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레닌그라드 포위전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레닌그라드 포위전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독일과 핀란드 군대에 의해 1941년 9월 8일부터 1944년 1월 27일까지 872일 동안 소련의 레닌그라드 시를 포위한 사건이다. 이 포위전은 바르바로사 작전의 일환으로 시작되었으며, 레닌그라드를 점령하려는 독일군의 목표와 도시를 방어하려는 소련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특징지어진다. 독일군은 도시의 봉쇄를 통해 식량과 물자 공급을 차단하고 시민들을 굶주리게 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레닌그라드 시민들은 혹독한 기아, 추위, 포격 속에서 생존을 위해 투쟁했으며, 소련군은 라도가 호수를 통한 보급로(생명의 길)를 유지하며 도시를 지원했다. 1943년 이스크라 작전으로 포위망의 일부가 뚫렸고, 1944년 레닌그라드-노브고로드 공세를 통해 포위가 완전히 해제되었다. 이 포위전은 막대한 인명 피해를 초래하여, 100만 명 이상의 민간인 사망자를 기록한 전쟁 중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로 평가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944년 소련 - 계속 전쟁
    계속 전쟁은 1941년에서 1944년 사이 핀란드가 겨울 전쟁에서 잃은 영토 회복 및 확장을 목표로 소련을 공격했으나 교착 상태에 빠져 휴전 협정을 체결, 일부 영토를 할양하고 배상금을 지불했지만 독립을 유지한 전쟁이다.
  • 1944년 소련 - 국립 모스크바 국제 관계 대학교
    국립 모스크바 국제 관계 대학교(MGIMO)는 1944년 설립된 러시아 명문 대학으로, 외교관을 비롯한 국제 관계, 대외 경제, 국제 저널리즘 분야의 엘리트 전문가를 양성하는 기관이며, 다양한 언어 교육과 높은 대학 평가 순위를 자랑한다.
레닌그라드 포위전 - [전쟁]에 관한 문서
위치 정보
기본 정보
1941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소련 대공포대
1941년 성 이사악 대성당 근처 레닌그라드에 있는 소련 대공포대
명칭레닌그라드 포위전
로마자 표기blokada Leningrada
분쟁제2차 세계 대전 중 동부 전선
날짜1941년 9월 8일 – 1944년 1월 27일 (2년 4개월 19일)
장소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SFSR 레닌그라드 (현재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결과소비에트 연방의 승리
영토축군은 레닌그라드에서 60–100km 물러남.
교전 세력
교전국 1

해군 지원:
지휘관
지휘관 1빌헬름 리터 폰 레프
게오르크 폰 퀴흘러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지휘관 2마르키안 포포프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게오르기 주코프
키릴 메레츠코프
병력 규모
병력 1초기: 725,000명
병력 2초기: 930,000명
사상자
사상자 1독일 북부 집단군:
1941년: 총 85,371명 사상자
1942년: 총 267,327명 사상자
1943년: 총 205,937명 사상자
1944년: 총 21,350명 사상자
총합: 579,985명 사상자
117,407명 전사
23,405명 실종
사상자 2글란츠 추정치:
3,473,066명 사상자
1,017,881명 전사, 포로 또는 실종
2,418,185명 부상 및 질병
크리보셰예프 추정치:
523,415명 전사 및 실종
민간인 사상자1,042,000명
포위전 중 642,000명 사망
대피 중 400,000명 사망
총 사망자1,300,000명–2,000,000명
관련 정보
추가 정보홀로코스트 다음으로 레닌그라드 포위전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유럽에서 가장 큰 집단 학살 행위였음.
독일과 핀란드는 레닌그라드를 폭격하고 굶겨 항복시키려 했음.
포위된 지역 내에서 기아, 추위, 적의 폭격으로 사망한 민간인의 수는 90만 명으로 추정됨.

2. 배경

레닌그라드 포위전은 바르바로사 작전의 3가지 주요 목표 중 하나였고, 북부 집단군의 주요 목표였다. 레닌그라드는 옛 러시아 제국의 수도이자 러시아 혁명의 상징적인 장소였고, 소련 발트 함대의 주요 거점이었으며, 산업 시설과 무기 공장이 밀집한 대도시였다.[130] 1939년 기준으로 이 도시는 소련 전체 산업 생산량의 11%를 차지했다.[131]

아돌프 히틀러는 레닌그라드 점령을 확신하여 호텔 아스토리아에서 열릴 승전 축하 행사 초대장을 이미 인쇄했다고 전해진다.[132] 나치 독일의 레닌그라드 점령 후 계획은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소련 언론인 레프 베지멘스키에 따르면 "아돌프스부르크" 등으로 개칭하고[133] 제너럴플랜 오스트에 따라 새로운 잉에르만란드 주의 주도로 삼아 도시의 시민들을 완전히 몰살할 계획이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1941년 9월 29일, 북부 집단군에게 보낸 명령에 따르면 "소비에트 러시아의 패배 이후, 이 큰 도시 중앙에 대한 지속적인 유지 여부는 관심이 없을 수 있다. [...] 도시를 포위한 이후, 인구 재배치와 공급 문제는 우리가 해결할 할 수 없고 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항복 협상 요청은 거부해야 한다. 우리의 존재를 위한 전쟁에서, 우리는 이 매우 많은 도시 인구의 일부라도 존재에 관심을 가질 수 없다."라고 하였다.[134] 히틀러의 궁극적인 계획은 레닌그라드를 완전히 파괴하고 네바강 북부 영토를 핀란드에게 넘기는 것이었다.[135][136]

1941년 레닌그라드 근교의 불타는 주택과 교회 앞 독일군 병사들

3. 준비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소전쟁의 일부인 레닌그라드 포위전은 나치 독일군이 소련 레닌그라드(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포위하고 봉쇄한 사건이다.

아돌프 히틀러러시아 혁명의 상징이자 발트 함대 거점, 산업 시설 밀집 지역인 레닌그라드의 전략적 중요성을 고려해 도시 점령을 핵심 목표로 삼았다.[130][131] 심지어 승리 축하 행사 초대장을 미리 인쇄할 정도로 점령을 확신했다.[132]

독일은 레닌그라드 함락 후 도시 이름을 "아돌프스부르크" 등으로 바꾸고 제너럴플랜 오스트에 따라 잉에르만란드 주의 주도로 삼아 시민들을 몰살할 계획이었다.[133] 히틀러는 네바강 북쪽 영토를 핀란드에 넘기려 했다.[135][136]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원수 휘하 북부 집단군은 레닌그라드를 목표로 진격했으나, 히틀러는 4 기갑군을 모스크바 공방전 지원으로 이동시켜 폰 레프는 도시 포위 및 핀란드군 협력 임무를 맡게 되었다.[137][138] 독일군은 레닌그라드 남쪽을 점령, 핀란드군은 북쪽에 위치하여 도시 봉쇄 및 보급 차단을 시도했다. 독일군은 식량 부족을 무기로 레닌그라드가 수 주 안에 기아 상태에 빠질 것으로 예측했다.[168][164][139][140][141][142]

빌헬름 리터 폰 레프와 에리히 회프너 (1941년 9월)


레닌그라드는 1939년 당시 319만 명 인구를 가진 소련 제2 도시이자 발트 함대 근거지였다. 북유럽 국가 철광석 수입에 의존하던 독일에게는 경제 전략상 필수적이었다. 히틀러는 레닌그라드 점령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북방군 집단에 공략을 명령했다. 북방군 집단은 제18군, 제16군, 제4기갑군 3개 군으로 구성되었다. 에른스트 부시 제16군 사령관, 게오르크 폰 퀴흘러 제18군 사령관은 열렬한 나치당원으로, 레닌그라드 점령은 이데올로기적 투쟁 측면이 컸기에 히틀러는 신중히 사령관을 선택했다. 개전 직전 히틀러는 북방군 집단 사령부를 방문, “지난 24년간 러시아인들을 지탱해 온 상징이다. 전투 패배는 슬라브 민족 정신을 꺾을 것이다. 레닌그라드 함락은 완전한 붕괴를 초래할 것이다.”라며 중요성을 강조했다.

발트 국가에서 레닌그라드에 이르는 광대한 공간에는 적군 심층 방어 시스템이 전개되어 북방군 집단 임무에 어려움이 예상되었다. 히틀러는 프랑스 마지노선을 돌파한 라이프슈타트 원수에게 북방군 집단 지휘를 맡겼다.

한편, 독일 제18군, 제16군은 친위대(SS) 특별 작전 부대(Einsatzgruppen A)와 동행하며 카우나스 등지에서 유대인 학살을 자행했고, 리투아니아 반소련 파르티잔은 이에 협력했다. 친위대(SS) 만행에 국방군 장교들은 격분, 후방 군정국장 프란츠 폰 로크니스는 라이프슈타트 원수에게 직소했으나, 라이프슈타트는 자신에게는 그러한 조치에 영향이 없다고 말했다.

1941년 6월 27일, 레닌그라드 의회는 민간인 "반격 그룹" 조직을 결정했다. 다음 날, 시민들은 위험 대상으로 통보받고 요새 건설에 동원되었다. 도시 경계를 따라 남북에서 몰려오는 적에 저항하기 위해 민간인 방어선이 구축되었다.[168][143]

방어선은 남쪽에서 루가강에서 시작하여 추도보, 가치나, 우리츠크, 풀코보, 네바강까지 이어졌다. 다른 방어선은 페테르고프, 가치나, 풀코보, 콜피노, 콜트스키를 통과했다. 북쪽에서는 1930년대부터 레닌그라드 북부 교외에 있던 카렐리냐 요새 지역이 핀란드군을 방어하기 위해 다시 사용되었다. 총 190km 목재 바리케이드, 635km 철조망, 700km 대전차 도랑, 5000km 토재 및 목재 진지, 철근 콘크리트 진지, 25000km 참호가 대부분 민간인에 의해 건설되었다. 러시아 순양함 오로라의 포는 레닌그라드 남쪽 풀코보 고지로 이동했다.

1941년 7월, 레닌그라드 여성들이 대전차 참호를 파는 모습

3. 1. 독일군의 계획

바르바로사 작전의 3가지 주요 목표 중 하나였던 레닌그라드 점령은 북부 집단군의 핵심 목표였다. 레닌그라드는 러시아 혁명의 상징적인 장소이자 옛 러시아 수도로서 정치적 중요성을 지녔고, 발트 함대의 주요 거점으로서 군사적 가치가 높았으며, 산업 시설과 무기 공장이 밀집한 대도시였다.[130] 1939년 기준으로 레닌그라드는 소련 전체 산업 생산량의 11%를 차지했다.[131] 아돌프 히틀러는 레닌그라드 점령을 확신했으며, 호텔 아스토리아에서 열릴 승리 축하 행사 초대장을 이미 인쇄했다는 보고가 있을 정도였다.[132]

나치 독일의 레닌그라드에 대한 최종 계획은 여러 이론이 있지만, 소련 언론인 레프 베지멘스키의 주장에 따르면, 도시 이름을 "아돌프스부르크" 등으로 바꾸고,[133] 제너럴플랜 오스트에 따라 새로운 잉에르만란드 주의 주도로 삼아, 도시의 모든 시민을 몰살할 계획이었다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1941년 9월 29일, 북부 집단군에 하달된 명령은 다음과 같다.

히틀러의 최종 계획은 레닌그라드 지역을 완전히 파괴하고 네바강 북쪽 영토를 핀란드에 넘기는 것이었다.[135][136]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원수 휘하의 북부 집단군은 레닌그라드를 주 목표로 진격했다. 폰 레프의 계획은 도시를 점령하는 것이었지만, 히틀러는 독일 참모총장 프란츠 할더의 주장을 받아들여 4 기갑군을 페도르 폰 보크의 모스크바 공세 지원을 위해 남쪽으로 이동시켰다.[137] 그 결과 폰 레프는 라도가호 부근에서 도시를 무기한 포위하고,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휘하의 핀란드 육군은 레닌그라드 동쪽 스비리강에서 대기하며 포위망을 완성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138]

독일군은 남쪽에서 영토를 점령했고, 핀란드군은 레닌그라드 북쪽에 위치했다. 양측 모두 레닌그라드를 포위하고 봉쇄하여 도시와의 모든 통신을 차단하고, 식량 및 보급품 수송을 막는 것을 목표로 했다. 독일군은 식량 부족을 시민들에 대한 가장 강력한 무기로 삼을 계획이었고, 독일 과학자들은 레닌그라드가 몇 주 안에 기아 상태에 빠질 것이라고 예측했다.[168][164][139][140][141][142]

레닌그라드는 1939년 당시 319만 명의 인구를 가진 소련 제2의 도시이자 최대의 무기 생산지였다. 1941년 6월 22일 독소전쟁 발발 당시에는 520개의 공장과 72만 명의 노동자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소련 전역 발전 설비의 8할을 레닌그라드에 의존하고 있었다. 또한 발트 함대의 근거지였으며, 북유럽 국가들에 대한 철광석 수입에 의존하던 독일에게 레닌그라드 점령은 경제 전략상 필수적이었다. 히틀러는 레닌그라드 점령을 작전의 최우선 목표로 삼고, 3개의 군 집단 중 북방군 집단에 공략을 명령했다. 북방군 집단은 제18군, 제16군, 제4기갑군의 3개 군으로 구성되었다. 제16군 사령관 에른스트 부시 장군과 제18군 사령관 게오르크 폰 퀴흘러 장군은 열렬한 나치당원이었으며, 레닌그라드 점령은 이데올로기적 투쟁의 측면이 컸고, 히틀러는 사령관들을 신중하게 선택했다. 개전 직전, 히틀러는 북방군 집단 사령부를 방문하여 “이는 지난 24년간 러시아인들을 지탱해 온 상징이다. 전투에서의 패배는 슬라브 민족의 정신을 꺾을 것이다. 그러나 레닌그라드 함락은 완전한 붕괴를 초래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레닌그라드 공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발트 국가들에서 레닌그라드에 이르는 광대한 공간에는 적군의 심층 방어 시스템이 전개되어, 북방군 집단의 임무에는 어려움이 예상되었다. 히틀러는 프랑스의 마지노선을 돌파한 라이프슈타트 원수에게 북방군 집단의 지휘를 맡겼다. 라이프슈타트는 먼저 기갑 병력을 이분하여, 에리히 폰 만슈타인 상급 대장 지휘하의 제56기갑군단을 서부 드비나 강의 교량 확보에 보내고, 라인하르트 기갑 병대장 지휘하의 제41기갑군단에 국경에 집결해 있던 소비에트군 기갑 병력을 공격하게 했다. 라세이냐 근교에서 양군의 기갑 병력이 충돌하여 대규모 전차전이 전개되었다. 적군 최강의 중전차 KV-1KV-2도 투입되었고, 그 성능은 독일군 장병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전차전 기술은 독일군이 능가했고, 독일군 전차 부대는 근거리 사격으로 소비에트의 중전차를 무력화시켜, 자군의 중포대가 대기하고 있는 매복 지점으로 유인했다. 총 200대의 KV-1과 KV-2가 파괴되었고, 발트 지역 소비에트 기갑 전력의 대부분이 이 한 번의 전투에서 궤멸되었다. 독일군의 진격에 대한 측면에서의 위협은 일소되었다.

한편 만슈타인은 다우가프필스에 도착했다. 도시에서 5km 지점에서 기갑 부대는 진군을 멈추고, 노획한 적군의 대형 트럭 4대가 교량 확보에 나섰다. 적군 경비병은 위장한 독일군 특수 부대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고, 첫 번째 트럭은 쉽게 건너편에 도착했다. 두 번째 트럭은 경비병에게 저지당했고, 총격전이 시작되었다. 후방에 대기하고 있던 전차 부대가 급행하자, 적군 경비병은 교량을 폭파하기 전에 도주했고, 독일군은 단기간에 서부 드비나 강의 교량을 확보했다. 라이프슈타트는 첫 번째 장애물인 서부 드비나 강을 건너, 스탈린선 돌파에 전력을 쏟았다. 스탈린선은 콘크리트 건축물과 천연 장애물, 대전차 장애물, 지뢰밭, 방어진지, 토치카로 구성된 심층 방어 시스템이었고, 방어 진지는 매우 교묘하게 위장되어 있었다. 라이프슈타트는 후방 보병군이 기갑군에 따라잡을 때까지 기다렸다.

제18군, 제16군은 빠른 기갑 부대에 비해 진격 속도가 느렸다. 또한 그들의 부대에는 동부에서 민족 정화를 담당하는 친위대(SS) 특별 작전 부대(Einsatzgruppen A)가 동행하고 있었다. 제16군이 리투아니아의 수도 카우나스에 진입하자, 특별 작전 부대가 시내 유대인 학살을 시작했다. 리투아니아의 반소련 파르티잔이 특별 작전 부대에 협력하여 유대인 체포에 활약했다. 6월 26일, 1000명의 유대인이 시내에 모여 곤봉으로 살해되었다. 특별 작전 부대를 지휘하는 프란츠 발터 슈타이커 친위대 소장 겸 경찰 소장은 제16군 사령관 부시 장군과 개인적인 협정을 맺었고, 부시는 자정 작전에 대한 불개입을 약속했다. 슈타이커는 수일 만에 3800명의 유대인을 살해했다고 군 당국에 보고했고, 군 당국의 이해가 없으면 정화 작전의 원활한 수행은 어려웠다고 말하고 있다. 한편 국방군 장교들은 SS의 만행에 격분했다. 후방 군정국장 프란츠 폰 로크니스는 학살 현장을 시찰한 후, 부시 장군의 연루를 라이프슈타트 원수에게 직소했다. 라이프슈타트는 자신에게는 그러한 조치에 영향이 없으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문제에 접근하지 않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3. 2. 레닌그라드 요새 지대

1941년 6월 27일, 레닌그라드 의회는 민간인으로 구성된 "반격 그룹"을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다음 날, 레닌그라드 시민들은 위험 대상으로 통보받고 요새 건설에 동원되었다. 도시 경계를 따라 남쪽과 북쪽에서 몰려오는 적에 저항하기 위해 민간인들이 방어선을 구축했다.[168][143]

방어선은 남쪽에서 루가강에서 시작하여 추도보, 가치나, 우리츠크, 풀코보, 네바강까지 이어졌다. 다른 방어선은 페테르고프, 가치나, 풀코보, 콜피노, 콜트스키를 통과했다. 북쪽에서는 1930년대부터 레닌그라드 북부 교외에 있던 카렐리냐 요새 지역이 핀란드군을 방어하기 위해 다시 사용되었다. 총 190km의 목재 바리케이드, 635km의 철조망, 700km의 대전차 도랑, 5000km의 토재 및 목재 진지, 철근 콘크리트 진지, 25000km의 참호가 대부분 민간인에 의해 건설되었다. 러시아 순양함 오로라의 포는 레닌그라드 남쪽의 풀코보 고지로 이동했다.

4. 편제

1941년 북부 집단군의 소련 진격 지도. 산호색은 7월 9일까지, 분홍색은 9월 1일까지, 녹색은 12월 5일까지


레닌그라드 포위전 당시 참전한 병력은 다음과 같다.

레닌그라드 포위전 당시 양측 편제
북부 집단군 (원수 빌헬름 리터 폰 레프)[145]핀란드 방위군 본부 (핀란드 원수 만네르헤임)[146]북부 전선군 (중장 포포프)[147]



14 군은 무르만스크를, 7 군은 카렐리야 지역을 방어하고 있었기 때문에 초기 공세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8 군은 처음에는 북서부 전선군 소속으로 발트해를 통해 퇴각했으며, 7월 14일 북서부 전선군에서 북부 전선군으로 재배치되었다.

8월 23일, 북부 전선군은 레닌그라드 정면부 및 측면부로 나누어졌고, 본부는 무르만스크와 레닌그라드 사이 전선의 군들을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4. 1. 독일군

바르바로사 작전의 3가지 목표 중 하나였던 레닌그라드 점령은 북부 집단군의 주요 목표였다. 레닌그라드는 옛 러시아 수도로서 정치적 중심지이자 러시아 혁명의 상징적인 장소였고, 소련 발트 함대의 주요 거점으로 군사적 중요도가 높았으며, 산업 시설과 무기 공장이 모인 대도시였다.[130] 1939년부터 이 도시는 소련 산업 생산의 11%를 차지했다.[131] 아돌프 히틀러는 레닌그라드를 확실히 점령할 것이라 생각했고, 이미 호텔 아스토리아에서 개최될 승리 행사 초대장을 인쇄하고 있었다고 한다.[132]

나치 독일의 레닌그라드에 대한 궁극적인 계획은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소련 저널리스트 레프 베지멘스키는 "아돌프스부르크" 등으로 이름을 개칭하고[133] 제너럴플랜 오스트에 따라 제국의 새로운 잉에르만란드 주의 주도가 되며, 도시의 시민을 완전히 몰살할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9월 29일 북부 집단군에게 보낸 명령문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히틀러의 궁극적인 계획은 레닌그라드 지역을 완전히 파괴하고 네바강 북부의 영토는 핀란드에게 주는 것이었다.[135][136]

빌헬름 리터 폰 레프 휘하의 북부 집단군은 레닌그라드를 주 목표로 진격했다. 폰 레프의 계획은 도시로 이동하여 점령하는 것이었지만, 히틀러는 독일 참모총장 프란츠 할더가 페도르 폰 보크의 모스크바 공세를 지원하기 위해 남쪽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여 독일 4 기갑군을 후퇴시키고[137] 폰 레프는 라도가호 기슭에 도착하여 도시를 무한정 포위하기 시작했다.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휘하의 핀란드 육군은 레닌그라드 동부의 스비리강에서 대기하며 포위를 완료했다.[138]

독일군은 남쪽에서 영토를 점령하는 동안, 핀란드군은 레닌그라드 북부에 있었다. 독일군과 핀란드군 모두 레닌그라드를 포위하고 봉쇄 지역의 경계를 유지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고, 도시와의 모든 통신망을 차단하고 음식 및 보급품을 운반하는 기선 통행을 막았다. 독일군은 시민에 대한 최고의 무기가 음식이 될 것이라고 계획했다. 독일 과학자들은 레닌그라드가 몇 주 후에 기아 상태에 접어들 것이라고 예측했다.[168][164][139][140][141][142]

동프러시아의 4 기갑군은 프스코프까지 빠르게 진격하여 루가와 벨리키노브고로드 지역에 근접했고 레닌그라드가 작전 범위에 들어왔지만, 도시 남부에서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전진이 멈췄다. 그러나, 18 군은 약 35만 명이 뒤쳐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 북서부 전선군이 레닌그라드로 후퇴할 때 오스트로프와 프스코프로 진격했다. 7월 10일에는 오스트로프와 프스코프가 함락되었으며 18 군은 나르바킨기세프에 도착했고 루가강 방어선 곳곳에서 레닌그라드로 전진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는 핀란드만에서 라도가 호수로 전진함으로써 모든 방향에서 레닌그라드를 고립시킨다는 목표에 부합했다. 핀란드 육군은 라도가 호수 동부 연안을 따라 전진할 것으로 예상했다.[144]

1941년 당시 레닌그라드는 319만 명의 인구를 가진 소련 제2의 도시이자 최대의 무기 생산지였다. 독소전쟁 발발 당시에는 520개의 공장과 72만 명의 노동자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소련 전역 발전 설비의 8할을 레닌그라드에 의존하고 있었다. 또한 발트 함대의 근거지였으며, 북유럽 국가들에 대한 철광석 수입에 의존하던 독일에게 레닌그라드 점령은 경제 전략상 필수적이었다. 히틀러는 레닌그라드 점령을 작전의 최우선 목표로 삼고, 3개의 군 집단 중 북방군 집단에 공략을 명령했다.

북방군 집단은 다음과 같이 3개 군으로 구성되었다.

부대사령관구성
제18군게오르크 폰 퀴흘러제42군단(보병 사단 2개), 제26군단(보병 사단 3개)
제16군에른스트 부쉬 원수제28군단(보병 사단 2개, 기갑 사단 1개), 제1군단(보병 사단 2개), 제10군단(보병 사단 3개), 제2군단(보병 사단 3개), 제50군단(제9군 예하, 보병 사단 2개)
제4기갑군단에리히 회프너제38군단(보병 사단 1개), 제41기계화군단(보병 사단 1개, 기계화 사단 1개, 기갑 사단 1개), 제56기계화군단(보병 사단 1개, 기계화 사단 1개, 기갑 사단 1개, 기갑척탄병 사단 1개)

[26]

제16군 사령관 에른스트 부시 장군과 제18군 사령관 게오르크 폰 퀴흘러 장군은 열렬한 나치당원이었으며, 레닌그라드 점령은 이데올로기적 투쟁의 측면이 컸고, 히틀러는 사령관들을 신중하게 선택했다. 히틀러는 개전 직전 북방군 집단 사령부를 방문하여 “이는 지난 24년간 러시아인들을 지탱해 온 상징이다. 전투에서의 패배는 슬라브 민족의 정신을 꺾을 것이다. 그러나 레닌그라드 함락은 완전한 붕괴를 초래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레닌그라드 공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발트 국가들에서 레닌그라드에 이르는 광대한 공간에는 적군의 심층 방어 시스템이 전개되어, 북방군 집단의 임무에는 어려움이 예상되었다. 히틀러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의 마지노선을 돌파한 라이프슈타트 원수에게 북방군 집단의 지휘를 맡겼다. 라이프슈타트는 먼저 기갑 병력을 이분하여, 에리히 폰 만슈타인 상급 대장 지휘하의 제56기갑군단을 서부 드비나 강(서도비나 강)의 교량 확보에 보내고, 라인하르트 기갑 병대장 지휘하의 제41기갑군단에 국경에 집결해 있던 소비에트군 기갑 병력을 공격하게 했다. 라세이냐 근교에서 양군의 기갑 병력이 충돌하여 대규모 전차전이 전개되었다. 적군 최강의 중전차 KV-1, KV-2도 투입되었고, 그 성능은 독일군 장병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전차전 기술은 독일군이 능가했고, 독일군 전차 부대는 근거리 사격으로 소비에트의 중전차를 무력화시켜, 자군의 중포대가 대기하고 있는 매복 지점으로 유인했다. 총 200대의 KV-1과 KV-2가 파괴되었고, 발트 지역 소비에트 기갑 전력의 대부분이 이 한 번의 전투에서 궤멸되었다.

한편 만슈타인은 다우가프필스에 도착했다. 도시에서 5km 지점에서 기갑 부대는 진군을 멈추고, 노획한 적군의 대형 트럭 4대가 교량 확보에 나섰다. 적군 경비병은 위장한 독일군 특수 부대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고, 첫 번째 트럭은 쉽게 건너편에 도착했다. 두 번째 트럭은 경비병에게 저지당했고, 총격전이 시작되었다. 후방에 대기하고 있던 전차 부대가 급행하자, 적군 경비병은 교량을 폭파하기 전에 도주했고, 독일군은 단기간에 서부 드비나 강의 교량을 확보했다. 라이프슈타트는 첫 번째 장애물인 서부 드비나 강을 건너, 스탈린선 돌파에 전력을 쏟았다. 스탈린선은 콘크리트 건축물과 천연 장애물, 대전차 장애물, 지뢰밭, 방어진지, 토치카로 구성된 심층 방어 시스템이었고, 방어 진지는 매우 교묘하게 위장되어 있었다. 라이프슈타트는 후방 보병군이 기갑군에 따라잡을 때까지 기다렸다.

제18군, 제16군은 빠른 기갑 부대에 비해 진격 속도가 느렸다. 또한 그들의 부대에는 동부에서 민족 정화를 담당하는 친위대(SS) 특별 작전 부대(Einsatzgruppen A)가 동행하고 있었다. 제16군이 리투아니아의 수도 카우나스에 진입하자, 특별 작전 부대가 시내 유대인 학살을 시작했다. 리투아니아의 반소련 파르티잔이 특별 작전 부대에 협력하여 유대인 체포에 활약했다. 6월 26일, 1000명의 유대인이 시내에 모여 곤봉으로 살해되었다. 특별 작전 부대를 지휘하는 프란츠 발터 슈타이커 친위대 소장 겸 경찰 소장은 제16군 사령관 부시 장군과 개인적인 협정을 맺었고, 부시는 자정 작전에 대한 불개입을 약속했다. 슈타이커는 수일 만에 3800명의 유대인을 살해했다고 군 당국에 보고했고, 군 당국의 이해가 없으면 정화 작전의 원활한 수행은 어려웠다고 말하고 있다. 한편 국방군 장교들은 SS의 만행에 격분했다. 후방 군정국장 프란츠 폰 로크니스는 학살 현장을 시찰한 후, 부시 장군의 연루를 라이프슈타트 원수에게 직소했다. 라이프슈타트는 자신에게는 그러한 조치에 영향이 없으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문제에 접근하지 않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서부 드비나 강 우안의 교두보가 확장되면서, 레프는 스타린 선 돌파에 다시 기갑부대를 사용했다. 7월 2일, 라인하르트가 오스트로프를 함락시켰다. 적군은 기계화 부대를 오스트로프로 향하게 했으나, 매복해 있던 독일군의 榴彈砲(유탄포) 부대의 공격을 받아 140대의 전차가 파괴되었다. 7월 8일, 프스코프를 점령하여 스타린 선에 틈을 만들었고, 7월 11일, 춥스코예 호(페이프시 호)를 지나 브류싸 강의 교량을 확보했다. 라인하르트는 병사들을 고무시켜 더욱 진격하여 7월 13일, 레닌그라드의 관문인 루가 강(루가 강)에 교두보를 확보했다. 적군 수비대는 너무나 빠른 속도에 대응하지 못했고, 그 신속함은 정찰기가 라인하르트의 기갑부대를 아군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들은 3주 만에 800km를 진격하여 레닌그라드까지 110km 지점까지 접근했다. 그러나 다른 여러 군대는 진격이 난항을 겪었고, 제18군은 나르바의 적군 진지에 발이 묶였으며, 만슈타인은 지도에 없는 늪지대에 들어가 라인하르트보다 100km 뒤쳐졌다. 적군은 기갑부대가 움직일 수 없는 늪지대를 최대한 이용하여 만슈타인의 진격을 방해했다. 지형에 녹아든 적군 보병 부대는 독일군의 급조 진지에 교묘하게 잠입하여 집요하게 공격을 반복했다. 포병도 최전선에서 싸는 꼴이었고, 기관총 사격으로 포병의 희생이 잇따랐다. 기갑부대는 늪지대에서 원시적인 백병전을 강요받았고, 제8기갑사단이 고립되었다. 만슈타인은 증원을 투입하여 제8기갑사단을 구출하고 겨우 늪지대를 빠져나왔지만, 제8기갑사단은 전차의 절반을 잃었다. 루가 강 건너편을 확보한 라인하르트 역시 작전 가능한 전차가 50대로 격감하여 더 이상의 진격은 어려웠다. 기갑부대의 소모는 독일군의 전략을 전환시켰고, 확보한 교두보의 수비에 전력을 다하고 추가 진격은 보류되었다.

7월 19일, 히틀러는 총통 지령 제33호를 발령하여 북방군 집단의 전투력을 칭찬하면서 기갑부대의 재진격은 보병군이 따라잡을 때까지 기다리도록 못 박았다. 적군의 완강한 저항과 전투의 격화는 인종적 편견을 증폭시켰다. 각 부대에서 항복한 적군 포로를 사살하는 학살 사건이 발생하여, 제16군은 포로에 대한 폭행을 금지하는 이례적인 포고를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막대한 적군 포로는 도보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인종적 편견 때문에 차량을 오염시킬 것이라는 우려로, 제16군 사령부는 포로를 열차로 수송하는 것을 금지했다. 군에 동행하는 특별 행동대도 임무를 확장하여 유대인과 정치위원 외에 소련 고관, 재계 거물, 지방 유력자, 지식인을 “정화” 대상으로 학살했다. 제4기갑집단의 헵너 상급대장은 특별 행동대에 전면적으로 협력했고, 라인하르트가 루가 지역을 장악하자 대규모 SS 특수부대가 그곳으로 파견되었다. 레닌그라드 돌입에 대비하여, 시내의 정화 대상이 결정되었고, 정보 수집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제18군이 루가 강에 도달하고 제16군이 일리멘 호에 우회하자, 8월 2일, 기갑부대는 진격을 재개했다. 라인하르트 앞에 적군의 2개 보병사단이 나타나 완강하게 저항했다. 너무나 치열한 전투에 특별 행동대까지 전투에 참여하여 12일간의 전투 끝에 겨우 저항선을 돌파할 수 있었다. 한편 적군은 드멥얀스크를 탈취하여 일리멘 호와 춥스코예 호의 협로를 봉쇄하고 독일군을 분단하는 반격 계획을 세웠다. 스타라야 루싸를 공격 중이던 제16군의 측면에 9개 보병사단, 1개 기계화 군단, 1개 기병사단을 투입하여 4개 보병사단을 일리멘 호에 포위했다. 헵너는 삼로 호에 도달한 만슈타인에게 제16군의 구원을 명령했고, 만슈타인은 일리멘 호로 급파되었다. 현장에 도착한 만슈타인은 고립된 4개 보병사단(1개 사단으로 감소)에 반격을 명령하고, 스스로 기갑부대를 지휘하여 적군의 후방에 돌입했다. 적군은 와해되어 패주했고, 만슈타인은 동쪽에서 레닌그라드에 접근하여 보급로를 차단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일리멘 호에서의 승리 후, 독일군은 소모가 심한 도시 공격전을 피하고 보급로를 차단하는 봉쇄전으로 전략을 전환했다. 만슈타인의 제56기갑군단과 제16군은 쾌진격을 계속하여 노브고로드, 추도보, 므가를 함락시키고 동쪽에서 레닌그라드에 접근했다. 서쪽에서는 라인하르트가 지휘하는 제41기갑군단이 접근했고, 9월 8일에는 레닌그라드와 내륙을 연결하는 라도가 호 언덕의 슐리셀부르크가 함락되어 모든 연락로와 보급로가 끊겼다. 북쪽에서는 겨울 전쟁의 설욕에 불타는 핀란드군이 봉쇄에 참여했다. 6월 26일, 핀란드는 소련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고 겨울 전쟁 때 소련에 빼앗긴 카렐리야 지방에 침공했다(계속 전쟁). 핀란드군은 9월 7일까지 레닌그라드 북쪽 160km까지 도달했지만, 겨울 전쟁 이전의 국경선을 넘어 진격하는 것은 삼갔다. 9월 4일, 독일군의 알프레트 요들은 핀란드군 총사령관 카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을 방문하여 레닌그라드 공격을 요청했지만, 만네르하임은 이를 거절했다. 그 후에도 독일군과 핀란드군 간의 연락이 완료되는 일은 없었다.

4. 2. 핀란드군

1942년, 이마트라에서 히틀러와 핀란드의 원수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핀란드 대통령 리스토 뤼티와 만난 모습.


1941년 8월부터 핀란드군은 1939년 당시의 핀란드-소련 국경으로 진출하며 레닌그라드 북부 20km까지 도달하여 도시를 위협했다. 이 외에도, 핀란드군은 동카렐리야, 라도가 호수 동부를 점령하며 동부에서 도시를 위협했다. 핀란드군은 겨울 전쟁 이전의 국경인 카렐리야 지협에 도달해 벨로스트로프와 북 잉그니아의 소련군 돌출부를 제거했으며, 전선을 곧게 만들어 핀란드 만의 해안부터 라도가 호수까지 이어지는, 겨울 전쟁 이전 국경을 따라 전선이 유지되었다.[148] 각 목표를 달성한 이후, 핀란드는 전진을 중지하고 동카렐리야로 병력을 옮기기 시작했다.[149][150]

이후 3년 동안 핀란드군은 이 선을 유지하며 레닌그라드 포위에 참여하지 않았다.[151] 핀란드 사령부는 레닌그라드를 공격하는 독일의 공격 계획을 거부하고[152] 1941년 9월 7일 스비리강 남부로 전진하지 않은 채 동카렐리야를 점령했다(레닌그라드 동부 160km).

1941년 9월 6일, 독일 참모 총장 알프레트 요들은 헬싱키를 방문하여 만네르헤임이 공세를 재개하도록 설득하려 했다. 같은 해, 핀란드의 대통령 리스토 뤼티핀란드 의회에서 이 전쟁의 목적은 겨울 전쟁 기간 동안 핀란드가 잃은 영토를 다시 얻고 동부 영토를 합병하여 대핀란드를 만드는 것이라고 연설했다.[153][154][155] 전쟁 이후, 리티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41년 8월 24일, 나는 만네르헤임 원수의 지휘본부에 갔다. 독일군은 계속 국경을 넘어와 레닌그라드를 계속 공격하라고 압박하고 있었다. 나는 레닌그라드 점령이 우리의 목표가 아니며 우리가 거기에 참여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마네르하임과 국방장관 월든은 내 의견에 동의하고 독일군의 제안을 거부했다."

핀란드군의 위치는 레닌그라드 시내로부터 33km~35km 떨어진 곳에 위치했으며, 핀란드군의 공격 위협은 도시 방어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방어중인 전선군 사령관 마키안 포포프는 독일군이 카렐리야 지협에서 23군이 방어하기 위해 핀란드군 증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핀란드군의 배치 해제를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156] 만네르헤임은 1939년 국경에 도달한 1941년 8월 31일 공격을 종료하였다. 포포프는 안심하였고, 9월 5일 독일군이 위치한 곳으로 2개 사단을 증원하였다.[157]

이후, 핀란드군은 벨로스트로프와 키르야셀로의 포위망을 풀었고,[158] 이는 부오크시 강 남부와 해안 사이를 위협하는 위치였다.[158] 핀란드 해안 여단의 총지휘관인 중장 파보 타르벨라와 대령 야르비넌은 독일 사령부에서 라도가 호수의 생명의 길을 차단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독일 사령부는 독일 사령부 하 아인사트크사탑 퓌레 오스트(Einsatzstab Fähre Ost)와 핀란드군, 이탈리아 12 공격차량중대를 포함한 K 해군 파견대(Naval Detachment K)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해군 병력은 1942년 여름과 가을 동안 보급로 공격 작전에 이용했지만, 물이 어는 기간 동안 경기계화 장비로 멀리 이동하여 공격해야 했고 전선의 변화로 인해 나중에는 이 군들을 재편성하는 것이 더욱 효율적이었다.[159][160][161]

핀란드 국방군 사령부 (핀란드 원수 만네르헤임)[27] 휘하 병력은 다음과 같았다.

군단구성
제1군단보병 사단 2개
제2군단보병 사단 2개
제4군단보병 사단 3개


4. 3. 붉은 군대

동프러시아의 4 기갑군은 프스코프까지 빠르게 전진하여 루가와 벨리키노브고로드 지역에 근접했다. 그러나 레닌그라드 남부에서 강력한 저항으로 인해 전진이 멈췄다.[144] 18 군은 약 35만 명이 뒤쳐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 북서부 전선군이 레닌그라드로 후퇴할 때 오스트로프와 프스코프로 진격했다.[144] 7월 10일, 오스트로프와 프스코프가 함락되었고, 18군은 나르바킨기세프에 도착하여 루가강 방어선 곳곳에서 레닌그라드로 진격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144] 이는 핀란드만에서 라도가 호수로 진격하여 모든 방향에서 레닌그라드를 고립시킨다는 목표와 일치했다. 핀란드 육군은 라도가 호수 동부 연안을 따라 진격할 것으로 예상되었다.[144]

개전 전 발트 함대 사령관 블라디미르 트리부츠 해군 중장은 독일인 노동자들의 철수와 국경에서의 정찰 정보를 통해 독일군의 침공을 감지하고, 모스크바의 해군 인민위원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제독에게 전투 경계 명령 발령을 촉구했다.[144] 그날 안으로 발트 함대, 흑해 함대, 북방 함대에 제2종 전투 경계 명령이 발령되었지만, 트리부츠가 요구한 제1종 전투 경계 명령은 거부되었다.[144] 1941년 6월 22일, 독소 국경 부근에 배치되어 있던 소련군에 국방 인민위원으로부터 제1종 전투 경계 명령이 발령되었지만, 이미 독일군의 침공은 시작된 후였다.[144] 발트 지역을 방어하는 북서 방면군은 3개 방면군 중 가장 약했고, 3개 군, 2개 기계화 군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서 드비나 강의 교량 폭파를 명령받은 제11군은 폭파할 틈도 없이 후퇴했고, 북서 방면군 사령부는 체계적인 통신 혼란과 전력 부족으로 조직적인 반격을 수행할 수 없었다.[144]

5. 포위

레닌그라드 포위전은 바르바로사 작전의 주요 목표 중 하나로, 아돌프 히틀러는 이 도시를 점령하여 볼셰비즘의 상징을 파괴하고 소련 발트 함대의 거점을 없애려 했다.[130] 히틀러는 레닌그라드를 완전히 파괴하고 네바강 북쪽 영토를 핀란드에 넘기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135][136]

1941년 9월 29일, 북부 집단군에 보낸 명령문에 따르면, 히틀러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패배 이후, 이 큰 도시 중앙에 대한 지속적인 유지 여부는 관심이 없을 수 있다. [...] 도시를 포위한 이후, 인구 재배치와 공급 문제는 우리가 해결할 할 수 없고 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항복 협상 요청은 거부해야 한다."라고 밝혔다.[134]

독일군은 레닌그라드를 포위하고 주민들을 굶주리게 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1941년 9월 8일 폭격으로 178건의 화재가 발생했으며,[34] 독일 최고 사령부는 도시 점령 대신 포위와 폭격을 통해 주민들을 굶주리게 하는 방안을 채택했다.[35] 1941년 10월 7일, 히틀러는 항복을 받아들이지 말라는 추가 지령을 내렸다.[37]

레닌그라드 방어를 위해 민간인들이 동원되어 방어선을 구축했다. 1941년 6월 27일, 레닌그라드 의회는 민간인 "반격 그룹"을 조직하고, 다음날 민간인 전체를 위험 대상으로 통보하여 요새 건설에 동원했다. 방어선은 도시 경계를 따라 구축되었으며, 남쪽 방어선은 루가강에서 네바강까지, 북쪽 방어선은 카렐리냐 요새 지역을 활용했다.[168][143]

개전 직후, 루가강을 따라 제2방어선이 구축되었고, 수십만 명의 레닌그라드 시민들이 동원되어 지뢰밭, 대전차호, 진지 등을 건설했다. 루가 방어선은 독일군의 공세를 한 달간 저지했지만, 1941년 8월 13일 킨기세프와 노브고로드가 함락되면서 돌파되었다.[116]

레닌그라드 방어의 군사 부문 최고 사령관은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원수였으나, 1941년 9월 11일 게오르기 주코프 상장으로 교체되었다.[118]

레닌그라드 성 이사악 성당 앞에서 경계 중인 소련 대공포.


북부 전선군 (중장 포포프)[147] 예하 부대는 다음과 같다.

부대구성
7 군2개 소총병 사단, 1개 의용군 사단, 1개 해병 여단, 3개 기계화 소총병 및 1개 기갑 연대
8 군10 소총병 군단 (2개 소총병 사단)
11 소총병 군단 (3개 소총병 사단)
독립 부대 (3개 소총병 사단)
14 군42 소총병 군단 (2개 소총병 사단)
독립 부대 (2개 소총병 사단, 1개 요새화 지역, 1개 기계화 소총병 연대)
23 군19 소총병 군단 (3개 소총병 사단)
독립 부대 (2개 소총병 사단, 1개 기계화 사단, 2개 요새화 지역, 1개 소총병 연대)
루가 작전 집단군41 소총병 군단 (3개 소총병 사단)
독립 부대 (1개 기계화 여단, 1개 소총병 연대)
킨기세프 작전 집단군독립 부대 (2개 소총병 사단, 2개 의용군 사단, 1개 기갑 사단, 1개 요새 지역)
독립 부대3개 소총병 사단, 4개 수비 사단, 3개 요새화 지역, 1개 소총병 여단



1941년 9월 1일, 레닌그라드 전선 참호에서 데그챠레프 경기관총으로 무장한 두 소련군.


1941년 9월부터 키릴 메레츠코프가 지휘하는 볼호프 전선군은 포위되었고, 4개 방어 지역(북부 23 군, 서부 42 군, 남부 55 군, 동부 67 군)으로 나뉘었다. 8 군은 라도가 함대와 함께 도시의 유일한 보급로인 생명의 길을 지켰다. 제6항공군 레닌그라드 지구 PVO 군단과 발트 함대 항공대가 항공 방어를 담당했다.

5. 1. 통신선 차단

빌헬름 리터 폰 레프 휘하의 북부 집단군은 레닌그라드를 주 목표로 삼아 진격했다. 폰 레프는 도시를 점령하려 했으나, 히틀러는 프란츠 할더의 주장을 받아들여 4 기갑군을 후퇴시키고[137] 폰 레프에게는 도시를 포위하도록 했다.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휘하의 핀란드 육군은 레닌그라드 동쪽 스비리강에서 대기하며 포위망을 완성했다.[138]

독일군은 남쪽에서 영토를 점령했고, 핀란드군은 레닌그라드 북쪽에 있었다. 이들은 레닌그라드를 포위하고 봉쇄하여 도시와의 모든 통신을 차단하고 보급품 수송을 막는 것을 목표로 했다. 독일군은 시민들에게 가장 큰 무기가 식량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레닌그라드가 몇 주 안에 기아 상태에 빠질 것이라고 예측했다.[168][164][139][140][141][142]

동프러시아에서 4 기갑군은 프스코프까지 빠르게 진격하여 루가와 벨리키노브고로드 지역에 근접했다. 그러나 도시 남부에서 강력한 저항으로 진격이 멈췄다. 18 군은 소련군 약 35만 명이 후퇴하는 와중에도 오스트로프와 프스코프를 점령하고 나르바킨기세프에 도착, 루가강 방어선에서 레닌그라드로 진격하려 했다. 이는 핀란드만에서 라도가 호수까지 진격하여 레닌그라드를 완전히 고립시키는 목표에 따른 것이었다. 핀란드 육군은 라도가 호수 동부 연안을 따라 진격할 것으로 예상되었다.[144]

핀란드 정보 당국은 소련 군사 암호 일부를 해독하여 정보를 얻었고, 이는 히틀러에게 유용하게 사용되었다.[32] 핀란드의 역할은 히틀러의 '21호 지령'에 명시되어 있었는데, 핀란드군은 라도가 호 서쪽 또는 양쪽에서 공격하여 최대한 많은 소련군을 묶어두는 임무를 맡았다.[33] 1941년 8월 30일, 독일군이 네바 강에 도달하면서 레닌그라드로 가는 마지막 철도 연결이 끊겼다. 1941년 9월 8일, 독일군이 슐리셀부르크에서 라도가 호에 도달하면서 포위된 도시로 가는 도로가 끊겼고, 라도가 호와 레닌그라드 사이의 좁은 육지만이 추축국에 점령되지 않은 채 남았다.

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드를 포위하고 주민들의 생활을 어렵게 만들기 위해 가스, 상하수도, 전력 공급 시설, 식량 창고를 포격했다. 독일 공군은 에스토니아의 비행장에서 출격하여 6000발 이상의 소이탄과 1000파운드급 고성능 폭탄 48발을 투하했다. 이로 인해 급수 시설과 시내의 모든 식량을 비축하고 있던 부터예프 창고가 파괴되어 식량 사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독일군 참모본부는 뮌헨 영양 연구소의 에른스트 찌겔마이어 교수와 회합하여 레닌그라드 시민을 굶주리게 하려면 얼마나 오랫동안 봉쇄해야 하는지 예측했다. 찌겔마이어는 방대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봉쇄를 한 달간 지속하면 빵 배급량이 하루 250그램으로 떨어지고, 겨울까지 봉쇄가 계속되면 기아 상태에 빠질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북부집단군은 대규모 포위 진지를 건설하고 참호, 감시소, 사격 진지, 포격 진지 등을 설치하여 장기적인 포위전에 대비했다. 가치나에 사령부를 둔 레프는 시내 포격을 지휘했다. 울리츠크와 볼로다르스키 사이 마을에 배치된 3개 포병 연대는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2시간마다 휴식을 취하며 포격을 실시했고, 1941년 9월 말까지 5364발의 포탄이 발사되었다.

5. 2. 핀란드군의 참여



1941년 8월, 핀란드군은 1939년 당시 핀란드-소련 국경에서 레닌그라드 북쪽 20km까지 진격하여 북쪽에서 도시를 위협했다. 또한 동카렐리야, 라도가 호 동부를 점령하며 동쪽에서 도시를 위협했다. 핀란드군은 겨울 전쟁 이전 국경인 카렐리야 지협에 도달해 벨로스트로프와 북 잉그니아의 소련군 돌출부를 제거하고, 핀란드 만 해안부터 라도가 호수까지 이어지는, 겨울 전쟁 이전 국경을 따라 전선을 정비했다. 레닌그라드에서 가장 가까운 핀란드군 위치는 여전히 겨울 전쟁 이전 국경에 있었다.[148] 소련은 9월부터 핀란드군이 카렐리야 방어 사단에 대한 공격을 중단했다고 주장했지만, 핀란드군은 1941년 8월 이전에 이미 목표 달성 후 추가 진격을 멈춘 상태였으며, 일부 부대는 겨울 전쟁 이전 국경 너머에 있기도 했다. 목표 달성 후, 핀란드는 진격을 멈추고 동카렐리야로 병력을 이동하기 시작했다.[149][150]

이후 3년간 핀란드군은 전선을 유지하며 레닌그라드 포위에 소극적으로 참여했다.[151] 핀란드 사령부는 레닌그라드 공격 계획을 거부하고[152] 9월 7일 동카렐리야(레닌그라드 동쪽 160km) 스비리강 남쪽으로 더 진격하지 않았다.[168][143] 11월 8일 독일군이 티흐빈을 점령했지만, 스비리 강 핀란드군과 합류하지 못해 레닌그라드 완전 포위에 실패했다. 12월 9일, 볼호프 전선군 반격으로 독일군은 볼호프강으로 후퇴했다.[168][143]

1941년 9월 6일, 독일 참모총장 알프레트 요들이 헬싱키를 방문해 만네르헤임에게 공세 재개를 설득하려 했다. 같은 해 리스토 뤼티 핀란드 대통령은 핀란드 의회에서 겨울 전쟁에서 잃은 영토 회복과 동부 영토 합병을 통한 대핀란드 건설이 전쟁 목표라고 연설했다.[153][154][155] 전후 뤼티는 "1941년 8월 24일 만네르헤임 원수 본부를 방문했을 때, 독일군은 국경을 넘어 레닌그라드 공격을 계속하라고 압박했다. 나는 레닌그라드 점령은 우리 목표가 아니며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만네르헤임과 루돌프 발덴 국방장관도 동의하여 독일군 제안을 거부했다. 그 결과 독일군은 북쪽에서 레닌그라드에 접근할 수 없는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했다."라고 회고했다. 1944년 1월까지 독일군과 핀란드군은 포위망을 유지했지만, 핀란드군은 체계적인 포격이나 폭격 작전에 참여하지 않았다.

핀란드군 위치는 레닌그라드 도심에서 33~35km 거리로, 핀란드군 공격 위협은 도시 방어를 복잡하게 했다. 방어 전선 사령관 마키안 포포프는 카렐리야 지협에서 23군 방어 강화를 위해 핀란드군에 맞설 예비군을 독일군에 투입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156] 만네르헤임은 1941년 8월 31일 1939년 국경 도달 후 공격 중단을 명령했고, 포포프는 안도하며 9월 5일 2개 사단을 독일군 지역으로 재배치했다.[157]

이후 핀란드군은 벨로스트로프와 키르야셀로 돌출부를 축소하여[158] 부오크시 강 남부와 해안 사이 위치를 위협했다.[158] 핀란드 해안 여단장 파보 타르벨라 중장과 야르비넌 대령은 독일 사령부에 라도가 호수 생명의 길 차단을 제안했다. 독일 사령부는 독일군 지휘 하 아인사트크사탑 퓌레 오스트(Einsatzstab Fähre Ost), 핀란드군, 이탈리아 12 공격차량중대를 포함한 K 해군 파견대(Naval Detachment K)를 편성했다. 이 해군 부대는 1942년 여름과 가을 보급로 공격 작전에 투입되었으나, 결빙으로 인한 장비 이동 문제와 전선 변화로 인해 부대 재편성이 더 효율적이었다.[159][160][161]

5. 3. 방어 작전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원수 휘하의 북부 집단군은 레닌그라드를 주요 목표로 진격했다. 폰 레프의 원래 계획은 도시를 점령하는 것이었지만, 히틀러는 프란츠 할더 참모총장의 주장을 받아들여 제4기갑군을 페도르 폰 보크 원수의 모스크바 공세 지원을 위해 남쪽으로 이동시키도록 명령했다.[137] 이로 인해 폰 레프는 라도가호 기슭에 도착하여 도시를 무기한 포위하게 되었고,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원수 휘하의 핀란드 육군은 레닌그라드 동쪽의 스비리강에서 대기하며 포위망을 완성했다.[138]

독일군은 남쪽에서 영토를 점령하고, 핀란드군은 레닌그라드 북쪽에 위치했다. 양측 모두 레닌그라드를 포위하고 봉쇄 지역의 경계를 유지하며 도시와의 모든 통신망을 차단하고, 식량 및 보급품을 운반하는 기선의 통행을 막는 것을 목표로 했다. 독일군은 시민에 대한 최고의 무기가 식량이 될 것이라고 계획했으며, 독일 과학자들은 레닌그라드가 몇 주 안에 기아 상태에 빠질 것이라고 예측했다.[168][164][139][140][141][142]

1941년 6월 27일, 레닌그라드 의회는 첫 민간인 "반격 그룹"을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다음날, 레닌그라드 민간인 전체가 위험 대상으로 통보받고 요새 건설에 동원되었다. 방어선은 남쪽과 북쪽에서 몰려오는 적의 저항을 막기 위해 도시 경계를 따라 민간인들이 방어하는 선으로 구축되었다.[168][143]

남쪽 방어선은 루가강에서 시작하여 추도보, 가치나, 우리츠크, 풀코보, 네바강까지 이어졌다. 다른 방어선은 페테르고프, 가치나, 풀코보, 콜피노, 콜트스키를 통과했다. 북쪽의 핀란드군을 방어하는 선은 카렐리냐 요새 지역으로, 1930년대부터 레닌그라드 북부 교외에 있었고 다시 사용되기 시작했다. 총 방어선은 190km의 목재 바리케이드, 635km의 철조망, 700km의 대전차 도랑, 5000km의 토목 및 목재 진지, 철근 콘크리트 진지, 25000km의 참호로 구성되었으며, 대부분 민간인이 건설했다. 러시아 순양함 오로라의 함포는 레닌그라드 남쪽 풀코보 고지로 이동했다.

개전 직후, 제2방어선은 루가강(루가천)을 따라 구축하기로 결정되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수십만 명의 레닌그라드 시민들이 동원되어 북쪽의 나르바, 킨기세프, 루가, 남쪽의 일리메니 호변의 시므스크에 이르는 200마일(약 320km)에 걸쳐 지뢰밭, 대전차호, 진지 등으로 이루어진 루가 방어선의 건설이 진행되었다. 거기에는 시민들로부터 모집된 많은 의용군 부대도 배치되었다. 루가 방어선은 독일군 망슈타인 부대에 큰 피해를 입히는 등 독일군의 공세를 7월 상순부터 8월 상순까지 약 1개월간 저지했지만, 8월 13일 킨기세프와 일리메니 호 바로 북쪽의 노브고로드가 함락되면서 루가 방어선은 돌파되었다.[116] 루가 방어선이 돌파됨에 따라 발트 함대의 기지가 있던 탈린은 전선 후방에 고립되는 상황이 되었다. 8월 26일 발트 함대의 탈린 철수 명령이 내려졌고, 190척이 넘는 함선이 코트린 섬의 크론슈타트로 향했으나, 독일군이 매설한 기뢰와 포격으로 50척이 넘는 함선이 손실되었다.[119] 그러나 그 후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탈출에 성공한 함선들의 함포는 큰 역할을 하게 된다.

  • 북부 전선군 (중장 포포프)[147]

부대구성
7 군2개 소총병 사단, 1개 의용군 사단, 1개 해병 여단, 3개 기계화 소총병 및 1개 기갑 연대
8 군10 소총병 군단 (2개 소총병 사단)
11 소총병 군단 (3개 소총병 사단)
독립 부대 (3개 소총병 사단)
14 군42 소총병 군단 (2개 소총병 사단)
독립 부대 (2개 소총병 사단, 1개 요새화 지역, 1개 기계화 소총병 연대)
23 군19 소총병 군단 (3개 소총병 사단)
독립 부대 (2개 소총병 사단, 1개 기계화 사단, 2개 요새화 지역, 1개 소총병 연대)
루가 작전 집단군41 소총병 군단 (3개 소총병 사단)
독립 부대 (1개 기계화 여단, 1개 소총병 연대)
킨기세프 작전 집단군독립 부대 (2개 소총병 사단, 2개 의용군 사단, 1개 기갑 사단, 1개 요새 지역)
독립 부대3개 소총병 사단, 4개 수비 사단, 3개 요새화 지역, 1개 소총병 여단



이들 중 14 군은 무르만스크를, 7 군은 카렐리야 지역을 방어하고 있었기 때문에 초기 공세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8 군은 처음에는 북서부 전선군 소속으로 발트해를 통해 후퇴하다가 7월 14일 북부 전선군으로 재배치되었다.

8월 23일, 북부 전선군은 레닌그라드 전선군과 측면부로 분리되었고, 본부는 무르만스크와 레닌그라드 사이 전선의 군들을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레닌그라드 전선군(초기에는 레닌그라드 군관구)은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원수가 지휘했다. 이 전선군은 핀란드 만과 라도가 호수 사이 북부 지역의 23 군과 핀란드 만과 파블롭스크-므가 서부 지역의 48 군을 포함했다. 레닌그라드 요새 지역, 레닌그라드 주둔군, 발트 함대, 코포레 남부 풀코보 고지-술레츠크-콜피노 지역 작전 그룹도 포함되었다.

1941년 9월부터 키릴 메레츠코프가 지휘하는 볼호프 전선군은 포위되었고, 4개 방어 지역으로 나뉘었다. 북부 지역은 23 군, 서부 지역은 42 군, 남부 지역은 55 군, 동부 지역은 67 군이 맡았다. 볼호프 전선군의 8 군은 라도가 함대와 함께 도시의 유일한 보급로를 지키는 역할을 맡았다. 제6항공군 레닌그라드 지구 PVO 군단과 발트 함대 항공대가 항공 방어를 담당했다.

140만 명 정도 되는 민간인 피난을 보호하는 방위 작전은 레닌그라드 반격 작전의 일부로 구상되었고, 안드레이 즈다노프,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알렉세이 쿠즈네초프가 맡았다. 우라지미르 트리부츠가 지휘하는 발트 함대의 해군도 추가적인 작전을 펼쳤다.

6. 도시 방어

빌헬름 리터 폰 레프가 이끄는 북부 집단군은 레닌그라드를 주요 목표로 진격했다. 폰 레프는 도시 점령을 계획했으나, 히틀러는 프란츠 할더의 주장을 받아들여 4 기갑군을 페도르 폰 보크의 모스크바 공세를 지원하기 위해 남쪽으로 이동시켰다.[137] 폰 레프는 라도가호 기슭에 도착하여 도시를 무기한 포위하기 시작했고,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휘하의 핀란드 육군은 레닌그라드 동쪽 스비리강에서 대기하며 포위를 완료했다.[138]

독일군은 남쪽에서 영토를 점령했고, 핀란드군은 레닌그라드 북쪽에 있었다. 독일군과 핀란드군은 모두 레닌그라드를 포위하고 봉쇄 지역의 경계를 유지하며, 도시와의 모든 통신망을 차단하고 음식 및 보급품을 운반하는 기선 통행을 막는다는 목표를 공유했다. 독일군은 시민에 대한 최고의 무기가 식량이 될 것이라고 계획했으며, 독일 과학자들은 레닌그라드가 몇 주 안에 기아 상태에 빠질 것이라고 예측했다.[168][164][139][140][141][142]

1941년 6월 27일, 레닌그라드 의회는 민간인으로 구성된 "반격 그룹"을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다음날 레닌그라드 민간인 전체는 위험 대상으로 통보되었고 요새 건설에 동원되었다. 방어선은 남쪽과 북쪽에서 몰려오는 적을 막기 위해 도시 경계를 따라 민간인들이 방어하는 선으로 이루어졌다.[168][143]

남쪽 방어선은 루가강에서 시작하여 추도보, 가치나, 우리츠크, 풀코보, 네바강까지 이어졌다. 다른 방어선은 페테르고프, 가치나, 풀코보, 콜피노, 콜트스키로 이어졌다. 북쪽에서 핀란드군을 방어하는 선은 카렐리냐 요새 지역으로 1930년대 이후 레닌그라드 북부 교외에 있었고 다시 사용되었다. 총 방어선은 190km의 목재 바리케이드, 635km의 철조망, 700km의 대전차 도랑, 5000km의 토목 및 목재 진지, 철근 콘크리트 진지, 25000km의 참호로 구성되었으며, 이들 대부분은 민간인이 건설했다. 러시아 순양함 오로라의 포는 레닌그라드 남쪽 풀코보 고지로 이동했다.

레닌그라드 전선군(초기 레닌그라드 군사 지구)은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원수가 지휘했다. 핀란드 만과 라도가 호수 사이 북부 지역의 23 군, 핀란드 만과 파블롭스크-므가 서부 지역의 48 군을 포함하며, 레닌그라드 요새 지역, 레닌그라드 주둔군, 발트 함대, 코포레 남부 풀코보 고지-술레츠크-콜피노 지역 작전 그룹도 포함되었다.

이후 도시 방어는 여러 지역으로 분할되어 각 군이 담당했다.


  • 북부 지역: 23 군
  • 서부 지역: 42 군
  • 남부 지역: 55 군
  • 동부 지역: 67 군


볼크호브 전선군 8 군은 라도가 함대와 함께 도시의 유일한 보급로를 지켰다. 6 항공군 레닌그라드 지구 PVO 군단과 발트 함대 항공대가 항공 방어를 맡았다.

6. 1. 민간인 피난 방위

1941년 6월 27일, 레닌그라드 의회는 민간인으로 구성된 "반격 그룹"을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다음 날, 레닌그라드 민간인 전체에게 위험이 통보되었고, 요새 건설에 동원되었다. 방어선 몇몇 곳은 남쪽과 북쪽에서 몰려오는 적을 막기 위해 도시 경계를 따라 민간인들이 방어하는 선으로 이루어졌다.[168][143]

방어선은 남쪽과 북쪽에 각각 설치되었다.

  • 남쪽 방어선: 루가강에서 시작하여 추도보, 가치나, 우리츠크, 풀코보, 네바강까지 이어졌다. 다른 부분은 페테르고프, 가치나, 풀코보, 콜피노, 콜트스키로 이어졌다.
  • 북쪽 방어선: 카렐리냐 요새 지역으로, 1930년대부터 레닌그라드 북부 교외에 있었으며 다시 사용하기 시작했다.


총 방어선은 190km의 목재 바리케이드, 635km의 철조망, 700km의 대전차 도랑, 5000km의 토재 및 목재 진지 및 철근 콘크리트 진지, 25000km의 참호로 이루어졌으며, 이들 대부분은 민간인이 건설했다. 러시아 순양함 오로라의 포는 레닌그라드 남쪽의 풀코보 고지로 이동했다.

140만 명 정도 되는 민간인 피난을 보호하는 방위 작전은 레닌그라드 반격 작전의 일부로 구상되었고, 안드레이 즈다노프,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알렉세이 쿠즈네초프가 작전을 맡았다. 블리다미르 트리부츠가 지휘하는 발트 함대의 해군도 추가적인 작전을 펼쳤다.

6. 2. 포격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원수 휘하의 북부 집단군은 레닌그라드를 주 목표로 삼아 진격했다. 폰 레프는 도시 점령을 계획했으나, 프란츠 할더 참모총장의 의견에 따라 히틀러는 제4 기갑군을 페도르 폰 보크의 모스크바 공세 지원을 위해 남쪽으로 이동시켰다.[137] 폰 레프는 라도가호 기슭에 도착하여 도시를 무기한 포위하기 시작했고,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휘하의 핀란드 육군은 레닌그라드 동쪽 스비리강에서 대기하며 포위를 완료했다.[138]

독일군은 남쪽에서 영토를 점령했고, 핀란드군은 레닌그라드 북쪽에 위치했다. 양측 모두 레닌그라드를 포위하고 봉쇄 경계를 유지하며 도시와의 모든 통신망을 차단하고 보급품 수송을 막는 것을 목표로 했다. 독일군은 시민들에게 가장 큰 무기가 식량이 될 것이라고 계획했고, 독일 과학자들은 레닌그라드가 몇 주 안에 기아 상태에 빠질 것이라고 예측했다.[168][164][139][140][141][142]

1941년 6월 27일, 레닌그라드 의회는 민간인으로 구성된 "반격 그룹"을 조직했다. 다음날 레닌그라드 민간인들은 위험 대상으로 통보되어 요새 건설에 동원되었다. 방어선은 남쪽과 북쪽으로 몰려오는 적을 막기 위해 도시 경계를 따라 민간인들이 방어하는 선으로 구축되었다.[168][143]

남쪽 방어선은 루가강에서 추도보, 가치나, 우리츠크, 풀코보, 네바강까지 이어졌다. 다른 방어선은 페테르고프, 가치나, 풀코보, 콜피노, 콜트스키를 연결했다. 북쪽의 핀란드군을 방어하는 카렐리냐 요새 지역은 1930년대부터 레닌그라드 북부 교외에 있었고 다시 사용되었다. 총 방어선은 190km의 목재 바리케이드, 635km의 철조망, 700km의 대전차 도랑, 5000km의 토목 및 목재 진지, 철근 콘크리트 진지, 25000km의 참호로 구성되었고, 대부분 민간인이 건설했다. 러시아 순양함 오로라의 포는 레닌그라드 남쪽 풀코보 고지로 이동했다.

1941년 9월 10일, 독일군 포격 중 부상자를 돌보는 간호사.


1941년 9월 21일 기준 레닌그라드 전선도.


1941년 9월 8일부터 독일군은 도시를 포위하고 레닌그라드 및 교외 보급로를 차단했다. 게오르기 주코프가 방어 작전을 맡았고, 추축군은 872일 동안 공성전을 펼쳤다.

레닌그라드 포격은 1941년 8월에 시작되어 1942년에 장비 보강으로 강도가 높아졌다. 1943년에는 더 많은 포탄과 폭탄을 사용하며 포격 강도가 증가했고, 루프트바페는 야간 공습에 어뢰를 사용하기도 했다. 소련 발트 함대 해군항공대는 공방전 동안 10만 번의 출격을 했다.[162] 독일군의 포격과 폭격으로 레닌그라드 포위전 동안 5,723명이 사망하고 20,507명이 부상당했다.[163]

북부집단군은 주민들의 생활 능력을 차단하기 위해 가스, 상하수도, 전력 공급 시설, 식량 창고를 포격했다. 독일 공군은 6000발 이상의 소이탄과 1000파운드급 고성능 폭탄 48발을 투하하여 급수 시설과 부터예프(бутырев) 창고를 파괴했다. 부터예프 창고의 손실은 시내 식량 사정을 악화시켰다. 독일군 참모본부는 뮌헨 영양 연구소의 에른스트 찌겔마이어(Ernst Zieglermayer) 교수에게 봉쇄 기간을 예측하게 했다. 찌겔마이어는 한 달간 봉쇄하면 빵 배급량이 하루 250g으로 줄고, 겨울철 봉쇄가 계속되면 기아 상태에 빠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괴벨스는 일기에 "레닌그라드의 항복 요구로 고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거의 과학적인 방법으로 파괴할 수 있다."라고 썼다. 국방군 최고사령부는 점령 대신 울타리와 전깃줄로 주민 탈출을 막고 탈출자에게 포병대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히틀러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지표면에서 없애기로 결정했다."라는 훈령을 발령했다.

북부집단군은 포위 진지를 건설하고 참호, 감시소, 사격 진지, 포격 진지, 방어 거점용 토치카와 은폐호를 설치했다. 포위 진지 후방에는 연락 도로와 식량·물자 저장소를 건설하여 장기 포위전에 대비했다. 레프는 가치나에 사령부를 두고 포격을 지휘했다. 울리츠크와 볼로다르스키 사이 마을에 3개 포병 연대를 배치하여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7시까지 2시간마다 휴식을 취하며 포격했다. 9월 말까지 5364발의 포탄이 발사되었다. 민간인 탈출 시도는 즉결 처형되었지만, 북부집단군 사령부는 병사들의 심리적 영향을 우려하여 지뢰밭을 설치하고 포병대로 대처하기로 했다. 레프는 병사가 민간인을 근거리에서 사살하는 상황을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심리 상담사가 진지에 상주하고 나치 이데올로기 교육을 강화하여 열등 인종에 대한 동정은 불필요하다고 선전했다. 포병대는 시내를 감시하고 시내에서 나온 초기 단계에서 처리해야 했다. 그러나 독일군 병사들은 동요했고, 빵을 던지거나 매춘을 강요하는 병사도 있었다. 포병대 병사들은 민간인을 표적으로 하는 명령을 비꼬았다.

6. 3. 수비군 보급

빌헬름 리터 폰 레프가 이끄는 북부 집단군은 레닌그라드를 주요 목표로 진격했다. 폰 레프의 계획은 도시를 점령하는 것이었지만, 히틀러는 프란츠 할더의 주장을 받아들여 4 기갑군을 페도르 폰 보크의 모스크바 공세를 지원하기 위해 남쪽으로 이동시켰다.[137] 폰 레프는 라도가호 기슭에 도착하여 도시를 무기한 포위하기 시작했고,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휘하의 핀란드 육군은 레닌그라드 동부의 스비리강에서 대기하며 포위를 완료했다.[138]

독일군은 남쪽에서 영토를 점령했고, 핀란드군은 레닌그라드 북쪽에 있었다. 독일군과 핀란드군은 모두 레닌그라드를 포위하고 봉쇄 지역의 경계를 유지하며, 도시와의 모든 통신망을 차단하고 음식 및 보급품을 운반하는 기선 통행을 막는다는 목표를 공유했다.[168][164][139][140][141][142] 독일군은 시민에 대한 최고의 무기가 식량이 될 것이라고 계획했으며, 독일 과학자들은 레닌그라드가 몇 주 안에 기아 상태에 빠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1942년 라도가 호수의 바지선에서 협궤 열차로 보급품을 하역하는 모습.


붉은 군대는 레닌그라드를 오가는 안정적인 보급로를 확보해야 했다. 이 경로는 라도가호 남부를 지나갔으며, 겨울철에는 두꺼운 얼음 위로 트럭이, 여름철에는 함선이 물자를 운송했다. 라도가 함대, 레닌그라드 PVO 부대, 보급로 보안군이 이 공급로의 안전을 책임졌다. 이 보급로는 포위된 도시에서 민간인들을 피난시키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1941년 11월 20일, 얼어붙은 호수 위로 도로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긴급 비상 대피 계획이 없어 굶주림에 시달렸다.

이 도로는 생명의 길(Дорога жизниru)로 불렸다. 차량이 독일군의 포격으로 깨진 얼음에 빠지거나 미끄러지는 경우가 많아 매우 위험했다. 높은 사망률 때문에 "죽음의 길"이라고도 불렸지만, 군수 물자와 보급품을 수송하고 부상병과 민간인을 후방으로 이송하여 도시가 저항을 계속하는 데 기여했다.

도시 포위 동안 이용된 생명의 길에 관한 미군 선전 영화 "우리는 왜 싸우는가"


1941년 11월 20일, 라도가호가 얼어붙자 마차 수송대가 빙판길을 통해 레닌그라드로 물자를 운송하기 시작했다. 이후 트럭 수송도 가능해졌다. 이 빙판길은 '''생명의 길'''(Дорога жизниru, 다로가 지즈니)로 불렸다. 호수 건너편에서 도시로 물자가 들어오고 시민들이 탈출할 수 있었다. 생명의 길은 1942년 4월 24일까지 152일 동안 이용 가능했으며, 이 기간 동안 51만 4천 명의 시민과 3만 5천 명의 부상병이 레닌그라드를 탈출했고, 중요한 산업 시설도 반출되었다. 생명의 길은 대공포와 전투기로 방어했지만, 독일군의 포격과 공습 위협에 항상 노출되어 위험했다. 사람들은 이 길을 "죽음의 길"이라고 비꼬아 부르기도 했다. 1942년 여름에는 라도가호 밑바닥을 통과하는 길이 29km의 송유관인 "생명의 동맥"이 설치되었다. 겨울이 되자 생명의 길은 다시 열렸다. 12월 20일부터 말의 통행이 시작되었고, 12월 24일부터는 자동차 수송도 재개되었다. 빙상 철도 건설도 진행되었다.

레닌그라드로 식량을 수송하는 빙상 열차

7. 도시의 영향

2년 반 동안의 계속된 포위 공격은 대규모 도시 파괴를 야기했고, 현대 도시에서 벌어진 전투 중 가장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전투로 알려져 있다.[164]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도시 방어 구역 외곽에 위치한 예카테리나 궁전, 페테르호프 궁전, 로프샤, 스트렐나, 가치나와 같은 차르 궁전 및 기타 역사적 건물들에 존재하는 많은 예술품들이 약탈당하고 파괴되었다.[165] 또한, 수많은 공장, 병원, 학교 및 사회 기반 시설이 공습 및 장거리 포격으로 파괴되었다.

872일간의 포위 동안 물, 에너지, 식량, 공공 서비스 등이 중단되어 레닌그라드 지역에 심각한 기근을 초래했다. 그 결과 군인 150만 명 이상,[166] 주로 어린이와 여성으로 이루어진 민간인 140만 명 이상이 대피 중 포격으로 인한 사망, 기아로 인해 사망했다.[167][168][143] 피스카례요브스코례 기념비(Piskaryovskoye Memorial Cemetery)는 공방전 기간 중 사망한 민간인 50만 명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레닌그라드의 경제적 및 인적 피해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모스크바 공방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 폭탄 투하의 손실을 초과했다. 레닌그라드 포위전은 가장 사상자가 많은 포위전 중 하나이며 일부 역사학자들은 공격 작전을 대량 학살의 일부로 보기도 하고, 전례 없는 "인종적 이유의 기아 정책" 등 독일과 소련의 전쟁에서 독일이 생각한 전쟁 정책의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되었다.[169][170]

11살 소녀 타냐 사비체바의 일기장. 그의 일기장에는 기아로 인해 할머니, 삼촌, 엄마, 동생이 죽었다고 쓰여 있으며 마지막 장에는 "혼자 남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영양실조로 인해 포위전 기간 중 죽었다. 이 일기는 뉘른베르크 재판에 증거물로 제출되었다.


레닌그라드 시민들은 특히 1941년~1942년 겨울 기근으로 고통받았다. 1941년 11월부터 1942년 2월까지 시민들은 톱밥이 50~60% 이상 함유되고 그 외 먹을 수 없는 혼화제가 섞인 빵 125g을 배급받았다. 1942년 1월 2주일 동안에는 이 배급마저 노동자와 군인만 받을 수 있었다. -30 °C에 달하는 극심한 한파와 도시 교통 시설 정지로 인해, 식품 배급소에서 불과 몇 km 떨어진 곳의 시민들도 배급을 받을 수 없었다. 1942년 1월부터 2월까지 매일 700명에서 1,000명의 사람들이 기아로 사망했다.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사망했고, 시민들은 곧 죽음의 광경에 익숙해졌다.

레닌그라드로의 보급은 연락선 차단으로 거의 중단되었다. 9월 2일, 시민 식량 배급이 축소되어 육체노동자는 하루 빵 600g, 노동자는 400g, 기타 시민과 어린이는 300g으로 정해졌다. 9월 8일 공습으로 부터에프 창고에 저장된 곡물과 설탕이 대량 소실되었다. 9월 12일, 잔여 식량은 다음과 같이 추산되었다.

품목잔량 (일)
곡물·밀가루35일분
귀리·가루30일분
육류·가축33일분
유지45일분
설탕·과자류60일분



같은 날, 배급이 다시 축소되어 육체노동자는 하루 빵 500g, 노동자와 어린이는 300g, 기타 시민은 250g으로 정해졌다. 육군과 발트 함대는 비축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기아로 인한 사망이 속출했다. 타냐 사비체바는 12세 소녀로, 12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레닌그라드에 있던 친척들이 차례로 죽어간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타냐의 일기). 레닌그라드 거리에는 시체가 넘쳐났다.

1941~1942년 겨울, 생존자들이 새, 쥐, 애완동물을 모두 먹은 후에는 식인을 했다는 보고가 있었다.[171] 굶주린 사람들이 사람들을 공격하고 먹기 시작했다.[172] 레닌그라드 경찰은 식인종을 단속하는 특별 병력을 배치했고, 260명이 식인 행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173]

1941년 겨울부터 인육 섭취(식인 풍습) 보고가 있었지만, NKVD 관련 기록은 2004년까지 공개되지 않았다. 이전까지 식인 풍습 증거는 대부분 일화적이었다. 당시 레닌그라드 시민들의 공포를 보여주는 사례로, 경찰은 협조하지 않는 용의자를 식인종이 있는 감방에 가두겠다고 위협했다.[82]

NKVD 기록에 따르면 인육을 식량으로 처음 사용한 것은 1941년 12월 13일이며, 이후 지속적으로 식인 행위가 보고되었다. 1942년 12월까지 NKVD는 2,105명의 식인자를 체포했는데, 이들은 시체를 먹은 자(трупоедства, ''trupoyedstvo'')와 사람을 먹은 자(людоедства, ''lyudoyedstvo'')로 분류되었다. 사람을 먹은 자는 대개 총살되었고, 시체를 먹은 자는 투옥되었다. 소비에트 형법에는 식인죄 조항이 없어, 모든 유죄 판결은 "특수 범죄 강도"를 의미하는 형법 제59-3조에 따라 이루어졌다.[85]

대규모 기아 상황에서 식인 풍습은 비교적 드물었다.[88] 배급 카드를 얻기 위한 살인이 훨씬 더 흔했다. 1942년 상반기에 레닌그라드에서는 이러한 살인이 1,216건 발생했다. 같은 시기 레닌그라드는 월 10만 명에 달하는 최고 사망률을 기록했다.

9월 8일부터 독일군은 도시를 포위하며 레닌그라드 및 교외 보급로를 모두 차단했다. 1941년 8월부터 레닌그라드 포격이 시작되었고, 1942년과 1943년에도 포탄과 폭탄을 이용해 포격 강도를 높였다. 루프트바페는 야간 공습을 감행했다. 소비에트 연방 발트 함대 해군항공대는 공방전 동안 총 10만 번의 군사 작전을 지원했다.[162] 독일군의 포격과 폭격으로 레닌그라드 시민 5,723명이 사망하고 20,507명이 부상당했다.[163]

1942년 8월 9일, 레닌그라드 라디오 오케스트라에서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7번 교향곡이 연주되었다.[174] 이 콘서트는 도시 스피커와 적진을 향해 방송되었다.

11월 20일, 라도가 호수가 얼어붙자 말이 끄는 수송 부대가 얼음 위를 통과해 레닌그라드에 물자를 수송했다. 이후 트럭 수송도 가능해졌고, 얼음 위 연결로는 “생명의 길”(러시아어:Дорога жизни)로 불렸다. 호수 맞은편에서 시내로 물자가 운반되면서 시민 탈출도 가능해졌다.

한편, 레닌그라드는 독일군 포위 속에서도 시내 무기 공장을 가동해 대량의 무기를 생산하며 병기창 기능을 계속했다. 공장 출하 무기는 레닌그라드 방위군이 아닌 각 전선 소련군에 공급되었다. 1941년 7월부터 12월까지 전차 500대, 장갑차 600대, 야포 2400문, 기관총 1만 정, 포탄 300만 발, 로켓포 3만 발을 출하해 독소전쟁 승리에 기여했다.

포위전 희생자 수는 여러 의견이 있다. 전후 소련 정부 공식 발표는 67만 명 사망이었지만, 다른 연구에서는 사망자 수를 70만 명에서 150만 명으로 추정하며, 가장 많은 의견은 약 110만 명이다.

포위전의 기억은 시민들에게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한편, 레닌그라드가 900일에 가까운 시간 동안 저항하며 “트로이도 함락되었고, 로마도 함락되었지만, 레닌그라드는 함락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시민들의 새로운 자랑거리가 되었다.

8. 소련군의 포위망 구호

소련군은 1942년 가을부터 레닌그라드 포위망을 뚫기 위한 공세를 지속적으로 시도했다. 1942년 8월의 시냐비노 공세는 레닌그라드 전선군의 일부 부대가 소규모 공격을 개시하면서 시작되었고, 독일군은 노르트리히트 작전에 투입될 예정이던 병력을 소련군 방어에 투입해야 했다. 이 공세에서 독일군은 티거 전차를 처음 투입하는 등 제한적인 성공을 거두었지만, 결국 소련군의 공격은 중단되었고 독일군도 레닌그라드 공격을 중단해야 했다.

1943년 1월, 레닌그라드 전선군과 볼호프 전선군이 합동으로 실시한 이스크라 작전을 통해 마침내 포위망이 뚫렸다. 1943년 1월 12일 시작된 이 작전에서, 1월 18일 볼호프 전선군의 372 소총병 사단과 레닌그라드 전선군의 123 소총병 사단이 만나면서 약 10~12 km 폭의 통로가 확보되어 레닌그라드에 대한 보급이 가능해졌다.

보로실로프 원수는 레닌그라드 방어전 초기에는 적군을 지휘했지만, 슐리셀부르크 함락으로 포위망이 좁혀지자 "적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를 이유로 해임되었고, 주코프 상장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118] 주코프는 규율 회복과 방어 체계 재정비를 통해 레닌그라드 방어에 기여했다. 그러나 독일군 기갑 부대가 모스크바 방면으로 이동하는 상황에서도 불필요한 공격을 명령하여 큰 피해를 입기도 했다.[121]

독일군은 레닌그라드 포위를 강화하기 위해 티흐빈을 점령하여 보급로를 차단하려 했지만, 소련군은 한 달 후 티흐빈을 탈환했다.[124] 1941년 11월 20일부터는 결빙된 라도가 호수를 통해 생명의 길이라 불리는 보급로가 개설되어 식량과 물자 수송, 시민들의 탈출이 이루어졌다.

1942년 8월 9일,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가 레닌그라드 방송관현악단에 의해 연주되었다. 이 연주회는 도시 전역과 적진에 방송되었다.

8. 1. 신야비노 공세

신야비노 공세는 1942년 가을 소련군이 도시 봉쇄를 깨려고 시도했던 공세이다. 레닌그라드 전선군의 2 충격군과 8군이 공세의 주공을 맡았다. 같은 시간, 독일 측은 도시를 점령하기 위해 세바스토폴점령한 이후 남은 군들에게 측면 공격인 노드리트 작전을 준비했다.[175] 전투가 시작될 때까지 양측 모두 상대편의 의도를 알지 못했다.

신야비노 공세는 노드리트 작전이 시작되기 몇 주 전인 1942년 8월 27일 레닌그라드 전선군의 소규모 공세로 시작되었다. 이 작전의 성공적인 시작은 노드리트 작전을 준비하던 독일군이 소련군을 방어하기 위해 투입되도록 만들었다. 독일군의 역공은 티거 전차를 처음으로 투입하면서 제한된 성공을 거두었다. 2군의 일부가 포위되고 무너진 이후, 소련의 공격이 중지되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레닌그라드의 공세 작전을 중단했다.

8. 2. 이스크라 작전

스타프카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반격 작전에 맞춰 고보로프에게 레닌그라드 해방 공세의 상세한 계획을 요구했다. 고보로프는 슐리셀부르크 회랑으로 진격하여 독일군 동쪽에 배치된 볼호프 방면군과 합류하여 봉쇄를 돌파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 공세를 위해 4,500문의 포가 집결되었다. 고보로프의 계획은 스타프카에 승인되어 이스크라(火花) 작전으로 명명되었다. 작전을 조정하기 위해 최고 사령관 대리 주코프 원수도 파견되었다. 철저한 준비 끝에 1943년 1월 12일, 이스크라 작전이 시작되었다. 먼저, 모든 구경의 포가 특정된 독일군의 모든 포병 진지를 철저히 격파했다. 고보로프가 지휘하는 레닌그라드 방면군은 네바 강 건너편을 확보하고 전진을 시작했다. 독일군은 요새화된 시냐비노 구릉에서 전진을 저지했지만, 고보로프는 정면 공격을 피하고 우회를 명령했다. 볼호프 방면군은 요새화된 제8노동자 구역에서 격렬한 저항을 받았다. 그러나 고보로프의 대포병 사격이 큰 효과를 거두었고, 선제 사격으로 타격받은 독일군 포병 진지는 기능하지 못했다. 1월 15일, 결빙된 라도가 호수를 경유하여, 적군의 스키 여단이 슐리셀부르크에 돌입했다. 두 방면군은 합류까지 800미터의 거리까지 접근했고, 고보로프는 마지막 장애물인 제5노동자 구역의 요새에 공격을 명령했다. 2시간의 격전 끝에 독일군은 시냐비노 구릉으로 후퇴했고, 마침내 두 방면군이 합류하는 데 성공했다. 1943년 1월 17일, 레닌그라드 시 당국은 라디오로 레닌그라드의 해방을 선포했고, 시민들은 열광했다.[124]

이 무렵, 스탈린그라드에서도 적군이 승리했고(1월 31일), 독소 전쟁은 큰 전환기를 맞았다.

8. 3. 포위전의 끝

레닌그라드 포위전은 1944년 1월 27일 소련군이 레닌그라드-노브고로드 공세를 펼치며 독일군이 도시 남부로 퇴각하면서 끝났다. 이 공세는 레닌그라드 전선군, 볼호프 전선군, 1 발트 전선군, 2 발트 전선군이 합동으로 치른 공세이다. 발트 함대독일 국방군에 대한 마지막 공격에 30%의 항공력을 지원했다.[162] 1944년 여름, 소련군은 비보르크-페트로자보츠크 공세를 통해 핀란드 방어군을 비보르크 만과 부오크시 강 건너편으로 몰아냈다.

1944년 1월 27일, 레닌그라드에서는 포위 해방을 기념하는 축포가 울려 퍼졌다. 이는 1941년 9월 8일 슐리스셀부르크 함락으로 포위가 시작된 지 872일 만이었다.[126]

이후 서쪽으로 진격한 소련군과 독일군은 나르바에서 격돌했다.

9. 연대기

네프스키 대로의 고스티니 드보르(Gostiny Dvor)와 오스트로프스키 광장(Ostrovsky Square) 사이 탄약고에서 물을 길어가는 사람들


1941년 레닌그라드 포위 상태에서 기아로 인한 근육 위축을 겪고 있는 희생자

  • '''4월:''' 바르바로사 작전과 동방총체계획에 따라 아돌프 히틀러는 레닌그라드 점령 및 파괴를 계획한다.
  •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추축국소련 침공이 시작된다.
  • '''6월 23일:''' 레닌그라드 사령관 M. 포포프는 부사령관을 레닌그라드 남쪽 방어 진지 정찰에 파견한다.
  • '''6월 29일:''' 루가 방어 요새 건설이 시작되고, 아동과 여성의 대피가 시작된다.
  • '''6월~7월:''' 독일군의 진격으로부터 피신한 프스코프와 노브고로드의 30만 명이 넘는 민간인 난민들이 레닌그라드로 피난 온다. 북서부 전선군의 군대가 레닌그라드 전선에 합류한다. 예비군과 자원병을 포함한 총 병력은 전투에 참여하는 모든 측면에서 200만 명에 달한다.
  • '''7월 19일~23일:''' 북부 집단군의 레닌그라드 첫 공격이 도시 남쪽 100km 지점에서 저지된다.
  • '''7월 27일:''' 히틀러가 북부 집단군을 방문하여 빌헬름 리터 폰 레프에게 12월까지 레닌그라드를 점령할 것을 명령한다.
  • '''7월 31일:''' 핀란드가 카렐리야 지협에서 소련 제23군을 공격하여 겨울 전쟁 이전의 핀란드-소련 국경 북쪽에 도달한다.
  • '''8월 20일~9월 8일:''' 레닌그라드에 대한 포격이 공장, 학교, 병원 및 민간 주택을 강타한다.
  • '''8월 21일:''' 히틀러의 34호 지령은 "핀란드와 연계하여 레닌그라드를 포위한다"고 명령한다.
  • '''8월 20일~27일:''' 철도 및 레닌그라드 밖 다른 출구에 대한 공격으로 민간인 대피가 차단된다.
  • '''8월 31일:''' 핀란드군이 방어 태세로 전환하고 전선을 정비한다.[40] 1939년 겨울 전쟁 이전 국경을 넘어 키르야살로와 벨로오스트로프 시정촌을 점령하는 것을 포함한다.[40]
  • '''9월 6일:''' 독일 최고 사령부의 알프레드 요들이 레닌그라드에 대한 공세를 계속할 것을 핀란드에 설득하는 데 실패한다.
  • '''9월 2일~9일:''' 핀란드가 벨로오스트로프와 키르야살로 돌출부를 점령하고 방어 준비를 한다.
  • '''9월 8일:''' 독일군이 라도가 호 연안에 도달하면서 레닌그라드의 육지 포위망이 완성된다.
  • '''9월 10일:''' 요셉 스탈린이 게오르기 주코프 장군을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원수의 후임으로 레닌그라드 전선 및 발트 함대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 '''9월 12일:''' 레닌그라드에서 가장 큰 식량 창고인 바다예프스키 일반 창고가 독일 폭탄에 의해 파괴된다.
  • '''9월 15일:''' 빌헬름 리터 폰 레프는 제4기갑집단군을 전선에서 철수하여 모스크바 공세를 위해 중앙 집단군으로 이동시켜야 한다.
  • '''9월 19일:''' 독일군이 레닌그라드에서 10km 지점에서 저지된다. 시민들이 방어선에서 전투에 참여한다.
  • '''9월 22일:''' 히틀러는 "레닌그라드를 지구상에서 지워버려야 한다"고 지시한다. 같은 날 히틀러는 "...우리는 민간인의 생명을 구할 의향이 없다"고 선언한다.
  • '''11월 8일:''' 히틀러는 뮌헨 연설에서 "레닌그라드는 기아로 죽어야 한다"고 말한다.
  • '''11월 10일:''' 소련의 반격이 시작되어 12월 30일까지 지속된다.
  • '''12월:''' 윈스턴 처칠은 일기에 "레닌그라드는 포위되었지만 함락되지는 않았다"고 적었다.
  • '''12월 6일:''' 영국이 핀란드에 선전포고를 한다. 이어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인도, 뉴질랜드가 선전포고를 한다.
  • '''12월 30일:''' 11월 10일에 시작된 소련의 반격으로 독일군이 티흐빈에서 볼호프 강으로 후퇴하여 라도가 호 동쪽 해안에 주둔한 핀란드군과 합류하는 것을 막았다.

독일군의 포격 후 파괴된 가옥을 떠나는 소련 민간인들, 1942년 12월 10일

  • '''1월 7일:''' 소련의 류반 공세 작전이 시작된다. 16주 동안 지속되었지만 실패로 끝나고 제2 충격 군의 손실을 초래했다.
  • '''1월:''' 소련군은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네프스키 피야초크 교두보를 위한 전투를 시작한다. 이 전투는 1943년 5월까지 지속되지만 부분적인 성공에 그쳤다. 양측 모두 매우 큰 사상자를 냈다.
  • '''4월 4일~30일:''' 독일 공군의 아이스 슈토스 작전(얼음 충격 작전)은 레닌그라드에 얼음에 갇힌 발트 함대 함선들을 침몰시키는 데 실패한다.
  • '''6월~9월:''' 새로운 독일군 철도 포인 38cm 지그프리트 K (E)가 800kg의 포탄으로 레닌그라드를 포격한다.
  • '''8월:''' 스페인의 청색 사단이 레닌그라드로 이동한다.
  • '''1942년 8월 9일:'''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가 레닌그라드에서 연주되었다.[95]
  • '''8월 14일~10월 27일:''' 해군 부대 K가 레닌그라드 보급로와 라도가 호수에서 충돌한다.
  • '''8월 19일:''' 소련군은 8주 동안 시냐비노 공세를 시작하지만 포위망을 해제하지 못하고 독일군의 공세 계획(노르트리히트 작전)을 좌절시킨다.
  • '''1월–12월:''' 레닌그라드에 대한 포격이 증가하였다.
  • '''1월 12일–30일:''' 이스크라 작전으로 라도가 호 연안을 따라 도시로 통하는 육로 통로가 열리면서 포위 공격이 돌파되었다. 포위 상태가 해제되었다.
  • '''2월 10일–4월 1일:''' 포위 공격을 해제하려는 시도였던 폴랴르나야 즈베즈다 작전이 실패하였다.

1,496,000명의 소련 군인들이 1942년 12월 22일부터 레닌그라드 방위 훈장을 수여받았다

  • '''1월 14일 – 3월 1일:''' 포위를 종식시키기 위한 여러 차례의 소련 공세 작전이 시작된다.
  • '''1월 27일:''' 레닌그라드 포위가 종식된다. 독일군은 도시에서 60km 떨어진 곳까지 밀려난다.
  • '''1월:''' 후퇴하기 전에 독일군은 예카테리나궁, 페테르호프궁, 가치나궁, 스트렐나궁과 같은 차르의 역사적인 궁전들을 약탈하고 파괴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교외의 다른 많은 역사적 랜드마크와 주택들이 약탈되고 파괴되며, 다수의 귀중한 미술품들이 독일로 옮겨진다.


포위 기간 동안 레닌그라드와 교외 지역에서 약 3,200채의 주거용 건물과 9,000채의 목조 주택이 불타고, 840개의 공장과 공장이 파괴되었다.[96]

9. 1.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의 3가지 목표 중 하나는 레닌그라드 점령이었고, 이는 북부 집단군의 주요 목표였다. 레닌그라드는 옛 러시아 수도이자 러시아 혁명의 상징적인 장소였으며, 소련 발트 함대의 주요 거점으로서 군사적 중요도가 높았다. 또한 산업 시설과 무기 공장이 모여 있어 1939년 기준 소련 산업 생산의 11%를 차지하는 대도시였다.[130][131] 아돌프 히틀러는 레닌그라드 점령을 확신하여 호텔 아스토리아에서 열릴 승리 행사 초대장을 이미 인쇄했다고 전해진다.[132] 나치 독일의 레닌그라드 점령 후 계획은 여러 이론이 있지만, 소련 저널리스트 레프 베지멘스키에 따르면 "아돌프스부르크" 등으로 개칭하고[133] 제너럴플랜 오스트에 따라 제국의 새로운 잉에르만란드 주의 주도로 삼아 시민들을 모두 죽일 것이 분명했다. 1941년 9월 29일 북부 집단군에게 보낸 명령문은 다음과 같다.

히틀러의 궁극적인 계획은 레닌그라드를 완전히 파괴하고 네바강 북부 영토를 핀란드에게 주는 것이었다.[135][136]

빌헬름 리터 폰 레프 휘하의 북부 집단군은 레닌그라드를 주 목표로 진격했다. 폰 레프는 도시 점령을 계획했지만, 히틀러는 프란츠 할더의 주장을 받아들여 독일 4 기갑군을 페도르 폰 보크의 모스크바 공세 지원을 위해 남쪽으로 이동시켰다.[137] 그 결과 폰 레프는 라도가호 기슭에 도착하여 도시를 무기한 포위하기 시작했고,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휘하의 핀란드 육군은 레닌그라드 동부 스비리강에서 대기하며 포위를 완료했다.[138]

독일군은 남쪽에서, 핀란드군은 레닌그라드 북쪽에서 영토를 점령하며 포위망을 유지하고 도시와의 모든 통신망을 차단했다. 독일군은 시민들에게 가장 효과적인 무기가 식량이 될 것이라고 계획했고, 독일 과학자들은 레닌그라드가 몇 주 안에 기아 상태에 빠질 것이라고 예측했다.[168][164][139][140][141][142]

1941년 6월 27일, 레닌그라드 의회는 민간인으로 구성된 "반격 그룹"을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다음날 레닌그라드 민간인 전체가 위험 대상으로 통보되고 요새 건설에 동원되었다. 방어선은 남쪽과 북쪽으로 몰려오는 적을 막기 위해 도시 경계를 따라 민간인들이 방어하는 선으로 구축되었다.[168][143]

남쪽 방어선은 루가강에서 시작하여 추도보, 가치나, 우리츠크, 풀코보, 네바강까지 이어졌고, 다른 부분은 페테르고프, 가치나, 풀코보, 콜피노, 콜트스키로 연결되었다. 북쪽의 핀란드군을 방어하는 카렐리냐 요새 지역은 1930년대부터 레닌그라드 북부 교외에 있었고 다시 사용되기 시작했다. 총 방어선은 190km의 목재 바리케이드, 635km의 철조망, 700km의 대전차 도랑, 5000km의 토재 및 목재 진지, 철근 콘크리트 진지, 25000km의 참호로 구성되었으며, 대부분 민간인이 건설했다. 러시아 순양함 오로라의 포는 레닌그라드 남쪽 풀코보 고지로 이동했다.

동프러시아의 4 기갑군은 프스코프까지 빠르게 진격하여 루가와 벨리키노브고로드 지역에 근접했다. 레닌그라드가 작전 범위에 들어왔지만, 도시 남부의 강력한 저항으로 진격이 멈췄다. 18 군은 약 35만 명이 뒤처졌음에도 불구하고 소련 북서부 전선군이 레닌그라드로 후퇴할 때 오스트로프와 프스코프를 향해 진격했다. 7월 10일, 오스트로프와 프스코프가 함락되었고, 18 군은 나르바킨기세프에 도착하여 루가강 방어선에서 레닌그라드로 진격하려 했다. 이는 핀란드만에서 라도가 호수까지 진격하여 레닌그라드를 모든 방향에서 고립시키는 목표에 부합했다. 핀란드 육군은 라도가 호수 동부 연안을 따라 진격할 것으로 예상되었다.[144]

1941년 당시 주요 참전 부대는 다음과 같다.

북부 집단군 (원수 빌헬름 리터 폰 레프)[145]핀란드 방위군 본부 (핀란드 원수 만네르하임)[146]북부 전선군 (중장 포포프)[147]



이들 중 14 군은 무르만스크를, 7 군은 카렐리야 지역을 방어하고 있어 초기 공세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8 군은 처음에는 북서부 전선군 소속이었으나 발트해를 통해 퇴각한 후 7월 14일 북부 전선군으로 재배치되었다.

8월 23일, 북부 전선군은 레닌그라드 정면부와 측면부로 나뉘었고, 본부는 무르만스크와 레닌그라드 사이 전선을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8월부터 핀란드군은 1939년 당시 핀란드-소련 국경으로 진출하여 레닌그라드 북부 20km까지 도달, 도시를 위협했다. 또한 동카렐리야, 라도가 호수 동부를 점령하며 동쪽에서도 도시를 위협했다. 핀란드군은 겨울 전쟁 이전 국경인 카렐리야 지협에 도달하여 벨루스트로프와 북 잉그니아의 소련군 돌출부를 제거하고 전선을 곧게 만들었다. 핀란드 만 해안부터 라도가 호수까지 이어진 전선은 레닌그라드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가 겨울 전쟁 이전 국경에 그대로 자리 잡고 있었다. 소련은 9월부터 핀란드군의 카렐리야 방어 사단에 대한 공격이 중단되었다고 주장했지만,[148] 핀란드군은 1941년 8월 이전부터 목표 도달 후 더 이상 진격하지 않았으며, 일부는 겨울 전쟁 이전 국경 너머에 있기도 했다. 목표 달성 후 핀란드는 전진을 중지하고 동칼렐리야로 병력을 이동했다.[149][150] 이후 3년 동안 핀란드군은 이 선을 유지하며 레닌그라드 포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151] 핀란드 사령부는 레닌그라드 공격을 거부하고[152] 스비리강 남부로 진격하지 않은 채 9월 7일 동카렐리야를 점령했다(레닌그라드 동부 160km). 남동쪽에서 독일군은 11월 8일 티흐빈을 점령했지만, 핀란드군이 있는 스비리 강까지 진격하지 못해 레닌그라드를 완전히 포위하지 못했다. 12월 9일, 볼흐프 전선군의 반격으로 독일군은 티흐빈에서 볼호프강으로 후퇴했다.[168][143]

1941년 9월 6일, 독일 참모 총장 알프레트 요들은 헬싱키를 방문하여 만네르헤임에게 공세를 재개하도록 설득하려 했다. 1941년 핀란드의 대통령 리스토 뤼티핀란드 의회에서 이 전쟁의 목적이 겨울 전쟁 동안 잃은 영토를 되찾고 동부 영토를 합병하여 대핀란드를 만드는 것이라고 연설했다.[153][154][155] 전쟁 후 뤼티 대통령은 "1941년 8월 24일, 만네르헤임 원수의 지휘본부에 갔다. 독일군은 국경을 넘어 레닌그라드를 계속 공격하라고 압박했다. 나는 레닌그라드 점령이 우리의 목표가 아니며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마네르하임과 국방장관 월든은 내 의견에 동의하고 독일군의 제안을 거부했다. 이 결과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했다. 독일군은 북부에서 레닌그라드로 접근할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독일군과 핀란드 육군은 1944년 1월까지 포위망을 유지했지만, 핀란드군의 체계적인 포격이나 폭격은 없었다.

핀란드군의 위치는 레닌그라드 시내에서 33km에서 35km 떨어진 곳이었고, 핀란드 공격 위협은 도시 방어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방어 전선군 사령관 마키안 포포프는 독일군이 카렐리야 지협에서 23군이 방어하기 위해 핀란드군 증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핀란드군 배치를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156] 만네르헤임은 1939년 국경에 도달한 1941년 8월 31일 공격을 종료했다. 포포프는 안심하고 9월 5일 독일군이 있는 곳으로 2개 사단을 증원했다.[157]

이후 핀란드군은 벨로스트로프와 키르야셀로의 포위망을 풀었고,[158] 이는 부오크스키 강 남부와 해안 사이를 위협하는 위치였다.[158] 핀란드 해안 여단 총지휘관 파보 타르벨라와 대령 야르비넌은 독일 사령부에서 라도가 호수의 생명의 길을 차단하라는 제안을 받았다. 독일 사령부는 독일 사령부 하 아인사트크사탑 퓌레 오스트(Einsatzstab Fähre Ost)와 핀란드군, 이탈리아 12 공격차량중대를 포함한 K 해군 파견대(Naval Detachment K)로 구성되었다. 이 해군 병력은 1942년 여름과 가을 동안 보급로 공격 작전에 이용했지만, 물이 어는 기간 동안 경기계화 장비로 멀리 이동하여 공격해야 했고 전선 변화로 인해 나중에는 이들을 재편성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다.[159][160][161]

레닌그라드 전선군(초기 레닌그라드 군사 지구)은 원수 클리멘트 보로실로프가 지휘했다. 핀란드 만과 라도가 호수 사이 북부 지역의 23 군과 핀란드 만과 파블롭스크-므가 서부 지역의 48 군을 포함했다. 레닌그라드 요새 지역, 레닌그라드 주둔군, 발트 함대, 코포레 남부 풀코보 고지-술레츠크-콜피노 지역 작전 그룹도 존재했다.

9월 8일부터 독일군은 도시를 포위하며 레닌그라드 및 도시 교외 보급로를 모두 차단했다. 공세 작전을 할 수 없게 된 도시는 게오르기 주코프가 방어 작전을 맡았고, 추축군은 총 872일 동안 공성전을 펼쳤다.

레닌그라드 포격은 1941년 8월 시작되었고, 1942년 새로운 장비가 도착하면서 포격 강도가 높아졌다. 1943년에는 전년도에 사용했던 만큼 많은 포탄 및 폭탄을 이용하면서 포격 강도는 계속 증가했다. 루프트바페는 야간 공습을 위해 종종 어뢰를 사용했다. 소비에트 연방 발트 함대 해군항공대는 공방전 동안 군사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총 10만 번의 출격을 했다.[162] 독일군 포격 및 폭격으로 레닌그라드 시민 5,723명이 사망하고 20,507명이 부상을 입었다.[163]

도시 방어를 위해서는 붉은 군대가 레닌그라드를 오가는 안정적인 보급로 확보가 중요했다. 이 경로는 라도가 호수 남부를 지나갔으며, 겨울철에는 두꺼운 얼음 위로 트럭이, 여름에는 함선이 물자를 운송했다. 공급로 안전은 라도가 함대, 레닌그라드 PVO 부대, 보급로 보안군이 맡았다. 이 공급로는 포위된 도시에서 민간인들을 피난시키는 데에도 이용되었다. 전쟁 첫 겨울 동안 혼란으로 긴급 비상 대피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1941년 11월 20일 얼어붙은 호수 위로 도로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굶주리고 있었다.

이 길은 생명의 길(Дорога жизниru)이라고 불렸다. 차량이 독일군 포격으로 깨진 얼음에 빠져 침몰하거나 얼음에 미끄러져 매우 위험했다. 겨울철 높은 사망률 때문에 "죽음의 길"이라고도 불렸다. 그러나 생명의 길은 군사 및 보급품을 오가게 하고 부상병 및 민간인을 후방으로 내보낼 수 있게 하여 도시가 저항을 계속할 수 있게 했다.

연결선 차단으로 레닌그라드에 대한 보급은 완전히 끊어졌다. 9월 2일 시민 식량 배급이 줄어 육체노동자는 하루 빵 600그램, 노동자는 400그램, 시민과 아이는 300그램으로 정해졌다. 9월 8일 공습으로 상당량의 곡물, 유지, 설탕이 소실되었다. 9월 12일 남은 식량은 다음과 같이 계산되었다.


  • 곡물, 밀가루 35일분
  • 귀리, 분말 30일분
  • 육류, 가축 33일분
  • 유지 45일분
  • 설탕·과자류 60일분


같은 날 배급은 다시 조정되어 육체노동자는 하루 빵 500그램, 노동자와 아이는 300그램, 기타 시민은 250그램으로 바뀌었다. 육군과 발트 함대는 비축분이 있었으나 충분하지 않았다. 라도가 호수에 배치된 함대는 장비가 부족했고, 여러 차례 독일군 공습을 받아 9월에는 곡물 수송선이 격침되었다. 수송선은 나중에 인양되었고, 배에서 발견된 부패한 곡물도 빵을 만드는 데 사용했다. 소맥분을 전부 사용한 후에는 셀룰로오스와 톱밥, 목화씨까지 식용으로 사용했다. 말 사료용 귀리도 식용으로 돌렸다. 육류가 떨어지자 내장 및 가죽도 요리했다. 시내 빈 공터에는 양배추 등 야채를 심었다.

9월 말에는 석유와 석탄도 떨어졌다. 유일한 연료는 나무였다. 10월 8일 도시 북쪽 삼림에서 목재 채벌이 계획되었으나, 기재도 작업 시설도 없어 10월 24일까지 목재 채벌 계획의 1%만 실시되었다. 전력 공급도 부족해져 군 사령부, 지역 위원회, 방공 거점 등을 제외하고는 전력 사용이 금지되었다. 대부분 공장이 작업을 중지하고, 11월에는 모든 공공 교통 기관이 통행을 정지했다. 1942년 봄 일부 노면 전차가 운행을 재개했으나, 트롤리버스와 버스는 종전까지 재개하지 않았다.

872일간의 포위 동안 물, 에너지, 식량, 공공 서비스 등이 중지되어 레닌그라드 지역에 심각한 기근을 몰고 왔다. 그 결과 군인 150만 명 이상,[166] 주로 어린이와 여성으로 이루어진 민간인 140만 명 이상이 대피 중 포격, 기아로 사망했다.[167][168][143] 레닌그라드 피스카례요브스코례 기념비(Piskaryovskoye Memorial Cemetery)는 공방전 기간 중 사망한 민간인 50만 명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레닌그라드의 경제적, 인적 피해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모스크바 공방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 폭탄 투하의 손실을 초과했다. 레닌그라드 포위전은 가장 사상자가 많은 포위전 중 하나이며, 일부 역사학자들은 공격 작전을 대량 학살의 일부로 보기도 하고, 전례 없는 "인종적 이유의 기아 정책" 등 독일과 소련의 전쟁에서 독일이 생각한 전쟁 정책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169][170]

1942년 레닌그라드에서 사망자 시신을 매장하는 세 남자.


겨울이 가까워지자 사람들은 굶어 죽기 시작했다. 식물학자 니콜라이 바비로프 연구원 중 1명은 식용에 쓰일 수 있었던 20만 종의 식물 종자 수집품을 지키다가 아사했다. 레닌그라드 외곽에는 굶주림과 추위로 죽은 희생자 시체가 넘쳐났다. 식료가 끊어진 도시에서는 사체에서 채집한 인육을 먹는 상황이 일상화되었다. 인육을 파는 상점까지 나타나 사람들은 이것을 먹었다. 레닌그라드 경찰 안에는 이를 단속하는 '식인단속 기동타격대'가 만들어졌다. 이 타격대 대장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태동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테렌티 슈티코프다.

레닌그라드 시민은 특히 1941년~1942년 겨울 기근으로 고통받았다. 1941년 11월부터 1942년 2월까지 시민들은 톱밥이 50~60% 이상 함유되고 그 외 먹을 수 없는 혼화제 성분의 빵 125g을 배급받았다. 1942년 1월 2주일 동안에는 이 배급마저 노동자와 군인만 받을 수 있었다. -30 °C에 달하는 극심한 한파와 도시 교통 시설 정지로 식품 배급 키오스크에서 불과 몇 km 떨어진 지역 시민들도 배급을 받을 수 없었다. 1942년 1월부터 2월까지 매일 700명에서 1,000명이 기아로 사망했다.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사망했고, 시민들은 곧 죽음의 광경에 익숙해졌다.

1941~1942년 겨울 생존자들이 모든 새, 쥐, 애완동물을 먹어치운 이후 식인 보고가 들어왔다.[171] 굶주린 사람들이 사람들을 공격하고 먹기 시작했다.[172] 레닌그라드 경찰은 식인종 단속 특별 병력을 배치했다. 이 병력들의 단속 결과 260명이 식인 행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173]

1942년 8월 9일, 레닌그라드 라디오 오케스트라에서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7번 교향곡이 연주되었다.[174] 이 연주는 1942년 3월 하룻밤 동안 항공을 통해 독일 방어선을 통과했다. 콘서트는 도시 모든 스피커 및 적진을 향해 방영되었다. 이것은 히틀러가 레닌그라드 점령을 축하하기 위해 선택한 날짜이자 신야비노 공세 시작 며칠 전이었다.

11월 20일 라도가 호수가 얼어붙자 말이 끄는 수송 부대가 얼음 위를 통과하여 레닌그라드에 물자를 수송했다. 그 후 트럭에 의한 수송도 가능해졌고, 얼음 위 연결로를 “생명의 길”(러시아어:Дорога жизни)이라고 불렀다. 호수 맞은편에서 시내로 물자가 운반되면서 시민 탈출도 가능해졌다. 생명의 길은 1942년 4월 24일까지 152일간 이용되었다. 그 기간 동안 시민 514,000명과 부상병 35,000명이 레닌그라드에서 탈출했고, 중요한 산업 설비도 운반되었다. 생명의 길은 대공포와 전투기로 방어했으나, 독일군 포격과 공습으로 위협이 계속되어 위험은 지극히 높았다. 트럭 운전수들은 이곳을 “죽음의 길”이라고도 불렀다.

1942년 여름에는 라도가 호수 밑바닥으로 29km의 석유 파이프라인인 “생명의 동맥”이 건설되었다. 겨울이 되어 호수가 얼자, 생명의 길은 다시 열렸다. 12월 20일부터는 말의 왕래가 시작되었고, 4일 후에는 자동차를 이용한 수송도 시작되었다. 빙상 철도 건설도 이루어졌다.

1943년 1월 12일 라도가 호수 남쪽 부근에 있던 소련군의 반격 작전이 개시되어, 1월 18일 레닌그라드를 연결하는 육상 루트가 확보되었다. 그 후에도 레닌그라드는 독일군에게 부분적으로 포위되어 폭격과 포격을 받았으나, 1944년 1월 소련군 공세로 독일군이 철수하자 포위는 완전히 풀렸다. 1944년 여름에는 핀란드군도 개전 시 위치까지 밀려났다.

1941년 주요 사건은 다음과 같다.

  • '''4월:''' 바르바로사 작전과 제네라플랜 오스트 계획에 따라 히틀러는 레닌그라드를 점령하고 파괴하고자 했다.[176]
  •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추축국소련을 침공하기 시작한다.
  • '''6월 23일:''' 레닌그라드 지휘관 M. 포포프가 레닌그라드 남부 방어지 답사 명령을 내린다.[177]
  • '''6월 29일:''' 루가 방어 진지 건설이 시작되고,[178] 어린이 및 여성 대피령이 시작된다.
  • '''6~7월:''' 독일군 진격으로 프스코프와 노브로고드에서 피난 온 시민 30만 명이 레닌그라드로 몰려온다. 북서전선군은 레닌그라드 전방 방어선에 배치되고, 자원군 및 징집병을 포함한 전선 병력이 200만 명에 도달한다.
  • '''7월 19일~23일:''' 북부 집단군의 첫 레닌그라드 공격이 레닌그라드 남부 100km에서 멈춘다.
  • '''7월 27일:''' 히틀러가 북부 집단군을 방문하여 진격 지연에 분노하고, 빌헬름 리터 폰 레프에게 12월까지 레닌그라드를 점령하라고 명령한다.[176]
  • '''7월 31일:''' 핀란드군이 카렐리야 지협의 소련 23 군을 공격하여 겨울 전쟁 이전 핀란드 국경에 도달한다.
  • '''8월 20일~9월 8일:''' 레닌그라드의 산업, 학교, 병원, 주거 지역에 포격이 있었다.
  • '''8월 21일''': 히틀러 제34 지침에서 "핀란드군과 함께 레닌그라드를 포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179]
  • '''8월 20일~27일:''' 레닌그라드로 이어지는 철도 및 도로 공격으로 민간인 대피가 중단되었다.[180]
  • '''8월 31일:''' 핀란드군이 방어 태세에 들어가고 전선을 더 이상 진군하지 않는다.[150]
  • '''9월 6일:''' 독일 국방군 최고 사령부의 알프레트 요들이 핀란드군에게 레닌그라드 공격을 계속하라고 설득하는 데 실패한다.[152]
  • '''9월 2일~9일:''' 핀란드군이 벨루스트로프와 잉구시 북부 해안지대를 점령하고 완전 방어 태세에 들어선다.[158][181]
  • '''9월 8일:''' 독일군이 라도가호에 도달하면서 레닌그라드 육지를 완전히 포위한다.

    참조

    [1] 웹사이트 Tysk-italiensk gästspel på Ladoga 1942, Tidskrift i Sjöväsendet 1973 Jan.–Feb. http://www.koms.se/c[...]
    [2] 웹사이트 Heeresarzt 10-Day Casualty Reports per Army/Army Group, 1941 http://ww2stats.com/[...] 2012-03-28
    [3] 웹사이트 Heeresarzt 10-Day Casualty Reports per Army/Army Group, 1942 http://ww2stats.com/[...] 2015-03-24
    [4] 웹사이트 Heeresarzt 10-Day Casualty Reports per Army/Army Group, 1943 http://ww2stats.com/[...] 2013-05-25
    [5] 웹사이트 Heeresarzt 10-Day Casualty Reports per Army/Army Group, 1944 http://ww2stats.com/[...] 2012-05-03
    [6] 논문
    [7] 서적 Soviet Casualties and Combat Losses in the Twentieth Century https://books.google[...] Greenhill Books 2020-10-03
    [8] 논문
    [9] 웹사이트 Siege Warfare and the Starvation of Civilians as a Weapon of War and War Crime https://www.justsecu[...] 2016-02-04
    [10] 서적 The Leningrad Blockade, 1941–1944: A New Documentary History from the Soviet Archives Yale University Press 2012
    [11] harvnb
    [12] 서적 Racisms Made in Germany https://books.google[...] LIT Verlag 2020-06-23
    [13] 학술지 Opfer, Täter, Betrachter: Finnland und die Leningrader Blockade
    [14] 학술지 Die doppelte Tragödie: Anna Reid über die Leningrader Blockade
    [15] 웹사이트 Saint Petersburg – The Soviet Period http://www.britannic[...] 2011-07-19
    [16] harvnb https://books.google[...]
    [17] 일반
    [18] 서적 Finland in the Second World War: between Germany and Russia Palgrave Macmillan
    [19] harvnb
    [20] harvnb
    [21] 논문
    [22] 서적 The Leningrad Blockade Yale University press
    [23] 웹사이트 Aurora, St. Petersburg https://www.aviewonc[...] 2020-03-02
    [24] 서적 Panzers at War 1939–1942 Coda books
    [25] 서적 История 24-й танковой дивизии ркка http://www.soldat.ru[...] BODlib 2008-01-27
    [26] 논문
    [27] 논문
    [28] 서적 Blue Division Soldier 1941–45: Spanish Volunteer on the Eastern Front Osprey Publishing
    [29] 논문
    [30] 논문
    [31] 논문
    [32] 논문
    [33] 간행물 Führer Directive 21. Operation Barbarossa
    [34] 웹사이트 St Petersburg – Leningrad in the Second World War http://the-siege-of-[...] The Russian Embassy 2000-05-09
    [35] 서적 6. No Sentimentality https://books.google[...]
    [36] 서적 6. No Sentimentality https://books.google[...]
    [37] 웹사이트 'Nuremberg Trial Proceedings Vol. 8', from The Avalon Project at Yale Law School http://www.yale.edu/[...]
    [38] 서적 Карта обстановки на фронте 23 Армии к исходу 11 September 1941 https://web.archive.[...] Архив Министерства обороны РФ. фонд 217 опись 1221 дело 33
    [39] 서적 Jatkosodan hyökkäystaisteluja 1941 Otavan kirjapaino Oy
    [40] 논문
    [41] 논문
    [42] 논문
    [43] 논문
    [44] 서적 ru:Великая Оболганная война http://militera.lib.[...] Яуза 2007-09-25
    [45] 웹사이트 И вновь продолжается бой... http://politika-kare[...] Politika-Karelia 2003-01-28
    [46] 논문
    [47] 논문
    [48] 논문
    [49] 웹사이트 Kenraali Talvelan sota http://ohjelmat.yle.[...] YLE
    [50] 간행물 Tysk-italiensk gästspel på Ladoga 1942
    [51] Harvnb
    [52] 서적 Russian Aviation and Air Power in the Twentieth Century
    [53] 서적 The battle for Leningrad 1941–1944 : 900 days of terror https://archive.org/[...] Cassell
    [54] 서적 Soviet naval operations in the Great Patriotic War 1941–1945 Naval Institute Press
    [55] 웹사이트 Пимченков Алексей Титович – Муниципальное образование Литейный округ (№79) https://www.liteiny7[...] 2020-03-02
    [56] Harvnb
    [57] 웹사이트 Project 60 – 'The First Fight Against Fascism' – Archives http://www.bartcop.c[...] 2023-10-03
    [58] Harvnb
    [59] Harvnb
    [60] Harvnb https://books.google[...]
    [61] 뉴스 Тайна 'Дороги жизни' https://www.kp.ru/da[...] 2006-06-23
    [62] 웹사이트 Д-2 'Народоволец' http://www.museum.na[...] 2008-05-22
    [63] 논문
    [64] 서적 A Global Chronology of Conflict: From the Ancient World to the Modern Middle East: From the Ancient World to the Modern Middle East https://books.google[...] ABC-CLIO
    [65] 서적 The Storm of War: A New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HarperCollins
    [66] 서적 The Second World Wars: How the First Global Conflict Was Fought and Won Basic Books
    [67] 서적 The Rape of Europa: the Fate of Europe's Treasures in the Third Reich and the Second World War Vintage Books
    [68] 웹사이트 Saint Petersburg encyclopaedia http://www.encspb.ru[...]
    [69] 논문
    [70] 논문
    [71] 논문
    [72] 논문
    [73] 논문
    [74] 서적 The Second World Wars: How the First Global Conflict Was Fought and Won Basic Books
    [75] 서적 The Second World Wars: How the First Global Conflict Was Fought and Won Basic Books
    [76] 서적 Beyond the Siege of Leningrad: One Woman’s Life during and after the Occupation: The Recollections of Evdokiia Vasil’evna Baskakova-Bogacheva https://www.degruyte[...] Central European University Press 2024-04-15
    [77] 논문
    [78] 논문
    [79] 논문 https://books.google[...]
    [80] 서적 Symphony for the city of the dead: Dmitri Shostakovich and the siege of Leningrad Candlewick Press
    [81] 서적 15. Corpse-eating and person-eating https://books.google[...]
    [82] 서적
    [83] 서적 19. The Gentle Joy of Living and Breathing https://books.google[...]
    [84] 서적 15. Corpse-eating and person-eating https://books.google[...]
    [85] 서적 15. Corpse-eating and person-eating https://books.google[...]
    [86] 서적 15. Corpse-eating and person-eating https://books.google[...]
    [87] 서적 15. Corpse-eating and person-eating https://books.google[...]
    [88] 서적 The Legacy of the Siege of Leningrad, 1941–1995: Myth, Memories, and Monuments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5-10-25
    [89] 뉴스 Orchestral manoeuvres (part 1) https://www.theguard[...] 2001-11-25
    [90] 서적 Lost Victories
    [91] 서적 Blue Division Soldier 1941–45: Spanish Volunteer on the Eastern Front Osprey Publishing
    [92] 논문 Tragedy and Feat of the 2nd Shock Army
    [93] 서적 World War II in Europe: An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Taylor & Francis 2018-06-23
    [94] 다양한 출처 Saint Petersburg encyclopaedia http://www.encspb.ru[...] Bergharhn Books 2020-06-23
    [95] 서적 The sound of hope: Music as solace, resistance and salvation during the holocaust and world war II McFarland
    [96] 서적 Сведения городской комиссии по установлению и расследованию злодеяний немецко-фашистских захватчиков и их сообщников о числе погибшего в Ленинграде населения ЦГА СПб, Ф.8357. Оп.6. Д. 1108 Л. 46–47
    [97] 학술지 Strategies for Prosecuting Mass Starvation https://academic.oup[...] 2019
    [98] 뉴스 Россия потребовала от Германии официально признать блокаду Ленинграда актом геноцида https://tass.ru/poli[...] 2024-03-18
    [99] Harvnb
    [100] Harvnb
    [101] 논문 2010
    [102] 웹사이트 Война и эвакуация в СССР. 1941–1942 http://vivovoco.astr[...] 2015-11-08
    [103] 웹사이트 Museum of the Defense and Siege of Leningrad, St. Petersburg Russia http://www.saint-pet[...] 2020-03-02
    [104] 웹사이트 A meeting with Acting Governor of St Petersburg Alexander Beglov http://en.kremlin.ru[...] 2020-03-02
    [105] 웹사이트 Saint Petersburg encyclopaedia http://www.encspb.ru[...] 2021-07-22
    [106] 웹사이트 Monument to the Heroic Defenders of Leningrad, St. Petersburg, Russia https://mamayevkurga[...] 2012-09-13
    [107] 웹사이트 The Monument to the Heroic Defenders of Leningrad http://www.saint-pet[...] 2020-03-02
    [108] 웹사이트 History https://www.spbmuseu[...] 2020-03-02
    [109] 웹사이트 Пискарёвское мемориальное кладбище http://www.museum.ru[...] 2020-03-02
    [110] 뉴스 Military Parade Marking 75th Anniversary of Leningrad Siege Held on Palace Square http://tass.com/soci[...] TASS News Agency 2019-01-27
    [111] 뉴스 Military Parade Marks 75th Anniversary of End of Siege of Leningrad https://www.rferl.or[...] Radio Free Europe/Radio Liberty (RFERL.org) 2019-03-03
    [112] 서적 The Siege of Leningrad 1941-44: 900 Days of Terror Zenith Press 2001
    [113] 뉴스 レニングラード解放75年 独軍包囲下で飢餓耐え抜く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 2019-01-28
    [114] 웹사이트 The Siege of Leningrad http://www.soviethis[...]
    [115] 웹사이트 The Legacy of the Siege of Leningrad, 1941-1995 http://www.cambridge[...]
    [116] 서적 包囲されたレニングラード 上
    [117] 서적 包囲されたレニングラード 上
    [118] 서적 包囲されたレニングラード
    [119] 서적 包囲されたレニングラード 上
    [120] 서적 包囲されたレニングラード 下
    [121] 서적 レニングラード封鎖
    [122] 서적 レニングラード封鎖
    [123] 서적 包囲されたレニングラード 下
    [124] 서적 ライフ
    [125] 서적 包囲されたレニングラード 下
    [126] 서적 包囲されたレニングラード 下
    [127] 논문 Tysk-italiensk gästspel på Ladoga 1942 1973
    [128] 서적 2001
    [129] 웹사이트 The Siege of Leningrad, 1941 – 1944 http://www.eyewitnes[...]
    [130] 서적 1963
    [131] 웹사이트 Saint Petersburg - The Soviet Period http://www.britannic[...] 2011-07-19
    [132] 웹사이트 Orchestral manoeuvres (part one) http://www.guardian.[...] 2001-11-25
    [133] 서적 Sonderakte "Barbarossa" http://books.google.[...] Deutsche Verlag-Anstalt
    [134] 서적
    [135] 기타
    [136] 서적 Finland in the Second World War: between Germany and Russia Palgrave Macmillan
    [137] 서적
    [138] 서적 #추정. Harvnb 템플릿의 정확한 정보가 부족하여 추정
    [139] 서적 #추정. Harvnb 템플릿의 정확한 정보가 부족하여 추정 2013-09-07
    [140] 서적 #추정. Harvnb 템플릿의 정확한 정보가 부족하여 추정
    [141] 논문
    [142] 논문
    [143] 논문
    [144] 서적 История 24-й танковой дивизии ркка http://www.soldat.ru[...] BODlib
    [145] 논문
    [146] 논문
    [147] 논문
    [148] 서적 Карта обстановки на фронте 23 Армии к исходу 11.09.1941 http://podvignaroda.[...] Архив Министерства обороны РФ. фонд 217 опись 1221 дело 33
    [149] 서적 Jatkosodan hyökkäystaisteluja 1941 Otavan kirjapaino Oy
    [150] 논문
    [151] 논문
    [152] 논문
    [153] 논문
    [154] 서적 Великая Оболганная война http://militera.lib.[...] 2007-09-25
    [155] 웹사이트 И вновь продолжается бой... http://politika-kare[...] Politika-Karelia 2007-09-25
    [156] 논문
    [157] 논문 2013-10-24
    [158] 논문
    [159] 논문
    [160] 웹사이트 Kenraali Talvelan sota http://ohjelmat.yle.[...]
    [161] 간행물 Tysk-italiensk gästspel på Ladoga 1942 1973-01-01 # 출판 날짜를 정확하게 알 수 없으므로 1월 1일로 설정.
    [162] Harvnb # Harvnb 참고문헌 유형으로 유지 1990
    [163] Harvnb 2001
    [164] Harvnb 2014-01-15 # 쪽 번호가 없으므로 날짜를 date 필드로 이동.
    [165] 서적 The Rape of Europa: the Fate of Europe's Treasures in the Third Reich and the Second World War Vintage Books 1995
    [166] Harvnb 1969
    [167] Harvnb 2004
    [168] Harvnb 1972
    [169] Harvnb 2005
    [170] Harvnb 2005
    [171] 웹인용 900-Day Siege of Leningrad http://it.stlawu.edu[...] 2009-08-08
    [172] 웹사이트 PBS World War 2 http://www.pbs.org/b[...] 2010-03-30
    [173] 웹인용 This Day in History 1941: Siege of Leningrad begins http://www.history.c[...] 2014-01-15
    [174] 웹사이트 Orchestral manoeuvres (part two). From the Observer http://www.guardian.[...]
    [175] 서적 Lost victories
    [176] 논문 2014-03-30
    [177] 논문
    [178] 논문
    [179] 논문
    [180] 서적 The World War II. Desk Reference Grand Central Press
    [181] 웹인용 Approaching Leningrad from the North. Finland in WWII (На северных подступах к Ленинграду) http://www.aroundspb[...]
    [182] Harvnb
    [183] Harvnb
    [184] Harvnb
    [185] 웹인용 Directive No. 1601 http://www.hrono.ru/[...] 1941-09-22
    [186] Harvnb
    [187] 서적 The Grand Alliance Cassel & Co
    [188] 간행물 Finland in the Second World War Bergharhn Books
    [189] 웹인용 Notes of aviation engineer (Аэростаты над Ленинградом. Записки инженера — воздухоплавателя. Химия и Жизнь №5) http://xarhive.narod[...] 2008-03-20
    [190] Harvnb
    [191] 웹사이트 Siege of 1941–1944 http://www.encspb.ru[...]
    [192] 웹인용 ОТЕЧЕСТВЕННАЯ ИСТОРИЯ. Тема 8 http://www.ido.edu.r[...] Ido.edu.ru 2008-10-26
    [193] 웹인용 Фотогалерея: "От Волги До Берлина. Основные операции советской армии, завершившие разгром врага." http://victory.tass-[...] victory.tass-online.ru (ИТАР-ТАСС) 2008-10-26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