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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몽골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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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몽골 전쟁은 13세기 몽골 제국의 고려 침략으로 시작되어, 1231년부터 1270년까지 이어진 전쟁이다. 1225년 몽골 사신 저고여가 피살된 사건을 계기로 몽골은 고려를 침략했고, 고려는 무신정권의 지도 아래 강화도로 천도하여 장기 항전을 벌였다. 몽골의 침략은 총 9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고려는 몽골의 지속적인 침략과 요구에 굴복하여 결국 항복했다. 이후 고려는 몽골의 지배를 받으며 원나라의 속국이 되었고, 왕실의 위상 저하와 내정 간섭을 겪었다. 이 전쟁은 고려 사회와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몽골과의 관계를 통해 문화 교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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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몽골 전쟁
구글 지도
기본 정보
주요 분쟁몽골 제국의 침략
관련 전쟁몽골 제국의 침략과 정복
시기1231년, 1232년, 1235년–1239년, 1251년, 1254년, 1255년, 1257년, 1259년
장소한반도
결과몽골의 승리
전투 세력 1고려
전투 세력 2몽골 제국
지휘관 (고려)
지휘관최우
지휘관박서
지휘관김윤후
지휘관이룡상
지휘관김경손
지휘관최춘명
지휘관대집성
지휘관이자성
지휘관채송년
지휘관김윤후
지휘관이세화
지휘관현려
지휘관 (몽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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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5년 몽골의 고려 침략
1235년 몽골의 고려 침략

2. 배경

12세기 후반 1170년 고려에서 무신(군인)들이 문신의 지배에 반발하여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후 1270년까지 무신정권이라 불리는 집정 체제가 유지되었다. 1196년 최충헌이 정권을 장악한 이후로는 “우봉 최씨” 일족이 권력을 잡았다. 몽골의 고려 침공 당시에는 최씨 2대 최우가 정권을 운영하고 있었다.

고려최씨정권 아래에 있는 동안 중앙아시아 대륙에서는 테무친이 등장하여 몽골족을 통일하고, 1206년(희종 2년)에는 칭기즈 칸이라 칭하고 강대한 제국으로 군림하였다.[55] 그는 세계를 정복할 목적으로 동·서양 각국을 공격하여, 세계 최대의 제국을 건설한 다음 남하하여 금나라를 공격하니 금은 대내적인 분열을 일으켰다. 요나라 유민의 일부분은 대요국(大遼國)을 세우고 여진족과 화합하여 재기의 기회를 노렸으나 다시 몽골에 쫓기어 1216년(고종 4년)에는 마침내 고려의 국경을 넘어서게 되었다.[55]

이에 몽골은 여진족의 동진국(東眞國)과 동맹을 맺고, 거란족을 소탕하기 위하여 고려에 들어오자 고려도 군사를 동원하여 그들과 협력하여 강동성에서 거란을 공격하여 무찔렀다(→강동성 전투).[55] 몽골은 이를 계기로 고려와 협약을 맺고 해마다 과중한 조공을 요구하는 한편 몽골 사신은 고려에 들어와 오만한 행동을 자행하여, 고려는 차츰 그들을 적대시하게 되었다.[55]

이러한 상황에서 1225년(고종 12년) 음력 1월 몽골 사신 저고여(箸告與)가 국경지대에서 죽임을 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몽골은 이를 고려의 소행이라고 간주하고, 고려는 국경을 넘어서 금나라 사람에게 피살된 것이라 주장하여, 두 나라 사이는 점차 험악해지고 마침내는 국교 단절에까지 이르러 몽골은 고려를 향한 침략을 계획하였다.

2. 1. 몽골 제국의 등장과 동아시아 정세 변화

1206년 테무친이 몽골족을 통일하고 칭기즈 칸이라 칭하며 몽골 제국이 등장했다.[55] 몽골 제국은 세계 정복을 목표로 동서양 각국을 공격하며 성장했고, 금나라를 공격하여 내분을 일으켰다. 요나라 유민 일부는 대요국을 세워 여진족과 연합했으나, 1216년 몽골에 쫓겨 고려 국경을 넘었다.[55]

몽골은 여진족의 동진국과 동맹을 맺고 거란족 소탕을 위해 고려에 들어왔고, 고려군과 협력하여 강동성 전투에서 거란을 격파했다.[55] 이를 계기로 몽골은 고려와 협약을 맺었으나, 과도한 조공 요구와 몽골 사신의 오만한 행동으로 고려는 몽골을 적대시하게 되었다.[55]

1211년 고려 사신이 몽골 군사에게 살해당하면서 고려와 몽골이 처음 접촉하게 되었다. 이후 몽골은 적대적인 거란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고려에 진입하였다. 1211년, 금나라의 군 지휘관으로 복무하던 거란의 왕자 예리구(耶律留哥)가 반란을 일으켜 요동 지역 일부를 장악하였다. 1213년 그는 요의 통치자임을 선포하였다. 예리구는 그의 동생 예리사부(耶律廝不)에게 쫓겨나고 찬탈자에 대항하여 칭기즈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사부 또한 그의 신하 중 한 명인 예리규누(耶律乞奴)에게 찬탈당했다.

1214년, 금나라는 복선만누(僕速完奴)를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하려 하였으나 패배하고 1215년 스스로 반란을 일으켰다. 동경(東京)("동쪽 수도")을 근거지로 삼은 복선만누는 ''대진(大真)''("큰 여진")이라는 국가를 선포하였다. 1216년 봄, 금나라에서 도망치던 거란이 복선만누의 영토를 넘어 등주(登州)에서 의주까지 지역을 장악하였다.

같은 해, 예리구와 함께한 몽골군은 거란 반군을 고려 국경까지 추격하여 압록강 하류의 섬에 위치한 대부영(大府營)을 공격하였다. 거란은 고려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하자, 약 9만 명의 병력으로 압록강을 건너 고려 국경을 넘어왔다. 1217년 한 해 동안 거란 반군은 한반도 남쪽을 약탈하고 다녔으나, 고려 장군 김취려의 여러 차례 승리로 인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복선만누의 영토로 다시 눈을 돌렸다. 복선만누는 이미 몽골에게 패배하고 항복했지만, 몽골군이 철수하자 동쪽으로 더 이동하여 1217년 초, ''동하(東夏)''("동쪽 서하")라는 국가를 선포하였다. 금나라의 압력을 받아 다시 동쪽으로 두만강 하류로 도망쳤다. 거란 또한 고려에서 도망친 곳도 그곳이었다. 거란은 증원군을 모아 1217년 가을 고려를 다시 침략하였다. 거란의 침략은 고려군이 그들을 저지한 강동을 함락한 후 중단되었다.

1218년 겨울, 하전(哈真)과 찰라(札剌)가 지휘하는 1만 명의 몽골군과 완안자원(完顔子淵)이 지휘하는 2만 명의 동여진군이 북동쪽에서 고려에 진입하였다. 그들은 화주(華州), 맹주(孟州), 순주(順州), 덕주(德州)에서 거란군을 물리쳤다. 몽골-여진군의 진격은 폭설로 인해 도로가 통행 불가능해짐으로써 멈추었다. 하전은 통역관 조중상(趙仲祥)을 통해 고려 북서 지역의 지휘관 조충(趙沖)에게 식량을 요청하고 거란을 정복한 후 두 나라가 형제의 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조충과 김취려는 몽골의 요구를 수용하는 데 찬성했지만, 고려 조정은 더욱 우려하였다. 결국 조충의 촉구로 몽골군에게 식량을 제공하기로 합의하였다. 쌀 1천 석과 정예병 1천 명을 몽골군에게 보냈다. 그들은 몽골군이 태주(泰州)의 성곽 도시에서 거란을 공격하는 것을 목격하기 위해 제때에 도착했다. 몽골은 증원군을 환영했다.

1219년 초, 강동에 있는 마지막 거란 거점을 함락하기 위한 준비가 진행되었다. 고려군이 몽골-여진군에 합류하였다. 약 5만 명의 거란이 항복하고 성문을 열었다.

강동 함락 후, 고려는 찰라의 진영에 사절과 몽골 지휘관들에게 선물을 보냈다. 몽골 사신은 고종(재위 1213-1259)을 만나 평소의 예의 없이 문서를 전달했다. 조충은 몽골과 여진 지휘관들과 함께 압록강으로 가서 몽골이 많은 고려 말을 징발하고 떠났다. 그러나 그들은 고려어를 배우고 몽골군의 귀환을 기다리기 위해 의주에 41명의 부하를 남겼다. 몽골은 또한 고려로부터 연례 공물을 징수하기 시작했고, 2년 이내에 고종은 공물 지불 중단과 몽골에 대한 저항을 주장하였다.

거란의 침략 이후 북서 지역의 상황은 열악했다. 1219년 가을, 한선(韓遜)과 다치(多遲)라는 군 지휘관이 의주에서 반란을 일으켜 복선만누에게 투항했고, 복선만누는 1만 명의 동여진군을 증원하였다. 그들은 금나라 지휘관 우격하(虞格霞)와 동맹을 맺으려 했다. 우격하는 그들을 연회에 초대하여 살해했다. 그들의 목은 1220년 초 개경으로 보내졌고, 우격하는 고려 조정으로부터 큰 상을 받았다. 그러나 우격하는 그 후에도 수년 동안 고려의 국경 도시를 반복적으로 약탈했다.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의주에 파견된 군대가 너무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바람에 4개월 후에 또 다른 반란이 발생하여 5천 명의 군대를 투입해야 했다. 산으로 도망친 거란은 계속해서 고려의 수비대를 습격했다.

1225년 음력 1월, 몽골 사신 저고여가 국경 지대에서 피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55] 몽골은 이를 고려의 소행으로 간주했으나, 고려는 금나라 사람의 소행이라 주장하며 양국 관계는 악화되어 국교 단절에 이르렀고, 몽골은 고려 침략을 계획하게 되었다.

2. 2. 고려와 몽골의 첫 만남: 강동성 전투

12세기 후반 1170년에 고려에서 무신(군인)들이 문신의 지배에 반발하여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후 1270년까지 무신정권이라 불리는 집정 체제가 유지되었다. 1196년 최충헌이 정권을 장악한 이후로는 “우봉 최씨” 일족이 권력을 잡았다. 몽골의 고려 침공 당시에는 최씨 2대 최우가 정권을 운영하고 있었다.

고려최씨정권 아래에 있는 동안 중앙아시아 대륙에서는 테무친이 등장하여 몽골족을 통일하고, 1206년(희종 2년)에는 칭기즈 칸이라 칭하고 강대한 제국으로 군림하였다.[55] 그는 세계를 정복할 목적으로 동·서양의 각국을 공격하여, 세계 최대의 제국을 건설한 다음 남하하여 을 공격하니 금은 대내적인 분열을 일으켰다. 요나라 유민의 일부분은 대요국(大遼國)을 세우고 여진족과 화합하여 재기의 기회를 노렸으나 다시 몽골에 쫓기어 1216년(고종 4년)에는 마침내 고려의 국경을 넘어서게 되었다.[55]

이후 몽골은 적대적인 거란을 추격하는 과정에서 고려에 진입하였다. 1211년, 금나라의 군 지휘관으로 복무하던 거란의 왕자 예리구(耶律留哥)가 반란을 일으켜 요동 지역 일부를 장악하였다. 2년 후 그는 요의 통치자임을 선포하였다. 예리구는 그의 동생 예리사부(耶律廝不)에게 쫓겨나고 찬탈자에 대항하여 칭기즈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사부 또한 그의 신하 중 한 명인 예리규누(耶律乞奴)에게 찬탈당했다. 1214년, 금나라는 복선만누(僕速完奴)를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하려 하였다. 그러나 복선만누는 패배하고 1215년 스스로 반란을 일으켰다. 동경(東京)("동쪽 수도")을 근거지로 삼은 복선만누는 '대진(大真)'("큰 여진")이라는 국가를 선포하였다. 1216년 봄, 금나라에서 도망치던 거란이 복선만누의 영토를 넘어 등주(登州)에서 포주(의주)까지 지역을 장악하였다.[4]

1216년, 예리구와 함께한 몽골군은 거란 반군을 고려 국경까지 추격하여 압록강 하류의 섬에 위치한 대부영(大府營)을 공격하였다. 거란은 고려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하자, 약 9만 명의 병력으로 압록강을 건너 고려 국경을 넘어왔다. 거란 반군은 1217년 한 해 동안 한국 한반도 남쪽을 약탈하고 다녔으나, 고려 장군 김취려의 여러 차례 승리로 인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복선만누의 영토로 다시 눈을 돌렸다. 복선만누는 이미 몽골에게 패배하고 항복했지만, 몽골군이 철수하자 동쪽으로 더 이동하여 1217년 초, '동하(東夏)'("동쪽 서하")라는 국가를 선포하였다. 금나라의 압력을 받아 다시 동쪽으로 두만강 하류로 도망쳤다. 거란 또한 고려에서 도망친 곳도 그곳이었다. 거란은 증원군을 모아 1217년 가을 고려를 다시 침략하였다. 거란의 침략은 고려군이 그들을 저지한 강동을 함락한 후 중단되었다.[3]

1218년 겨울, 하전(哈真)과 찰라(札剌)가 지휘하는 1만 명의 몽골군과 완안자원(完顔子淵)이 지휘하는 2만 명의 동여진군이 북동쪽에서 고려에 진입하였다. 그들은 화주(華州), 맹주(孟州), 순주(順州), 덕주(德州)에서 거란군을 물리쳤다. 몽골-여진군의 진격은 폭설로 인해 도로가 통행 불가능해짐으로써 멈추었다. 하전은 통역관 조중상(趙仲祥)을 통해 고려 북서 지역의 지휘관 조충(趙沖)에게 식량을 요청하고 거란을 정복한 후 두 나라가 형제의 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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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몽골은 여진족의 동진국(東眞國)과 동맹을 맺고, 거란족을 소탕하기 위하여 고려에 들어오자 고려도 군사를 동원하여 그들과 협력하여 강동성에서 거란을 공격하여 무찔렀다(→강동성 전투).[55] 몽골은 이를 계기로 고려와 협약을 맺고 해마다 과중한 조공을 요구하는 한편 몽골 사신은 고려에 들어와 오만한 행동을 자행하여, 고려는 차츰 그들을 적대시하게 되었다.[55]

강동성 함락 후, 고려는 찰라의 진영에 사절과 몽골 지휘관들에게 선물을 보냈다. 몽골 사신은 고종(재위 1213-1259)을 만나 평소의 예의 없이 문서를 전달했다. 조충은 몽골과 여진 지휘관들과 함께 압록강으로 가서 몽골이 많은 고려 말을 징발하고 떠났다. 그러나 그들은 고려어를 배우고 몽골군의 귀환을 기다리기 위해 포주에 41명의 부하를 남겼다. 몽골은 또한 고려로부터 연례 공물을 징수하기 시작했고, 2년 이내에 고종은 공물 지불 중단과 몽골에 대한 저항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침 1225년(고종 12년) 음력 1월 몽골 사신 저고여가 국경지대에서 죽임을 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몽골은 이를 고려의 소행이라고 간주하고, 고려는 국경을 넘어서 금나라 사람에게 피살된 것이라 주장하여, 두 나라 사이는 점차 험악해지고 마침내는 국교 단절에까지 이르러 몽골은 고려를 향한 침략을 계획하였다.

2. 3. 몽골 사신 피살 사건과 전쟁의 발발

12세기 후반 1170년 고려에서 무신(군인)들이 문신의 지배에 반발하여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후 1270년까지 무신정권이라 불리는 집정 체제가 유지되었다. 1196년 최충헌이 정권을 장악한 이후로는 “우봉 최씨” 일족이 권력을 잡았다. 몽골의 고려 침공 당시에는 최씨 2대 최우가 정권을 운영하고 있었다.

고려최씨정권 아래에 있는 동안 중앙아시아 대륙에서는 테무친이 등장하여 몽골족을 통일하고, 1206년(희종 2년)에는 칭기즈 칸이라 칭하고 강대한 제국(帝國)으로 군림하였다.[55]

그는 세계를 정복할 목적으로 동·서양의 각국을 공격하여, 세계 최대의 제국을 건설한 다음 남하하여 금나라를 공격하니 금은 대내적인 분열을 일으켰다. 요나라 유민의 일부분은 대요국(大遼國)을 세우고 여진족과 화합하여, 재기의 기회를 노렸으나 다시 몽골에 쫓기어 1216년(고종 4년)에는 마침내 고려의 국경을 넘어서게 되었다.[55]

이에 몽골은 여진족의 동진국(東眞國)과 동맹을 맺고, 거란족을 소탕하기 위하여 고려에 들어오자 고려도 군사를 동원하여 그들과 협력하여 강동성에서 거란을 공격하여 무찔렀다(→강동성 전투).[55] 1218년 에 속해 있던 거란족 일부(흑거란, 후요라 불림)가 만주에서 고려로 침입하여 강동성(江東城)에 농성하였으나, 몽골과 고려가 공동으로 이들을 토벌하였다.[24] 몽골은 이를 계기로 고려와 협약을 맺고 해마다 과중한 조공을 요구하는 한편 몽골 사신은 고려에 들어와 오만한 행동을 자행하여, 고려는 차츰 그들을 적대시하게 되었다.[55] 1220년부터 1223년까지 고려는 매년 몽골에 조공을 바쳤으나(이후와 달리 노예를 요구받지는 않았고)[25], 1225년에 몽골 사절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몽골의 침공을 불러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1225년(고종 12년) 음력 1월 몽골 사신 저고여(箸告與)가 국경지대에서 죽임을 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몽골은 이를 고려의 소행이라고 간주하고, 고려는 국경을 넘어서 금나라 사람에게 피살된 것이라 주장하여, 두 나라 사이는 점차 험악해지고 마침내는 국교 단절에까지 이르러 몽골은 고려를 향한 침략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때 몽골의 칭기즈칸은 서하 원정 중이었고, 고려 침공은 칭기즈칸의 사후, 그의 셋째 아들 오고타이가 카안에 즉위한 후에 이루어졌다.

3. 전쟁의 경과

몽골의 침입 기간 동안 고려의 수도는 강화도로 옮겨졌다. 새로운 수도는 강력하게 요새화되었고 몽골에 함락된 적이 없다.


1232년, 최우는 몽골의 침입에 맞서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겼다. 왕실이 강화도로 이전한 후, 백성들에게는 산성이나 해안 섬으로 피신하라는 지시가 내려졌고, 이 과정에서 육지에 있던 몽골 다루가치들이 살해되었다.[1]

서경(평양)은 몽골에 투항한 홍복원의 지배하에 있었다. 서경 백성들은 조정이 몽골 관리들을 죽일 계획을 세웠다는 것을 알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서경 관리들은 척도로 도망쳤다.[2]

1232년 여름, 살리타가 이끄는 몽골군은 한강 유역까지 진격했으나, 처인성에서 승려 김윤후의 화살에 맞아 살리타가 전사했다. 몽골군은 후퇴했고, 홍복원은 정복 지역을 감독하게 되었다.[3]

1233년 봄, 몽골은 고려의 죄목을 적은 목록을 전달했고, 고려는 홍복원을 서경에서 축출하는 공격으로 맞섰다. 홍복원요양과 심양으로 도망쳤고, 서경 백성들은 섬으로 이주했다. 몽골은 홍복원을 고려 북서부 지도자로 임명했다.[4]

1235년, 쿠릴타이에서 오고타이는 고려, 남송, 볼가 강 서쪽 지역을 공격하고 카슈미르까지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

1235년 몽골의 고려 침입


1235년 여름, 몽골군이 고려를 침략하였다. 강화도 주변에 방어선이 구축되었고, 남경(현재 서울)과 광주 백성들은 강화도로 피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235년 말까지 탕구트-바투르의 지휘 아래 몽골군과 동여진군은 용강, 함종, 삼등, 해평(현재 상주)을 점령하였다. 1236년 봄, 몽골군은 남쪽으로 진격하여 황주, 신주, 안주를 점령하였다. 겨울이 되자 몽골군은 남경에까지 진출하여 청주까지 침투하였다.[9]

고려는 몽골에 맞서 군대를 동원하지 않았고, 백성들에게 산성이나 섬 요새와 같은 방어 가능한 곳으로 피난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강화도는 강력하게 방어되었고 몽골군은 결코 함락시키려 하지 않았다. 침입 기간 동안, 고종고려대장경 제작을 명령하였고, 1237년에 작업이 시작되어 1248년에 완성되었다.[9]

일부 고려인들은 몽골에 투항하였다. 1238년 여름, 조현섭과 이원우의 지휘 아래 2,000명이 몽골에 항복하였고, 홍복원의 지휘하에 들어갔다. 이균식도 12명과 함께 투항하였다.[9]

1238년 겨울, 고려가 영원한 복종을 약속하면서 협상이 시작되었고, 몽골군은 철수하였다. 몽골은 고려 왕이 몽골 궁정에 참석할 것을 요구했으나, 고려는 왕대비 상중, 질병, 고령 등을 핑계로 거부하였다. 고려는 신안공 전과 왕손 영녕공을 가짜 인질로 보냈고, 1241년 가짜 왕세자가 몽골 궁정에 도착함으로써 1247년까지 일시적인 휴전을 얻었다.[9]

몽골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수도는 본토로 이전되지 않았다. 고종은 몇 년 후 본토에서 몽골 사신들을 만났지만, 최우와 그의 후계자들은 강화도에 남았다. 고려의 지속적인 저항은 1247년 또 다른 몽골 침략을 초래하였다.

1247년, 압카(Amukan)가 지휘하는 몽골군과 홍복원이 이끄는 지원군이 염주에 도착했다. 1248년 귀위크 칸이 죽자 인질로 잡혀 있던 왕전이 고려로 돌아왔다. 몽골군은 청천강 이북 지역을 장악하고 고려를 약탈했다. 동여진족도 1249년 말부터 1250년 말까지 고려를 약탈했다. 최우는 1249년에 죽고 그의 아들 최항이 계승하여 강화도를 계속 방어하고 요새화했다. 1250년 4월 북서 지역 주민들은 개경서해도로 대피했다.

1253년 몽골의 고려 침입


1251년 몽케 칸이 즉위하자, 고려 국왕의 몽골 조정 방문과 개경 환도를 거듭 요구했다. 1253년 초, 동여진 기병이 북서쪽의 덩주를 포위했고, 여름에는 소규모의 약탈대가 나타났다. 몽골에 포로로 잡혀 갔던 원주 주민 몇몇이 고려로 돌아와 몽케가 예쿠, 숭주, 아무칸, 홍복원을 지휘관으로 하는 침략을 명령했다고 알렸다.

1253년 8월, 몽골군은 압록강대동강을 건넜다. 충주는 70일간의 몽골군 포위 공격을 견뎌냈으나, 주민들은 굶어 죽기 시작했고, 일부는 자신과 가족을 불태웠다. 결국 몽골군은 시민들을 학살했다.

1253년 겨울, 예쿠는 병이 들자 회복을 위해 북쪽으로 돌아갔고, 아무칸과 홍복원이 현장 작전 지휘를 맡았다. 만구다이가 이끄는 몽골 사절단이 순천부의 새 궁궐에서 고종을 만났다. 고종은 환도에 동의하고 그의 계자인 안경공 창을 인질로 몽골에 보냈다. 그러나 최항은 강화도를 떠나지 않았다. 예쿠가 파면되자 몽골군은 철수했다.

1253년에서 1258년 사이, 잘랄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은 고려를 상대로 네 차례의 침입을 감행했다. 몽케는 인질이 고려 왕족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고려 조정이 자신을 속였다고 비난했다. 잘랄타이는 1254년 고려의 상당 부분을 황폐화시키고 20만 6,800명의 포로를 사로잡았다.[10] 기근과 절망으로 인해 농민들은 몽골에 항복했고, 용흥에 천호 사무소를 설치했다.

1255년, 몽골군은 탈영병들을 시켜 배를 짓게 한 뒤, 해안의 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11] 요동 반도에서는 고려 탈영병들을 모아 식민지를 만들었다. 몽케 칸은 예종과 홍복원을 선장으로 삼아 대규모 군대를 파견했으나, 김수강이 몽케 칸을 설득하여 몽골군은 고려에서 철군했다.

1258년, 고종과 최씨 정권의 신하 김인준은 반란을 일으켜 최씨 정권을 종식시켰다. 이후 고종은 몽골과 강화를 청했다. 고려 조정이 훗날 원종이 되는 왕자를 인질로 몽골 조정에 보내고 개경으로 돌아갈 것을 약속하자, 몽골군은 중앙 고려에서 철수했다.

고려 내부에는 몽골과의 전쟁에 반대하는 문신 세력과 전쟁을 계속할 것을 주장한 최씨 정권의 무신 세력이 있었다. 문신 세력이 최씨 정권을 제거하자 강화 조약이 체결되었다.[12] 이 조약은 고려의 주권과 전통 문화를 유지하는 것을 허용했는데, 이는 몽골이 고려를 직접 지배하는 것을 포기하고 고려의 자치를 인정하는 데 만족했음을 의미한다. 다만 고려 국왕은 몽골 공주와 결혼하고 몽골 칸에게 예속되어야 했다.[13]

몽골은 1257년에 고려를 아홉 번째로 침입했다.

3. 1. 1차 침입 (1231년)

1231년 오고타이 칸은 1225년 몽골 사신 저고여 살해 사건을 구실로 고려에 항복을 요구하는 국서를 보냈고, 이로써 고려몽골 제국 간의 전쟁이 시작되었다.[56][57] 몽골 제국의 장수 살리타는 압록강을 넘어 의주를 함락시켰다. 항복한 고려 장수 홍복원과 그의 군사들은 몽골군과 함께 귀주성을 공격했다.[7]

1231년 몽골의 고려 침입


오고타이 칸


귀주성에서는 박서와 김경손이 이끄는 고려군이 몽골군에 맞서 싸웠다. 몽골군은 포차, 누차 등 대형 병기를 동원해 맹공을 퍼부었으나 귀주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결국 몽골군은 귀주성 공격을 포기하고 고려의 수도 개경을 포위했다. 고려 조정은 개경이 포위되자 몽골에 강화를 요청하고, 막대한 공물을 바쳐 강화를 맺었다.[8] 귀주성의 박서도 항복하면서 전투는 중단되었다. 이후 몽골군은 감시와 간섭을 위해 개경평안도 일대에 다루가치 72명을 배치하고 철수했다.[28]

3. 2. 2차 침입 (1232년)

1232년, 고려는 몽골의 침입에 맞서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겼다. 최우는 가족을 강화도로 보내고, 고위 관료들을 모아 천도를 제안했으며, 반대하는 김세충을 처형했다. 왕실이 강화도로 이전한 후, 백성들에게는 산성이나 해안 섬으로 피신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이 과정에서 육지에 있던 몽골 다루가치들이 살해되었다.[1]

서경(평양)은 몽골에 투항한 홍복원의 지배하에 있었다. 서경 백성들은 조정이 몽골 관리들을 죽일 계획을 세웠다는 것을 알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서경 관리들은 척도로 도망쳤다.[2]

같은 해 여름, 사리대가 이끄는 몽골군은 한강 유역까지 진격했으나, 처인성에서 승려 김윤후의 화살에 맞아 사리대가 전사했다. 몽골군은 후퇴했고, 홍복원은 정복 지역을 감독하게 되었다.[3]

1233년 봄, 몽골은 고려의 죄목을 적은 목록을 전달했고, 고려는 홍복원을 서경에서 축출하는 공격으로 맞섰다. 홍복원은 요양과 심양으로 도망쳤고, 서경 백성들은 섬으로 이주했다. 몽골은 홍복원을 고려 북서부 지도자로 임명했다.[4]

몽골은 고려의 수도 이전과 다루가치 살해에 대한 보복으로 두 번째 원정을 감행했다. 홍복원의 지휘 아래 한반도 북부를 장악한 몽골군은 한반도 남부에 도달했으나, 강화도를 함락하지 못하고 광주에서 반격당했다. 처인성(處仁城) 전투에서 살리타이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면서 몽골군은 철군했다.

3. 3. 3차 침입 (1235년 ~ 1239년)



1235년 여름, 몽골군이 고려를 침략하였다. 강화도 주변에 방어선이 구축되었고, 남경(현재 서울)과 광주 백성들은 강화도로 피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235년 말까지 탕구트-바투르의 지휘 아래 몽골군과 동여진군은 용강, 함종, 삼등, 해평(현재 상주)을 점령하였다. 1236년 봄, 몽골군은 남쪽으로 진격하여 황주, 신주, 안주를 점령하였다. 겨울이 되자 몽골군은 남경에까지 진출하여 청주까지 침투하였다.[9]

고려는 몽골에 맞서 군대를 동원하려 하지 않았고, 공격적인 행동은 소규모 정찰대에 대한 약탈에 국한되었다. 백성들에게 산성이나 섬 요새와 같은 방어 가능한 곳으로 피난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스스로 살아남도록 내버려 두었다. 강화도는 강력하게 방어되었고 몽골군은 결코 함락시키려 하지 않았다. 침입 기간 동안, 고종은 불교 경전의 인쇄판을 제작할 것을 명령하였고, 1237년에 작업이 시작되었다. 『고려대장경』은 1248년에 완성되었다.[9]

일부 고려인들은 몽골에 투항하였다. 1238년 여름, 조현섭과 이원우의 지휘 아래 2,000명이 몽골에 항복하였다. 조현섭은 홍복원의 지휘하에 들어갔다. 이균식도 12명과 함께 투항하였다.[9]

1238년 겨울, 고려가 영원한 복종을 약속하면서 협상이 시작되었고, 그 후 몽골군은 철수하였다. 몽골 사신들은 고려 왕이 몽골 궁정에 참석할 것을 포함한 일련의 요구 사항을 가지고 왔다. 고려의 왕대비가 갓 죽었기 때문에 왕은 상중을 핑계로 이를 거부하였다. 이후 질병이나 고령을 포함하여 더 많은 핑계들이 제시되었다. 고려는 신안공 전을 인질로 보내 왕의 형제로 가장하였다. 그는 148명의 수행원과 함께 몽골 궁정에 가서 청원서와 공물을 바쳤다. 왕손 영녕공 또한 왕세자로 가장하여 몽골 궁정에 인질로 보내졌다. 1241년 17세의 가짜 왕세자가 몽골 궁정에 도착하고 공물 사절단이 재개됨으로써 1247년까지 고려는 일시적인 휴전을 얻었다.[9]

해인사 대장경판전 내의 판목


1235년부터 몽골은 경상도와 전라도 전역에서 약탈을 시작하였다. 몽골군은 강화도 정권 및 한반도 본토의 산성 공략을 피하고, 고려군의 보급을 끊기 위해 농지를 불태우는 행위에 나섰다. 강화도 정권은 방어를 더욱 강화했지만, 끊임없는 몽골군의 침략에 저항 불가능한 상황에 빠져들고 있었다.

한편 강화도에서는 1236년, 고종이 제2차 침공 당시 화재로 소실된 부인사(符仁寺) 대장경 판목의 복원을 지시했다. 15년의 세월을 거쳐 1251년에 경전 1,512부, 6,805권을 모은 81,258매의 판목(고려팔만대장경)이 제작되었다.[29] 이후 해인사로 옮겨져 현재 대한민국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1238년, 고려는 다시 화의를 원하게 되었고, 고려 왕실에서 인질을 내놓는 것을 조건으로 몽골군이 철수하게 되었다. 하지만 무관계한 사람을 왕실 사람으로 속여 인질로 보냈기 때문에, 몽골 측은 격노하여 고려 왕실의 강화도 퇴거, 해상의 모든 함선의 소탕, 반몽골적 귀족의 인도 등을 강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고려 측은 왕족 전(佺)[30]과 10명의 귀족 자제를 인질로 보낸 것 외에는 요구를 거절했다.

3. 4. 4차 침입 (1247년)과 5차 침입 (1253년)

오고타이 칸의 대를 이어 귀위크 칸(원 정종)이 즉위하자 몽골은 고려에 입조와 강화도에서 나올 것을 요구하며 아모간(阿母侃)에게 군사를 주어 고려를 치게 하였다. 그러나 이때 몽골은 정종이 죽고 후계자 문제로 분규가 생겨 한때 철군하였다.[55]

1247년, 몽골은 네 번째 고려 침공을 감행하여 강화도에서 개경으로의 환도와 고려 왕실로부터의 인질을 다시 요구했다. 압카(아모간)가 이끄는 몽골군은 염주에 주둔했다. 고려 조정이 개경으로의 귀환을 거부하자 전토에 대한 약탈을 재개했으나, 1248년귀위크 칸이 죽으면서 몽골군은 일시적으로 철수했다. 그러나 몽골군의 습격은 1250년까지 계속되었다. 그 사이 고려에서는 반몽골 전쟁을 주도했던 최우1249년에 사망했다.

몽케 칸(원 헌종)이 즉위하자, 1251년 몽골은 예수(也速)에게 의뢰하여 고려를 침공했다. 최우의 사후 고려 조정의 집권자가 된 최항은 강화도를 굳게 지키게 하였으나, 몽골은 이를 함락시키지 못하고 동주, 춘주, 양근, 양주 등을 공격한 후 충주성으로 향했다. 이때 갑자기 예수는 병을 이유로 귀국했지만, 도중에 고려의 철수 요구를 받았다.[55] 그는 어느 정도 타협의 자세를 취했고, 고종은 강화도에서 나와 승천부에서 몽골 사신 홍고이를 만났다. 한편 충주성 전투도 70여 일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 끝에 몽골이 불리하게 되자, 결국 퇴각하기 시작했다.[55]

1253년(고려 고종 40년) 예케(也窟 또는 也古)를 시켜 고려에 대거 침입하였다.[55] 이에 고려는 전쟁을 각오하고 강화도를 굳게 지키니 몽골은 이를 함락하지 못하고 동주, 춘주, 양근, 양주 등을 공격한 다음 충주성에 이르렀다. 이때 돌연 예케는 병을 이유로 귀국하였는데, 도중 개경에서 고려의 철수 요구를 받았다.[55] 그는 어느 정도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여 고종은 강화도에서 나와 승천부(昇天府)에서 예케의 사신과 회견하였으며, 한편 충주성 전투도 70여 일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 끝에 몽골이 불리하게 되어 드디어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북부 지방에 있던 몽골의 군대는 철수를 주저하고 있다가 고려 왕자 안경공 창을 몽골에 보내어 항복을 표시함으로써 완전히 철병하였다.[55]

3. 5. 6차 침입 (1254년)

1254년(고종 41년) 음력 7월 몽케 칸(원 헌종)은 고려 국왕에게 개경으로 돌아올 것과 직접 몽골에 입조할 것을 요구하면서 자랄타이札剌兒帶|찰랄아대중국어를 정동원수(征東元帥)로 삼아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게 하였다.[55]

자랄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은 전국 각처를 휩쓸고 계속 남하하여 충주성상주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했다. 이때 자랄타이는 돌연 몽케 칸의 명으로 군을 돌이켰는데, 이때 고려가 받은 피해는 어느 때보다도 심하여 《고려사》에는 포로가 206,800여 명, 살상자는 부지기수라고 기록되어 있다.[58]

3. 6. 7차 침입 (1255년) ~ 9차 침입 (1259년)

1255년, 몽골몽케 칸은 자랄타이를 대장으로 삼고, 인질로 갔던 영녕공과 홍복원을 대동하여 대군을 보내 강화도를 공격할 기세를 보였다. 그러나 이전에 몽골에 갔던 김수강이 몽케 칸을 설득하여 몽골군은 고려에서 철수하였다.[55]

하지만 이는 일시적인 상황이었고, 1257년에 고려가 해마다 몽골에 보내던 세공을 중단하자, 몽골은 다시 자랄타이에게 군사를 주어 고려를 침략하게 하였다. 고려 정부는 다시 김수강을 몽골에 파견해 몽케 칸을 만나게 하여 철군 허락을 얻었다. 몽골은 출륙과 친조를 조건으로 일단 군대를 북쪽으로 후퇴시키고 고려의 동정을 살폈다.[55]

몽골은 끈질기게 고려 왕의 입조와 출륙을 요구했다. 고려는 몽골의 철수를 우선적으로 요구하며 교섭이 지지부진했으나, 1258년 최씨 정권의 마지막 집권자인 최의가 김준에게 살해되면서 몽골과의 강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55]

1259년 음력 3월, 박희실 등을 사신으로 보내 자랄타이와 회견하여 왕의 출륙과 입조를 약속하고, 태자 전(倎) 등 40여 명을 몽골에 인질로 보냈다. 또한 강화도의 성을 헐어 고려의 강화 의지를 확고히 보여주면서, 28년간의 전쟁 끝에 고려는 항복하였다. 그해 음력 6월, 고종이 사망하고 태자가 귀국하여 원종으로 즉위하였다. 원종은 몽골에 태자를 다시 인질로 보내 성의를 표했지만, 강화도에서 나오지는 않았다.[55]

4. 고려의 저항

1231년 8월 26일,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이 압록강을 건너 함신진을 포위했고, 방어 장군 조숙창과 부판관 전관은 항복했다.[7] 몽골군은 삭주를 공격하고, 일부는 압록강을 따라 남하했다. 충주에서 김경손은 몽골과 싸우려 했지만, 도시 전체가 도망쳐 구주성으로 후퇴했다. 몽골군은 충주에서 인주로 진격했고, 홍복원이 변절하여 그 지역과 1,500호를 몽골에 바쳤다. 그의 가족은 이후 몽골 원정에서 안내자 역할을 했다.[7] 철주에서는 주민들이 항복 대신 목을 매달고 창고와 모든 여성, 아이들을 불태웠다.[7] 용주, 손주, 곽주는 10월에 함락되었다.[7]

몽골군은 차주서경(평양)을 우회했고, 그곳에서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 지광수가 이끄는 노예 군대는 죽을 때까지 싸웠다. 그들은 개경으로 가는 관문인 자비관에 도착하기 전에 황주를 점령했다.[8]

최우는 삼군을 소집하고 각 도에서 군대를 모았다. 융계샤는 5,000명의 병사를 제공했고 산적들까지 고려군에 합류했다. 이자성이 이끄는 삼군은 10월 초 개경을 출발하여 8,000명 몽골군의 기습 공격을 막았다. 고려군은 안주에서 패배했고, 이후 고려는 몽골과 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11월 말 몽골이 고려의 항복을 요구하자 고려는 저항을 계속했다. 12월 말 개경은 몽골군에 포위되었고, 고려는 공식적으로 항복했다.[7]

구주성 전투에서 박서는 주변 도시에서 모인 군대를 이끌고 몽골에 맞서 방어했다. 몽골군은 여러 방법으로 성벽을 넘으려 했지만, 수비대는 용융된 쇠를 사용해 공성 무기를 불태우는 등 격렬히 저항했다. 40일간의 포위 공격 후 몽골군은 철수했지만, 증원군과 함께 돌아와 30개의 투석기를 설치하고 성벽 50곳을 돌파했으나, 수리되었고 박서는 성공적인 돌격을 감행하여 공격자들을 몰아냈다. 구주와 차주는 고려 조정의 여러 명령 후에 마침내 항복했다.[7]

살리타이는 1만 마리의 작은 말, 1만 마리의 큰 말, 1만 필의 자주색 비단, 2만 개의 수달 가죽, 100만 명의 군대를 위한 의복을 요구했다. 고려는 많은 공물을 바쳤지만 인질은 제공하지 않았다.[7] 살리타이 장군은 1232년 봄 주력 부대를 북쪽으로 철수하며, 고려 북서부 여러 도시에 72명의 몽골 행정관(다루가치)을 배치했다.[7]

이후 고려는 강화도로 천도하고 장기 항전에 돌입했으며, 민중들의 자발적인 저항과 팔만대장경 제작 등 불교의 역할이 돋보였다.

4. 1. 무신정권의 강화도 천도와 장기 항전

최우는 이전 몽골의 침입 때 개경이 위협받자 자신의 가족을 강화도로 보냈다. 1232년 봄, 최우는 모든 고위 관료들을 자신의 저택에 모아 수도를 강화도로 옮길 것을 제안했고, 이 계획에 반대한 김세충은 처형되었다.[71] 왕실은 강화도로 이전했고, 각 도에는 백성들에게 산성이나 해안 섬으로 피신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사신들이 파견되었다.[71] 강화도에는 견고한 성이 축조되었고, 맞은편 반도 본토 쪽에도 소규모 성벽이 설치되었으며, 문수산에는 이중 벽이 건설되었다.[32]

이는 몽골군이 육전에는 능하지만 해전에 약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32] 최우는 국내의 모든 배를 동원하여 군사와 군수물자를 강화도로 운반했다. 또한 평민들에게도 성과 산성, 앞바다의 섬 등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지만, 이는 실현 불가능한 명령이었다.[32]

1232년 여름, 육지에 있던 몽골 다루가치(행정관)들이 살해되었고[71], 같은 해 최우는 몽골이 남긴 다루가치 72명을 모두 살해했다.[32]

고종이 집권자인 최항에게 대책을 묻자, 최항은 “국왕은 함부로 강화도를 나가서는 안 됩니다.”라고 답했다. 신하들은 몽골의 출륙 요구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최항이 이를 거절해야 한다는 의향을 보였기에 고종은 그에 따랐다. 고종은 대신 신안공 전에게 사자들을 맞이하게 하도록 하고 국왕의 출륙은 이루어지지 않았다.[32]

4. 2. 민중들의 자발적인 저항

1253년 8월 3일, 몽골군은 압록강을 건넜고, 8월 10일에는 대동강을 건넜다. 야전에서 조직적인 저항은 없었고, 방어와 순찰대에 대한 매복 공격만 있었다. 충주는 70일간 몽골군의 포위 공격을 견뎌냈으나, 보급을 얻을 수 없었다. 주민들은 굶어 죽기 시작했고, 일부는 자신과 가족을 불태웠으며, 결국 몽골군은 시민들을 학살했다.

4. 3. 팔만대장경 제작과 불교의 역할

고종은 몽골의 침입 기간 동안 불교 경전의 인쇄판을 제작할 것을 명령하였고, 1237년에 작업이 시작되었다. 1248년에 『고려대장경』이 완성되었다.[9]

1236년, 고종은 제2차 침공 당시 화재로 소실된 부인사 대장경 판목의 복원을 지시했다. 15년의 세월을 거쳐 1251년에 경전 1,512부, 6,805권을 모은 81,258매의 판목(고려팔만대장경)이 제작되었다.[29] 이후 해인사로 옮겨져 현재 대한민국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5. 전쟁의 결과와 영향

수십 년간의 전쟁으로 고려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황룡사 9층탑과 최초의 팔만대장경이 소실되는 등 문화적 피해도 컸다.[65][66][67][68][69][70][71][72][73][74][75] 국토는 황폐화되어 목조 건물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쿠빌라이 칸은 고려 왕세자가 항복하러 오자 "고려는 옛날 당 태종이 직접 원정을 갔어도 정복하지 못한 나라인데, 이제 왕세자가 내게 항복하니 하늘의 뜻이다!"라며 기뻐했다.

몽골과의 전쟁, 그리고 이후에도 지속된 침략과 고려 귀족들의 방관, 심지어 몽골을 돕는 행위로 인해 고려 백성들은 큰 고통을 겪었다.[62][63][64] 그러나 일부 백성들은 고려를 배신하고 몽골군에 항복하기도 했다.[76][77][78]

1270년까지 몽골과의 평화에 대한 왕실 내부 갈등이 계속되었다. 최충헌 이후 고려는 최씨 가문의 사병에 의해 통치되는 군사 독재 국가였고, 이들 중 일부는 삼별초의 난(1270~1273)을 일으켜 한반도 남쪽 해안 섬들에서 저항하기도 했다.

원나라가 쇠퇴하고 중국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던 1350년대부터 고려는 원나라 주둔군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공민왕은 이 기회를 틈타 북쪽 영토 일부를 회복하기도 했다. 기황후는 1364년 몽골군을 고려에 침입시켰지만 실패했다.[22]

5. 1. 고려의 항복과 원 간섭기의 시작

1270년 원종이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고려는 몽골에 완전히 복종하였다. 그 과정에서 무신정권의 집권자 임유무가 처형되었고 무신정권이 붕괴되었다.[59] 1170년에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이 무신정변을 일으킨 지 100년 만의 일이었다. 1259년에 원종이 몽골에 입조할 무렵 몽골에는 몽케 칸이 급서하였고 왕위 계승을 놓고 아리크부카가 이끄는 유목계 본지파와 쿠빌라이가 이끄는 농경계 한지파가 대립하였다. 이때 원종이 쿠빌라이를 찾아가 항복하였고, 이는 쿠빌라이가 칸의 자리에 오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아리크부카를 물리치고 칸의 자리에 오른 쿠빌라이 칸은 "고려의 국체와 풍속을 보존하라.(不改土風)"라는 명을 내려 고려의 국체를 보존하게 하여 원종에게 보답하였다. 이를 세조구제(世祖舊制)라고 부른다.[60] 훗날 고려의 부원배들이 "고려를 몽골의 한 지방으로 편입시켜 달라."는 입성책동을 벌일 때나 몽골이 고려를 한 지방으로 편입시키려고 시도할 때마다 고려는 이 세조구제를 들어 나라를 지켜냈다.

그러나 국체는 보존했지만 고려는 제후국으로 위상이 격하되었고 왕실 용어와 관제 등이 모두 제후국 수준으로 격하되었으며 몽골의 내정간섭도 이어졌다. 이에 원종은 훗날 충렬왕이 되는 세자를 몽골 공주와 혼인시켜 내정간섭을 줄여보려는 시도를 하였다. 몽골은 황금씨족이 아니면 결혼하지 않는 관례가 있었으나, 쿠빌라이 칸은 이를 깨고 고려의 국혼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의 국혼이 성사되어 충렬왕은 쿠빌라이 칸의 사위가 되었다. 몽골은 국가의 대소사를 쿠릴타이라는 회의를 통해 결정하였는데, 칸의 사위도 이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 충렬왕은 쿠빌라이 칸의 사위였기에 쿠릴타이에 참석할 자격이 주어졌으며, 그 덕분에 고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고 다루가치 철수, 호구 조사 요구 철회, 동녕부 및 탐라총관부 반환 등을 이뤄낼 수 있었다. 충렬왕의 아들인 충선왕쿠빌라이 칸의 외손자였기에 몽골 황실 내에서 서열이 높았고, 원 무종이 황제가 되도록 지지하여 그 보답으로 심양왕 직위를 얻어 만주 지역을 다스릴 권한을 부여받았다.

하지만 국혼을 통해 고려 왕자들은 몽골 황실의 외손이 되었고, 몽골은 고려 왕자들을 몽골에서 성장하고 교육받도록 하였다. 왕실에 대한 간섭이 심화되어 다른 왕조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중조(重祚) 현상이 두 차례 나타났다.[61] 고려에 시집 온 몽골 공주들은 고려 왕후보다 몽골 제국의 작위를 우선시했기에 '왕후' 대신 '공주'라는 시호가 붙었다. 고려는 국체를 지켰지만 몽골의 내정간섭을 받는 반독립 상태의 제후국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충렬왕부터 약 80년 동안 고려는 원나라의 속국이자 강제 동맹국이었다. 몽골과 고려 통치자들은 혼인 관계를 맺었는데, 일부 몽골 왕자와 귀족들은 고려 공주와 결혼했고 그 반대 경우도 있었다. 쿠빌라이 칸 통치 시기에 충렬왕은 쿠빌라이의 딸과 결혼했다. 기황후라 불리는 고려 공주는 토곤 테무르와 결혼하여 황후가 되었고, 그녀의 아들 아이유시리다라는 북원의 황제가 되었다. 고려 왕들은 마르딘, 위구르, 몽골(오이라트, 홍기라트, 이케레스)의 다른 중요한 가문들과 같은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다. 어떤 고려 군주는 쿠빌라이 칸의 가장 사랑받는 손자였고 원나라 궁정에서 자랐다고 주장된다.

고려 궁정에 있던 몽골의 다루가치들은 식량을 제공받았고, 때로는 고려 궁정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5. 2. 몽골의 일본 원정과 고려의 역할

충렬왕은 아버지 원종의 정책을 이어받아 친몽골 정책을 펼쳤다. 원종이 폐위되었을 때 몽골군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고려는 이후 몽골의 원정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겠다는 약속을 했기 때문에, 쿠빌라이의 일본 원정에 "앞장서서 임한다"는 태도를 보여야 했다.[50] 원정에 필요한 병력, 인원, 장비는 고려에 큰 부담이었으며, 쿠빌라이의 요구를 들어주면서도 부담을 줄이기 위해 계속 노력했고, 때로는 자체 조달이 어려웠던 무기 등을 원나라 군대로부터 지원받기도 했다.[50] 일본 원정을 위해 정동행성이 설치되었고, 고려 국왕은 그 차관인 좌승상이 되었다.[50]

문영의 역(1274년)과 관련된 사건들은 고려 왕실에게는 지위 안정을 위한 끊임없는 위기이자 기회였다.[51] 첫 번째 일본 원정인 문영의 역은 삼별초 진압 다음 해, 원정군 출발 직전 고려 세자 왕심과 몽골 황녀 쿠툴룩 켈미시의 혼인이 이루어지고, 곧바로 원종이 사망한 후 세자 왕심이 충렬왕으로 즉위하는 등 고려에게도 급격한 변화가 있던 해였다. 정동행성을 운영한 몽골 관리들은 고려에서 귀족으로 대접받았다.

5. 3. 고려 사회의 변화와 문화 교류

1270년 원종이 개경으로 돌아오면서 고려는 몽골에 완전히 복종하였고, 무신정권은 100년 만에 붕괴되었다.[42] 쿠빌라이는 "고려의 국체와 풍속을 보존하라.(不改土風)"는 명을 내려 고려의 국체를 보존하게 하였다. 이를 세조구제(世祖舊制)라고 부른다.[59][60]

그러나 국체는 보존했지만 고려는 제후국으로 위상이 격하되었고 왕실 용어와 관제 등이 모두 제후국 수준으로 격하되었으며 몽골의 내정간섭도 이어졌다. 이에 원종은 훗날 충렬왕이 되는 세자를 몽골 공주와 혼인시켜 내정간섭을 줄여보려는 시도를 하였다. 쿠빌라이 칸은 관례를 깨고 고려가 요청한 국혼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의 국혼이 성사되어 충렬왕은 쿠빌라이 칸의 사위가 되었다. 몽골은 국가의 대소사를 쿠릴타이라는 회의를 통해 결정하였는데 이 쿠릴타이에는 칸의 사위도 참석이 가능했다. 충렬왕은 쿠빌라이 칸의 사위였기에 쿠릴타이에 참석할 자격이 주어졌으며 그 덕분에 고려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고 다루가치 철수, 호구 조사 요구 철회, 동녕부 및 탐라총관부 반환 등을 이뤄낼 수 있었다.

충렬왕부터 약 80년 동안 고려는 원나라의 속국이자 강제 동맹국이었다. 몽골과 고려의 통치자들은 혼인 관계를 맺었는데, 일부 몽골 왕자와 귀족들은 고려 공주와 결혼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쿠빌라이 칸 통치 시대에 충렬왕은 쿠빌라이의 딸과 결혼했다. 나중에 기황후라 불리는 고려 공주는 토곤 테무르와의 결혼을 통해 황후가 되었고, 그녀의 아들 아이유시리다라는 북원의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국혼을 통해 고려 왕자들은 몽골 황실의 외손이 되었는데, 몽골은 고려 왕자들을 반드시 외가인 몽골로 보내 몽골에서 성장하고 교육받도록 하였으며 한 집안으로 묶였기에 왕실에 대한 간섭이 심화되었다. 고려는 국체를 지켜내는데는 성공했지만 몽골의 내정간섭을 받는 반독립 상태의 제후국으로 전락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전쟁과 그 이후에도 지속된 몽골의 침략과 그것을 방관하거나 자신들의 안전과 이익만 추구하여 몽골을 돕기도 했던 고려 귀족들[62][63][64]로 인하여 고려 백성들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65][66][67][68][69][70][71][72][73][74][75]

수십 년간의 전쟁 이후 고려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문화적 파괴도 있었고, 황룡사 9층탑과 최초의 팔만대장경이 파괴되었다.

고려 궁정에 있던 몽골의 다루가치들은 식량을 제공받았고, 때로는 고려 궁정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제주도에서 사용되는 여러 몽골어 단어들이 있다. 게다가 몽골의 유라시아 지배는 문화 교류를 장려했고, 이는 예를 들어 몽골의 지배하에 있는 다른 지역으로의 일부 한국의 사상과 기술 전파를 포함한다.

6. 역사적 평가와 의의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철수하라는 명령에 따르지 않고 반란을 일으켜 진도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몽골에 저항했다. 1271년 몽골-고려 연합군은 진도를 공격하여 몽골이 최초로 해전에서 승리하였다. 삼별초 지도자 김통정 등은 탐라로 도망쳐 저항했으나, 1273년 원나라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원나라는 탐라총관부를 설치하고 고려 정복 사업을 완료했다.[45]

7. 관련 유적지

고려-몽골 전쟁 관련 유적지
번호유적소재지지정 종별내용비고
1처인성경기 용인시 남사면 아곡리1232년 살리타이 사살기념비
2죽주산성경기 안성시 이죽면1236년 송문주의 승전
3읍내리산성, 성안말산성충남 아산시 온양1236년 향리 현려의 승전九月三日|9월 3일중국어
4봉수산성충남 예산군 대흥면사적1236년 전투
5봉의산성강원 춘천시1253년 몽골 야굴의 침입으로 함락 도륙됨기념비
6권금성강원 속초시1253년 전투
7백화산성경북 상주시 모동면1254년 전투, 승 홍지기념탑
8입암산성전남 장성군 입암리1256년
9온양(아산만)충남 아산시 선장면1256년 장군 이천이 온수현에서 승전六月二十三日|6월 23일중국어
10월악산성충북 제천시1256년
11한계산성강원 인제군1259년
12용장성전남 진도군1270년기념탑
13항파두성제주 북제주군1271~1273년기념비
14환해장성제주 연안1271~1273년
15강화 고려궁지인천 강화군1232~1270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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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문서 『元史高麗伝』「[太祖]十四年九月,皇太弟、国王及元帥合臣、副元帥札剌等各以書遣宣差大使慶都忽思等十人趣其入貢,尋以方物進。十五年九月(中略)以皇太弟、国王書趣之,仍進方物。十八年八月,宣差山朮等十二人復以皇太弟、国王書趣其貢献。」
[26] 문서 『元史』巻2 太宗本紀「[太宗三年秋八月]是月、以高麗殺使者、命撒禮塔率師討之、取四十餘城。」
[27] 문서 『元史』巻208 高麗伝「[太祖十九年]十二月、又使焉、盜殺之于途、自是連七歳絶信使矣。 太宗三年八月、命撒禮塔征其國、國人洪福源迎降于軍、得福源所率編民千五百戸、旁近州郡亦有來師者。」
[28] 문서 『元史』巻208 高麗伝「太宗三年八月、命撒禮塔征其國、國人洪福源迎降于軍、得福源所率編民千五百戶、旁近州郡亦有來師者。撒禮塔即與福源攻未附州郡、又使阿兒禿福源抵王京、招其主王皞遣其弟懷安公王侹請和、許之。置京、府、縣達魯花赤七十二人監之、遂班師。」
[29] 문서 世界全史、312頁。
[30] 문서 村井1999、14頁。
[31] 문서 『高麗史』巻129 列伝43 叛逆3 崔忠献「[高宗]三十九年、李峴奉使如蒙古、沆謂峴曰:『彼若問出陸、宜荅以今年六月。(中略)帝乃留峴、遂遣多可土等密勅曰『汝到彼國、王迎于陸則、雖百姓未出猶可也。不然、速回。待汝來、當發兵致討伐…』」
[32] 문서 『高麗史』巻24 高宗世家3 高宗三十九年秋七月戊戌(十六日)条「戊戌、蒙古使多可阿土等三十七人來帝密勅多可等曰:「汝到彼國、王出迎于陸、則雖百姓未出、猶可也。不然則待、汝來當發兵致討。」多可等至王、遣新安公佺、出迎之請蒙使入梯浦館。王乃出見宴未罷、多可等以王不從帝命怒而還昇天館。」/『高麗史節要』巻17 高宗三十九年七月条「秋七月、蒙古遣多可阿土等三十七人、來審出陸之状。初李峴之如蒙古也。崔沆謂曰『若詰出陸、宜荅以今年六月』。乃出峴未至蒙古、東亰路官人阿母侃通事洪福源等請發兵伐之。帝已許之及峴至。帝問『爾國出陸否』。對如沆言。帝又問『留爾等別遣使審視。否則如何』。對曰『臣於正月發程、已於昇天府白馬山營宮室城郭。臣敢妄對』。對帝乃留峴。遂遣多可土等来密勅曰『汝到彼國、王迎于陸則、雖百姓未出猶可也。不然、速回。待汝來、當發兵致討伐』。峴書状官張鎰随多可能来密知之具白王。王以問沆對曰『大駕不宜輕出江』。公卿皆希沆意執不可。王從之遣新安公佺、出江迎之請蒙使入梯浦館。王乃出見宴未罷、多可等以王不從帝命怒而還昇天館。時人謂『沆以淺智誤國大事、蒙兵必至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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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웹인용 이자성이 충주의 반란을 진압하다 http://db.history.go[...]
[65] 웹인용 몽고군이 남쪽으로 진격하며 도처에서 살육을 저지르다 http://db.history.go[...]
[66] 웹인용 몽고 원수 살리타이가 철주를 도륙하다 http://db.history.go[...]
[67] 웹인용 몽고 기병이 용강 등지를 침략하여 약탈하다 http://db.history.go[...]
[68] 웹인용 몽고군이 앙갚음으로 평주를 도륙하다 http://db.history.go[...]
[69] 웹인용 몽고군이 평주를 도륙하다 http://db.history.go[...]
[70] 웹인용 몽고의 필천호 등이 우리 백성들을 납치해가다 http://db.history.go[...]
[71] 웹인용 몽고군 선봉이 예성강까지 침략해 백성들을 살육하다 http://db.history.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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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웹인용 몽고군이 춘주성을 점령하다 http://db.history.go[...]
[75] 웹인용 몽고군에 의한 피해가 전례 없이 극심하다 http://db.history.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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