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타메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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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피타메네스는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의 소그디아나와 박트리아의 호족으로, 기원전 331년 가우가멜라 전투 이후 알렉산드로스 3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베소스와 동맹을 맺었으나, 이후 항복하고 알렉산드로스에게 협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원전 329년 다시 반란을 일으켜 유목민과 연합하여 마케도니아 군을 교란했다. 결국 기원전 328년 가바이 전투에서 패배한 후, 아내 또는 아군에게 암살당했으며, 그의 머리는 알렉산드로스에게 바쳐졌다. 그는 딸 아파마를 두었으며, 아파마는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와 결혼하여 셀레우코스 제국의 미래 통치자인 안티오코스 1세 소테르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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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타메네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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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스피타메네스는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의 소그디아나, 박트리아의 호족이었다. 기원전 331년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가 이끄는 마케도니아 왕국 군에 의해 페르시아 군이 격파되었을 때, 박트리아의 총독이었던 베소스는 다리우스 3세를 암살하고 스스로 왕을 칭했다.[4][5]
스피타메네스는 베소스와 함께 알렉산드로스에 대항했지만, 베소스는 싱겁게 패배를 당하고 박트리아에서 쫓겨났으며, 스피타메네스도 그와 함께 소그디아나로 도주했다. 이후 스피타메네스는 동료 옥시알테스와 함께 베소스를 잡아 그의 신병을 알렉산드로스에게 인도하고 항복했다.[6] 베수스는 그 후 스피타메네스에 의해 권좌에서 물러났고, 프톨레마이오스가 그를 잡기 위해 보내졌다.[7][8][9][10]
알렉산드로스가 마라칸다(현 사마르칸트)를 점령하고 시르다리야 강(옛 이름: 약사르테스강) 방면으로 계속 진군하자 기원전 329년 스피타메네스는 반란을 일으켰다. 알렉산드로스는 알렉산드리아 에스카테를 건설하는 동안, 스피타메네스가 소그디아나를 선동하여 사마르칸트에 주둔한 마케도니아 수비대를 포위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당시 스피타메네스에 대항할 군대를 직접 이끌 여유가 없었던 알렉산드로스는 파르누케스 장군에게 진압 명령을 내렸지만, 파르누케스 군은 보병 2,000명 이상[5]과 기병 300명을 잃으며 전멸했다.[11]
스피타메네스는 마라칸다를 포위했지만, 파르누케스가 이끄는 마케도니아 군이 원병을 보낸 것을 알고 포위를 풀었다. 그는 박트리아를 공격했지만, 박트리아의 사트라프인 아르타바조스 2세에 의해 간신히 격퇴되었다(기원전 328년). 이후 스피타메네스는 스키타이 인과 마사게타이 인 등과 동맹을 맺고 소그디아나 각지의 도시 주민을 조직하여 군사력을 늘리고, 알렉산더가 점령지에 남긴 마케도니아 수비대 등을 습격하며 돌아다녔다. 그리고 토벌부대가 나타나면, 또는 나타나기 전에 즉시 철수하는 전법으로 1년 이상 마케도니아 군을 교란하였다. 이러한 기만전술은 유목민의 그것과 같았고, 그의 군대에 수많은 유목민이 참여하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그리스인 용병 부대를 새롭게 증원하여 병력을 확보하고, 키로폴리스 등 저항한 도시를 점령한 후 완전히 파괴하고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키는 방법으로 진압을 했다. 또한 스키타이에 대해서도 붕괴 공작이 이루어졌다. 알렉산드로스 휘하의 장군들도 스피타메네스의 반란 진압에 대규모로 동원되게 되고, 이에 따라 스피타메네스의 활동 범위는 점차 축소되어 갔다.
기원전 328년 마케도니아의 장군 크라테로스와의 전투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며 스피타메네스의 세력은 크게 줄어들었다. 결정적인 시기는 기원전 328년 12월 가바이 전투에서 스피타메네스가 알렉산드로스의 장군 코이노스에게 패배하면서 찾아왔다. 스피타메네스는 배신한 유목 부족 지도자들에게 살해당했고, 그들은 그의 머리를 알렉산드로스에게 보내 화평을 요청했다.
2. 1. 초기 생애와 베소스와의 동맹
스피타메네스는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의 소그디아나, 박트리아의 호족이었다. 기원전 331년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가 이끄는 마케도니아 왕국 군에 의해 페르시아 군이 격파되었을 때, 박트리아의 총독이었던 베소스는 다리우스 3세를 암살하고 스스로 왕을 칭했다.[4][5]스피타메네스는 베소스와 함께 알렉산드로스에 대항했지만, 베소스는 싱겁게 패배를 당하고 박트리아에서 쫓겨났으며, 스피타메네스도 그와 함께 소그디아나로 도주했다. 이후 스피타메네스는 동료 옥시알테스와 함께 베소스를 잡아 그의 신병을 알렉산드로스에게 인도하고 항복했다.[6] 베수스는 그 후 스피타메네스에 의해 권좌에서 물러났고, 프톨레마이오스가 그를 잡기 위해 보내졌다.[7][8][9][10]
알렉산드로스가 마라칸다(현 사마르칸트)를 점령하고 시르다리야 강(옛 이름: 약사르테스강) 방면으로 계속 진군하자 기원전 329년 스피타메네스는 반란을 일으켰다. 알렉산드로스는 알렉산드리아 에스카테를 건설하는 동안, 스피타메네스가 소그디아나를 선동하여 사마르칸트에 주둔한 마케도니아 수비대를 포위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당시 스피타메네스에 대항할 군대를 직접 이끌 여유가 없었던 알렉산드로스는 파르누케스 장군에게 진압 명령을 내렸지만, 파르누케스 군은 보병 2,000명 이상[5]과 기병 300명을 잃으며 전멸했다.[11]
스피타메네스는 마라칸다를 포위했지만, 파르누케스가 이끄는 마케도니아 군이 원병을 보낸 것을 알고 포위를 풀었다. 그는 박트리아를 공격했지만, 박트리아의 사트라프인 아르타바조스 2세에 의해 간신히 격퇴되었다(기원전 328년). 이후 스피타메네스는 스키타이 인과 마사게타이 인 등과 동맹을 맺고 소그디아나 각지의 도시 주민을 조직하여 군사력을 늘리고, 알렉산더가 점령지에 남긴 마케도니아 수비대 등을 습격하며 돌아다녔다. 그리고 토벌부대가 나타나면, 또는 나타나기 전에 즉시 철수하는 전법으로 1년 이상 마케도니아 군을 교란하였다. 이러한 기만전술은 유목민의 그것과 같았고, 그의 군대에 수많은 유목민이 참여하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그리스인 용병 부대를 새롭게 증원하여 병력을 확보하고, 키로폴리스 등 저항한 도시를 점령한 후 완전히 파괴하고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키는 방법으로 진압을 했다. 또한 스키타이에 대해서도 붕괴 공작이 이루어졌다. 알렉산드로스 휘하의 장군들도 스피타메네스의 반란 진압에 대규모로 동원되게 되고, 이에 따라 스피타메네스의 활동 범위는 점차 축소되어 갔다.
기원전 328년 마케도니아의 장군 크라테로스와의 전투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며 스피타메네스의 세력은 크게 줄어들었다. 결정적인 시기는 기원전 328년 12월 가바이 전투에서 스피타메네스가 알렉산드로스의 장군 코이노스에게 패배하면서 찾아왔다. 스피타메네스는 배신한 유목 부족 지도자들에게 살해당했고, 그들은 그의 머리를 알렉산드로스에게 보내 화평을 요청했다.
2. 2.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반란
스피타메네스는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 소그디아나, 박트리아의 호족이었다. 기원전 331년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 3세가 이끄는 마케도니아 왕국 군에 의해 페르시아 군이 격파되자, 박트리아의 총독이었던 베소스는 다리우스 3세를 암살하고 스스로 왕을 칭했다.[4][5]스피타메네스는 베수스의 동맹이었으며[4][5] 베소스와 함께 알렉산드로스에 대항했지만, 베소스는 싱겁게 패배를 당하고, 박트리아에서 쫓겨났으며, 스피타메네스도 그와 함께 소그디아나로 도주했다. 기원전 329년, 베수스는 동부 사트라피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같은 해 그의 동맹들은 그를 지지하는 것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6] 알렉산드로스는 군대를 이끌고 드랍사카로 가서 베수스를 포위했고, 베수스는 도주했다. 베수스는 그 후 스피타메네스에 의해 권좌에서 물러났고, 프톨레마이오스가 그를 잡기 위해 보내졌다.[7][8][9][10] 그래서 동료 옥시알테스와 함께 베소스를 잡아 그의 신병을 알렉산드로스에 인도하고 항복했다.
그 후 알렉산드로스는 마라칸다(현 사마르칸트)을 점령하고, 시르다리야 강(옛 이름: 약사르테스강) 방면으로 계속 진군하자 기원전 329년 스피타메네스는 반란을 일으켰다. 알렉산드로스가 시르다리야강에 새로운 도시 알렉산드리아 에스차테를 건설하는 동안, 스피타메네스가 소그디아나를 선동하여 사마르칸트(Markanda)에 주둔한 마케도니아 수비대를 포위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당시 스피타메네스에 대항할 군대를 직접 이끌 여유가 없었던 알렉산드로스는 리키아의 파르누케스에게 진압 명령을 내렸다.
스피타메네스는 마라칸다를 포위했지만, 파르노케스가 이끄는 마케도니아 군이 원병을 보낸 것을 알고 포위를 풀었다. 그 후, 깊숙이 추격을 해온 파르노케스 군 보병 2,000명, 기병 300기를 전멸시키고 승리를 거뒀다.[5][11] 이 패전 보고를 받은 알렉산더는 부하에게 패배 소식을 외부에 누설하지 말도록 지시를 내리고, 스스로 마라칸다를 탈환하러 떠났다. 스피타메네스는 소그디아나에 남아 기원전 328년에 박트리아를 공격했지만, 박트리아의 사트라프인 프리기아의 아르타바조스에게 격퇴당했다. 그 후 알렉산더와 직접 충돌을 피하기 위해, 그가 도착하기 전에 마라칸다에서 물러나 잠적했다.
그 후, 스피타메네스는 스키타이 인과 마사게타이 인 등과 동맹을 맺고 소그디아나 각지의 도시 주민을 조직하여 군사력을 늘리고, 알렉산더가 점령지에 남긴 마케도니아 수비대 등을 습격하며 돌아다녔다. 그리고 토벌부대가 나타나면, 또는 나타나기 전에 즉시 철수하는 전법으로 1년 이상 마케도니아 군을 교란하였다. 이러한 기만전술은 유목민의 그것과 같았고, 그의 군대에 수많은 유목민이 참여하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알렉산더는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그리스인 용병 부대를 새롭게 증원하여 병력을 확보하고, 키로폴리스 등 저항한 도시를 점령한 후 완전히 파괴하고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키는 방법으로 진압을 했다. 또한 스키타이에 대해서도 붕괴 공작이 이루어졌다. 또한 알렉산더 휘하의 장군들도 스피타메네스의 반란 진압에 대규모로 동원되게 되고, 이에 따라 스피타메네스의 활동 범위는 점차 축소되어 갔다.
그리고 기원전 328년 마케도니아의 장군 크라테로스와의 전투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당하며 스피타메네스의 세력은 크게 줄어들었다. 결정적인 시기는 기원전 328년 12월 가바이 전투에서 스피타메네스가 알렉산드로스의 장군 코이노스에게 패배하면서 찾아왔다. 알렉산더가 추격할 때마다 반복해서 도망쳤지만 결국에는 도망에 지친 아내에 의해 암살되었거나, 또는 아군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말도 있다. 어느 쪽이든 그의 목은 기원전 328년에 알렉산더에 바쳐졌다.
2. 3. 유목민과의 연합과 저항
기원전 331년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아케메네스 왕조의 다리우스 3세가 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패배한 후, 박트리아의 총독 베소스는 다리우스 3세를 암살하고 스스로 왕을 칭했다. 이때 스피타메네스는 베소스와 함께 알렉산드로스에 대항했으나, 베소스는 패배하고 박트리아에서 쫓겨났다. 스피타메네스는 베소스와 함께 소그디아나로 도주했고, 이후 동료 옥시알테스와 함께 베소스를 잡아 알렉산드로스에게 넘기고 항복했다.[4][5][6][7][8][9][10]알렉산드로스가 마라칸다(현 사마르칸트)를 점령하고 시르다리야 강 방면으로 진군하자, 기원전 329년 스피타메네스는 반란을 일으켰다. 알렉산드로스는 알렉산드리아 에스카테를 건설하고 스피타메네스 진압을 위해 파르누케스 장군을 보냈다. 스피타메네스는 마라칸다를 포위했으나 파르누케스 군이 오자 포위를 풀고, 추격해 온 파르누케스 군 보병 2,000명, 기병 300기를 전멸시켰다.[5][11] 알렉산드로스는 직접 마라칸다 탈환에 나섰지만, 스피타메네스는 소그디아나에서 기원전 328년에 박트리아를 공격했지만, 박트리아의 사트라프인 프리기아의 아르타바조스에게 격퇴당했다. 그 후 스피타메네스는 알렉산드로스와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고, 그의 도착 전에 마라칸다를 철수하고 행방을 감추었다.
스피타메네스는 스키타이인, 마사게타이인 등과 동맹을 맺고 소그디아나 각지 주민을 조직하여 마케도니아 수비대를 습격했다. 그는 추격군이 나타나면 즉시 철수하는 유목민 전술로 1년 이상 마케도니아 군을 교란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인 용병 부대를 증원하고, 키로폴리스 등 저항 도시를 파괴하고 주민을 강제 이주시키는 방법으로 진압했다. 또한 스키타이에 대한 와해 공작도 진행했다.
기원전 328년 마케도니아 장군 크라테로스와의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스피타메네스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장군 코이노스에게 가바이 전투에서 패배했다. 결국 스피타메네스는 도주에 지친 아내 또는 아군에게 암살당했고, 그의 머리는 알렉산드로스에게 바쳐졌다.[12][13]
2. 4. 최후
스피타메네스는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 소그디아나와 박트리아의 호족이었다. 기원전 331년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 3세가 이끄는 마케도니아 왕국 군에 의해 페르시아 군이 패배하자, 박트리아의 총독이었던 베소스는 다리우스 3세를 암살하고 스스로 왕을 칭했다.[4][5]스피타메네스는 베소스와 함께 알렉산드로스에 대항했지만, 베소스는 싱겁게 패배하고 박트리아에서 쫓겨났다. 스피타메네스도 그와 함께 소그디아나로 도주했고, 옥시알테스와 함께 베소스를 잡아 그의 신병을 알렉산드로스에게 인도하고 항복했다.[6]
기원전 329년, 스피타메네스는 반란을 일으켰다. 알렉산드로스는 파르누케스 장군에게 진압 명령을 내렸으나, 파르누케스 군은 보병 2,000명과 기병 300기를 잃고 전멸했다.[5][11] 알렉산드로스는 직접 마라칸다 탈환에 나섰지만, 스피타메네스는 기원전 328년에 박트리아를 공격했다가 박트리아의 사트라프인 프리기아의 아르타바조스에게 격퇴당했다. 스피타메네스는 스키타이인, 마사게타이인 등과 동맹을 맺고 마케도니아 군을 교란하는 전술을 펼쳤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인 용병 부대를 증원하고, 저항하는 도시들을 파괴하고 주민을 강제 이주시키는 방법으로 진압했다. 기원전 328년 마케도니아 장군 크라테로스와의 전투에서 스피타메네스의 세력은 크게 줄어들었다. 이후 스피타메네스는 328년 12월 가바이 전투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장군 코이노스에게 패배했다. 결국 스피타메네스는 아내 혹은 아군에게 암살당했고, 그의 머리는 알렉산드로스에게 바쳐졌다.
3. 가족 관계
스피타메네스는 딸 아파마를 두었다.[12][13] 아파마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가장 중요한 장군 중 한 명이자 디아도코이인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와 기원전 324년 2월에 결혼했다.[12][13] 이 부부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미래 통치자인 안티오코스 1세 소테르를 아들로 두었다.[12][13] 여러 도시가 그녀를 기리기 위해 아파메아로 이름 붙여졌다.
4. 평가 및 영향
4. 1. 대중문화
스티븐 프레스필드의 소설 The Afghan Campaign(아프가니스탄 전역)에서 스피타메네스는 중심 인물은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등장한다. 이 작품에서 스피타메네스는 타고난 군사 사령관으로서의 재능을 보여준다. 소설은 주로 스피타메네스에 의한 소그드인의 봉기가 진압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스피타메네스가 아내에 의해 목이 잘렸다는 묘사는 나오지 않으며, 동맹국인 마사게타이에게 붙잡힌 후 목이 잘린 채 평화를 요구하기 위해 알렉산드로스에게 넘겨졌다. 마사게타이는 알렉산드로스가 침공할 예정이었던 국가였다.참조
[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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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psychoanalytic history of the J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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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100 Most Influential Military Leaders of All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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