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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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렉산더 헤어는 1775년 런던에서 태어난 상인으로, 동인도 회사와 연관되어 활동했다. 그는 보르네오 섬 반자르마신에서 영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으며, 1812년부터 1818년까지 이 지역에서 토지를 얻어 독립적인 정치체를 건설하려 했다. 그러나 네덜란드와의 갈등으로 인해 영지를 상실하고, 1826년 코코스 제도에서 코코야자 플랜테이션을 경영했으나, 존 클루니에스 로스와의 갈등으로 1831년 정착지를 떠났다. 1834년 자바 섬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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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렉산더 헤어 - [인물]에 관한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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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초기 생애 및 경력
알렉산더 헤어는 1775년 런던에서 시계 제작자인 아버지와 재닛 사이에서 태어났다.[5] 다만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에게는 적어도 세 명의 남동생이 있었으며, 훗날 둘째와 셋째 동생은 런던에서 '헤어 상회'를 운영하며 수마트라 섬과 후추 무역을 했고, 넷째 동생은 바타비아에서 보석상을 운영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1800년경, 헤어는 포르투갈의 한 무역 회사에 입사하며 경력을 시작했다.[5] 이후 인도의 상회에서 근무하며 동인도 여러 지역과 교역했으며, 이 과정에서 노예 무역에도 관여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그는 캘커타를 거쳐 1807년 말라카에 상인으로 정착하여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6] 말라카에서 1807년과 1808년 사이, 페낭에서 병가로 머물던 영국 동인도 회사의 스탬퍼드 래플스와 처음 만나 친구 관계를 맺었다.[7]
2. 1. 동인도 회사와의 관계
헤어는 캘커타를 거쳐 1807년 말라카에서 상인으로 자리 잡았다. 그는 보르네오 섬 남부 해안의 반자르마신과 교역했는데, 이곳에는 원래 네덜란드 무역 거점이 있었으나 1809년 영국 해군의 공격으로 철수된 상태였다. 반자르마신의 술탄은 네덜란드를 대신할 세력을 찾고 있었고, 헤어에게 영국 무역 거점 설립을 요청하며 좋은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헤어는 신중하게 접근했고, 영국 동인도 회사(EIC)의 떠오르는 인물이었던 스탬퍼드 래플스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6] 헤어는 래플스가 페낭에서 병가를 얻어 1807년과 1808년 말라카에 머물렀을 때 처음 만났다.[7]이후 네덜란드가 지배하던 동인도 지역이 잠시 영국(1811–16)과 EIC의 통치 아래 놓이게 되자, 새로 자바 부총독으로 임명된 래플스는 헤어의 요청을 받아들여 그를 반자르마신 이사관(Resident)이자 보르네오 섬의 위원(Commissioner)으로 임명했다. 헤어는 래플스와의 친분 관계를 통해 이러한 직위를 얻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보르네오 섬 전체에 대한 지도권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는 당시 영국 식민지 관료들이 보르네오 섬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3. 반자르마신에서의 활동 (1812년 ~ 1818년)
1812년 반자르마신에 도착한 알렉산더 헤어는 동인도 회사를 대신하여 현지 술탄과 조약을 맺고, 개인적으로 바리토 강 하구부터 탄종 셀라탄까지 이어지는 약 3625.97km2의 광대한 토지를 얻었다.[6] 비록 회사 규정에는 어긋났지만, 토마스 래플스는 헤어가 영국의 영향력 확대에 기여할 것을 기대하며 이를 묵인했다.[7] 헤어는 이 땅을 '말루카'라 이름 짓고 자체 통화와 국기를 사용하는 등 독자적인 영지로 만들려 시도했다.[6] 그는 영지 개발을 위해 1813년 존 클루니에스 로스를 고용하여 관리를 맡겼다.[6][7]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 이후 체결된 1814년 영국-네덜란드 조약은 헤어의 계획에 큰 변수가 되었다.[8] 네덜란드가 반자르마신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면서 헤어와의 갈등이 불거졌고, 네덜란드 측은 헤어가 영국 세력 확장을 위한 거점으로 영지를 이용하려 한다고 의심했다.[7] 결국 1818년 7월, 네덜란드는 헤어가 영지에 대한 법적 권리가 없다고 주장하며 무력을 동원하여 영지를 장악했다.[7] 한편, 헤어의 영지 경영 방식은 동인도 회사 내부에서도 조사를 받는 등 논란을 낳기도 했다.[6][7][9]
3. 1. 영지 경영과 노예제 논란
1812년 반자르마신에 도착한 헤어는 동인도 회사를 대신하여 술탄과 협상하여 바리토 강 어귀에서 탄종 셀라탄까지 해안을 따라 내륙으로 이어지는 약 3625.97km2의 광대한 토지를 개인적으로 얻었다.[6] 이는 회사 정책에 어긋났지만, 래플스는 헤어가 영국의 영향력 확대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여 묵인했다.[7] 헤어는 이 영지를 '말루카'로 명명하고, 자체 통화와 국기를 사용하는 등 독립적인 정치체로 만들고자 했다.[6] 그는 영지에 거의 머무르지 않았기에, 1813년 존 클루니에스 로스를 고용하여 쌀, 설탕, 커피, 후추 재배를 위한 토지 개간, 무역선 건조, 소금 공장 및 방어 시설 건설 등 영지 개발을 맡겼다.[6][7]그러나 영지 개발에는 심각한 노동력 부족 문제가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헤어는 1812년 래플스에게 자바의 죄수들을 형벌의 일환으로 반자르마신으로 이송하고, 빈곤한 사람들의 이주를 장려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주민에게는 지원이 제공되었고, 원할 경우 가족을 동반할 수 있었다.[6][7]
하지만 헤어의 영지 경영 방식은 곧 논란에 휩싸였다. 동인도 회사는 헤어가 개인 영지 개발을 위해 회사 자금을 유용하고, 사람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노동력으로 사용한다는 의혹에 대해 조사에 착수했다. 1816년에 구성된 조사 위원회는 헤어의 회계 처리에서 여러 문제점을 발견했으며, 많은 여성이 납치되어 영지로 끌려온 사실을 헤어가 알고 있었다고 지적했다.[6][7][9]
특히 윌리엄 보기는 헤어가 3천 명 이상을 노예로 만들었다는 심각한 혐의를 제기했다. 그러나 이 혐의는 입증되지 않았다. 보기는 래플스에게 개인적인 불만을 품고 있었으며, 노예제를 혐오했던 래플스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이러한 주장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6][7][9] 한편, 이주민 대다수가 독신 남성이어서 성비 불균형 문제가 발생하자, 당국은 금전 제공이나 부채 탕감을 통해 여성의 이주를 장려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6][7]
3. 2. 네덜란드와의 갈등 및 영지 상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체결된 1814년 영국-네덜란드 조약은 독립적인 영지를 만들려던 알렉산더 헤어의 계획에 큰 위협이 되었다.[8] 당시 영국 동인도 회사의 부총독이었던 토마스 스탬포드 래플스와 그의 후임자 존 펜달은 보르네오의 식민지가 네덜란드에 의해 버려진 것이지 영국이 정복한 것이 아니므로 조약의 적용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네덜란드의 반환 요구에 저항했다. 그러나 이는 동인도 회사 전체의 공식 입장은 아니었다.[7]결국 1817년 1월, 네덜란드 대표는 반자르마신의 술탄과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은 네덜란드가 지역의 적들로부터 술탄을 보호해주는 대가로 반자르마신 주변의 넓은 영토에 대한 통제권을 네덜란드에 넘겨주는 내용이었다. 헤어는 이러한 권력 변화 속에서도 자신의 영지를 유지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네덜란드를 적으로 만들었다. 네덜란드는 헤어가 자신의 영지를 발판 삼아 영국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더욱 확장하려 한다고 의심했다.[7]
결과적으로 1818년, 새롭게 들어선 네덜란드 정부는 헤어가 해당 영지에 대한 법적 권리가 없다고 선언했다. 공교롭게도 술탄은 이전에 헤어와 맺었던 조약 문서를 분실한 상태였다. 네덜란드 정부는 현지 파견대에 필요하다면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헤어의 영지를 점령하라고 명령했고, 이는 1818년 7월 실행에 옮겨졌다.[7] 이로써 헤어는 네덜란드 세력에 의해 자신의 영지를 잃게 되었다.
4. 바타비아 및 벤쿨렌 시절 (1818년 ~ 1826년)
반자르마신에서 활동하던 헤어는 네덜란드의 점령 이전에 해당 지역을 떠나 자바 섬 바타비아 근처 팡기에핑안과 캄퐁 망기스에 있는 자신의 영지로 이주했다. 그는 말라카와의 무역을 재개하려 했으나, 1817년과 1818년에 걸쳐 네덜란드 당국으로부터 여러 척의 배를 억류당하거나 압류당하는 등 방해를 받았으며 이동에도 제한을 겪었다.
결국 1819년 3월, 헤어는 네덜란드 식민지 내 거주가 금지되었으나, 개인적인 용무를 정리할 몇 달의 시간을 얻었다. 그는 자바의 영지를 아들 알렉산더에게 넘겨준 뒤, 같은 해 12월 여행길에 올랐다. 먼저 형제 존을 만나 더 큰 배로 갈아타기 위해 롬복 섬으로 이동했고, 이후 수마트라 섬의 벤쿨렌 (현 벵쿨루)에 위치한 동인도 회사 요새로 향했다. 헤어의 당초 계획은 케이프타운, 케이프 식민지에 정착하는 것이었으나, 이를 위한 등록 과정에서 어려움에 부딪혔다.
4. 1. 벤쿨렌에서의 노예 해방
헤어는 네덜란드 당국에 의해 자바 섬에서 거주가 금지된 후, 1819년 12월 수마트라 섬의 벤쿨렌 (현 벵쿨루)에 있는 동인도 회사 요새로 이동했다. 그의 원래 계획은 케이프타운, 케이프 식민지에 정착하는 것이었지만, 이를 위해서는 등록 절차가 필요했다.그러나 당시 동인도 제도의 다른 부유한 유럽인들처럼 헤어도 노예와 첩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등록 과정에서 어려움에 직면했다. 그가 소유한 인원은 성인 60명과 아이 30명에 달했다. 벤쿨렌의 치안 판사는 이들을 법적으로 해방시켰으나, 헤어는 해방된 이들을 설득하여 자신과 함께 머물도록 했다.
5. 코코스 제도 이주와 정착 (1826년 ~ 1831년)
케이프타운에서 다수의 첩들과 함께 생활하며 식민지 사회에서 평판이 좋지 않았던[7] 알렉산더 헤어는 새로운 정착지를 모색했다. 그는 자신의 부하였던 존 클루니에스 로스 선장에게 무인도 탐사를 지시했고, 로스로부터 코코스 제도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1826년, 헤어는 코코스 제도로 이주를 결정하고 실행에 옮겼다. 그는 많은 여성 추종자들과 말레이인 노예들을 데리고 코코스 제도의 풀로 셀마(Pulo Selma) 섬에 상륙하여 첫 정착지를 건설했다. 이후 풀로 베라스(Pulo Beras) 등 다른 여러 섬에도 작은 전초 기지를 세우며 세력을 확장했다.[6] 헤어는 데려온 말레이인 노예들을 노동력으로 이용하여 코코야자 플랜테이션을 경영하기 시작했다.
당시 헤어의 목표는 코코스 제도를 영구적인 거주지로 삼는 것이 아니라, 자바에 있는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기 위한 협상의 발판으로 삼을 단기적인 기지로 활용하는 것이었다.[6] 그러나 이후 섬에 도착한 존 클루니에스 로스와 플랜테이션 위치 선정 등 운영 방식을 둘러싸고 갈등이 발생하면서[6] 그의 계획은 차질을 빚게 되었고, 결국 1831년 초 코코스 제도의 정착지를 포기하기에 이른다.[6]
5. 1. 존 클루니에스 로스와의 갈등
존 클루니에스 로스는 헤어의 선장이자 부하였다. 헤어는 로스에게 무인도 탐사를 지시했고, 로스는 코코스 제도를 발견하여 보고했다.1826년, 헤어는 코코스 제도의 풀로 셀마(Pulo Selma) 섬에 상륙하여 정착지를 건설했다. 이후 풀로 베라스(Pulo Beras)로 이동하며 다른 섬에도 작은 전초 기지를 세웠다.[6] 이때 많은 여성들을 포함한 다수의 인원을 동반했으며, 말레이인 노예들을 데려와 코코야자 플랜테이션을 경영했다. 헤어의 초기 목표는 이곳을 영구 거주지가 아닌, 자바의 영지로 돌아가기 위한 협상 발판으로 삼을 단기적인 기지로 활용하는 것이었다.[6]
그러나 헤어의 전 부하였던 존 클루니에스 로스가 자신의 부하들을 이끌고 섬에 도착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다. 로스는 섬을 인도로 가는 중간 기지로 만들려는 독자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헤어의 구상과 배치되는 것이었다.[6] 특히 플랜테이션의 위치 선정 등을 둘러싸고 두 사람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으며, 이로 인해 관계는 점차 악화되어 결국 적대 관계로 발전했다.
이 갈등은 1831년 초 헤어가 코코스 제도의 정착지를 포기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런던에 있던 헤어의 가족 사업이 해체되면서 자금 지원이 끊긴 것도 그가 섬을 떠나게 된 요인 중 하나로 추정된다.[6] 헤어는 섬을 떠나면서 대부분의 추종자들과 첩들을 데려가지 못했고, 남겨진 이들은 존 클루니에스 로스의 통제 하에 놓이게 되었다.[6] 헤어는 이후 벤쿨렌으로 이동하여 정착했으나, 1834년 11월 그곳에서 사망했다.[7]
5. 2. 코코스 제도에서의 추방
존 클루니 로스는 원래 헤어 밑에서 일하던 선장이었으나, 코코스 제도의 운영 방식을 두고 헤어와 갈등을 겪었다.[6] 로스는 섬을 인도로 가는 중간 기지로 만들고자 했지만, 이는 영구적인 정착지를 원했던 헤어의 계획과 충돌했다.[6] 헤어는 코코야자 플랜테이션 경영을 위해 말레이인 노예들을 동원했는데, 로스는 이 문제를 이용하여 헤어를 압박했다. 로스는 헤어의 동생들에게 편지를 보내 헤어가 노예 상인과 거래하고 있으며, 이 문제가 공론화될 경우 당국의 조사를 받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동시에 헤어는 동인도 회사에 막대한 빚을 지고 있었고, 그의 동생들은 헤어가 직접 돌아와 부채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런던에 있던 헤어의 가족 사업마저 해체되면서 자금줄이 끊기는 상황에 처했다.[6]
결국 로스와의 분쟁, 재정적 압박, 노예 문제 등이 겹치면서 헤어는 코코스 제도를 떠나야 했다. 1831년 초, 그는 자신이 만든 하렘과 대부분의 추종자들을 섬에 남겨둔 채 정착지를 포기하고 떠났다.[6] 헤어가 떠난 후 남은 사람들은 존 클루니 로스의 통제 하에 들어갔다.[6] 코코스 제도를 떠난 헤어는 수마트라 섬의 벤쿨렌으로 가서 정착했으나, 1834년 11월 그곳에서 사망했다.[7]
6. 말년과 죽음
헤어는 동인도 회사에 막대한 빚을 지고 있었고, 그의 동생들은 헤어가 귀국하여 부채 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구했다. 한편, 로스는 헤어 상회에 편지를 보내 헤어 소유의 노예들이 노예 상인을 통해 거래되고 있으며, 이것이 계속될 경우 당국의 주목을 받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결국 1834년 10월 3일, 헤어는 자신의 하렘을 코코스 제도에 남겨둔 채 홀로 섬을 떠났다. 이는 사실상 로스에 의해 쫓겨난 것으로 보인다.
코코스 제도를 떠난 헤어는 수마트라 섬을 거쳐 자바 섬으로 건너갔으며, 그곳에서 1834년에 사망했다.
7. 가족 관계 및 유산
(내용 없음)
7. 1. 가족 관계
알렉산더 헤어에게는 세 명의 형제가 있었다. 데이비드(1777년 출생)는 바타비아에서 보석상이 되었고, 존(1782년 출생)과 조셉(1784년 출생)은 런던에서 식민지 상품 무역업을 했다.[10] 1851년과 1861년 영국 인구 조사 기록에 따르면, 조셉의 조카인 파티마가 그의 런던 집에 함께 살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동인도에서 태어난 파티마는 1837년경 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로 인해 데이비드의 딸일 가능성이 제기된다.[11] 파티마는 1862년 5월 22일 핌리코의 성 베드로 교회에서 제임스 그레이엄과 결혼했고, 1874년 런던에서 사망했다.7. 2. 문학 작품에서의 묘사
알렉산더 헤어는 1940년 라디오 드라마 ''존 로스, 코코스 제도의 왕''의 등장인물이었다.또한 그의 이야기는 1963년에 출판된 데이비드 디바인의 소설 ''The Daughter of the Pangaran''에 등장한다.[12] 2020년에는 나이젤 바일리의 소설 ''The Man Who Collected Women''에서 중심 인물로 다루어졌다.
참조
[1]
웹사이트
"The Man Who Collected Women" by Nigel Barley
https://asianreviewo[...]
2020-10-10
[2]
웹사이트
Emma's Ark draws Australia's most exotic community together - ABC (none) - Australian Broadcasting Corporation
https://www.abc.net.[...]
2023-10-06
[3]
웹사이트
From the Archives, 1955: Australia takes control of a 'paradise on Earth'
https://www.smh.com.[...]
2023-10-06
[4]
Familysearch
Familysearch
https://familysearch[...]
[5]
간행물
Journal of the Malayan Branch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https://drive.google[...]
Gibson-Hill, C.A., Raffles, Alexander Hare & Johanna van Hare
1955
[6]
논문
Documents relating to John Clunies Ross, Alexander Hare and the establishment of the colony on the Cocos-Keeling Island
1952
[7]
논문
Borneo's first "White Rajah': new light on Alexander Hare, his family and associates
https://go.gale.com/[...]
2013
[8]
논문
Alexander Hare in the East Indies: a reappraisal
https://www.jstor.or[...]
1999
[9]
서적
De man die vrouwen verzamelde; Een koloniale geschiedenis van de Kokos-eilanden
Joop van den Berg (‘s-Gravenhage 1998)
[10]
Familysearch
Familysearch
https://www.familyse[...]
[11]
Familysearch
Census via Familysearch
https://www.familyse[...]
[12]
서적
The Daughter of the Pangaran
https://www.goodread[...]
Little Brown & Company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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