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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야 몰다굴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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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리야 몰다굴로바는 1925년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태어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소련군 저격수로 참전한 인물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삼촌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했으며, 전쟁 발발 후 레닌그라드에 남아 헌신적으로 활동했다. 저격수 훈련을 받은 후 제54 소총 여단에 배치되어 뛰어난 사격 실력과 용감한 전투 정신을 발휘했으며, 1944년 노보소콜니키 전투에서 전사했다. 몰다굴로바는 사후 소련 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그녀의 업적은 카자흐스탄과 러시아에서 기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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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야 몰다굴로바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저격수 알리야 누르무하메트키지 몰다굴로바
저격수 알리야 누르무하메트키지 몰다굴로바
원어 이름Әлия Нұрмұхамедқызы Молдағұлова (카자흐어)
Алия Нурмухамбетовна Молдагулова (러시아어)
로마자 표기Äliia Nūrmūhamedqyzy Moldağūlova (카자흐어)
생애
출생일1925년 10월 25일
출생지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 공화국 불라크
사망일1944년 1월 14일
사망지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노보소콜니키
안장지모나코보
군사 복무
소속소련군
복무 기간1942년 – 1944년
최종 계급상병
참전제2차 세계 대전
소속 부대제54 독립 소총 여단
사후전사
훈장소련 영웅

2. 어린 시절과 성장 배경

알리야 몰다굴로바는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알마티에서 삼촌 아우바키르 몰다굴로프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했다. 1935년 삼촌이 군사 수송 아카데미에 입학하면서 가족은 모스크바로 이주했고, 이후 레닌그라드로 다시 이사했다. 1939년, 몰다굴로바는 레닌그라드의 46번 기숙 학교에 입학하여 교육을 받았으며, 1942-43년에 이 학교는 고아원이 되었다.[4][5][2]

2. 1. 출생과 가족

알리야 몰다굴로바는 1925년 10월 25일 카자흐 자치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악토베 지역 호브딘스키 구역에 위치한 불라크 마을에서 누르무하메트 사르쿨로프와 마르잔 사이에서 태어났다.[1] 바그다트라는 남동생이 있었다.

1930년대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대기근 동안, 어머니 마르잔은 감자 찌꺼기를 모으다 1933년 파수꾼에게 총살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동생 바그다트는 2살 무렵에 사망했다.[2][3]

아버지 사르쿨로프는 귀족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소비에트 당국에 의해 박해를 받았다.[1] 어머니가 사망한 후, 몰다굴로바는 알마티에서 삼촌 아우바키르 몰다굴로프가 그녀를 할머니 손에서 키울 때까지 1년 동안 마을을 돌아다녔다.[2] 잠시 동안 아울리에-아타 마을의 11번 학교에서 공부했으며, 어린 나이에도 목표 지향적이고 확고한 성격을 보였다.[2]

2. 2. 카자흐스탄 대기근과 가족의 비극

1930년대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대기근 동안, 알리야의 어머니 마르잔은 감자 찌꺼기를 모으다 1933년 파수꾼에게 총살당했다.[1] 얼마 지나지 않아 알리야의 남동생 바그다트도 2살 무렵에 사망했다.[1] 알리야의 아버지 누르무하메트 사르쿨로프는 귀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소비에트 당국에 의해 박해받았다.[1] 그는 아내를 쿠라일리 강 하류 어딘가에 급히 매장했다.[2][3]

2. 3. 삼촌 밑에서의 성장

어린 시절 부모를 잃은 뒤부터 알마티에 거주하던 삼촌 아우바키르 몰다굴로프 밑에서 성장했다.[2][3] 잠시 아울리에-아타 마을의 11번 학교에서 공부했다.[2] 어린 나이에도 목표 지향적이고 확고한 성격을 보였다.[2]

1935년 삼촌이 군사 수송 아카데미에 입학하면서 몰다굴로프 가족은 모스크바로 이사했다.[4] 몇 년 후, 아카데미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전하면서 함께 이사했다.[4] 1939년 가을, 삼촌은 14세의 몰다굴로바가 교육을 받기를 원해 46번 기숙 학교에서 공부하도록 주선했다. 1942-43년, 기숙 학교는 고아원이 되었다.[4][5][2]

3. 학창 시절

알리야 몰다굴로바는 카자흐스탄 불라크 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알마티에 사는 삼촌 밑에서 자랐다. 1935년 레닌그라드에 있는 군사학교에 입학했으나, 1939년 보육원으로 보내졌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42년 리빈스크 항공학교에서 군사 교육을 받았다.

3. 1. 군사 수송 아카데미 입학

몰다굴로바는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알마티에 있는 삼촌 밑에서 자랐다. 1935년 삼촌이 군사 학교에 입학하면서 가족은 레닌그라드로 이주했으나, 1939년 몰다굴로바는 보육원으로 보내졌다.

3. 2. 레닌그라드 46번 기숙 학교

1935년 레닌그라드에 위치한 군사학교에 입학했지만, 1939년에 보육원으로 보내졌다.[1]

3. 3. 르빈스크 항공 기술 학교

1939년 보육원으로 보내졌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42년 뱌츠카 중학교를 졸업하고 리빈스크 항공 기술 학교에 입학하여 군사 교육을 받았다.

4.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1942년 리빈스크 항공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은 후, 몰다굴로바는 소련 군대에 입대했다.[7] 1943년 5월 중앙 여성 저격수 학교에서 교육을 마치고 같은 해 7월 소련 제54사격여단에 저격수로 배치되었다.[8] 1944년 1월 노보소콜니키-드노 철도에서 독일군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노보소콜니키에서 독일군의 기습 공격을 받고 전사했다.[7]

4. 1. 전쟁 발발과 참전 결심

독소 전쟁 발발 및 소련 침공 직후, 중앙아시아와 카자흐스탄 공화국의 군사 등록 및 징병 사무소에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조국을 지키려는 자원자들의 지원서가 쏟아져 들어왔다. 카자흐스탄에서는 전선에 나가 싸우기를 원하는 여성들이 전체 자원자의 40%를 차지했다. 수천 명의 여성과 소녀들이 간호사 전문 기술을 빠르게 배우기로 결심했다. 전쟁 첫 두 달 동안 206개의 간호 과정과 248개의 위생 그룹이 만들어졌고, 약 20만 명의 여성과 소녀들이 이 계획에 참여했다.[6]

1941년 6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몰다굴로바의 삼촌 가족은 레닌그라드를 떠나 대피했다. 그러나 어린 몰다굴로바는 레닌그라드에 남기로 했다. 몰다굴로바의 삼촌 아부바키르 몰다굴로프는 가족에게 긴급 대피하라는 전보를 보냈지만,[2] 몰다굴로바는 카자흐스탄으로 돌아가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가족들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남아 "끝까지 조국을 지킬 것"이라고 설명했다.[2]

1941년 9월 8일, 레닌그라드 포위전이 시작되었다. 몰다굴로바는 썰매를 가지고 물을 뜨러 갔다가 의식을 잃고 쓰러진 채 발견되기도 했다. 의사의 진찰 결과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였다. 이후 몰다굴로바는 건강이 좋지 않은 어린 소녀에게 자신의 얼마 안 되는 빵 배급량의 절반을 준 것이 밝혀졌다. 그녀는 몸을 회복하자마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지붕으로 올라가 소이탄을 끄는 일을 도왔다.

4. 2. 중앙 여성 저격수 훈련 학교

1942년 12월 21일, 몰다굴로바는 전선으로 가기 위해 기술 학교에서 제적되었다.[7] 1942년 3월 20일 소비에트 연방 국방 인민 위원회의 명령에 따라, 브세보부치 주관청 산하에 저격수 훈련 학교가 설립되었고, 같은 해 11월 27일 중앙 여성 저격수 훈련 학교로 개편되었다. 몰다굴로바는 이 학교의 첫 번째 입학생에 포함되었으며, 학교는 현재 모스크바 인문 대학교가 위치한 지역인 모스크바 근교의 베시냐키 구 마을에 위치해 있었다.[4]

N.A. 마트베예바의 회고록에 따르면, 몰다굴로바는 저격수 기술을 습득하는 데 끈기를 보여주었으며, "우수한 사격을 한 공로로 콤소몰 중앙 위원회로부터"라는 비문이 새겨진 맞춤형 소총을 받았다.[4][7] 1943년 2월 23일, 몰다굴로바의 생도 그룹은 군사 선서를 했다.[8]

4. 3. 제54 소총 여단 배치

1943년 5월, 중앙 여성 저격수 학교에서 교육을 마친 몰다굴로바는 1943년 7월, 소련 제54 소총 여단에 저격수로 배치되어 본격적인 전투에 참여하게 되었다.[8] 그녀의 전우였던 Ya. K. 프로코펜코바는 몰다굴로바를 "카자흐스탄 출신의 연약하고 예쁜 소녀"라고 회상하며, 그녀가 18세에 불과했지만 10월까지 32명의 파시스트를 사살했다고 증언했다.[8]

N. A. 마트베예바는 몰다굴로바가 전선에 투입되기 전 나이와 키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제4 대대에 배치된 후 짝을 지어 임무를 수행하며 용감하게 적을 사살하고 부상병을 돕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고 회고했다.[7]

1943년 12월 3일, 몰다굴로바는 친척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최전선 참호에서 독일군과 대치 중인 상황을 묘사하며, "나치에 대해 연민을 느끼지 않지만, 처음에는 조금 걱정했다"고 솔직한 심정을 드러냈다. 또한, 3일 만에 14명의 파시스트를 사살한 공로로 지휘관에게 감사를 받았다는 내용을 전했다.[2]

4. 4. 주요 전투 활약상

몰다굴로바는 1944년 1월 노보소콜니키-드노 철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그녀는 이 전투에서 독일군 병사들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7] 하지만, 노보소콜니키에서 독일군의 기습 공격을 받고 전사했다.[7]

전투 당시 몰다굴로바는 뛰어난 용기를 보여주었다. 그녀는 적의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파시스트들을 사살했을 뿐만 아니라, 전장에서 부상당한 동료들을 옮기고 응급 처치를 해주는 등 헌신적인 모습을 보였다.[7]

1943년 12월 3일, 몰다굴로바는 친척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금 우리는 최전선에 있습니다... 저는 나치에 대해 연민을 느끼지 않지만, 처음에는 조금 걱정했습니다... 우리 지휘관이... 저격수 리야 마그다굴로바는 3일 만에 14명의 파시스트를 죽였다... 감사를 표합니다..."라고 썼다.[2] 이 편지에서 그녀의 용기와 전투 의지를 엿볼 수 있다.

5. 노보소콜니키 전투와 죽음

1944년 1월, 몰다굴로바는 노보소콜니키-드노 철도에서 독일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독일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전사했다. 당시 제4대대 지휘관은 모이세예프 소령, 정치 지도원은 G.V. 바르샤브스키였다.[8]

몰다굴로바는 지뢰 파편에 팔을 다치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백병전에 참여했다. 독일 장교와 교전 중 재차 부상을 입었으나, 결국 그를 사살했다. 그러나 이 부상으로 인해 몰다굴로바는 전사했다. 작전 전날, 몰다굴로바는 여동생 사푸라에게 편지를 썼으며, 노보소콜니키 지구 모나코보 마을에 묻혔다.[7][8][9]

5. 1. 전투 배경

1944년 1월 초, 레닌그라드-노브고로드 작전 중, 소련 제54 소총 여단은 노보소콜니키 시 방향으로 진격하여 독일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도시 북쪽으로 진출했다.[8] 제4대대는 나스바 역 철도에 도달하여 노보소콜니키-드노 철도를 끊고 카자치하 마을을 점령하는 임무를 맡았다.[8] 그러나 독일군의 강력한 반격으로 소련군의 공격은 저지되었다.[8]

당시 기온이 -47°C까지 내려가는 혹한 속에서, 알리야 몰다굴로바는 "전우들이여, 나를 따르라!"라고 외치며 소련군 병사들을 독려하여 공격을 재개하도록 이끌었다.[8] 몰다굴로바는 그날 세 번의 독일군 반격을 격퇴하는 데 참여하며 전투를 이어갔다.[8]

5. 2. 전투 과정

1944년 1월 초, 레닌그라드-노브고로드 작전 중 제54 소총 여단은 노보소콜니키 시 (프스코프 지역)로 전선을 따라 행진하여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시의 북쪽으로 진격했다.[8] 알리야 몰다굴로바가 복무한 제4대대의 정치 강사 G.V. 바르샤브스키에 따르면, 여단의 일부는 나스바 역의 철도에 도달했고, 그곳에서 강력한 적의 화력에 직면했다. 밤에 출발선을 점령한 붉은 군대는 1944년 1월 14일 새벽에 공격을 시작했다. 저격수들의 지원을 받은 대대는 나스바 역 지역에서 노보소콜니키-드노 철도를 끊고 카자치카 마을을 점령하는 임무를 받았다. 첫 번째 방어선은 성공적으로 돌파되었지만, 곧 적의 강력한 반격 화력에 공격이 묻혔다.[10]

이 위기의 순간, 알리야 몰다굴로바는 "전우들이여, 나를 따르라!"라고 외쳤다. 소녀의 외침에 용사들은 일어섰고, 몰다굴로바는 그날 세 번 더 적의 반격을 격퇴하는 데 참여했다. 공격은 계속되었다.[8]

공격 중 하나에서 몰다굴로바는 지뢰 파편에 팔을 부상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참호에서 시작된 백병전에 참여했다. 전투 중에 그녀는 독일 장교에게 다시 부상을 입었다. 그녀는 독일 장교를 죽이는 데 성공했지만, 그녀의 부상은 치명적이었다.[7]

몰다굴로바의 전선 친구들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겨울 추위는 -47°C까지 내려갔고, 모두 참호에 누워 있었다. 몰다굴로바는 당황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칼리닌(트베르) 지역의 노보소콜니키 타운 근처 카자치카 마을로 데려갔고, 그곳에서 소련 군인들은 이미 나치와 백병전을 벌였다. 갑자기 독일 장교가 코너에서 나타나 몰다굴로바에게 사격을 가했다. 쓰러지면서 그녀는 반격을 가했다.[10]

5. 3. 몰다굴로바의 최후

1944년 1월 초, 몰다굴로바는 노보소콜니키-드노 철도에서 독일군과 전투를 벌였다. 제54 소총 여단은 노보소콜니키 시 북쪽으로 진격하여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려 했다. 몰다굴로바가 속한 제4대대는 나스바 역 지역에서 철도를 끊고 카자치하 마을을 점령하는 임무를 맡았다. 첫 번째 방어선은 돌파했지만, 적의 강력한 반격으로 공격이 멈췄다. 이때 몰다굴로바는 "전우들이여, 나를 따르라!"라고 외치며 병사들을 독려했고, 세 번의 반격을 격퇴하는 데 기여했다.[8]

전투 중 몰다굴로바는 지뢰 파편에 팔을 다쳤지만, 백병전에 참여했다. 독일 장교와 싸우던 중 다시 부상을 입었지만, 결국 그를 사살했다. 하지만 이 부상으로 인해 몰다굴로바는 전사했다. 작전 전날, 몰다굴로바는 여동생 사푸라에게 편지를 썼으며, 노보소콜니키 지구의 모나코보 마을에 묻혔다.[7][8][9]

당시 겨울은 매우 추웠고, 기온은 -47°C까지 내려갔다. 몰다굴로바는 이러한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용감하게 싸웠다. 그녀는 쓰러지면서도 반격하여 적을 사살하는 투지를 보였다. 공식 기록에 따르면 몰다굴로바는 78명의 파시스트를 사살했지만, 카자흐스탄 박물관 관계자들은 100명이 넘는다고 추정한다.[10] 몰다굴로바는 1944년 1월 14일, 18세의 나이로 카자치하 마을 근처에서 전사했으며, 사후 소련 영웅 칭호와 레닌 훈장을 추서받았다.[11] 그녀의 최종 저격 기록은 자료에 따라 30명대에서 91명까지 다양하게 나타난다.[12][13]

6. 사후 추서와 기억

몰다굴로바가 복무했던 부대의 지휘관은 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에 편지를 써서 그녀의 업적과 조국에 대한 헌신을 알려줄 것을 요청했다.[10] 또한, 몰다굴로바가 우등으로 졸업한 저격수 학교에도 편지를 보냈는데, 이 문서는 악토베에 있는 영웅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10]

1944년 6월 4일 소련 정부는 몰다굴로바에게 소비에트 연방영웅 칭호와 레닌 훈장을 추서했다.[10]

소련 국민들은 몰다굴로바를 기리기 위해 악튜빈스크에 그녀의 이름을 딴 거리와 기념비를 세웠으며, 레닌그라드의 한 학교도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3] 1995년 5월 9일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50주년을 기념하여 카자흐스탄에서 기념 우표를 발행했다.[14] -- 1997년 알마티의 아스타나 광장에는 기념비가 세워졌고,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등 여러 도시에 그녀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 악토베 불락스키 지방에는 알리야(Aliya) 마을과 [https://patriotaliya.kz/ "알리야" 애국 교육 지역 센터]가 있으며, 2021년 4월 28일 악토베 공항은 알리야 몰다굴로바 국제공항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15]

6. 1. 소련 영웅 칭호와 레닌 훈장 추서

1944년 6월 4일 소련 정부로부터 소비에트 연방영웅 칭호와 레닌 훈장을 추서받았다.[10]

6. 2. 카자흐스탄 및 러시아에서의 추모


  • 소련 국민들은 몰다굴로바의 기억을 신성하게 기렸다. 악튜빈스크에는 그녀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으며, 도시 중심에는 카자흐 국민의 충실한 딸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3] 레닌그라드의 한 학교도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3]
  • 1995년 5월 9일,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50주년을 기념하여 카자흐스탄은 그녀를 기리는 우표를 발행했다.[14]
  • 1997년, 알마티의 아스타나 광장에 그녀의 이름을 딴 기념비가 세워졌다.
  •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및 기타 도시의 거리가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 악토베 불락스키 지방에는 알리야(Aliya) 마을이 있고, [https://patriotaliya.kz/ "알리야" 애국 교육 지역 센터]가 있다.
  • 2021년 4월 28일 악토베 공항은 알리야 몰다굴로바를 기념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알리야 몰다굴로바 국제공항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15]

6. 3. 알리야 몰다굴로바 국제공항

2021년 악토베 공항은 알리야 몰다굴로바를 기념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알리야 몰다굴로바 국제공항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15]

7. 유산과 영향

(이전 출력이 없으므로 수정할 내용이 없습니다. 원본 소스를 제공해주시면 해당 섹션 내용을 작성해 드리겠습니다.)

참조

[1] 웹사이트 Новые сведения об Алие Молдагуловой говорят, что её мать была убита, а могила затеряна http://rus.azattyq.o[...]
[2] 뉴스 New information about Aliya Moldagulova says that her mother was killed and her grave was lost https://rus.azattyq.[...] 2010-05-08
[3] 간행물 Лысенков С.Г. Никто не забыт, ничто не забыто? (К вопросу об учете боевых потерь Красной Армии и отдании воинских почестей павшим на фронтах Великой Отечественной войны) 2017-07
[4] 웹사이트 Алия Молдагулова http://kazakhi.info/[...]
[5] 웹사이트 Aliya Moldagulova Nurmahemotvna – Biography http://www.warheroes[...]
[6] 웹사이트 The Great Patriotic War: gender aspects of sociocultural memories and commemorative practices in the Post-Soviet Kazakhstan https://womaninrussi[...] 2017-03-25
[7] 웹사이트 Memoirs about Aliya http://ibirzha.kz/zh[...] 2014-04-10
[8] 웹사이트 Heroes of Great Patriotic War: Aliya Moldagulova https://www.inform.k[...] 2015-03-30
[9] 웹사이트 Soviet Snipers 1941–1945 http://airaces.narod[...]
[10] 웹사이트 Eternal Giants of the Country. Aliya Moldagulova https://presidentlib[...]
[11] 웹사이트 Aliya Moldagulova http://www.cvsi.kz/i[...] 2012-09-26
[12] 서적 Heroines of the Soviet Union 1941–45 https://books.google[...] Bloomsbury Publishing 2002
[13] 웹사이트 Молдагулова Алия Курумгамбиевна http://soviet-aces-1[...] 2021-04-12
[14] 웹사이트 Aliya Moldagulova stamp http://colnect.com/e[...] 2013-07-27
[15] 뉴스 Вечная память: Международному аэропорту Актобе присвоено имя Алии Молдагуловой https://almaty.tv/ne[...] 2024-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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