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안티오키아의 마리아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안티오키아의 마리아는 안티오키아의 콘스탄스와 푸아티에의 레이몽의 딸로, 비잔티움 황제 마누엘 1세의 황후이자, 아들 알렉시우스 2세 콤네노스를 위한 섭정이었다. 1161년 마누엘 1세와 결혼하여 비잔티움 제국과 안티오키아의 관계를 강화했다. 마누엘 1세 사후, 섭정으로 아들을 보필했으나, 정치적 갈등과 반대에 직면했다. 결국 안드로니코스 1세에 의해 체포되어 살해되었으며, 그녀의 죽음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182년 사망 - 발데마르 1세
    발데마르 1세는 1157년부터 1182년까지 덴마크를 통치한 왕으로, 내전을 극복하고 덴마크를 재건하며 영토를 확장하고 내정을 안정시켰다.
  • 1182년 사망 - 후지와라노 아쓰요리
    후지와라노 아쓰요리는 1090년에 태어나 1179년경에 사망한 헤이안 시대 말기의 귀족이자 가인으로, 좌마두를 지냈으며, 칙찬 와카슈에 시가 수록되고 오구라 백인일수에도 시가 실려 있다.
  • 안타키아 출신 - 월터 시드니 애덤스
    월터 시드니 애덤스는 별의 스펙트럼 연구에 기여하고 마운트 윌슨 천문대 대장을 지낸 미국의 천문학자로, 별의 절대 등급과 스펙트럼 선의 관계를 밝히고 거성과 왜성을 구별하는 방법을 제시했으며, 시리우스 B 연구로 백색 왜성의 존재를 확인하고 금성 대기의 이산화 탄소를 발견하는 데 기여하여 그의 업적을 기려 소행성과 화성 분화구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다.
  • 안타키아 출신 - 괴크한 잔
    괴크한 잔은 터키의 전직 축구 선수로, 중앙 수비수로 활약하며 하타이스포르, 베식타시 JK, 갈라타사라이 SK 등에서 뛰었고 튀르키예 축구 국가대표팀으로도 활약했으며, 2008년 UEFA 유로 2008에서 튀르키예 대표팀의 4강 진출에 기여했고 터키 쉬페르리그, 터키 컵, 터키 슈퍼컵 등에서 우승했으며, 차나칼레 해협 방어전에 참전한 군인으로서의 이력도 가지고 있다.
  • 1145년 출생 - 마쓰도노 모토후사
    마쓰도노 모토후사는 헤이안 시대 말기의 구교로, 섭정과 관백을 역임했으나 정치적 대립으로 부침을 겪었고 유식고실에 능통하여 후대 섭관가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145년 출생 - 쇼시 내친왕 (1145년)
    쇼시 내친왕은 토바인과 카스가노츠보네 사이에서 태어나 타카쿠라 천황의 카모 사이인으로 점정되었으나 사임하고, 렌게죠인을 창건하여 죠에 법친왕을 유자로 삼았으며, 다이고제에서 살다가 사망했다.
안티오키아의 마리아
기본 정보
엠프리스 마리아의 원고 세밀화 (
엠프리스 마리아의 원고 세밀화 ("바티칸 도서관")
칭호동로마 황후 배우자
재위 기간1161년 12월 24일 - 1180년 9월 24일
배우자마누엘 1세 콤네노스
자녀알렉시우스 2세 콤네노스
가문푸아티에 가문
아버지레몽 드 푸아티에
어머니콘스탄스 (안티오키아 여공)
출생일1145년
출생지안티오키아 (현재 튀르키예하타이 주안타키아)
사망일1182년 (36–37세)
이름
프랑스어Marie

2. 초기 생애

안티오키아의 마리아는 안티오키아의 콘스탄스와 푸아티에의 레이몽의 딸이었다.[1] 1160년, 마리아의 계부 샤티용의 레날드가 알레포의 통치자에게 포로로 잡혔다. 콘스탄스는 안티오키아 공국 통치권을 주장했으나, 귀족들은 마리아의 남동생 안티오키아의 보에몽 3세를 지지했다.[1] 예루살렘의 발두인 3세는 보에몽 3세를 공작으로 세우고, 리모주의 아메리를 섭정으로 임명했다.[1] 콘스탄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이 결정에 항의했다.[1]

3. 비잔티움 황후

1159년 말, 마누엘 1세의 첫 황후 이레네가 사망하자, 마누엘 1세는 십자군 국가 출신의 새 황후를 원했다. 요안니스 키나모스에 따르면 마리아가 더 아름다웠다고 하며, 키가 크고 금발이었던 마리아는 노르만족 혈통을 드러냈다. 마누엘 1세는 마리아를 선택했고, 이에 모욕감을 느낀 트리폴리의 레몽 3세는 보복으로 비잔티움 제국의 키프로스를 공격했다.

1161년 12월 24일 하기아 소피아에서 마누엘 1세와 마리아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루카스 크리소베르게스, 알렉산드리아의 그리스 총대주교 소프로니우스, 안티오키아의 그리스 총대주교 아타나시오스 1세가 결혼식을 집전했다. 결혼식은 교회에 대한 연회와 선물, 그리고 히포드롬에서의 전차 경주로 축하되었다. 이 결혼은 안티오키아와 비잔티움 제국의 관계를 강화했다. 니케타스 코니아테스는 마리아를 아프로디테, 헤라, 트로이의 헬레네 등에 비유하며 그녀의 뛰어난 미모를 칭송했다.

마누엘 1세 콤네노스와 함께 있는 안티오키아의 마리아의 필사본 미니어처, 바티칸 도서관, 로마

3. 1. 제국 내 영향력

4. 섭정

1180년 마누엘 1세가 사망하자 마리아는 "제네"()라는 이름으로 수녀가 되었으나, 아들 알렉시우스 2세 콤네노스를 위해 섭정을 맡았다.[2] 마리아는 마누엘 1세의 친척 알렉시우스 콤네노스 (프로토세바스토스)를 프로토세바스토스이자 프로토베스티아리오스로 선택하여 조언자이자 연인으로 삼아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스캔들을 일으켰다.[2] 서방인이었던 마리아는 이탈리아 상인들을 선호하여 그리스인들의 반대에 직면했고, 그녀의 섭정은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2]

반대 세력의 지도자는 마리아의 의붓딸인 마리아 콤네네와 그녀의 남편 몽페라토의 레니에르였다.[2] 자색 태생 마리아는 자신이 정당한 계승자라고 생각했으며, 마리아와 레니에르는 테오도시우스 1세 총대주교의 지지를 얻어 하기아 소피아를 작전 기지로 삼았다.[2] 알렉시우스는 총대주교를 체포했고, 이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거리에서 공개적인 전쟁으로 이어졌다.[2]

4. 1. 반발과 몰락

5. 죽음

안드로니코스 1세는 마리아 콤네네와 레니에르를 독살하고, 황후 마리아를 체포하여 성 디오메데스 수도원 또는 인근 감옥에 수감했다.[4] 마리아는 헝가리의 벨라 3세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실패했다.[4] 안드로니코스는 알렉시오스 2세에게 어머니의 처형 명령에 서명하게 했고, 콘스탄티노스 트리프시코스와 환관 프테리게오니테스가 마리아를 목 졸라 살해했다.[4] 시신은 해변에 암매장되었다.[4]

그녀의 죽음을 둘러싼 비밀 때문에, 자루에 묶여 익사했다는 다른 버전의 이야기가 유포되기도 했다.[5] 안드로니코스 1세는 알렉시오스 2세마저 살해하고 황제가 된 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마리아의 초상들을 훼손하거나 파괴했다.

6. 사후

안티오키아의 마리아에 대한 평가는 시대와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안드로니코스 1세는 마리아의 초상을 뜯어내거나 파괴하도록 명령했다.

7. 가계

참조

[1] 백과사전 Maria of Antioch Oxford
[2] 웹사이트 Maria of Antioch, Byzantine Empress http://www.roman-emp[...] 2015-03-25
[3] 서적 Histories
[4] 서적 Histories
[5] 기록 Annals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