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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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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태조 이성계는 1335년에 태어나 1408년에 사망한 고려 말 조선 초의 인물로, 조선을 건국한 초대 국왕이다.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왜구와 홍건적을 물리치며 명성을 떨쳤으며, 위화도 회군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고 1392년 조선을 건국했다. 그는 신진 사대부와 연대하여 개혁 정치를 추진하고 한양으로 천도하는 등 국가 기틀을 마련했다. 그러나 왕자의 난으로 인해 말년에 정치적 혼란을 겪었으며,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공존한다. 태조는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묘사되고 있으며, 그에 대한 설화와 이야기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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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조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태조의 초상화
이름이성계 (李成桂) → 이단 (李旦)
중결 (仲潔), 군진 (君晋)
송헌 (松軒), 송헌거사 (松軒居士)
묘호태조 (太祖)
시호강헌 (康獻), 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 (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 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 (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
출생일1335년 11월 4일
출생지쌍성총관부, 원나라
사망일1408년 6월 27일
사망지창덕궁 광연루 별전, 한성부, 조선
매장지동구릉, 구리시, 대한민국
본관전주 이씨
종교불교
재위 기간1392년 8월 5일 ~ 1398년 10월 14일 (조선 국왕), 1398년 10월 14일 ~ 1408년 6월 27일 (태상왕)
즉위 장소개성 수창궁
재위 년호홍무 (洪武)
서명
군사 경력
복무 기간1356년 ~ 1392년
소속고려군
계급삼군도총제사
주요 전투쌍성부 탈환 (1356년)
개경 홍건적 격퇴 (1361년)
나하추 격퇴 (1362년)
기황후의 원나라 침입 격퇴 (1364년)
김삼선·김삼개의 난 진압 (1364년)
동녕부 탈환 (1370년)
왜구 토벌 (개경, 1377년)
왜구 토벌 (지리산, 1377년)
황산대첩 (1380년)
호바투 격퇴 (1383년)
왜구 토벌 (길주, 1384년)
요동 정벌 (1388년)
가족 관계
아버지이차춘 (李子春)
어머니의혜왕후 최씨
배우자신의왕후 한씨 (1351년 결혼, 1391년 사망)
신덕왕후 강씨 (1370년 결혼, 1396년 사망)
자녀정종
태종
그 외 6남 5녀
관직
고려 관직문하시중 (종1품)
조선 관직제1대 국왕, 태상왕
기타
대한제국 추존황제
명나라 시호강헌 (康獻)

2. 가계 및 출생

이성계는 1335년 고려 동북면 화령(현재의 함경남도 금야군)에서 태어났다.[32] 그의 가문은 대대로 무신 가문이었으며, 고조부 이안사는 전주에서 삼척으로 이주하여 간도 지방에서 기반을 마련하였다.[74] 증조부 이행리, 조부 이춘에 이르기까지 원나라의 다루가치 벼슬을 세습하였다.[74] 아버지 이자춘은 원나라 쌍성총관부의 만호였으나,[6] 1356년 고려 공민왕의 북방 수복 정책에 호응하여 고려에 귀순하였다.[8]

이성계는 어릴 때부터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했으며, 용맹함이 뛰어났다고 전해진다.[77] 특히 활을 잘 쏘아 '신궁(神弓)'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이자춘이 꿈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에게 침척(바느질에 사용하는 자)을 받는 태몽을 꾸고 이성계를 잉태하였다고 한다. 이성계 또한 금으로 된 자, 즉 금척(金尺)을 받는 꿈을 꾸었는데, 훗날 마이산의 풍광이 꿈에서 본 곳과 같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러한 내용은 태조 2년(1393년) '몽금척(夢金尺)'이라는 악장과 '금척무(金尺舞)'라는 춤으로 만들어졌다.

이성계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태조 가계도
환조 이자춘 (1315-1360)
의혜왕후 최씨
조부도조 이춘 (?-1342)
조모경순왕후 박씨
외조부영흥부원군 최한기
외조모조선국대부인 이씨



이성계는 신의왕후 한씨, 신덕왕후 강씨와 혼인하였고, 그 외에도 성비 원씨, 정경궁주 유씨, 화의옹주 김씨, 찬덕 주씨, 궁인 김씨 등의 후궁을 두었다.

과의 초기 외교 관계에서 태조의 족보에 대한 논쟁이 발생했다. 대명회전에 이성계를 이인임의 아들이라고 잘못 기록하여, 명나라가 태조를 찬탈자로 여기게 된 것이다. 이러한 오류는 1518년에 처음 언급되었고,[23] 좌찬성 이계맹과 예조판서 남곤 등이 "종계변무"()를 지어 명나라에 시정을 요구했다.[24] 1584년 대사헌 황정욱을 통해 문제가 해결되었다.[25][26]

일부 학자들은 이성계가 여진족이거나 여진족의 피를 이어받았을 가능성을 제기한다.[63][64]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은 원나라의 직할령이었던 쌍성총관부에 봉사하는 무인이었고, 이 지역에는 여진족이 많이 살았기 때문이다.[65] 또한, 이성계의 휘하에 많은 여진족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가 무장으로서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여진족의 무력을 흡수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66]

최근에는 이성계가 몽골 군벌 출신이며, 그의 가문이 쌍성총관부에서 약 100년 동안 몽골 관직을 역임하며 세력을 키웠다는 학설도 제시되고 있다.[67][68][69]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는 1255년에 몽골 황제로부터 천호장, 달가치의 지위를 받았는데, 이는 몽골족 이외의 사람이 임명되는 경우가 드문 고위직이므로, 실제로는 칭기즈칸의 동생 템게 오치긴이 인정한 군벌 세력이 취임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3. 고려에서의 활약

3. 1. 군사적 업적

이성계는 고려 공민왕 때부터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여 나라를 지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2] 1356년, 공민왕의 반원 정책에 협력하여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아버지 이자춘과 함께 공을 세웠다.[53] 1361년에는 박의의 반란을 평정하고,[35] 홍건적의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자 2,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수도 탈환 작전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웠다.[35] 이들 군사 대부분은 기병이었으며, 이성계는 '팔준'이라 불리는 여덟 마리의 애마를 타고 다녔다.[75]

1362년, 나하추가 이끄는 원나라 군대가 함경도로 쳐들어오자 동북면 병마사로서 이를 함흥 평야에서 격퇴하여 명성을 떨쳤다.[35] 1364년에는 최유가 이끄는 원나라 군사를 최영 등과 함께 막았고,[37] 함주를 침공한 여진족 김삼선·김삼개 형제를 격퇴하여 밀직부사에 임명되었다.[35] 1370년에는 원의 동녕부를 원정하여 국토를 확장하고 요동성을 점령하였다.[39]

1380년에는 황산대첩에서 왜구 장수 아지발도를 활로 사살하는 등 큰 공을 세워 왜구를 격파했다.[75] 이성계는 황상과의 활쏘기 대결에서도 승리했는데, 황상은 원나라 순제 앞에서 몽골 궁수를 모두 이긴 실력자였다.[76] 50발까지는 막상막하였으나, 50발이 넘어가자 황상의 활이 빗나가기 시작했다.[76]

1388년 명나라가 고려 북쪽 영토 반환을 요구하자, 최영은 요동 반도 침략을 주장했다. 이성계는 반대하였으나, 결국 침략을 이끌게 되었고, 위화도 회군을 통해 개경으로 돌아가 정부를 장악했다.

3. 2. 신진사대부와의 연대

이성계는 뛰어난 군사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중앙 정치에서의 영향력은 미미했다.[78] 이에 그는 성리학을 수용하여 고려를 개혁하고자 했던 신진사대부와 연대하였다.[78] 이성계는 정몽주의 능력을 인정하여 여러 전쟁터에 동행시켰으며,[79] 정몽주를 통해 정도전을 소개받아 그와 함께 정사와 현안을 논의하며 개혁을 추진했다.[79] 또한 이색, 우현보, 권근 등과 교류하며 정치적 기반을 다져나갔다.[80] 이성계는 친명 세력이자 원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신진사대부에 대한 압력과 위협에서 이들을 지켜주고 보호함으로써 신진사대부와 결속력을 다져나가게 되었다.[80] 한편 최영, 조민수와도 깊은 친분 관계를 유지하였고, 최영이 임견미, 염흥방 등의 부패권문세족 세력들을 숙청할 때는 그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1364년, 여진족 토벌전에 문관으로 종군한 정몽주는 이후 이성계와 대립하게 되었지만, 이성계와 절친한 사이였다.[35]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은 이성계는 정도전, 조준 등과 함께 토지 제도 개혁을 단행하여[32] 친원적인 특권 계급과 부패한 불교 세력이 사유화한 토지를 몰수하고 국고를 확보하려 했다.

4. 위화도 회군과 조선 건국

4. 1. 위화도 회군

1388년 명나라는 철령 이북의 영토를 요구하며 철령위를 설치하려 하였다.[83] 이에 우왕과 최영요동 정벌을 추진하였으나, 이성계는 4불가론을 내세우며 반대하였다.[84][85] 4불가론은 소국이 대국을 거스르는 것, 여름철 농번기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 왜구의 침입 가능성, 장마철로 인한 활의 아교가 녹고 전염병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84]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왕과 최영은 요동 정벌을 강행하였다. 이성계는 우군도통사로서 요동 정벌에 나섰으나, 압록강 하구의 위화도에서 14일간 머무르다 좌군도통사 조민수를 설득하여 회군하였다.[92] 회군 과정에서 심덕부, 이지란과 의형제를 맺었다는 기록화인 '''장수군도'''가 발견되었다.[92]

회군한 이성계와 조민수는 최영과의 전투 끝에 개경을 점령했고, 우왕을 폐위하고 창왕을 옹립하였다. 이후 조준, 정몽주, 정도전 등과 함께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여 전제 개혁을 단행했다. 최영은 제거되어 군사적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위화도 회군은 이성계의 신흥 무인세력과 신진 사대부가 결합하여 고려 권문 세족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며, 조선 왕조 개창의 단초가 되었다.[32] 조준, 남은, 윤소종, 정도전 등 급진 신진 사대부의 적극적인 도움과 이색, 정몽주, 하륜 등의 협조로 내부 반발을 억제할 수 있었다.

4. 2. 조선 건국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으로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위시켰다. 이후 창왕, 공양왕을 차례로 옹립하며 권력을 강화하였다.[53] 이성계는 조준, 남은, 정도전 등과 함께 전면적인 사전(私田) 개혁에 나섰으며[93] 대농장 소유와 불법 겸병으로 국고를 고갈시키고 극심한 양극화를 부른 고려 귀족 기득권의 저항에도 굴하지 않고 사전을 혁파해 고려 말 사회 혼란을 해소한 뒤, 신흥세력의 기반을 굳건히 하고 중앙 집권과 관료제, 근세적 토지 소유 관계의 기초를 닦았다. 비록 농민에게 토지를 직접 분배한다는 정도전의 계구수전론은 실현되지 못했으나 개경 거리 한복판에서 고려의 모든 공사 전적(토지대장)을 소각하고 시행한 조준의 사전 혁파와 과전법 시행은 고려 말 재정 고갈을 해소하였다.[97]

1392년 이성계는 정몽주등 온건개혁파들을 제거하고 배극렴,조준,정도전등의 신진사대부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라 조선을 건국하였다.[71] 처음에는 민심의 동요를 염려하여 국호는 그대로 고려로 두었으나, 1393년 3월 27일(음력 2월 15일) 조선(朝鮮)으로 바꾸었다.[100]

이성계는 즉위 직후 과의 관계 개선을 추구하였는데,[4][5] 남경의 조정에 왕조 교체 사실을 알리는 사신을 파견했다.[10] 또한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여 우호적인 관계 재건을 추구했는데, 이는 성공적이었고 아시카가 요시미츠(Ashikaga Yoshimitsu)가 이 사절단에 호의적인 인상을 받았다고 전해진다.[3] 류큐 왕국(Ryukyu Kingdom)의 사신들은 1392년, 1394년, 1397년에, 그리고 (Siam)의 사신들은 1393년에 조선에왔다.[10] 1394년에는 새로운 수도를 한성(현재의 서울)에 건설하였다.[11][12]

5. 조선 개국 이후

1392년, 이성계는 공양왕을 강제로 폐위시키고 원주로 유배 보낸 뒤(그와 그의 가족은 비밀리에 처형되었다), 스스로 왕위에 올라 고려 475년의 통치에 종지부를 찍었다. 1393년에는 왕조의 이름을 조선으로 바꾸었다.

그의 초기 업적으로는 과의 관계 개선이 있었다. 즉위 직후 그는 남경의 조정에 왕조 교체 사실을 알리는 사신을 파견했다.[10] 또한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여 우호적인 관계 재건을 추구했는데, 이는 성공적이었고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이 사절단에 호의적인 인상을 받았다고 전해진다.[3] 류큐 왕국의 사신들은 1392년, 1394년, 1397년에, 그리고 의 사신들은 1393년에 조선에왔다.[10]

1394년, 새로운 수도가 한성(현재의 서울)에 건설되었다.[11][12]

새로운 왕조가 공식적으로 선포되었을 때, 누가 왕위를 계승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태조의 첫째 부인 신의왕후의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이 아버지의 권력 장악에 가장 큰 공헌을 했지만, 그는 태조의 핵심 동맹자인 정도전남은에 대해 깊은 증오심을 품고 있었다.

양측 모두 상호 적대감을 충분히 인식하고 끊임없이 위협을 느꼈다. 이방원이 가장 적합한 후계자임이 분명해지자, 정도전은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왕을 설득하여 왕국에 가장 좋은 아들이 아닌,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라고 주장했다.

1392년, 태조의 여덟 번째 아들(둘째 부인 신덕왕후의 둘째 아들)인 이방석이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396년 신덕왕후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태조가 아직 부인의 상중에 있을 때, 정도전은 자신의 왕실 내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이방원과 그의 형제들을 선제적으로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1398년, 이 계획을 듣게 된 이방원은 즉시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습격하여 정도전과 그의 추종자들, 그리고 신덕왕후의 두 아들을 살해했다. 이 사건은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아들들이 왕위를 위해 서로 죽이려는 사실에 경악하고, 둘째 부인의 죽음으로 심리적으로 지쳐 있던 태조는 둘째 아들인 이방과(시호 정종)를 새로운 후계자로 지명하고 즉위했다.[13]

그 후 태조는 함흥 본궁으로 은퇴하여 생애의 남은 기간 동안 다섯째 아들과 거리를 두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방원은 여러 차례 사자를 보냈지만, 전 왕은 매번 그들을 처형하여 다시는 아들을 만나지 않겠다는 확고한 결심을 표명했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적 일화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뜻하는 '함흥차사'라는 용어를 탄생시켰다.[14] 그러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태조는 사자들을 실제로 처형하지 않았고, 이들은 우연히 그 지역에서 발생한 반란 중에 사망했다고 한다.[15]

1400년, 정종은 자신의 동생 이방원을 왕세자로 선포하고 스스로 퇴위했다. 같은 해 이방원은 마침내 조선의 왕위에 올랐는데, 그는 태종으로 추존되었다.[16]

5. 1. 한양 천도와 제도 정비

이성계는 즉위 후 한양으로 천도하고,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과 종묘, 사직 등을 건설하여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118][120] 그는 수도를 옮기기 위해 신도궁궐조성도감을 설치하고,[118] 1394년에는 한성부로 천도하여 도성을 신축하는 등 국가의 새로운 면모를 갖추었다.[118][120][121]

태조는 도평의사사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 체제를 운영하며, 국왕의 권력이 우위에 있으면서 재상들과 논의하여 정책을 시행하는 방식으로 왕권을 강화했다.[123] 또한, 《조선경국전》, 《경제육전》 등의 법전을 편찬하여 통치 규범을 확립하였다.[122] 고려 시대에 있던 사회제도 역시 계승하여 정비하였다.[124][125]

태조는 개국에 반대했던 인물들을 회유하거나 원종공신으로 포상하여 새 왕조에 합류시켰다.[104] 특히 권근, 하륜 등 이색 문하 온건개혁파는 새로운 왕조에 적응해 다양한 직임에서 각종 문물 정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104]

5. 2. 왕자의 난과 퇴위

태조에게는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여섯 왕자와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두 왕자가 있었는데, 신덕왕후 소생 두 왕자 중 장남 이방번은 고려 공양왕의 조카사위였기 때문에[126] 차남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127] 한편 조선 개국에 공이 컸던 신의왕후 소생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은 불만이 컸다. 태조는 즉위 이후 군권분장정책에 따라 왕자들과 종친을 절제사로 임명하고 군권을 분할했는데,[128] 태조는 정도전을 내세워 이들이 가진 사병을 혁파하고자 했다.[129] 이런 상황에서 이방원은 정도전 일파가 세자를 조종하여 자신들을 해치려 한다는 조작된 명분을 내세워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을 비롯한 관료들과 신덕왕후 소생 왕자들, 공주의 남편 흥안군을 살해하였다. 이성계는 팔남 이방석을 후계로 삼으려 하였으나, 오남 이방원이 반란을 일으켜 이방석을 살해하였다(제1차 왕자의 난).[52] 이때 병석에 있던 이성계는 이 싸움에 염증을 느껴 국사를 포기하고, 이방원이 추천한 차남 이방과(정종)에게 국사를 넘겼다.

태조는 이 사건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또 이미 실권도 모두 잃어, 왕위를 둘째 아들 방과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방과가 정종으로 즉위하고 아우 방원은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1400년에는 왕위계승을 두고 넷째 아들인 방간과 다섯째 아들인 방원이 대립하여 제2차 왕자의 난이 발발하였다. 정종의 동생이자 이성계의 사남인 이방간이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고, 그 진압에 공이 있었던 이방원(태종)에게 정종은 국사를 양위하였다.[52] 이성계는 충격으로 함주에 은거하였다.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통해 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하였다.

태종은 즉위하자 성석린을 보내 태조를 서울로 모셔 왔다. 그러나 이성계는 자신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죽이고, 자신을 사실상 폐위한 이방원을 매우 증오해 1402년(태종 2년)에 다시 함경도로 들어간 채 돌아오지 않으므로 태종이 차사(差使)를 보내어 돌아오기를 권유하니, 차사마저 돌려보내지 않고 활에 화살을 넣고 족족 오는 차사마다 죽였다는 야사가 있어 함흥차사란 말이 생겨났다. 그곳에서 이성계는 '조사의의 난'을 부추겨 아들 이방원을 쳤지만 실패로 돌아갔고, 뒤에 태종 이방원의 아내인 '원경왕후 민씨'의 천거로 무학대사가 차사로 가서 겨우 서울로 오게 하였는데 오면서도 두 차례에 걸쳐 이방원을 살해할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결국 체념해 이방원을 인정하고 용서했다는 야사가 있다.

1401년 한성부로 돌아온 태조는 태상왕으로 7년을 더 살며 염불삼매로 조용한 나날을 보내다가 1408년 음력 5월 24일에 지병으로 있던 중풍이 악화되어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74세로 승하하였다.

5. 3. 말년과 죽음

태조 이성계는 왕위에서 물러난 뒤, 1400년 함주(함흥)에 은거하며 불교에 귀의했다.[51] 1402년, 신덕왕후 강씨의 친척이었던 안변부사 조사의가 신덕왕후의 원수를 갚겠다며 함경도 호족들을 이끌고 봉기했을 때(조사의의 난), 태조는 뒤에서 이를 지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51] 반란이 진압된 후, 태조는 태종과 화해하여 서울로 돌아와 국새를 넘겨주고 태종을 정식으로 조선 국왕으로 인정했다.[51] 태종은 아버지로부터 후계자로 인정받고자 함흥에 사신을 보냈으나, 이성계는 서울에서 온 사자들을 멀리서 화살로 쏘아 죽였다고 전해지며, 여기서 "함흥차사"라는 고사성어가 생겨났다.[51] 그러나 이는 전설이며, 마지막 함흥차사로 알려진 박순은 조사의의 난에 가담한 박만을 설득하려다 죽임을 당했다.[51]

태조의 건원릉


이후 이성계는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고 염불에만 정진하다가,[51] 1408년 창덕궁에서 74세로 승하하였다.[17] 그의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있는 건원릉이다.[17] 태조는 생전에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 곁에 묻히기를 원했으나, 태종은 신덕왕후의 능을 도성 밖으로 이장하고 훼철했으며,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격하시켰다. 태조는 자신을 함흥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태종은 한양 근교 양주에 능을 조성하고 함흥의 흙과 억새풀을 가져다 덮었다.[51]

6. 평가

태조는 고려를 무너뜨리고 전 왕조에 충성을 지킨 관리들을 축출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를 혁명가이자 결단력 있는 통치자로 여긴다. 무능하고 낡고 무력해진 통치 체제를 제거하여 나라를 외세와 분쟁으로부터 구해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국내 안보가 강화되면서 한국인들은 문화를 재건하고 더욱 발전시켰다. 원나라와 명나라의 격렬한 경쟁 속에서 조선은 몽골에 의해 위협받았던 국가 정체성의 발전을 촉진했다. 그러나 특히 북한의 일부 학자들은[18] 태조를 옛 정권에 대한 배신자이자 부르주아 반역자로 보고, 고려에 충성하며 죽을 때까지 헌신한 보수적인 군사엘리트 최영 장군과 비교한다.

조선 초기 한국을 안전하게 지켜낸 그의 외교적 성공은 주목할 만하다.[19][20][21]

이성계의 출신은 공식적으로는 전주 이씨로 되어 있으나, 삼다무라 타이스케는 "원래 이성계는 전라도 전주 명문 출신이라고 하나 의심스럽고, 수대 전부터 북한 함경도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59] 이케우치 히로시는 전주 이씨라는 것은 결코 믿어서는 안 된다고 비판하고 있다.[60] 무타이타 요는 고조부 이안사 시대에 전주에서 동북면으로 이주하여 원나라에 입사한 후 여러 곳을 전전했다고 한다. 또는 그의 아버지 이자춘은 쌍성 등의 천호로 원나라에 봉직했으나, 1355년에 고려에 내응하여 소부윤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고려가 행한 쌍성총관부 공격 시 恭愍王(공민왕)의 명령을 받고 이를 공격하여 전공을 세워 함경도 만호·병마사에 임명되었다는 것은 "전설"로서,[61] "이러한 전설은 『고려사』 『태조실록』 『용비어천가』 등에 보이지만, 어디까지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 것인지는 의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62] 생모인 의혜왕후 최씨는 본래 중국산동반도등주 사람으로 함경도이주하여 살았다.[33][34] 한편, 이성계를 여진족으로 보는 설이나 몽골 군벌로 보는 설도 있다.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진보 진영에서는 이성계의 개혁 정치와 민생 안정을 위한 노력을 높이 평가하며, 그의 조선 건국을 역사 발전의 필연적인 과정으로 이해한다. 반면, 국민의힘 등 보수 진영에서는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왕조 교체를 군사 쿠데타와 권력 찬탈로 규정하고, 왕자의 난 등을 통해 나타난 그의 권력욕과 리더십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6. 1. 긍정적 평가

이성계는 고려 말 왜구와 홍건적 등 외침을 막아내고 백성과 고려를 구한 전쟁 영웅으로 추앙받았다.[146] 조준, 남은, 정도전 등 급진개혁파 사대부들과 함께 조선 왕조를 개창하여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사상 등 여러 방면에서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147][148]
내치태조는 강력한 왕권을 가졌으면서도 국가 기틀 정비에 힘썼으며, 조준, 정도전 등 여러 관료들을 등용했다. 법률 정립에 힘써 성종 대까지 통치규범체제 확립의 첫걸음을 떼었다.[150][151] 고려 말부터 즉위 이후까지 지속적인 개혁을 통해 국가 기틀을 정비하고 태종과 세종 대 조선이 나아갈 방향성을 제시하였다.
외치태조는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건국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를 혁명가이자 결단력 있는 통치자로 여긴다. 무능하고 낡은 통치 체제를 제거하여 나라를 외세와 분쟁으로부터 구해냈다는 것이다. 조선 초기 한국을 안전하게 지켜낸 그의 외교적 성공은 주목할 만하다.[19][20][21]

이성계의 출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공식적으로는 전주 이씨로 되어 있으나, 삼다무라 타이스케는 이성계가 전라도 전주 명문 출신이라는 것은 의심스럽다고 말하고 있다.[59] 이케우치 히로시는 전주 이씨라는 것은 결코 믿어서는 안 된다고 비판하고 있다.[60] 무타이타 요는 고조부 이안사 시대에 전주에서 동북면으로 이주하였다는 설과 그의 아버지 이자춘이 쌍성 등에서 원나라의 천호 벼슬을 하다가 1355년에 고려에 내응하여 벼슬을 받았다는 것은 "전설"이라고 말하고 있다.[61][62] 의혜왕후 최씨는 본래 중국산동반도 등주 사람으로 함경도이주하여 살았다.[33][34]

6. 2. 부정적 평가

이성계는 재위 기간 중 사초 열람을 시도하여 사관의 독립성을 침해하려 했다는 비판을 받는다.[153] 재위 2년에는 고려의 사초에 우왕, 창왕, 변안열이 죄없이 이성계에게 죽었다고 기록한 사관 이행(李行)을 국문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152]

태종의 명을 받은 하륜이 편찬한 《태조실록》은 사관의 출입을 막고 편찬되어 당대에도 비난받았으며, 학계에서는 태조정도전, 신덕왕후와 개국 공신들에 대한 곡필이 심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건국 초기 혼란한 상황이 지난 후, 왕의 사초와 실록 열람은 성리학적 이념 강화와 통치 규범 정착으로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일부 학자들은[18] 태조를 옛 정권에 대한 배신자이자 부르주아 반역자로 보기도 하며, 고려에 충성하며 죽을 때까지 헌신한 최영 장군과 비교하기도 한다.

이성계의 출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공식적으로는 전주 이씨로 알려져 있으나, 삼다무라 타이스케(三田村泰助)는 이성계가 전라도 전주 명문 출신이라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며 함경도 출신일 가능성을 제시했다.[59] 이케우치 히로시(池内宏)는 전주 이씨라는 것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비판했다.[60] 무타이타 요(六反田豊)는 이성계의 고조부 이안사 시대에 전주에서 동북면으로 이주했다는 설과, 아버지 이자춘이 원나라에 봉직하다 1355년 고려에 내응하여 공을 세웠다는 것은 "전설"이라고 주장했다.[61][62]

7. 대중문화 속의 태조

이성계는 드라마, 영화, 소설 등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드라마 《개국》, 《용의 눈물》, 《정도전》, 《육룡이 나르샤》, 《태종 이방원》, 영화 《순수의 시대》 등이 있다.





1983년 KBS 드라마 《개국》에서 임동진이, 1983년 MBC 드라마 《추동궁 마마》와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김무생이 태조 역을 맡았다. 2005년~2006년 MBC 드라마 《신돈》에서는 이진우가, 2012년 SBS 드라마 《신의》에서는 오재무가, 2012년~2013년 SBS 드라마 《대풍수》에서는 지진희가 태조를 연기했다. 2014년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유동근이, 2014년 영화 《해적》에서는 이대연이, 2015년 JTBC 드라마 《하녀들》에서는 이도경이, 2015년 영화 《순수의 시대》에서는 손병호가 태조 역을 맡았다. 2015년~2016년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천호진이, 2016년 KBS 드라마 《장영실》에서는 김기현이, 2019년 JTBC 드라마 《나의 나라》와 2021년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는 김영철이 태조를 연기했다.

모바일/PC 게임 《라이즈 오브 킹덤즈》에도 등장한다.

8. 기타

태조 이성계에 대한 설화는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조선왕조실록, 대동야승, 동사강목, 연려실기술, 성호사설, 용비어천가 등의 자료에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다.

왕건이 세운 고려1392년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혁명세력에 의해 멸망하였는데, 이때부터 왕씨들에게 대대적인 수난이 시작되었다. 이성계는 당초 고려 왕씨 후예에 대해 온건책을 썼으나, 왕씨가 한 사람이라도 살아 있다면 고려 왕조의 복위를 기도할 수 있으므로 후환을 없애려 했던 개국공신들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왕씨 일족을 몰살시켰다. 남효온의 한문 수필집인 《추강냉화(秋江冷話)》 별지에도 "조선조 태조 3년 갑술(1394년) 여름에 모든 왕씨를 바다 가운데 빠뜨려 죽이고 밖으로 명령하여 크게 왕씨의 남은 겨레를 찾아서 다 죽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살아남은 왕씨들은 변성명(變姓名)을 하며 목숨을 유지했다. 왕씨들은 '임금 왕(王)'자에서 모양을 변형하여 전씨(田, 全), 옥씨(玉), 차씨(車), 신씨(申) 등으로 바꾸어 살았다.[137] 태종 시대에 이르러 왕씨 멸족령은 해제되었다.[138]

이성계는 조선 건국 과정에서 반대 세력들을 숙청하였고, 새로운 왕조 개창에 협조하지 않는 고려의 충신들이 벼슬을 버리고 은둔 생활을 하였다는 야사가 있다.[143] 두문동의 72현을 비롯하여 고려의 유신들은 낙향하거나 산으로 숨어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러나 이는 18세기에 이르러 등장한 야사로, 조선 후기에 창작된 내용이며, 두문동 설화는 18세기 이후 유포되었다.[144]

태조는 즉위 초, 민심의 동요를 우려하여 나라 이름을 그대로 고려라고 했으며, 모든 법제를 고려의 예에 따르게 했다.[143] 권근, 하륜, 심덕부, 설장수 등은 그의 요청에 협력하여 새 조정에 참여하였지만 신진사대부의 스승격인 이색 역시 조선 조정 참여 요청을 거절하였다.

태종은 자주 차사(差使)를 함흥으로 보내어 아버지와 아들 간의 불화를 풀고 태조를 환궁시켜 옥새를 얻고자 하였으나, 태조는 차사로 오는 이들을 보는 족족 활을 쏘아 맞추어 죽였다는 함흥차사 이야기가 전해온다. 그러나 이는 후대의 야사로, 태조가 관여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건은 조사의의 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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