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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놀트 하우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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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놀트 하우저는 헝가리 출신의 미술사학자이자 예술사회학자이다. 부다페스트, 비엔나, 베를린, 파리에서 미술사와 문학을 공부했으며, 막스 드보르자크, 게오르크 지멜, 앙리 베르그송 등에게 사사했다.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하고,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피해 영국으로 망명하여 리즈 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그의 대표작인 《예술과 문학의 사회사》는 예술을 사회, 경제적 변화와 연관 지어 설명하며, 예술사회학 발전에 기여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바탕으로 예술을 분석했지만, 경제적 요인이 예술을 '결정'한다는 기계적인 해석은 경계했다. 그의 저작은 대한민국에도 번역되어 예술사회학 연구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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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헝가리의 대학 교수 - 한스 스바로프스키
    한스 스바로프스키는 헝가리 부다페스트 출신의 오스트리아 지휘자이자 교육자로, 빈 대학교에서 심리학과 역사학을 전공하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아르놀트 쇤베르크 등에게 음악을 배웠으며, 베를린 국립 오페라, 취리히 오페라 극장 등에서 지휘자로 활동했고 빈 국립 음악 대학교에서 수많은 유명 지휘자를 배출했으며, 저서 《모양을 지킨다》는 지휘 및 연출 분야의 중요한 참고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아르놀트 하우저
기본 정보
이름아르놀트 하우저
원어 이름Arnold Hauser
출생일1892년 5월 8일
출생지오스트리아-헝가리 티미쇼아라
사망일1978년 1월 28일
사망지헝가리 부다페스트
국적헝가리, 독일
직업미술 사학자, 사회학자
학력
활동
활동 분야문학, 미술사
직장리즈 대학교
가족

2. 생애

하우저는 부다페스트, 비엔나, 베를린, 파리에서 미술사와 문학을 공부했다. 그의 스승으로는 비엔나의 막스 드보르작(Max Dvořák), 베를린의 게오르크 지멜(Georg Simmel), 파리의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과 귀스타브 랑송(Gustave Lanson)이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2년 동안 이탈리아에서 이탈리아 미술을 연구했다. 1921년 베를린, 1924년 비엔나로 이주했다. 그는 “우리 시대가 가장 열정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미술과 문학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사회학적인 문제이다.”라고 결론지었다.[1]

베르나르트 알렉산더(Bernhard Alexander)는 하우저에게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와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에 대한 관심을 심어주었고, 이는 하우저가 연극과 영화를 더 큰 예술 세계의 일부로 체계적으로 연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2]

죄르지 루카치(György Lukács)를 만나 부다페스트의 일요모임(Sonntagskreis)에 참여하면서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였다. 1911년부터 1918년까지 부다페스트에서 체계적인 미학 창조 문제에 관한 박사 논문을 포함한 초기 저술들을 발표했는데, 이 논문은 1918년 ''아테네움(Athenaeum)''지에 실렸다. 이후 33년 동안 연구와 여행에 전념했다.[3]

1938년 나치와 헝가리 파시스트 십자당의 유대인 학살을 피해 영국으로 망명했다. 1951년부터 1957년까지 리즈 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막스 드보르자크와 게오르크 지멜에게 사사했고, 에른스트 트로엘치, 루카치 게르기, 만하임 카로이 등의 영향을 받았다. 예술사를 사회학, 역사학, 사상사 등과 종합적으로 연구했다. 1951년에 출간한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구석기 시대의 자연주의 이후 “평평하고, 상징적이며, 형식화되고, 추상적이며, 정신적 존재와 관련된” 예술이 사회가 계층적이고 권위주의적이기보다는 더욱 상업적이고 부르주아적이 됨에 따라 더욱 사실적이고 자연주의적으로 변해왔다고 주장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하우저는 1892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테메슈바르(Temesvár, 현 루마니아 티미쇼아라)에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1] 부다페스트, 비엔나, 베를린, 파리에서 미술사와 문학을 공부했다. 비엔나에서는 막스 드보르작(Max Dvořák)에게, 베를린에서는 게오르크 지멜(Georg Simmel)에게, 파리에서는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과 귀스타브 랑송(Gustave Lanson)에게 배웠다.[1]

베르나르트 알렉산더(Bernhard Alexander)는 하우저에게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와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였고, 이는 훗날 하우저가 연극과 영화를 더 큰 예술 세계의 일부로 체계적으로 연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2]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2년 동안 이탈리아에 머물면서 이탈리아 미술을 연구했다.[1] 1911년부터 1918년까지 부다페스트에서 체계적인 미학 창조 문제에 관한 박사 논문을 포함한 초기 저술들을 발표했는데, 이 논문은 1918년 ''아테네움(Athenaeum)''지에 실렸다.[3]

2. 2. 마르크스주의 수용과 망명

죄르지 루카치의 저술을 읽고 그를 만나 부다페스트의 일요모임(Sonntagskreis)에 참여하면서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였다.[3] 1938년 이후 나치와 헝가리 파시스트 십자당의 유대인 학살을 피해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2. 3. 영국에서의 활동과 학문적 성취

1938년 나치(Nazi)와 헝가리 파시스트 십자당(Arrow Cross Party)에 의한 유대인 학살을 피해 영국으로 이주한 후, 아르놀트 하우저는 영국에서 예술사회학 연구에 매진했다.[1] 1951년부터 1957년까지 리즈 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1951년, 대표작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출간하여 학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1] 이 책은 예술의 역사를 사회, 경제적 변화와 연관 지어 설명한 기념비적인 저작으로 평가받으며, 특히 진보 진영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하우저는 이 책에서 구석기 시대의 자연주의 이후 “평평하고, 상징적이며, 형식화되고, 추상적이며, 정신적 존재와 관련된” 예술이 사회가 계층적이고 권위주의적이기보다는 더욱 상업적이고 부르주아적이 됨에 따라 더욱 사실적이고 자연주의적으로 변해왔다고 주장했다.

이후 《예술사의 철학》(1958), 《매너리즘: 르네상스의 위기와 근대 예술의 기원》(1964), 《예술의 사회학》(1974) 등을 발표하며 예술사회학의 이론적 토대를 확립했다.[1]

3. 주요 사상과 이론

하우저는 죄르지 루카치(György Lukács)를 만나고 그의 저술을 읽었으며, 부다페스트에 있는 일요모임(Sonntagskreis)에 참여하면서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였다.[3] 그는 예술과 문학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사회학적인 문제라고 보았다.[1]

어니스트 곰브리히는 하우저의 마르크스주의적 접근 방식을 지나친 "사회적 결정론"이라고 비판했다.[4]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곰브리히가 하우저를 마르크스주의의 전형적인 대표자로 보았지만, 그의 미묘한 점과 가장 엄격한 형태의 사회적 결정론에 대한 그의 미묘한 비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5]

3. 1. 예술사회학

하우저는 예술을 사회적 산물로 보았다. 즉, 예술 작품의 형식과 내용은 특정 시대와 사회의 조건, 특히 지배 계급의 이해관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예술의 역사를 사회, 경제적 변화와 함께 분석하여, 각 시대별 예술 양식의 특징과 변화 과정을 설명했다. 특히, 《예술과 문학의 사회사》에서 구석기 시대부터 현대까지의 예술을 사회적 맥락에서 분석하여 큰 주목을 받았다.[1]

하우저는 죄르지 루카치(György Lukács)의 저술을 읽고 그를 만나 부다페스트의 일요모임(Sonntagskreis)에 참여하면서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였다.[3] 그의 마르크스주의적 접근 방식은 어니스트 곰브리히에 의해 지나친 "사회적 결정론"으로 비판받았다.[4] 곰브리히는 하우저의 이론이 "인문학"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고 비판했다.[4]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곰브리히가 하우저의 주장과 사회적 결정론에 대한 비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5]

3. 2. 마르크스주의적 관점과 비판

하우저는 죄르지 루카치(György Lukács)를 만나고 그의 저술을 읽었으며, 부다페스트에 있는 일요모임(Sonntagskreis)에 참여하면서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였다.[3] 그는 예술과 문학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사회학적인 문제라고 결론지었다.[1] 그의 4권으로 된 『미술의 사회사』(1951)에서는 구석기 시대의 자연주의 이후 “평평하고, 상징적이며, 형식화되고, 추상적이며, 정신적 존재와 관련된” 예술이 사회가 계층적이고 권위주의적이기보다는 더욱 상업적이고 부르주아적이 됨에 따라 더욱 사실적이고 자연주의적으로 변해왔다고 주장했다.

어니스트 곰브리히는 하우저의 마르크스주의적 접근 방식을 지나친 “사회적 결정론”이라고 비판했다.[4] 곰브리히는 『미술의 사회사』 서평에서 "하우저의 이론적 편견이 그의 공감 능력을 방해했을지도 모른다"라고 비판하며, "만약 우리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이 그들의 존재의 경제적, 사회적 환경에 의해 완전히 조건 지워진다면, 우리는 과거를 일반적인 공감으로 이해할 수 없다”라고 적었다.[4]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곰브리히가 하우저를 마르크스주의의 전형적인 대표자로 보았지만, 그의 미묘한 점과 가장 엄격한 형태의 사회적 결정론에 대한 그의 미묘한 비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5]

4. 저서


  • 1951년: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Sozialgeschichte der Kunst und Literatur)Sozialgeschichte der Kunst und Literatur|소치알게쉬히테 데어 쿤스트 운트 리테라투어de[1]
  • 1958년: 《예술사의 철학》(Philosophie der Kunstgeschichte)Philosophie der Kunstgeschichte|필로조피 데어 쿤스트게쉬히테de
  • 1964년: 《매너리즘: 르네상스의 위기와 근대 예술의 기원》(Der Manierismus. Die Krise der Renaissance und der Ursprung der modernen Kunst)Der Manierismus. Die Krise der Renaissance und der Ursprung der modernen Kunst|데어 마니에리스무스 디 크리제 데어 르네상스 운트 데어 우어슈프룽 데어 모데르넨 쿤스트de
  • 1974년: 《예술의 사회학》(Soziologie der Kunst)Soziologie der Kunst|소치올로기 데어 쿤스트de
  • 1978년: 《게오르크 루카치와의 대화》(Im Gespräch mit Georg Lukács)Im Gespräch mit Georg Lukács|임 게슈프레히 미트 게오르크 루카치de - 세 편의 인터뷰와 "게오르크 루카치에게서 본 tertium datur에 대한 변주곡" 에세이를 수록한 소품집

4. 1. 한국어 번역본


  • 高橋義孝일본어(다카하시 요시타카) 역, 『예술의 역사』 전3권, 平凡社일본어(헤이본샤), 1958년
  • * 개정판 『예술과 문학의 사회사』 전3권, 平凡社일본어(헤이본샤), 1968년
  • * 제3판 『예술의 역사: 미술과 문학의 사회사』 전3권, 平凡社일본어(헤이본샤), 1977년
  • 若桑みどり일본어(와쿠사 미도리) 역, 『마니에리스무 르네상스의 위기와 근대예술의 기원』 전3권, 이와사키미술사, 1970년, 개정판 1981년
  • 『르네상스 미술의 역사』今西雅章일본어(이마니시 마사아키)・金城盛紀일본어(킨죠 모리노리) 주석, 研究社일본어(겐큐샤), 1985년, 원문 텍스트(발췌본)
  •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백낙청, 반성완 역, 창비, 1979, 1999, 2016.
  • 《예술사의 철학》, 염무웅 외 역, 풀빛, 1985.

참조

[1] 논문 The young Arnold Hauser and the Sunday Circle - The publication of Hauser’s estate 2019
[2] 논문 "" 2019
[3] 논문 "" 2019
[4] 논문 The Social History of Art by Arnold Hauser 1953
[5] 논문 Gombrich’s Critique of Hauser’s Social History of Art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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