송문주
1. 개요
송문주는 고려 시대 무관으로, 1231년 몽골의 1차 침입 때 귀주성 전투에 참여하여 몽골군의 전술을 익혔다. 1236년 몽골의 3차 침입 당시 죽주산성 방호별감으로 몽골군을 격퇴하여 좌우위장군으로 임명되었다. 죽주산성에는 송문주를 기리는 충의사가 있으며, 매년 제향이 열린다. 한편, 송문주의 출신과 관련하여 진천 송씨 문중은 송문주가 진천 송씨라고 주장하지만, 1891년 간행된 《죽산부읍지》에는 송문주가 의성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어 논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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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몽골 전쟁 관련자 -
원종 (고려)
원종은 고려 고종의 장남으로 몽골과의 강화 조약을 위해 원나라에 갔다가 즉위하여 원나라의 속국이 되었으며, 임연의 쿠데타와 삼별초의 항쟁을 겪고 개경으로 환도한 후 1274년에 사망했다. -
고려-몽골 전쟁 관련자 -
몽케 칸
칭기즈 칸의 손자이자 툴루이의 아들인 몽케 칸은 1251년 몽골 제국의 대칸으로 선출되어 금나라 정벌, 유럽 원정 참여, 중앙 정부 강화, 무역로 확보, 고려 항복, 훌라구를 통한 이란-이라크 원정 성공, 룸 술탄국 정벌, 티베트-대리국 평정 등 광범위한 영토 확장을 이끌었으나 남송 정벌 중 병사하며 몽골 제국 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
생몰년 미상 -
유급
유급은 전한 말기에 신양후에 봉해졌으나, 전한 멸망으로 작위를 잃은 유영의 아들이다. -
생몰년 미상 -
야스케
야스케는 16세기 일본에 기록된 최초의 아프리카인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며, 혼노지의 변에서 함께 싸웠으나 이후 행적은 불확실하고,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소재로 활용된다. -
고려의 무신 -
태조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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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무신 -
완풍대군
완풍대군 이원계는 고려 말 무신이자 이성계의 이복 형으로, 위화도 회군에 반대하다 사망 후 대군으로 추봉되었으며 홍건적과 왜구 격퇴에 공을 세워 완산군에 봉해졌고 조선 개국 후 완산백에 추봉, 여러 사당에 배향되었다.
2. 몽골과의 전투 및 활약
송문주는 1231년 몽골의 1차 침입 당시 귀주성 전투에서 박서의 휘하로 참전하여 몽골군과 싸웠으며, 고려-몽골 전쟁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특히 몽골군의 전략 전술을 꿰뚫어 보고 효과적으로 대응하여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2.1. 귀주성 전투 (1231년)
1231년 고종 18년 몽골의 1차 침입 당시 박서의 휘하로 귀주성 전투에 참전하여 몽골군과의 전투 경험과 몽골군의 전략전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귀주성 전투의 공으로 낭장(郞將)이 되었다.
2.2. 죽주산성 전투 (1236년)
1231년 몽골의 1차 침입 당시 귀주성 전투에 박서의 휘하로 참전하여 몽골군과의 전투 경험이 있었던 송문주는 1236년 몽골의 3차 침입 때 방호별감(防護別監)으로써 죽주에 파견되어 죽주산성을 지켰다. 몽골군은 6월에 압록강을 건너 서북면으로 내려와 8월에는 자주를 함락시키고 남경에 주둔하며 온수군까지 공격하였고, 9월 8일 죽주를 공격하였다. 송문주는 죽주산성의 방호별감을 맡고 있었다.
몽골군은 우선 죽주산성의 고려군에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성안에서는 병사들을 출격시켜서 몽골군을 쫓아버렸다. 몽골군은 죽주산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귀주에서 몽골군의 공성 전술을 체험했던 송문주는 몽골군의 공성 작전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고 번번이 군사들에게 "오늘은 적이 어떤 기계를 설치할 것이니 우리는 어떤 기구로 맞서야 한다"며 몽골군에 대한 대응 전술을 지휘하였다. 송문주의 말대로 몽골군이 화포로 성문을 부수자 죽주산성의 방어군 역시 포(砲)를 사용하여 몽골군을 막아 물러나게 하였고, 이어 몽골군이 인유(人油), 관솔불, 쑥풀 등을 짚에 뿌리고 화공을 펼치자 때맞춰 죽주산성 안에서 병력이 한꺼번에 성문을 열고 나와 몽골군을 기습해 숱한 몽골군을 베었다. 결국 보름 만에 몽골군은 공성무기를 불태우고 물러갔고, 죽주산성은 무사하였다. 당시 죽주산성 내의 군사들은 몽골군의 공격 전법이 송문주의 말과 실제로 맞아떨어지는 것을 보고 송문주를 '신명(神明)'이라 불렀다고 한다.
고려 조정은 죽주산성에서의 승전에 대한 논공행상으로 송문주를 좌우위장군(左右衛將軍)으로 삼았다.
2.3. 기타 전투
몽골군은 온수군을 공격하였으나 9월 3일에 그곳의 향리인 현려 등에게 패하였고, 겨울 12월 대흥성에서도 고려 방어군이 몽골군을 격퇴하였다.
3. 충의사
송문주가 몽골군을 상대로 싸워 승리했던 죽주산성 안에는 충의사라는 이름의 사당이 있다. 언제 세워졌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조선 후기 채제공이 쓴 《송장군묘비명》에 따르면, 후세 사람들이 송문주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성 북쪽에 사당을 지었고, 세월이 흐르면서 죽주산성과 함께 퇴락한 것을 죽산부사 유언지가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제향하였다고 한다. 묘비명에는 송문주가 몽골군과 대치하던 당시, 몽골군이 죽주산성 안에 물이 별로 없으니 곧 항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자, 송문주가 커다란 붕어를 잡아 몽골군 진영에 "멀리서 오셨는데 배가 고프실 것 같아서 물고기로 대접해 드리겠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성에 물이 많음을 알렸고, 이에 포위를 풀고 물러나는 몽골군의 배후를 쳐서 크게 이겼다는 전승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채제공이 살던 당시까지도 죽산 사람들은 송문주를 칭송하였다고 한다.
3.1. 건립 및 관리
송문주가 몽골군을 상대로 싸워 승리했던 죽주산성 안에는 충의사라는 사당이 있다. 사당 건립 시기는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조선 후기 채제공이 쓴 《송장군묘비명》에 관련 기록이 있다. 채제공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죽산 사람들은 "송 장군이 아니었다면 우리 조상들께서는 어륙(魚肉)이 되었을 것이고, 조상 없이 우리가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죽산 사람들이 이렇게 밭 갈고 우물 파서 부모 처자 데리고 살아가는 것은 모두 장군의 은혜다"라며 송문주를 칭송하였다고 한다.
《송장군묘비명》에는 후세 사람들이 송문주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성 북쪽에 사당을 지었고, 세월이 흐르면서 죽주산성과 함께 퇴락한 것을 죽산부사 유언지가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제향하였다는 내용과, 송문주가 몽골군과 대치하던 당시, 성을 포위한 몽골군이 죽주산성 안에 물이 별로 없어 곧 항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자, 송문주가 커다란 붕어를 잡아 몽골군 진영에 보내 "멀리서 오셨는데 배가 고프실 것 같아서 물고기로 대접해 드리겠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성에 물이 많음을 알렸고, 이에 포위를 풀고 물러나는 몽골군의 배후를 쳐서 크게 이겼다는 전승이 기록되어 있다.
충의사에서는 해마다 음력 9월 9일에 안성시가 주관하고 죽산면 기관·사회단체장과 지역주민이 참여하여 송문주에 대한 제향을 올리고 있다.
3.2. 제향
송문주가 몽골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던 죽주산성 안에는 충의사라는 사당이 있다. 조선 후기 채제공이 쓴 《송장군묘비명》에는 후세 사람들이 송문주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성 북쪽에 사당을 지었고, 세월이 흐르면서 죽주산성과 함께 낡아진 것을 죽산부사 유언지가 크게 수리하고 제향하였다고 한다. 충의사에서는 해마다 음력 9월 9일에 안성시가 주관하고 죽산면 기관·사회단체장과 지역주민이 참여하여 송문주에 대한 제향을 올리고 있다.
4. 가계 논란
진천 송씨 문중과 《죽산부읍지》의 기록에서 송문주의 가계에 대한 서로 다른 주장이 나타나고 있다. 진천 송씨 문중은 송문주를 진천 송씨로 보고 여러 행사에 참여하고 있지만, 《죽산부읍지》에는 송문주가 의성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죽산면 상구산, 하구산 마을과 미륵당 마을에서는 음력 10월 초에 산신제와 함께 송대장군제를 지내는데, 이는 마을 단위로 전해져 오는 동제로서 충의사의 제향과는 별개라고 한다.
4.1. 진천 송씨 문중의 주장
진천 송씨 문중에서는 송문주가 진천 송씨이며, 진천 송씨 족보에 자를 '문주'라고 전하는 송언상(宋彦祥)이 송문주 장군이라고 주장한다. 해마다 음력 9월 9일 충의사 제향에 진천 송씨 종친회장이 참여하고 있다. 2012년 10월 19일 죽주산성 내 송문주 사당인 충의사에서 있었던 송문주 장군 영정 봉안식 역시 진천 송씨 대종회가 안성시로부터 10의 예산을 지원받아 영정 제작을 맡고 봉안식 제반 사항에 이르는 모든 관련 행사를 준비하고 개최하였다. 2017년 8월 8일 죽산면 삼거리에서 거행된 송문주 동상 제막식에도 진천 송씨 대종회장이 황은성 안성시장에게 종친회 명의로 감사패를 제공하였고, 동상 안내 입간판에는 "진천 송씨 대종회에서도 죽주민들에 대한 감사와 조상의 전공을 기리며 이 제례에 참여하고 있다"라는 내용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