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하치의 난
1. 개요
아카하치의 난은 1500년 류큐 왕국이 야에야마 제도의 호족 아카하치의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일으킨 군사적 충돌이다. 류큐 왕국은 야에야마가 조공을 중단하고 미야코를 공격하려 했다는 이유로 공격을 감행했다. 아카하치는 이시가키섬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류큐에 반기를 들었으며, 류큐 왕국은 3,000명 규모의 군대를 파견하여 아카하치를 제압하고 야에야마 제도를 완전히 복속했다. 이 사건 이후 류큐 왕국은 야에야마 제도에 직접 통치 체제를 확립하고, 지역 유력자들을 관리로 임명하여 중앙집권화를 강화했다. 아카하치는 야에야마 제도에서 지역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관련 전설과 민속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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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년 분쟁 -
케팔로니아 공성전
케팔로니아 공성전은 1500년 스페인-베네치아 연합군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케팔로니아 섬을 탈환하여 베네치아 공화국 영토로 만들고 아드리아 해와 동지중해 해상 무역로를 통제하는 데 기여한 전투이다. -
야에야마 제도의 역사 -
오야케 아카하치
오야케 아카하치는 15세기 말 류큐 왕국에 반기를 든 야에야마 제도의 호족으로, 이시가키 섬을 중심으로 독립을 시도했으나 류큐 왕국에 의해 진압되었으며, 류큐 왕국에서는 반역자로, 이시가키 섬에서는 영웅으로 여겨진다. -
야에야마 제도의 역사 -
나카마 미츠케이마
2. 배경
류큐왕조의 정사서에는 한자로 적봉정벌(赤蜂征伐)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공격의 이유로 야에야마에서 홍무 연간부터 조공국으로서 올려오던 공물을 2-3년간 끊었다는 점, 그리고 류큐의 신민인 미야코를 야에야마에서 공격하려 했다는 점, 이렇게 두 가지를 거론하고 있다. 그리고 사료들은 태평산(야에야마・미야코)의 조공이 끊긴 것은 오오하마의 아카하치가 모반했기 때문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아카하치 이전의 누가 중산왕부에 조공을 했는지는 불분명하며, 1500년 이전에 그러한 기록은 중산 측에도 태평산 측에도 없다.
미야코는 대대로 소라비(空広) 나카소네 투유먀의 일족이 통치해왔다. 『충도씨가보정통』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미야코 백성들은 싸움질을 좋아했다. 소라비는 생각했다. 이것은 쌀과 좁쌀이 풍족하기 때문이다. 주국(主国, 오키나와 중산)에 부세를 부탁하여 조공을 하자. 이리하여 명을 청하여 주국의 관리들이 주둔하게 되고, 여러 마을에 인두세를 정하였더니 농사를 게을리하지 않게 되었다. 이 때 소라비는 팔중산으로 향하여 팔중산의 추장을 타일러, 더불어 부용국의 직분을 지키고 매년 조공의 원수(員数)를 정하여 주국에 조공하고 신민으로서 충성을 다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오오하마의 아카하치 혼카와라가 동의하지 않고 오히려 미야코를 들이치려 하였으므로 주국에 호소하였다고 한다.
이 기록은 “홍무 연간부터 매년 조공하였다”는 류큐왕조 정사서 측 서술과 모순되며, 팔중산의 추장이란 누구라는 것인지도 불분명하다. 게다가 7대조 때부터 미야코를 통치해온 나카소네 투유먀가 갑자기 주민들이 호전적임을 한탄하고, 너무 풍요로워서 배가 부른 탓이라며, 그 해결책으로서 주권을 포기하고 상국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받는 것을 자처했다는 등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다. 그래서 이 기록들은 류큐 중산왕조 측에서 미야코를 정복한 이후 조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야에야마 측 사료들은 “아카하치 혼카와라라는 두 사람”이 있었다고 공통된 서술을 남기고 있다. 예컨대 『장영성가보대종』은 “혼카와라 및 아카하치라는 자 2인”이라고 명시하여 아카하치와 혼카와라가 다른 사람이라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미야코에서는 “카와라”라는 이름이 드물지 않은데, 예컨대 나카소네 투유먀의 조상 가운데 후사세이 투유먀의 별명이 “祢間津노 카와라”였다. 다만 이 경우 “카와라”란 수령의 칭호이고, “혼카와라”는 대추장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아카하치 혼카와라”는 두 사람의 명칭이 아니라 아카하치 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아무튼 야에야마 측 사료들은 섬의 모든 주민들이 아카하치를 중심으로 마음을 모았다는 점을 일관되게 기술하고 있다.
2.1. 류큐 왕국의 팽창과 야에야마 제도
15세기 류큐 왕국은 쇼신 왕(尚真王)의 통치 아래 중앙집권화를 추진하며 주변 섬들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류큐왕조의 정사서에는 야에야마가 홍무 연간부터 조공국으로서 올려오던 공물을 2~3년간 끊었고, 류큐의 신민인 미야코를 공격하려 했다는 점을 들어 야에야마를 공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아카하치 이전에 누가 중산왕부에 조공을 했는지는 불분명하며, 1500년 이전에는 그러한 기록이 중산 측에도 태평산(야에야마・미야코) 측에도 없다.
미야코는 대대로 소라비(空広) 나카소네 투유먀의 일족이 통치해왔다. 『충도씨가보정통』에 따르면, 소라비는 미야코 백성들이 호전적인 이유가 풍족함 때문이라 생각하여 인두세를 통해 이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는 팔중산(야에야마)의 추장을 설득하여 함께 부용국의 직분을 지키고 매년 조공하기로 하였으나, 오오하마의 아카하치 혼카와라가 동의하지 않고 오히려 미야코를 공격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기록은 “홍무 연간부터 매년 조공하였다”는 류큐왕조 정사서 측 서술과 모순되며, 팔중산의 추장이란 누구인지도 불분명하다.
야에야마 측 사료들은 “아카하치 혼카와라라는 두 사람”이 있었다고 공통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장영성가보대종』은 “혼카와라 및 아카하치라는 자 2인”이라고 명시하여 아카하치와 혼카와라가 다른 사람이라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다만 “혼카와라”는 대추장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아카하치 혼카와라”는 아카하치 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2.2. 오야케 아카하치의 등장과 저항
오야케 아카하치는 이시가키섬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류큐 왕국에 반기를 들었다. 류큐 왕국의 정사(正史)에서는 아카하치가 홍무 연간부터 이어져 오던 조공을 2~3년간 중단하고, 류큐의 신민인 미야코를 공격하려 했다는 점을 들어 공격의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은 류큐 측에서 미야코 정복 이후 조작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있다.
나카소네 도요미야친 (쿠우히로)는 충도씨 가계 정통에서 미야코 백성들이 싸움을 좋아하는 이유가 쌀과 조가 풍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주국(主国, 오키나와 중산)에 부세를 부탁하여 조공하고 인두세를 정하여 농사를 게을리하지 않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쿠우히로는 야에야마의 수장을 설득하여 함께 부용국의 직분을 지키고 매년 조공하기로 하였으나, 오하마의 아카하치 혼카와라가 동의하지 않고 오히려 미야코를 공격하려 했기 때문에 주국에 호소했다고 한다.
야에야마 측 사료에서는 아카하치 혼카와라라는 두 사람이 있었다고 공통적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장영성가보대종은 혼카와라와 아카하치가 다른 사람이라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미야코에서는 "카와라"라는 이름이 드물지 않지만, "혼카와라"는 대추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아카하치 혼카와라"는 아카하치 한 사람을 가리킨다는 의견도 있다.
야에야마 측 사료들은 섬의 모든 주민들이 아카하치를 중심으로 마음을 모았다는 점을 일관되게 기술하고 있다. 아카하치는 각지에 격문을 띄워 사람들을 모으고, 중산의 대병이 경계를 침범하고 있으니 맞서 싸우라고 명령했다. 거의 모든 도민이 아카하치에게 복종했으나, 이시가키촌의 나아타 우후슈를 포함한 5명은 복종하지 않고 살해당하거나 도망쳤다.
아카하치는 중산(오키나와 중심의 류큐왕조)과 자기들 태평산(야에야마) 사이에 경계가 있고 류큐가 그 경계를 침범하려 한다는 인식을 나타냈다. 류큐대학의 역사학자 코라 쿠라요시는 아카하치가 규정한 류큐의 "침범"은 류큐 측에 있어서는 "지방 통치의 강화"라는 견해를 밝혔다. 한편, 코라는 류큐가 사츠마번의 공격을 받은 류큐 침공에 대해서는 "침입, 침구, 침략"이라고 하는 이중잣대적 견해를 보이고 있다.
2.3. 미야코섬의 역할
3. 전투 경과
1500년 2월 2일, 쇼신 왕은 9명의 장수를 선발하여 군사 행동을 개시했다. 필두 장군 다자토 우에친 외에 9번대 대장 아하네 사토누시 나오하리 등이 이끌었던 군선은 크고 작은 100여 척, 병력은 3,000명 규모였다. 나하에서 출발한 류큐 군은 13일에 야에야마 이시가키섬에 도착했다.
미야코 출신 소라비 나카소네 투유먀가 류큐 선단을 이끌었는데, 이전에 아카하치의 "난"을 알린 것도 그였다. 류큐 군의 앞잡이 역할을 한 나아타 우후슈는 작은 배를 타고 이리오모테에서 나와 매우 기뻐했다고 전해진다.
19일, 류큐군은 지형을 살피기 위해 작은 배로 상륙했다. 아카하치 군의 진지는 앞이 넓은 바다였고 뒤는 험한 절벽이었으며, 그곳의 부녀자들은 초목 가지를 들고 하늘과 땅에 류큐 군을 저주했다. 아카하치는 직접 싸움을 걸어왔지만, 류큐군은 날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싸움을 피하고 물러났다.
다자토 우에친은 적의 예기를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고 판단, 20일, 46척의 배를 둘로 나누어 이시가키섬 서남해안선의 양 끝에 해당하는 토노시로와 아라카와를 동시에 공격하게 했다. 양면 공격에 아카하치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결국 류큐 군이 승리했다.
3.1. 류큐 왕국의 군사 행동
1500년 2월 2일, 쇼신 왕은 9명의 장수를 선발하여 군사 행동을 개시했다. 필두 장군 다자토 우에친 외에 9번대 대장 아하네 사토누시 나오하리 등이 이끌었던 군선은 크고 작은 100여 척, 병력은 3,000명 규모였다. 나하에서 출발한 류큐 군은 13일에 야에야마 이시가키섬에 도착했다.
미야코 출신 소라비 나카소네 투유먀가 류큐 선단을 이끌었는데, 이전에 아카하치의 "난"을 알린 것도 그였다. 류큐 군의 앞잡이 역할을 한 나아타 우후슈는 작은 배를 타고 이리오모테에서 나와 매우 기뻐했다고 전해진다.
19일, 류큐군은 지형을 살피기 위해 작은 배로 상륙했다. 아카하치 군의 진지는 앞이 넓은 바다였고 뒤는 험한 절벽이었으며, 그곳의 부녀자들은 초목 가지를 들고 하늘과 땅에 류큐 군을 저주했다. 아카하치는 직접 싸움을 걸어왔지만, 류큐군은 날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싸움을 피하고 물러났다.
다자토 우에친은 적의 예기를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고 판단, 20일, 46척의 배를 둘로 나누어 이시가키섬 서남해안선의 양 끝에 해당하는 토노시로와 아라카와를 동시에 공격하게 했다. 양면 공격에 아카하치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결국 류큐 군이 승리했다.
3.2. 아카하치의 저항과 패배
1500년, 중산의 쇼신 왕은 야에야마 제도의 호족 아카하치의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9명의 장수가 이끄는 류큐군은 군선 100여 척과 병력 3000 명으로 구성되었으며, 2월 2일 나하를 출발하여 13일에 야에야마 이사가키에 도착했다.
류큐군은 이시가키섬에 상륙하여 아카하치군과 대치했다. 아카하치군은 험한 절벽을 등지고 바다를 마주보는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 지역 분여자들은 류큐군을 저주하는 의식을 벌였다. 아카하치는 직접 군을 이끌고 류큐군에 맞섰으나, 류큐군은 20일, 토노시로와 아라카와를 동시에 공격하는 전략을 펼쳤다. 양면 공격에 아카하치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결국 류큐군이 승리했다.
4. 전투의 결과
1500년 오야케 아카하치의 난을 진압한 후, 류큐 왕국은 야에야마 제도를 완전히 복속하고 직접 통치 체제를 확립하였다.
쇼신왕은 소라비 나카소네 투유먀를 미야코두(宮古頭)에, 그의 2남 마치린가니(真列金)를 야에야마두에 임명했다. 그러나 『충도씨정통가보』와 『구양』 109호는 마치린가니의 야에야마수호 봉명(奉命)만을 인정하고, 쇼엔왕에게 조공을 온 소라비에게 “미야코지마주장(主長)”을 봉명했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미야코두직이 아카하치의 난 이전부터 일관되게 계속되었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가보』에 따르면, 마치린가니는 4년간 봉직한 뒤 3남 치리마라(知利真良)로 대체되었으며, 『구양』 162호는 마치린가니가 백성을 학대했기 때문에 퇴관(退官)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소라비 투유먀는 야에야마 평정을 경하하기 위해 보검 지가네마루 한 자루와 보주 한 개를 바쳤고, 중산왕부는 비녀 한 개와 백견의(白絹衣) 한 벌을 하사했다. 또한 소라비는 하리미즈 우타키에서 “역도를 추토할 수 있으면 우타키 주위에 돌담을 신축하겠습니다”라고 소원을 빌었기 때문에, 돌아가는 길에 그 공약을 실행했다.
나아타 우후슈는 코미슈이우후야코(古見大首里大屋子)로 발탁되었고, 이 직책은 나중에 이시가키야에야마두직(石垣八重山頭職)으로 개칭되어 야에야마의 두직의 시작이라고 한다. 다만, 이 기록과 앞서 마치린가니가 “야에야마두”로 봉직되었다는 기록 사이의 정합성은 불분명하며, 당시 “야에야마두”의 실체 또한 불분명하다.
나레이토우의 어린 아들 保利久思는 비로스쿠슈이우후야코(美良底首里大屋子)가 되었고, 나카마 미츠케이마의 유족 남자 여덟 명은 모두 슈이우후야코가 되었다. 시시카톤의 유족 남자 세 명은 여인(与人)이 되었고, 여자 세 명은 여두직(女頭職)이 되었다.
나아타 우후슈의 누이동생 쿠이츠바(古市)는 아카하치의 아내였기 때문에 남편과 함께 살해당했다. 다른 누이동생 마이츠바(真市)는 이라빈가니(永良比金)라는 신의 신인(神人)으로 임명되었고, 질녀 우나리(宇那利)는 오오아무직(大阿母職)에 임명되었다. 마이츠바가 조카에게 양보하여 우나리가 더 고위직에 임명되었다.
마이츠바가 봉작을 받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마이츠바는 류큐 관군에게 “이라빈가니의 신의 탁선(託宣)이 있었는데, 지금 배를 타면 속히 나하에 이를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관군은 신탁을 믿지 않고 “병선이 일제히 나라에 도착하면 포상하겠으나, 신탁이 틀려서 앞뒤로 제각각 나라에 이르는 일이 있으면 중죄로 삼고 용서치 않겠다”라고 대답했다. 마이츠바는 미사키산(美崎山)에서 밤낮으로 단식하며 기원했고, 배가 신의 가호로 일제히 오키나와로 귀국하자 왕이 마이츠바를 발탁하려 했으나, 마이츠바는 조카 우나리에게 양보했다. 왕은 마이츠바를 이라빈가니 신을 모시는 신인으로 삼고, 우나리에게 봉미 1섬 5되, 마이츠바에게 1섬을 하사했다. 이 기록은 당시 중산국 병사들이 신탁을 별로 믿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4.1. 야에야마 제도의 복속
1500년 오야케 아카하치의 난을 진압한 후, 류큐 왕국은 야에야마 제도를 완전히 복속하고 직접 통치 체제를 확립하였다.
쇼신왕은 소라비 나카소네 투유먀를 미야코두(宮古頭)에, 그의 2남 마치린가니(真列金)를 야에야마두에 임명했다. 그러나 『충도씨정통가보』와 『구양』 109호는 마치린가니의 야에야마수호 봉명(奉命)만을 인정하고, 쇼엔왕에게 조공을 온 소라비에게 “미야코지마주장(主長)”을 봉명했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미야코두직이 아카하치의 난 이전부터 일관되게 계속되었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가보』에 따르면, 마치린가니는 4년간 봉직한 뒤 3남 치리마라(知利真良)로 대체되었으며, 『구양』 162호는 마치린가니가 백성을 학대했기 때문에 퇴관(退官)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소라비 투유먀는 야에야마 평정을 경하하기 위해 보검 지가네마루 한 자루와 보주 한 개를 바쳤고, 중산왕부는 비녀 한 개와 백견의(白絹衣) 한 벌을 하사했다. 또한 소라비는 하리미즈 우타키에서 “역도를 추토할 수 있으면 우타키 주위에 돌담을 신축하겠습니다”라고 소원을 빌었기 때문에, 돌아가는 길에 그 공약을 실행했다.
나아타 우후슈는 코미슈이우후야코(古見大首里大屋子)로 발탁되었고, 이 직책은 나중에 이시가키야에야마두직(石垣八重山頭職)으로 개칭되어 야에야마의 두직의 시작이라고 한다. 다만, 이 기록과 앞서 마치린가니가 “야에야마두”로 봉직되었다는 기록 사이의 정합성은 불분명하며, 당시 “야에야마두”의 실체 또한 불분명하다.
나레이토우의 어린 아들 保利久思는 비로스쿠슈이우후야코(美良底首里大屋子)가 되었고, 나카마 미츠케이마의 유족 남자 여덟 명은 모두 슈이우후야코가 되었다. 시시카톤의 유족 남자 세 명은 여인(与人)이 되었고, 여자 세 명은 여두직(女頭職)이 되었다.
나아타 우후슈의 누이동생 쿠이츠바(古市)는 아카하치의 아내였기 때문에 남편과 함께 살해당했다. 다른 누이동생 마이츠바(真市)는 이라빈가니(永良比金)라는 신의 신인(神人)으로 임명되었고, 질녀 우나리(宇那利)는 오오아무직(大阿母職)에 임명되었다. 마이츠바가 조카에게 양보하여 우나리가 더 고위직에 임명되었다.
마이츠바가 봉작을 받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마이츠바는 류큐 관군에게 “이라빈가니의 신의 탁선(託宣)이 있었는데, 지금 배를 타면 속히 나하에 이를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관군은 신탁을 믿지 않고 “병선이 일제히 나라에 도착하면 포상하겠으나, 신탁이 틀려서 앞뒤로 제각각 나라에 이르는 일이 있으면 중죄로 삼고 용서치 않겠다”라고 대답했다. 마이츠바는 미사키산(美崎山)에서 밤낮으로 단식하며 기원했고, 배가 신의 가호로 일제히 오키나와로 귀국하자 왕이 마이츠바를 발탁하려 했으나, 마이츠바는 조카 우나리에게 양보했다. 왕은 마이츠바를 이라빈가니 신을 모시는 신인으로 삼고, 우나리에게 봉미 1섬 5되, 마이츠바에게 1섬을 하사했다. 이 기록은 당시 중산국 병사들이 신탁을 별로 믿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4.2. 류큐 왕국의 중앙집권화 강화
『구양』 162호에 따르면, 류큐왕조는 소라비 나카소네 투유먀를 미야코두(宮古頭)에, 2남 마치린가니(真列金)를 야에야마두에 임명했다. 다만 『충도씨정통가보』, 『구양』 109호는 아카하치의 난의 전후처리로서 이루어진 봉작은 마치린가니의 야에야마수호 봉명(奉命)만을 인정하고 있다. 『가보』에 따르면, 마치린가니는 4년간 봉직한 뒤 3남 치리마라(知利真良)로 대체되었으며, 『구양』 162호는 마칠린가니가 백성을 학대했기 때문에 퇴관(退官)시켰다고 서술하고 있다.
나아타 우후슈는 코미슈이우후야코(古見大首里大屋子)로 발탁되었으며, 이 직책은 나중에 이시가키야에야마두직(石垣八重山頭職)이 되었고, 이것이 야에야마의 두직의 시작이라고 한다. 나레이토우의 어린 아들 保利久思는 비로스쿠슈이우후야코(美良底首里大屋子)가 되었다.
나아타 우후슈의 누이동생 마이츠바(真市)는 이라빈가니(永良比金)라는 신의 신인(神人)으로 임명되었다. 마이츠바가 류큐 관군에게 신탁을 전했으나 관군은 믿지 않았고, 마이츠바는 미사키산(美崎山)에서 단식하며 기원하여 배가 무사히 오키나와로 귀국하게 되었다. 왕은 마이츠바를 오오아무로 삼으려 했으나, 마이츠바는 조카 우나리에게 양보했다. 그래서 왕은 마이츠바를 이라빈가니 신을 모시는 신인으로 삼았다.
4.3. 지역 사회의 변화
류큐 왕국은 아카하치의 난 이후 야에야마 제도에 새로운 통치 기구를 설치하고, 지역 유력자들을 관리로 임명하여 지배 체제를 강화했다. 소라비 나카소네 투유먀는 미야코두(宮古頭)에 임명되었고, 그의 둘째 아들 마치린가니(真列金)는 야에야마두(八重山頭)에 임명되었다. 다만, 『충도씨정통가보』와 『구양』 109호는 마치린가니의 야에야마수호 임명만을 인정하고, 쇼신왕 대의 미야코두 임명은 인정하지 않는다. 『가보』에 따르면, 마치린가니는 4년간 봉직한 뒤 셋째 아들 치리마라(知利真良)로 교체되었다. 『구양』 162호는 마치린가니가 백성을 학대했기 때문에 퇴관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소라비 투유먀는 야에야마 평정을 축하하기 위해 쇼엔왕에게 조공을 바치고, 보검 지가네마루와 보주를 헌상했다. 이에 쇼엔왕은 비녀와 백견의(白絹衣)를 하사했다. 또한 소라비는 하리미즈 우타키에 “역도를 추토할 수 있으면 우타키 주위에 돌담을 신축하겠습니다”라고 소원을 빌었고, 돌아가는 길에 이를 실행했다.
나아타 우후슈는 코미슈이우후야코(古見大首里大屋子)로 발탁되었으며, 이 직책은 나중에 이시가키야에야마두직(石垣八重山頭職)으로 개칭되었다. 이것이 야에야마 두직의 시작이라고 한다. 나레이토우의 어린 아들 保利久思는 비로스쿠슈이우후야코(美良底首里大屋子)가 되었다. 나카마 미츠케이마의 유족 여덟 명은 모두 슈이우후야코가 되었고, 시시카톤의 유족 세 명은 여인(与人)이, 여자 세 명은 여두직(女頭職)이 되었다.
나아타 우후슈의 누이동생 쿠이츠바(古市)는 아카하치의 아내였기 때문에 남편과 함께 살해당했다. 다른 누이동생 마이츠바(真市)는 이라빈가니(永良比金) 신의 신인(神人)으로 임명되었고, 질녀 우나리(宇那利)는 오오아무직(大阿母職)에 임명되었다. 마이츠바가 조카에게 오오아무직을 양보했기 때문에, 왕은 마이츠바를 이라빈가니 신을 모시는 신인으로 삼았다.
마이츠바는 류큐 관군에게 “이라빈가니 신의 신탁이 있었는데, 지금 배를 타면 속히 나하에 이를 것입니다”라고 전했다. 그러나 관군은 신탁을 믿지 않았고, 마이츠바는 미사키산(美崎山)에서 단식하며 기원했다. 이후 배가 무사히 오키나와로 귀국하자, 왕은 마이츠바의 공을 인정하여 신인으로 임명했다. 이러한 기록은 당시 중산국 병사들이 신탁을 크게 신뢰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5. 역사적 의의 및 평가
5.1. 류큐 왕국 팽창 정책의 반영
5.2. 중앙집권화와 지역 세력의 갈등
5.3. 다양한 역사적 관점
류큐 왕국의 정사에는 이 사건이 한자로 '적봉정벌(赤蜂征伐)'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공격 이유로 야에야마가 홍무 연간부터 조공을 2-3년간 중단했다는 점과 류큐의 신민인 미야코를 공격하려 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사료들은 오오하마의 아카하치가 모반했기 때문에 미야코와 야에야마의 조공이 끊겼다고 서술하지만, 아카하치 이전에 누가 조공을 했는지는 불분명하며, 1500년 이전에는 그러한 기록이 양측 모두에게 없다.
충도씨가보정통에 따르면, 미야코는 대대로 소라비(空広) 나카소네 투유먀의 일족이 통치해왔으며, 미야코 백성들이 싸움을 좋아하여 소라비가 쌀과 좁쌀이 풍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주국(主国, 오키나와 중산)에 부세를 부탁하고 조공하여 명을 청하여 주국의 관리들이 주둔하게 되고, 여러 마을에 인두세를 정하였다고 한다. 소라비는 야에야마의 추장을 설득하여 함께 부용국의 직분을 지키고 매년 조공하기로 하였으나, 오오하마의 아카하치 혼카와라가 동의하지 않고 오히려 미야코를 공격하려 하여 주국에 호소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기록은 "홍무 연간부터 매년 조공하였다"는 류큐 왕조 정사의 서술과 모순되며, 야에야마의 추장이 누구인지도 불분명하다. 또한, 7대조 때부터 미야코를 통치해온 나카소네 투유먀가 갑자기 주민들이 호전적임을 한탄하고, 너무 풍요로워서 배가 부른 탓이라며, 그 해결책으로 주권을 포기하고 상국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받는 것을 자처했다는 것은 부자연스럽기 때문에 류큐 중산 왕조 측에서 미야코를 정복한 이후 조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야에야마 측 사료들은 "아카하치 혼카와라라는 두 사람"이 있었다고 공통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장영성가보대종은 "혼카와라 및 아카하치라는 자 2인"이라고 명시하여 아카하치와 혼카와라가 다른 사람이라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미야코에서는 "카와라"라는 이름이 드물지 않은데, 나카소네 투유먀의 조상 가운데 후사세이 투유먀의 별명이 "祢間津노 카와라"였다. 다만 "카와라"란 수령의 칭호이고, "혼카와라"는 대추장을 의미하는 것으로 "아카하치 혼카와라"는 두 사람의 명칭이 아니라 아카하치 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야에야마 측 사료들은 섬의 모든 주민들이 아카하치를 중심으로 마음을 모았다는 점을 일관되게 기술하고 있다.
6. 전설과 민속
오야케 아카하치는 류큐군에 맞서 싸운 용맹함으로 인해 야에야마 제도에서 지역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그와 관련된 전설과 민속이 현재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시가키 섬에는 이리키야아마리 신을 모시는 우타키가 남아있으며, 고하마 섬에는 전투에서 패한 아카하치가 도망쳤다는 전설이 있는 오야케 아카하치의 숲이 있다.
한편, 이 전투에서 공을 세운 키미나파 노로는 나카야마로부터 오아모(일 지역의 최고위 노로)에 필적하는 등급과 구메지마 노로의 최고위 지위를 받고, 곡옥을 하사받아 "오모로사우시"에도 노래되는 영웅이 되었다. 이시가키의 신녀 마이츠바(나가타 오야누시의 누이)는 류큐군의 안전한 귀환을 위한 신탁을 내려 류큐로부터 금비녀와 야에야마 최초의 오아모직을 포상으로 받았으나, 이를 고사하고 대신 이라빈가미 신직을 받았다. 그녀가 류큐군의 무사 귀환을 빌었던 곳은 미사키 우타키가 되었고, 그녀의 묘지에는 마이츠바 우타키가 만들어져 현재도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시가키 섬으로 원정한 장군 오자토 오야카타는 타케토미 섬의 니시토를 슈리로 데려갔다. 니시토는 소노햬안 우타키의 석문을 건축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야에야마를 통치하는 신분으로 타케토미 섬으로 돌아가 야에야마 지방의 쿠라모토를 두었다. 타케토미 섬에는 소노햬안 우타키의 신을 권청하여 쿠니나카 우타키(휘나-온)를 조성했고, 이는 야에야마에서 유일하게 류큐 왕부의 신과 연결되는 우타키이다. 그의 사후, 타케토미 섬의 묘지에는 니시토 우타키가 놓여 그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