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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스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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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기스 4세는 기원전 244년 에우리폰 가문 출신으로 스파르타의 왕이 되었다. 그는 부의 불평등 심화와 스파르타 사회의 쇠퇴를 막기 위해 리쿠르고스의 제도를 부활하려는 개혁을 추진했다. 채무 면제와 토지 재분배를 시도했지만, 기득권층의 반대와 외삼촌 아게실라오스의 방해로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레오니다스 2세의 쿠데타로 처형되었지만, 그의 개혁 시도는 후대 스파르타 역사에 영향을 미쳤다.

2. 생애

아기스 4세는 친구 리산드로스, 맨드롭클레이다스, 외삼촌 아게실라오스의 지지를 받아 채무 감면 운동을 추진했다. 그러나 아게실라오스는 자신의 부채를 탕감받기 위해 이 운동에 찬성했다는 숨은 의도가 있었다. 아기스는 어머니 아게시스토라타에게 재정 지원을 요청했고, 아게실라오스와 함께 어머니를 설득했다.

레오니다스는 부유층의 편이었으며, 아기스가 독재를 노리고 빈민층의 비위를 맞추려 한다고 비방했다. 아기스는 리산드로스를 에포로스(선출 행정관) 중 한 명으로 선출되게 하고 장로회에 다음과 같은 법안을 제출했다.


  • 채무자들을 채무에서 해방한다.
  • 스파르타 영토를 크게 둘로 나누어, 4500개의 동일 필지로 구성된 하나를 스파르타의 존경받는 페리오이코이(비시민권 자유민)와 이방인에게 분배하고, 나머지 하나는 15,000개의 동일 필지로 나머지 페리오이코이에게 분배한다.
  • 예부터 내려온 200명 단위의 공동 식사를 재현한다.


처음에 장로회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리산드로스는 민회를 소집하여 아기스가 제안한 내용을 설명하고, 자신이 먼저 땅과 돈을 희생하겠다고 제안했다. 아기스도 자신의 재산을 제공하고, 어머니와 할머니도 동참하겠다고 약속했다. 민중은 300년 만에 스파르타에 걸맞은 진정한 왕이 나타났다고 환호했다. 레오니다스는 리쿠르고스가 부채 탕감을 인정했는지, 외국인에게 시민권을 주었는지 질문하며 방해하려 했다.

아기스는 리쿠르고스가 화폐 자체를 국가에서 추방했고, 외국인이 아니라 국풍에 악영향을 미친 것을 혐오한 것이라고 답했다. 민중은 아기스를 지지했지만, 장로회는 부자들의 설득으로 법안을 한 표 차이로 부결시켰다.

리산드로스는 레오니다스가 외국에서 자랐고 외국인 아내를 두었다는 이유로 탄핵했다. 그는 헤라클레스 후손은 외국 여자와 아들을 낳지 말아야 하며, 이국으로 이주한 자는 사형이라는 옛 법률을 제시했다.[2] 레오니다스는 아테네 신전으로 도망쳐 망명했고, 사위 클레옴브로토스 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아기스와 클레옴브로토스는 협력했고, 아게실라오스가 에포로스 후임으로 선임되었다. 아게실라오스는 레오니다스 암살을 시도했지만, 아기스가 저지하여 레오니다스는 테게아로 무사히 호송되었다.

아게실라오스는 빚은 탕감받고 재산은 처분하지 않으려는 속셈으로, 채무 감면과 토지 재분배를 동시에 하는 것은 힘드니 채무 감면을 먼저 하자고 아기스에게 제안했다. 아기스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차용증서를 광장에 모아 불태웠다.

2. 1. 가족 배경 및 즉위

기원전 245년경, 아기스 4세는 아버지 에우다미다스 2세의 뒤를 이어 약 20세의 나이로 스파르타 에우리폰 왕조의 왕위에 올랐다.[17] 그의 가문은 스파르타의 두 왕가 중 하나인 에우리폰티드 왕조였다.[3][4] 아기스 4세의 치세는 기원전 294년 아르키다모스 4세가 데메트리오스 폴리오르케테스에게 패배한 이후 기록에서 사라졌던 에우리폰티드 왕조의 재등장을 알린다.[3][4]

아기스 4세의 아버지 에우다미다스 2세는 모든 스파르타 왕들 중 가장 알려지지 않은 인물인데, 아마도 정신적 또는 신체적 장애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5] 어머니는 아게시스트라타였으며, 할머니는 아르키다미아였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이들은 스파르타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이었다.[8] 아기스 4세는 아르키다모스라는 남동생이 있었다.

2. 2. 개혁 추진

아기스 4세는 즉위 당시 스파르타가 직면한 국내적 위기에 주목했다. 부의 불평등 심화, 사치 풍조 만연, 빈곤층 증가 등의 문제는 스파르타 사회의 안정을 위협하고 있었다.[17] 아기스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리쿠르고스 체제로의 복귀를 주장하며 개혁을 추진했다.

아기스는 자신의 개혁안을 추진하기 위해 친구 리산드로스, 외삼촌 아게실라오스 등의 지지를 얻었다. 특히, 리산드로스는 에포로스(선출 행정관) 중 한 명으로 선출되어 아기스의 개혁을 도왔다. 아기스는 민회에서 자신의 재산을 먼저 내놓겠다고 연설하여 민중의 지지를 얻어냈다. 어머니와 할머니도 재산을 내놓겠다고 약속하며 힘을 보탰다.

그러나 공동 왕 레오니다스 2세는 부유층의 편에 서서 아기스의 개혁에 반대했다. 그는 아기스가 독재를 추구한다고 비난하며 장로회를 설득해 개혁안을 부결시켰다.[1]

아기스의 개혁안은 다음과 같다.[9][10][11][12]

  • 부채 탕감: 시민들이 시시티아에 기여하기 위해 졌던 빚을 탕감.
  • 토지 재분배: 스파르타 시민, 페리오이코이, 외국인에게까지 토지를 분배하여 총 4500개의 새로운 토지를 조성.
  • 아고게 부활: 스파르타의 엄격한 군사 교육을 부활.
  • 시시티아 부활: 공동 식사 제도를 부활.

2. 3. 반대와 좌절

레오니다스 2세는 부유층의 편이었으며, 아기스가 독재를 하려 한다고 비방했다. 그는 리쿠르고스가 부채 탕감을 인정하고 외국인에게 시민권을 줬는지 질문을 던지며 아기스를 압박했다.[2] 아기스는 리쿠르고스가 화폐 자체를 국가에서 추방했고, 외국인이 아니라 국풍에 악영향을 미친 것을 혐오한 것이라 답했다. 민중은 아기스를 지지했지만, 장로회는 부자들의 설득으로 법안을 한 표 차이로 부결시켰다.

레오니다스는 외국에서 자랐고 외국인 아내를 두었다는 이유로 탄핵당했다. 리산드로스는 헤라클레스 후손은 외국 여자와 아들을 낳지 말아야 하며, 이국으로 이주한 자는 사형이라는 옛 법률을 제시했다.[2] 레오니다스는 아테네 신전으로 도망쳐 망명했고, 사위 클레옴브로토스 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아기스와 클레옴브로토스는 협력했고, 아게실라오스가 에포로스 후임으로 선임되었다. 아게실라오스는 레오니다스 암살을 시도했지만, 아기스가 저지하여 레오니다스는 테게아로 무사히 호송되었다.

아게실라오스는 빚은 탕감받고 재산은 처분하지 않으려는 속셈으로, 채무 감면과 토지 재분배를 동시에 하는 것은 힘드니 채무 감면을 먼저 하자고 아기스에게 제안했다.[2] 아기스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차용증서를 광장에 모아 불태웠다.

얼마 후 리산드로스의 임기가 만료되었고, 다음 해 에포로스는 아기스에게 반대하며 레오니다스를 복귀시키려 했다. 그들은 리산드로스와 만드로클레이데스를 법 위반으로 고발했다. 이들은 국왕을 설득하여 무력으로 에포로스를 폐위시키고 다른 사람들을 임명했다.[2]

아게실라오스는 자신의 목표를 달성한 후 여러 구실을 만들어 토지 분할을 지연시켰다.[1] 한편, 아카이아 동맹아이톨리아 동맹에 대항하기 위해 스파르타에 지원을 요청했고, 아기스는 군대를 이끌고 파견되었다. 아기스가 부재한 동안, 아게실라오스는 토지 분할을 계속 미뤄 가난한 계층을 격분시켰고, 아기스의 적들은 레오니다스 2세를 다시 데려와 왕위에 앉혔다. 아기스와 클레옴브로토스는 각각 피난처로 도망쳤다.[1]

2. 4. 처형과 유산

스파르타의 왕 아기스 4세의 죽음 - 20세기 초 조각


기원전 241년, 아기스는 친구들에게 배신당해 감옥에 갇혔다.[13] 레오니다스 2세는 용병을 동원해 감옥을 장악했고, 에포르(행정관)들은 형식적인 재판을 거쳐 아기스에게 교살형을 선고했다. 아기스는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개혁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나를 위해 울지 마시오. 나는 부당하게 고통받고 있지만, 살인자들보다 더 행복한 처지에 있소."라고 말했다.[13] 그의 어머니 아게시스트라테와 할머니 아르키다메이아도 함께 처형되었다.[13] 아기스 4세는 에포르(행정관)에게 처형된 최초의 스파르타 왕이었다.[13]

아기스의 미망인 아기아티스는 레오니다스 2세에 의해 그의 아들 클레오메네스 3세에게 강제로 시집갔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게 호감과 존경심을 갖게 되었다.[14][15]

아기스의 삶과 죽음은 여러 고대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어 다양한 문학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그는 필라르쿠스의 전기(傳記)의 주제였으며, 이 전기는 플루타르코스가 아기스 4세에 대한 전기를 쓸 때 많은 참고가 되었다.[2]

3. 평가

아기스 4세는 부의 불평등 심화와 스파르타 사회의 쇠퇴를 막기 위해 개혁을 추진했지만, 기득권층의 반발과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그는 진정한 목적과 젊은 시절의 겸손함, 왕족의 위엄을 겸비하여 스파르타 역사 전체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로 여겨진다.[2] 일부 역사학자들은 그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너무 약하고 선량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아기스 4세의 개혁 시도는 훗날 클레오메네스 3세의 개혁으로 이어지는 등 스파르타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아기스는 처형인 중 한 명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나를 위해 울지 마시오. 나는 부당하게 고통받고 있지만, 살인자들보다 더 행복한 처지에 있소."라고 말했다.[13]

참조

[1] 서적 Dictionary of Greek and Roman Biography and Mythology Little, Brown and Company 2008-05-23
[2] 서적 Oxford Classical Dictionary Oxford University Press
[3] 문서 The Eurypontid House
[4] 서적 Hellenistic and Roman Sparta
[5] 문서 The Eurypontid House
[6] 문서 The Eurypontid House
[7] 문서 The Eurypontid House
[8] 서적 Hellenistic and Roman Sparta
[9] 서적 Hellenistic and Roman Sparta
[10] 서적 Hellenistic and Roman Sparta
[11] 서적 Hellenistic and Roman Sparta
[12] 서적 Hellenistic and Roman Sparta
[13] 서적 Description of Greece
[14] 서적 Agis, Cleomenes, Aratus
[15] 서적 Description of Greece
[16] 서적 Dictionary of Greek and Roman Biography and Mythology 리틀, 브라운 앤드 컴퍼니 2017-02-22
[17] 서적 Oxford Classical Dictionary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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