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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슈타 프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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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슈타 프라단은 마라타 제국의 통치자 시바지가 1674년 제정한 8명의 각료 제도로, 국가의 주요 행정 기능을 분담하여 수행하도록 설계되었다. 각료는 판트프라단(수상), 아마티야(재무장관), 슈루나비스/사체브(비서관), 와키아-나비스(내무장관), 사르-이-나우바트/세나파티(총사령관), 수만트/다비르(외무장관), 냐야디시(대법원장), 판디트라오(대제사장)로 구성되었다. 무굴 제국과의 갈등으로 인해 군사적 권한이 중요했으며, 시바지 사후 페슈와에게 권력이 집중되면서 아슈타 프라단의 역할은 점차 축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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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슈타 프라단

2. 구성

아슈타 프라단(Ashta Pradhan)은 각료에게 행정의 한 역할을 맡겨 국가의 모든 주요 행정 기능을 포괄하도록 설계되었으며, 각료의 직함은 산스크리트어에서 따왔다. 8개의 각료 직책은 다음과 같다.

1674년, 시바지는 마라타 왕국의 왕으로 즉위하면서 크샤트리아의 정치론에 따라 8명의 대신 제도를 제정했다.[3] 시바지의 사후, 손자 샤후 시대에 정치 권력은 페슈와의 손으로 넘어가 그 지위는 세습되었다.[4] 샤후가 죽자 바라지 바지 라오에 의해 왕국의 실권은 완전히 페슈와의 손으로 넘어갔다.[5]

무굴 제국과의 지속적인 갈등으로 군사 문제가 초기 국가 문제에서 매우 중요하게 작용했다. 따라서 사제인 "판디트라오"와 사법부인 "냐야디시"를 제외한 다른 "프라단"들은 전임 군사 지휘권을 가졌으며, 그들의 대리인이 민간 업무를 대신 수행했다. 마라타 제국 후기 시대에 이들 대리인과 그들의 직원이 페슈와 관료제의 핵심을 이루었다.

M. V. Dhurandhar의 시바지 대관식

2. 1. 주요 각료


  • 페슈와 - 총리에 해당하는 관직으로, 차트라파티(황제) 바로 아래의 최고 권력자였다. 모로판트 트림박 핑글레가 시바지가 임명한 첫 번째 페슈와였다.
  • 마줌다르 - 현대의 재무장관으로, 제국의 예산안을 심의하였다. 1662년에는 닐로 손데오가 마줌다르로 임명되었다. 1674년 대관식에서 무줌다르 직책은 람찬드라 판트 아마티야에게 수여되면서 아마티야로 개명되었다.
  • 사키브 - 차트라파티(황제)의 비서관으로, 황실 칙령을 반포하였다. 1662년 안나지 다토 사체브가 슈르나비스/사체브로 임명되었다.
  • 만트리 - 현대의 내무장관으로 정보와 간첩 행위를 총괄하였다.
  • 세나파티 - 현대의 국방장관으로, 군대를 조직하고 국경을 방위하는 일을 맡았다. 함비라오 모히테는 당시 가장 유명한 세나파티였다.
  • 수만트 - 현대의 외교장관으로, 타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조정하였다. 초대 다비르는 샤하지가 시바지 1세와 지자바이를 돕기 위해 보낸 소노판트 비슈와나트 다비르였다.
  • 냐야드햐크스 - 현대의 사법장관으로, 정의와 법에 관련된 일을 맡아보았다. 프랄하드 니라지의 아버지인 니라지 라바지가 냐야디시 직책을 받았다.
  • 판디트라오 - 최고 종교 지도자로, 내부의 종교적인 사안들을 다루었다. 라구나트 판디트라오가 "판디트라오" 직책을 받았다.


종교 문제를 다루는 판디트라오와 법적인 사안을 다루는 나야드햐크스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위원들은 모두 강력한 군사적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며 동시에 행정적으로도 상당한 권력을 누렸다.[2]

직위/직함직무 담당자임명 연도후임
판트프라단 / 페슈와(수상)모로판트 트림바크 핑글레1674년모레슈바르 핑갈레
아마티아 / 마줌다르(재무 장관)닐로 손데오1662년람찬드라 판트 아마티야
슈루나비스/사체브(비서)안나지 다토 사체브1662년라고 안나지
와키아-나비스(내무 장관)다토지 판트
사르-이-나우바트 / 세나파티(총사령관)함비라오 모히테1674년말라오지 고르파데
수만트 / 다비르(외무 장관)소노판트 트림바크판트 다비르트림바크판트 다비르
냐야디시(대법원장)니라지 라바지프랄하드 니라지
판디트라오(대사제)라구나트라오 판디트라오모레슈바르 라구나트


2. 2. 각료의 권한


  • 페슈와 : 총리에 해당하는 관직으로, 차트라파티(황제) 바로 아래의 최고 권력자였다. 모로판트 트림박 핑갈레가 시바지에 의해 임명된 첫 번째 페슈와였다.[2]
  • 마줌다르 : 현대의 재무장관으로, 제국의 예산안을 심의하였다. 1662년 닐로 손데오가 마줌다르로 임명되었다. 1674년 대관식에서 무줌다르 직책은 람찬드라 판트 아마티야에게만 수여되는 아마티야로 개명되었다.[2]
  • 사키브 : 차트라파티(황제)의 비서관으로, 황실 칙령을 반포하였다. 1662년 안나지 다토 사체브가 슈르나비스/사체브로 임명되었다.[2]
  • 만트리 : 현대의 내무장관으로 정보와 간첩 행위를 총괄하였다.
  • 세나파티 : 현대의 국방장관으로, 군대를 조직하고 국경을 방위하는 일을 맡았다. 네타지 팔카르가 초대 세나파티로 임명되었다. 가장 유명한 세나파티는 함비라오 모히테였다.
  • 수만트 : 현대의 외교장관으로, 타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조정하였다. 초대 다비르는 샤하지가 시바지 1세와 지자바이를 돕기 위해 보낸 소노판트 비슈와나트 다비르였다.
  • 냐야드햐크스 : 현대의 사법장관으로, 정의와 법에 관련된 일을 맡아보았다. 프랄하드 니라지의 아버지인 니라지 라바지가 냐야디시 직책을 받았다.
  • 판디트라오 : 최고 종교 지도자로, 내부의 종교적인 사안들을 다루었다. 라구나트 판디트라오가 "판디트라오" 직책을 받았다.


종교 문제를 다루는 판디트라오와 법적인 사안을 다루는 냐야드햐크스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위원들은 모두 강력한 군사적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며 동시에 행정적으로도 상당한 권력을 누렸다. 각료의 직함은 산스크리트어에서 따왔다.[3]

1674년 시바지는 마라타 왕국의 왕으로 즉위하면서 크샤트리아의 정치론에 따라 8명의 대신 제도를 제정했다. 시바지의 사후, 손자 샤후 시대에 정치 권력은 페슈와의 손으로 넘어가 그 지위는 세습되었다. 샤후가 죽자 바라지 바지 라오에 의해 왕국의 실권은 완전히 페슈와의 손으로 넘어갔다.[4][5]

직위/직함직무 담당자임명후임
판트프라단 / 페슈와(수상)모로판트 트림바크 핑글레1674년모레슈바르 핑갈레
아마티아 / 마줌다르(재무 장관)닐로 손데오1662년람찬드라 판트 아마티아
슈루나비스/사체브(비서)안나지 다토 사체브1662년라고 안나지
와키아-나비스(내무 장관)다토지 판트
사르-이-나우바트 / 세나파티(총사령관)함비라오 모히테1674년말라오지 고르파데
수만트 / 다비르 - (외무 장관)소노판트 트림바크판트 다비르트림바크판트 다비르
냐야디시(대법원장)니라지 라바지프랄하드 니라지
판디트라오(대사제)라구나트라오 판디트라오모레슈바르 라구나트


3. 시바지 시대

1674년, 시바지는 현재 인도 마하라슈트라 주에 있는 라이가드 요새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고, 신생 국가의 행정을 이끌 8명의 장관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공식화했다. 이 위원회는 '아슈타 프라단'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각 장관은 행정 부서를 담당했다. 이는 관료제의 시작을 알렸다.[3]

행정 체제의 공식화는 시바지의 대관식 때 시행된 주권 국가의 공식화를 나타내는 다른 조치들과 함께 이루어졌다. 그의 문장이 새겨진 화폐(구리 '시브라이'와 금 '혼')가 발행되었고, '라자비셰크 시대'라는 새로운 시대가 선포되었다.

시바지는 마라타 왕국의 왕으로 즉위하면서 크샤트리아의 정치론에 따라 8명의 대신 제도를 제정했다. 대신은 다음과 같다.

직위/직함직무 담당자임명후임
판트프라단 / 페슈와(수상)모로판트 트림바크 핑글레1674년모레슈바르 핑갈레
아마티아 / 마줌다르(재무 장관)닐로 손데오1662년람찬드라 판트 아마티아
슈루나비스/사체브(비서)안나지 다토 사체브1662년라고 안나지
와키아-나비스(내무 장관)다토지 판트
사르-이-나우바트 / 세나파티(총사령관)함비라오 모히테1674년말라오지 고르파데
수만트 / 다비르 (외무 장관)소노판트 트림바크판트 다비르트림바크판트 다비르
냐야디시(대법원장)니라지 라바지프랄하드 니라지
판디트라오(대사제)라구나트라오 판디트라오모레슈바르 라구나트


4. 시바지 사후

시바지 황제의 아들 삼바지(1680–89년 통치)는 의회의 권한을 축소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의회의 직위는 세습되었고, 명목상의 권한만 가진, 혹은 권한이 없는 궁정의 형식적인 직위가 되었다. 1714년부터 시바지의 손자 사후에 의해 임명된 재상이 점차 권력을 장악했다. 짧은 기간 안에, 마라타 국가의 실질적인 통제권은 그의 가족에게 넘어갔다. 이 세습 재상 가문은 "페슈와"라는 칭호를 유지했다. 그러나 아슈타 프라단 의회는 시바지 통치 마지막 10년 동안 수행했던 기능을 다시 채우기 위해 부활되지 않았다.[4] 샤후가 죽자 바라지 바지 라오에 의해 왕국의 실권은 완전히 페슈와의 손으로 넘어갔다.[5]

5. 아슈타 프라단과 유사한 직위

아슈타 프라단과 유사한 직위로는 치트니스, 굽타헤어, 파드나비스 등이 있다.

6. 기타


  • 아슈타 프라단은 비크라마디티야악바르 궁정의 나바라트나, 크리슈나 데바 라야 궁정의 아스타디그가자와 같이 다른 유명한 황제들의 궁정 배열과 다소 유사하다.
  • 락슈만 센 세나 제국의 통치자는 '판차라트나'를 가지고 있었다.
  • 아슈타 프라단은 구루 고빈드 싱이 칼사와 유사하게 국가에서 두 번째 지도자 계층을 개발하려는 시도로 해석될 수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Ashta Pradhan | Marathi council https://www.britanni[...]
[2] 웹사이트 KKHSOU http://www.kkhsou.in[...]
[3] 서적 世界歴史大系 南アジア史2―中世・近世―
[4] 서적 世界歴史大系 南アジア史2―中世・近世―
[5] 서적 世界歴史大系 南アジア史2―中世・近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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