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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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리야(Aliyah)는 히브리어 단어로 "상승" 또는 "올라감"을 의미하며, 유대교 전통에서 이스라엘 땅으로의 이주를 지리적, 형이상학적으로 상승으로 여긴다. 이 용어는 이스라엘로의 이념적인 유대인 이민을 설명하는 데 널리 사용되었으며, 시오니즘의 기본 구성 요소로 간주된다. 알리야는 이스라엘의 귀환법에 명시되어 있으며, 모든 유대인과 자격이 있는 비유대인에게 이스라엘 이민 및 정착에 대한 법적 권리와 시민권을 부여한다. 알리야는 유대 메시아의 도래와 관련되어 왔으며, 시오니즘 담론에서는 자발적 이민과 박해받는 유대인들의 대량 탈출을 모두 포함한다. 알리야는 성경 시대부터 시작되어 시오니즘 이전 시대와 시오니즘 이후 시대를 거쳐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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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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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용어
히브리어 단어 ''aliyah''는 "상승" 또는 "올라감"을 의미한다. 유대교 전통에서는 이스라엘 땅으로의 여행을 지리적으로나 형이상학적으로나 상승으로 본다. 예루살렘은 해발 약 750m로, 초기 랍비 유대교 시대의 많은 유대인들이 살았던 나일 델타, 바빌로니아 평원, 지중해 분지보다 높은 곳에 위치했기 때문이다.[6]
עֲלִיָּהhe는 히브리어로 "상승" 또는 "올라감"을 의미하며, 유대교 전통에서는 이스라엘 땅으로의 여행을 지리적, 형이상학적으로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으로 본다.[6] 역사적으로 많은 유대인들이 나일 델타, 바빌로니아 평원, 지중해 분지 등 상대적으로 낮은 지역에 살았기 때문에, 예루살렘(해발 약 750m)으로 가기 위해서는 실제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했다.
성경의 초기 책에서는 이집트가 다른 나라보다 "아래"로 여겨졌으며, 이집트로 가는 것을 "이집트로 내려감", 이집트를 떠나는 것을 "이집트에서 올라감"이라고 묘사한다. 예를 들어, 창세기 46장에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가리라''."라고 말씀하신다. 출애굽기 1장에서는 억압적인 이집트의 새 왕이 이집트에 사는 히브리인들이 전쟁 시에 "우리와 싸워서 그들을 땅에서 ''올라오게'' 할" 적이라고 의심한다.
아르투르 루핀의 1930년 저서 Soziologie der Judende를 통해 ''Aliyah''라는 용어가 팔레스타인/이스라엘로의 이념적 영감을 받은 유대인 이민을 설명하는 데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아리예 타르타코버와 같은 사회학자들은 ''Aliyah''를 목적지에 관계없이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이민으로 정의하기도 했다.
''Aliyah''는 중요한 유대 문화적 개념이며 시오니즘의 기본 구성 요소이다. 이는 이스라엘의 귀환법에 명시되어 있으며, 이 법은 모든 유대인과 자격이 있는 비유대인에게 이스라엘에서 지원을 받는 이민 및 정착에 대한 법적 권리와 이스라엘 시민권을 부여한다. "''aliyah''를 하는" 사람은 ''oleh''(남성; 복수 ''olim'') 또는 ''olah''(여성; 복수 ''olot'')라고 불린다. 많은 종교적 유대인들은 ''aliyah''를 약속의 땅으로의 귀환으로 옹호하며, 하나님이 히브리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후손에게 한 성경적 약속의 성취로 간주한다. 나흐마니데스는 613가지 계명을 열거할 때 알리야를 포함한다.[7]
시프레는 에레츠 이스라엘에 사는 ''미츠바''(계명)가 다른 모든 ''미츠봇''을 합친 것만큼 중요하다고 말한다. 쉬미타와 같이 이스라엘에서만 수행할 수 있는 많은 ''미츠봇''이 있다.[8]
수 세대 동안 종교적인 유대인들에게 ''aliyah''는 유대 메시아의 도래와 관련이 있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메시아가 와서 이방인의 통치로부터 "이스라엘 땅" (''에레츠 이스라엘'', 영어로는 일반적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알려짐)을 구원하고 할라칙 신정 정치 하에서 세계 유대인을 그 땅으로 돌려보내기를 기도했다.[9]
시오니스트 담론에서 ''aliyah''(복수 ''aliyot'')라는 용어는 이념적, 정서적 또는 실용적 이유로 자발적인 이민과 박해받는 유대인들의 대량 탈출을 모두 포함한다. 오늘날 이스라엘 유대인의 대다수는 가족의 최근 뿌리를 이 나라 밖에서 찾을 수 있다. 이스라엘은 "이민자의 나라"이자 난민의 나라이기도 하다.
알리야의 날(Aliyah Day)()은 이스라엘의 국경일로, 매년 유대력에 따라 히브리력 니산월 10일에 기념하며, 이는 유대인이 히브리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온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 공휴일은 또한 이스라엘 국가의 핵심 가치로서의 알리야, 즉 유대 국가로의 이민을 인정하고, 이스라엘 사회에 대한 올림, 즉 유대인 이민자들의 지속적인 기여를 기리기 위해 제정되었다. 알리야의 날은 또한 히브리력 헤쉬반월 7일에 이스라엘 학교에서 기념된다.[117]
여호수아기의 성경적 서술에 따르면, 니산 10일에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궤를 들고 길갈에서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다. 이는 최초의 기록된 "집단 알리야"였다.
3. 역사
성경에서도 이집트를 "아래"로, 이집트를 떠나는 것을 "올라감"으로 묘사하는 등 지리적 의미가 반영되어 있다. 예를 들어,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시고, 출애굽기에서는 이집트 왕이 히브리인들이 "땅에서 올라오게" 할 것을 염려한다.
아르투르 루핀은 1930년 저서에서 이념적 영감을 받은 유대인 이민을 설명하기 위해 ''Aliyah''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6] 아리예 타르타코버와 같은 학자들은 ''Aliyah''를 목적지에 관계없이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이민으로 정의하기도 했다.[6]
''Aliyah''는 시오니즘의 기본 구성 요소이며, 이스라엘 귀환법에 명시되어 있다. 이 법은 모든 유대인과 자격 있는 비유대인에게 이스라엘에서 지원을 받는 이민 및 정착에 대한 법적 권리와 시민권을 부여한다. 종교적 유대인들은 ''aliyah''를 약속의 땅으로의 귀환이자 성경적 약속의 성취로 간주하며, 나흐마니데스는 613가지 계명에 알리야를 포함시킨다.[7] 시프레는 에레츠 이스라엘에 사는 것이 다른 모든 계명을 합친 것만큼 중요하다고 말한다.[8]
시오니스트 담론에서 ''aliyah''는 자발적인 이민과 박해받는 유대인들의 대량 탈출을 모두 포함한다. 오늘날 이스라엘 유대인의 대다수는 가족의 최근 뿌리를 이 나라 밖에서 찾을 수 있으며, 이스라엘은 "이민자의 나라"이자 난민의 나라이기도 하다.
알리야의 역사는 크게 시오니즘 이전과 시오니즘 이후로 구분할 수 있다. 시오니즘 이전의 알리야는 성경 시대부터 시작되었으며, 히브리 성경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기원전 1800년경 가족과 함께 가나안 땅으로 이주했다. 이후 유다 왕국 멸망과 바빌론 유배 이후에도 유대인들의 귀환이 이어졌다. 중세 시대에는 유럽 내 유대인 지위 하락과 종교적 박해 증가로 이스라엘 땅으로의 이주가 늘었다.
시오니즘 알리야는 1882년 빌루 출신 러시아 이민자들의 도착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의 물결로 구분된다. 각 시기별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3. 1. 시온주의 이전의 알리야
시온주의 이전의 알리야는 성경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히브리 성경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기원전 1800년경 가족과 함께 가나안 땅으로 이주했다. 그의 손자 야곱과 그 가족은 이집트로 갔지만, 수 세기 후 모세와 여호수아의 인도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으로 돌아왔다.[11]
유다 왕국 멸망과 바빌론 유배 이후, 기원전 538년 키루스 칙령에 따라 약 5만 명의 유대인이 시온으로 귀환했다. 기원전 459년에는 에즈라가 바빌론의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으로 이끌었다.[11] 제2성전 시대 동안에도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땅 귀환은 계속되었고, 헤롯 대왕은 알리야를 장려했다.[12] 고대 후기에는 많은 바빌로니아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땅으로 이주하여 랍비와 지도자가 되었다.[13] 10세기에는 카라임 유대교 공동체 지도자들이 에레츠 이스라엘 정착을 촉구했고, 예루살렘에 그들만의 구역을 세웠다.[14]
중세 시대(13~19세기)에는 유럽 내 유대인 지위 하락과 종교적 박해 증가로 이스라엘 땅으로의 이주가 늘었다. 영국 유대인 추방령(1290), 프랑스(1391), 오스트리아(1421), 스페인(1492) 등에서의 추방은 메시아적 정신을 강화했다.[15] 유대 메시아 도래, 추방된 자들의 귀환, 이스라엘 왕국 재건에 대한 믿음은 이스라엘 땅으로의 이주를 촉진했다. 1453년 비잔틴 제국 멸망과 스페인 유대인 추방(1492), 포르투갈(1498) 이후 많은 유대인들이 성지로 향했다.[16][17]
18세기와 19세기 초, 카발리스트와 하시디 랍비 추종자, 빌나 가온 제자, 하탐 소퍼 제자들의 이민은 예루살렘, 티베리아스, 헤브론, 체파트의 유대인 인구를 증가시켰다. 19세기 빌나의 가온의 메시아적 꿈은 시온주의 이전의 가장 큰 이스라엘 이주 물결 중 하나에 영감을 주었다. 1808년, 가온의 제자 수백 명이 페루심으로 알려졌으며, 티베리아스와 사페드에 정착했고, 나중에 예루살렘의 구 이슈브의 핵심을 형성했다.[18][19] 1840년에는 메시아 도래 예언에 따라 더 많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
1839년 탄지마트 개혁 이후 팔레스타인으로의 유대인 이주는 본격화되었고, 1840년부터 1880년까지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인구는 9,000명에서 23,000명으로 증가했다. 이주자들은 주로 동유럽과 중부 유럽 출신이었으며, 전통적인 이념과 실질적인 이유(출신 국가의 상황 악화, 팔레스타인에서의 삶 개선)를 함께 고려하여 이주를 결정했다.
3. 1. 1. 성서 시대
히브리 성경은 족장 아브라함이 가족과 추종자들과 함께 기원전 1800년경 가나안 땅으로 왔다고 전한다. 그의 손자 야곱은 가족과 함께 이집트로 내려갔고, 수 세기 후에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와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으로 돌아와 기원전 1300년경에 그 땅에 들어갔다.
지오니스트 역사 기술에서, 밸푸어 선언과 "제3차 알리야"의 시작 이후, "제1차 알리야"와 "제2차 알리야"는 원래 에즈라-느헤미야에 묘사된 두 번의 성서적 "시온 귀환"을 지칭했다. 즉, 스룹바벨이 이끈 "제1차 알리야"와 약 80년 후 에즈라와 느헤미야가 이끈 "제2차 알리야"였다.[11] 유다 왕국의 멸망과 유대인의 바빌론 유배 후 수십 년이 지나, 기원전 538년 키루스 칙령에 따라 약 5만 명의 유대인이 시온으로 귀환했다. 유대인 제사장 서기관 에즈라는 기원전 459년 바빌론에 살던 유대인 망명자들을 그들의 고향 도시인 예루살렘으로 이끌었다. 심지어 돌아오지 않은 유대인들조차 그들의 아이들에게 야슈브-차딕과 야엘리야후와 같은 이름을 지어주며 돌아가고 싶은 열망을 증명했다.[11]
유대인들은 제2성전 시대 내내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왔다. 헤롯 대왕 역시 알리야를 장려했으며, 종종 대제사장직과 같은 핵심 직책을 귀환자들에게 주었다.[12]
고대 후기에 랍비 학문의 두 중심지는 바빌로니아와 이스라엘 땅이었다. 아모라 시대 내내 많은 바빌로니아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땅으로 이주하여 랍비와 지도자로서 그곳의 삶에 발자취를 남겼다.[13]
3. 1. 2. 고대
지오니스트 역사 기술에서, 밸푸어 선언과 "제3차 알리야" 이전에는, "제1차 알리야"와 "제2차 알리야"는 원래 에즈라-느헤미야에 묘사된 두 번의 성서적 "시온 귀환"을 지칭했다. 즉, 스룹바벨이 이끈 "제1차 알리야"와 약 80년 후 에즈라와 느헤미야가 이끈 "제2차 알리야"였다.[11] 유다 왕국의 멸망과 유대인의 바빌론 유배 후 수십 년이 지나, 기원전 538년 키루스 칙령에 따라 약 5만 명의 유대인이 시온으로 귀환했다. 기원전 459년 유대인 제사장 서기관 에즈라는 바빌론에 살던 유대인 망명자들을 그들의 고향 도시인 예루살렘으로 이끌었다. 심지어 돌아오지 않은 유대인들조차 그들의 아이들에게 야슈브-차딕과 야엘리야후와 같은 이름을 지어주며 돌아가고 싶은 열망을 증명했다.[11]
제2성전 시대 내내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왔다. 헤롯 대왕 역시 알리야를 장려했으며, 종종 대제사장직과 같은 핵심 직책을 귀환자들에게 주었다.[12]
고대 후기에 랍비 학문의 두 중심지는 바빌로니아와 이스라엘 땅이었다. 아모라 시대 내내 많은 바빌로니아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땅으로 이주하여 랍비와 지도자로서 그곳의 삶에 발자취를 남겼다.[13] 10세기에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으며 살았던 카라임 유대교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추종자들에게 에레츠 이스라엘로 정착할 것을 촉구했다. 카라임교도들은 예루살렘의 키드론 계곡 서쪽 비탈에 자신들만의 구역을 세웠다. 이 시기에는 티슈레이 달, 특히 숙콧 연휴 무렵에 다양한 국가에서 온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순례에 대한 증거가 풍부하다.[14]
3. 1. 3. 중세
10세기에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으며 살았던 카라임 유대교 공동체의 지도자들이 추종자들에게 에레츠 이스라엘로 정착할 것을 촉구했다. 카라임교도들은 예루살렘의 키드론 계곡 서쪽 비탈에 자신들만의 구역을 세웠다. 이 시기에는 티슈레이 달, 특히 숙콧 연휴 무렵에 다양한 국가에서 온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순례에 대한 증거가 풍부하다.[14]
13세기에서 19세기 사이에 이스라엘 땅으로 이주하는 유대인의 수가 현저하게 증가했는데, 이는 주로 유럽 전역에서 유대인의 지위가 전반적으로 하락하고 종교적 박해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영국 유대인 추방령(1290), 프랑스 (1391), 오스트리아(1421), 스페인(1492년의 알함브라 칙령)에서의 추방은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구원의 징조로 여겨졌으며, 이 시대의 메시아적 정신에 크게 기여했다.[15]
알리야는 또한 이 시기에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국가, 폴란드, 러시아, 북아프리카 유대인들 사이에서 메시아적 열정이 되살아나면서 촉진되었다. 임박한 유대 메시아의 도래, 추방된 자들의 귀환, 이스라엘 왕국의 재건에 대한 믿음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 위험한 이스라엘 땅으로의 여정을 장려했다.
팔레스타인으로의 시온주의 이전의 재정착은 다양한 정도의 성공을 거두었다. 예를 들어, 1210년의 "300명의 랍비의 알리야"와 그 후손들의 운명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들은 1229년 십자군 침략으로 인한 피비린내 나는 격변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거의 없었으며, 이후 1291년 무슬림에 의해 추방된 것으로 여겨진다. 1453년 비잔틴 제국의 멸망과 스페인 유대인 추방(1492) 및 포르투갈 (1498) 이후, 많은 유대인들이 성지로 향했다.[16][17] 17세기 중반의 흐멜니츠키 봉기의 포그롬을 피해 도망친 일부 우크라이나 유대인 난민들도 성지에 정착했다. 그 후, 다양한 카발리스트와 하시디 랍비의 추종자, 빌나 가온의 제자들, 하탐 소퍼의 제자들의 18세기와 19세기 초의 이민은 예루살렘, 티베리아스, 헤브론, 체파트의 유대인 인구를 상당히 증가시켰다.
3. 1. 4. 19세기
13세기에서 19세기 사이에 이스라엘 땅으로 이주하는 유대인의 수가 눈에 띄게 증가했는데, 이는 주로 유럽 전역에서 유대인의 지위가 전반적으로 하락하고 종교적 박해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영국 유대인 추방령(1290), 프랑스 (1391), 오스트리아 (1421), 스페인 (1492년 알함브라 칙령)에서의 추방은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구원의 징조로 여겨졌으며, 이 시대의 메시아적 정신에 크게 기여했다.[15]
알리야는 또한 이 시기에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국가, 폴란드, 러시아, 북아프리카 유대인들 사이에서 메시아적 열정이 되살아나면서 촉진되었다. 임박한 유대 메시아의 도래, 추방된 자들의 귀환, 이스라엘 왕국의 재건에 대한 믿음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 위험한 이스라엘 땅으로의 여정을 장려했다.
1453년 비잔틴 제국의 멸망과 스페인 유대인 추방(1492) 및 포르투갈 (1498) 이후, 많은 유대인들이 성지로 향했다.[16][17] 17세기 중반 흐멜니츠키 봉기의 포그롬을 피해 도망친 일부 우크라이나 유대인 난민들도 성지에 정착했다. 그 후, 18세기와 19세기 초 카발리스트와 하시디 랍비의 추종자, 빌나 가온의 제자들, 하탐 소퍼의 제자들의 이민은 예루살렘, 티베리아스, 헤브론, 체파트의 유대인 인구를 상당히 증가시켰다.
빌나의 가온의 메시아적 꿈은 시온주의 이전의 가장 큰 이스라엘 이주 물결 중 하나에 영감을 주었다. 1808년, 가온의 제자 수백 명은 페루심으로 알려졌으며, 티베리아스와 사페드에 정착했고, 나중에 예루살렘의 구 이슈브의 핵심을 형성했다.[18][19] 이는 19세기 첫 10년 동안 페르시아와 모로코, 예멘과 러시아와 같이 광범위한 지역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수천 명의 유대인들의 더 큰 운동의 일부였으며, 1832년 이집트의 무함마드 알리의 지역 정복 이후에는 더욱더 많은 수가 몰려들었는데, 그들은 모두 유대력 5600년, 기독교력 1840년에 메시아가 도래할 것이라는 기대에 이끌렸다. 또한 영국의 신비주의자 로렌스 올리펀트와 같이 북부 팔레스타인을 임대하여 유대인을 정착시키려는 시도도 있었다(1879년).
팔레스타인으로의 유대인 이주는 1839년 탄지마트 개혁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1840년부터 1880년까지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인구는 9,000명에서 23,000명으로 증가했다. 이주자의 대다수는 동유럽과 중부 유럽(러시아 제국, 루마니아, 헝가리)에서 왔으며, 현대 시온주의 이념에 영감을 받지 않았다. 많은 이들은 전통적인 이념(예: 이스라엘 땅의 신성함에 대한 믿음과 시온으로의 귀환을 통한 유대 민족의 구원)과 실질적인 고려 사항(예: 출신 국가의 악화되는 상황을 피하고 팔레스타인에서 삶을 개선하려는 열망)을 혼합하여 동기를 부여받았다. 1850년대 후반과 1860년대 초에 서유럽에서 이미 구체화된 초기 시온주의 사상은 동유럽에서 통용되기 시작했다.
3. 2. 시온주의 알리야 (1882년 이후)
시온주의 역사에서 1882년 빌루 출신의 러시아 이민자들의 도착을 시작으로 하는 여러 차례의 ''알리야''는 날짜와 이민자들의 출신 국가에 따라 분류된다. 19세기 말, 전 세계 유대인의 99.7%가 이 지역 밖에 거주했으며, 유대인은 팔레스타인 지역 인구의 2–5%를 차지했다.[20][21]
19세기 이전의 소규모 귀환 이주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이스라엘 땅으로의 선사대 알리야로 특징지어진다. 19세기 말 시온주의의 탄생 이후, 알리야 옹호자들은 오스만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령 팔레스타인, 그리고 주권 이스라엘의 정착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알리야의 역사적 파동에 대한 기간 구분은 1917년 발포어 선언 이후 처음 출판되었으며, 이 선언은 성경의 "제1 알리야"와 "제2 알리야" "시온으로의 귀환"과 대조적으로 "제3 알리야"라는 거대한 이민 물결의 시작에 대한 기대를 만들었다. 그 후 2년 동안 시온주의 문헌에서 논의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현대적인 이민 물결을 지칭하기 위해 앞선 두 가지를 변형시켰다. 이 현대적 관습에 따른 이 기간은 1919년 10월 요세프 하임 브레너에 의해 처음 발표되었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시온주의 역사가들은 팔레스타인으로의 다음 이민 기간을 여러 단계로 나누기 시작했다. 현재 받아들여지는 5파동 기간 구분은 사회학자 데이비드 구레비치의 1944년 저서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인구: 이민, 인구 통계 구조 및 자연 성장''에서 처음 출판되었다.[22] 제1 알리야와 제2 알리야는 오스만 팔레스타인으로, 그 다음은 제3 알리야, 제4 알리야, 그리고 제5 알리야는 위임 통치령 팔레스타인으로 이어졌다.[22]
그 후, 지정된 기간에는 1934년과 1948년 사이의 알리야 베트와 브리차, 중동 및 북아프리카의 다른 지역에서의 알리야, 그리고 서방과 공산 국가로부터의 알리야가 포함되었으며, 이는 6일 전쟁과 1968년 폴란드 정치 위기에 이어졌으며, 1990년대의 탈소련 국가로부터의 알리야도 포함되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알리야는 이념적, 경제적, 또는 가족 재결합 목적의 자발적인 이주로 구성된다. 유대인 혈통은 이스라엘 시민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알리야''(이스라엘로 귀환)는 세속적 의미와 종교적 의미를 모두 갖는다.
일반적인 언어에서 숫자를 받은 최초의 현대 이민 기간은 제3 알리야였으며, 제1차 세계 대전 기간에는 성경 시대 바빌로니아에서 온 제1 및 제2 알리야의 후계자로 언급되었다. 이전 현대 기간을 제1 및 제2 알리야로 언급하는 것은 1919년에 처음 나타났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널리 퍼졌다.[23]
3. 2. 1. 오스만 팔레스타인 시기 (1881-1914)
빌루 출신의 러시아 이민자들이 도착한 1882년을 시온주의 역사에서 알리야의 시작으로 본다. 19세기 말, 전 세계 유대인의 99.7%가 이 지역 밖에 거주했으며, 유대인은 팔레스타인 지역 인구의 2–5%를 차지했다.[20][21]
1881년부터 1910년 사이에 러시아 유대인에 대한 극심한 박해는 대규모 이민 물결을 초래했다.[24] 당시 동유럽 유대인 중 시오니즘을 받아들인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에, 1881년부터 1914년 사이에 오스만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사람은 3만에서 4만 명에 불과했던 반면, 150만 명이 넘는 러시아 유대인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출신 30만 명이 북아메리카로 이주했다.[24]
제1차 알리야1882년과 1903년 사이에 약 35,000명의 유대인이 오스만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여, 1880년 20,000~25,000명으로 추산되는 기존 유대인 인구에 합류했다. 이주한 유대인들은 모이거나 모집된 집단으로 도착했다. 이들 집단의 대부분은 1880년대에 루마니아와 러시아 지역에서 조직되었다. 러시아 유대인의 이주는 러시아 포그롬의 종말과 관련이 있으며, 유럽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는 유대인은 약 3%였다. 이 시기에 팔레스타인에 도착한 집단은 히브리어로 "시온에 대한 애정"을 의미하는 ''히바트 치욘''이라고 불렸다. 그들은 또한 집단 구성원들에 의해 ''호베베이 치욘'' 또는 "시온 열광자"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들 집단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표현했지만, 나중에 다른 이주 물결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전체 대중 운동을 포괄할 만큼 충분한 규모는 아니었다.[25] 대부분은 호베베이 시온과 빌루 운동에 속했으며, 러시아 제국에서 왔고, 더 적은 수가 예멘에서 도착했다. 많은 사람들이 농업 공동체를 건설했다. 이들이 건설한 마을 중에는 페타 티크바 (이미 1878년), 리숀 레치온, 로쉬 피나, 지크론 야아코프 등이 있다. 1882년 예멘 유대인은 예루살렘 구시가지 벽의 남동쪽에 위치한 실완의 아랍 마을에 정착했다. 이 마을은 올리브 산의 경사면에 위치해 있다.[26] 쿠르드 유대인은 1895년경부터 예루살렘에 정착하기 시작했다.[27]
제2차 알리야1904년에서 1914년 사이에 35,000~40,000명의 유대인이 오스만 제국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 대다수는 특히 동유럽의 거주 지역에서 온 러시아 제국 출신이었다.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와 같은 동유럽의 다른 국가 출신 유대인들도 합류했다. 동유럽에서의 유대인 이주는 주로 그곳에서의 포그롬과 반유대주의 발발 때문이었다. 그러나 코카서스 출신의 산악 유대인과 예멘, 이란, 아르헨티나를 포함한 다른 국가 출신의 유대인들도 이때 도착했다. 이 시기의 동유럽 유대인 이민자들은 사회주의 이상에 큰 영향을 받아 1909년 최초의 키부츠인 데가니아 알레프를 설립했으며, 증가하는 아랍 적대감에 맞서고 아랍 약탈자로부터 유대인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 하쇼메르와 같은 자위 조직을 결성했다.[28] 1909년에 설립된 야파의 새로운 교외 지역인 아후잣 바이트는 결국 텔아비브 시로 성장했다. 이 기간 동안 독립적인 민족 국가의 몇 가지 기초가 생겨났다. 고대 국가 언어인 히브리어가 구어체로 부활했고, 히브리어로 쓰인 신문과 문학이 출판되었으며, 정당과 노동자 단체가 설립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제2차 알리야 시기를 효과적으로 종식시켰다.
이 기간 동안 도착한 사람들의 절반 이상이 떠난 것으로 추정되며, 다비드 벤구리온은 10명 중 9명이 떠났다고 말했다.[29]
3. 2. 2.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 시기 (1919-1948)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1919년부터 1923년까지 주로 동유럽 출신의 유대인 4만 명이 제1차 세계 대전의 여파로 팔레스타인 지역에 도착했다.[23] 영국의 팔레스타인 점령과 영국 위임통치령의 설립은 발포어 선언에 담긴 약속을 이행할 여건을 조성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농업 훈련을 받고 자립 경제를 구축할 수 있는, ''할루침''으로 알려진 이념에 의해 움직이는 개척자들이었다. 영국 행정부가 이민 쿼터를 설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말 유대인 인구는 9만 명에 달했다. 예스르엘 계곡과 헤페르 평원의 늪은 배수되어 농지로 전환되었다. 히스타드루트 (전국 노동 연맹), 선출된 의회, 국가 평의회, 그리고 이스라엘 방위군의 전신인 하가나와 같은 국가 기관들이 생겨났다.
1924년부터 1929년 사이에는 폴란드와 유럽 전역에서 증가하는 반유대주의로 인해 82,000명의 유대인이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했다.[30] 이들 대다수는 폴란드, 소련, 루마니아, 리투아니아 등 유럽 출신이었지만, 약 12%는 아시아, 주로 예멘과 이라크에서 왔다. 미국의 이민 쿼터는 유대인의 미국 입국을 제한했다. 이 그룹에는 성장하는 도시로 이주하여 소규모 사업과 경공업을 설립한 많은 중산층 가정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이들 중 약 23,000명이 팔레스타인을 떠났다.[30]
1929년부터 1939년 사이에는 독일에서 나치즘이 부상하면서 250,000명의 새로운 이민자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왔다. 이들 중 대다수인 174,000명이 1933년부터 1936년 사이에 도착했다. 이후 영국이 이민을 점점 더 제한하면서 이민은 비밀리에 불법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를 "알리야 베트"라고 불렀다. 제5차 알리야는 거의 전적으로 유럽에서, 주로 중앙유럽 (특히 폴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왔지만 그리스에서도 왔다. 일부 유대인 이민자들은 터키, 이란, 예멘과 같은 다른 국가에서도 왔다. 제5차 알리야에는 독일 출신의 많은 수의 전문직 종사자, 의사, 변호사 및 교수가 포함되었다. 망명 건축가와 음악가들은 바우하우스 스타일을 도입했고 (텔아비브 백색 도시는 바우하우스의 강한 요소를 가진 세계에서 국제 양식 건축의 가장 높은 밀도를 가지고 있다) 팔레스타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하이파 항구와 그 정유 공장의 완공으로 주로 농업 경제에 상당한 산업이 추가되었다. 유대인 인구는 1940년까지 450,000명에 달했다.
이 시기 동안 아랍인과 유대인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어 1929년 유대인에 대한 아랍 폭동과 1936-39년 팔레스타인 아랍 반란과 같은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영국은 1939년 백서를 발표하여 5년 동안 유대인 이민을 75,000명으로 제한했다.
나치가 권력을 잡은 직후, 하아바라 협정을 통해 50,000명의 독일 유대인과 1억 달러 상당의 자산을 팔레스타인으로 이전했다.[31]
영국 정부는 할당량으로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이민을 제한했으며, 나치즘이 독일에서 권력을 잡은 후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으로의 불법 이민, 즉 ''알리야 베트'' (''하아팔라'')가 시작되었다.[32] 모사드 레알리야 베트와 이르군이 이를 조직했으며, 주로 해상으로 이루어졌고, 이라크와 시리아를 통한 육로 이민도 소규모로 이루어졌다. 제2차 세계 대전과 독립 이후까지, ''알리야 베트''는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으로의 유대인 이민의 주요 형태가 되었다.
전쟁 이후, 브리차 ("탈출")는 전 파르티잔 및 바르샤바 게토 봉기 전투원들로 구성된 조직으로, 동유럽에서 폴란드를 통해 유대인을 밀수하는 역할을 했다. 1946년 폴란드는 비자나 출국 허가 없이 자유로운 유대인 알리야를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으로 허용한 유일한 동구권 국가였다.[33] 난민들은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으로 이동하는 이탈리아 항구로 보내졌다. 4,500명 이상의 생존자들이 ''President Warfield''(개명 ''Exodus'')호를 타고 세트의 프랑스 항구를 떠났으나, 영국은 그들을 하이파에서 프랑스로 되돌려보냈고, 함부르크에서 강제로 상륙시켰다. 영국이 불법 이민을 억제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운영 14년 동안 11만 명의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으로 이민했다.
3. 3. 이스라엘 건국 이후 (1948-현재)
이스라엘 건국 이후 알리야는 여러 차례 큰 흐름을 보였다. 1948년 건국 직후부터 1951년까지는 유럽의 홀로코스트 생존자와 아랍 및 이슬람 국가 출신 유대인들이 대거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이 시기 이스라엘의 유대인 인구는 두 배 이상 증가했으며, '키부츠 갈루이엇'(망명자들의 집결)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디아스포라 유대인 공동체가 이스라엘로 이주했다.[36] 1949년에는 한 해 동안 유대인 이민자 수가 249,954명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4]
1950년대 중반에는 북아프리카 국가에서 이민이 증가했고, 1960년대 후반부터는 소련에서 시오니즘 감정이 고조되면서 이민이 증가했다. 1980년대 후반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개방 정책과 1991년 소련 붕괴 이후에는 구소련 출신 이민자들이 대거 이스라엘로 이주했다.[55]
2000년대 이후에는 프랑스에서 반유대주의가 심화되면서 프랑스 유대인들의 이민이 증가했다. 또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우크라이나 유대인들의 이민도 급증했다. 북미 지역에서도 종교적, 이념적 이유로 꾸준히 이민자들이 이스라엘로 오고 있다.
3. 3. 1. 초기 (1948-1960)
1948년부터 1951년까지 홀로코스트 이후 유럽과 아랍 및 이슬람 세계에서 유대인 이민의 주요 물결이 일어났다. 3년 반 동안 이스라엘의 유대인 인구는 국가 건국 당시 65만 명에서 약 68만 8천 명의 유입으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36] 1949년에는 단일 연도에 유대인 이민자 수가 사상 최대인 249,954명이 이스라엘에 도착했다.[4] 이 시기에 많은 디아스포라 유대인 공동체가 알리야를 했기 때문에 ''키부츠 갈루이엇''(망명자들의 집결)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시기 이스라엘에 도착한 이민자 대부분은 유럽 출신의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었다.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의 실향민 수용소와 키프로스의 영국 수용소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다. 폴란드와 루마니아 등 유럽 전역의 유대인 공동체도 대규모로 이민을 왔으며, 불가리아와 유고슬라비아의 유대인 공동체는 거의 완전히 이주했다.
동시에 아랍 국가 출신의 유대인 이민자 수가 크게 증가했다. 예멘의 거의 모든 유대인 인구를 대피시킨 매직 카펫 작전과 이라크 유대인 대부분을 공수 수송한 에즈라와 느헤미야 작전과 같이 위험에 처한 유대인 공동체를 이스라엘로 대피시키기 위한 특별 작전이 수행되었다.[36] 이집트 유대인들은 고센 작전을 통해 이스라엘로 밀반입되었다. 리비아의 거의 모든 유대인 인구가 이 시기에 이스라엘로 떠났으며, 시리아 정부가 유대인 이민을 금지하면서 수십 년 동안 지속될 과정으로 시리아에서 비밀 알리야가 이루어졌다. 이스라엘은 이 기간 동안 이란, 터키,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비아랍 이슬람 국가에서도 상당한 유대인 이민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은 긴축 정책을 초래했다. 당시 경제 규모가 작고 외화 보유량이 부족했던 이스라엘은 이민자들을 부양하기 위해 엄격한 배급 제도를 시행했다. 모든 이스라엘 시민이 적절한 음식, 주택 및 의류에 접근할 수 있도록 조치가 시행되었다. 1953년 이스라엘은 서독과의 배상 협정을 체결하여 서독 정부가 홀로코스트에 대한 보상으로 이스라엘에 지불하게 되었다. 그 결과 유입된 외국 자본은 이스라엘 경제를 활성화하여 대부분의 규제를 완화할 수 있게 했다. 나머지 긴축 조치는 점진적으로 폐지되었다.
새 이민자들이 이스라엘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DDT를 살포받고, 건강 검진을 받고, 질병 예방 주사를 맞고, 음식을 받았다. 최초의 이민자들은 기존 도시 지역에서 원하는 집을 받았지만, 이민자 대부분은 처음에는 이민자 수용소로, 나중에는 ''마아바롯''으로 알려진 임시 수용소로 보내졌다. 1950년 말까지 약 93,000명의 이민자들이 62개의 임시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이스라엘 정부는 이민자들을 난민 수용소에서 가능한 한 빨리 사회로 내보내는 것을 목표로 했다. 수용소를 떠난 이민자들은 배급 카드, 신분증, 매트리스, 담요 한 쌍, 현금 21~36달러를 받았다. 그들은 기존의 도시와 마을 또는 키부츠와 모샤브에 정착했다.[36][37] 다른 많은 사람들은 ''마아바롯''에 남아 있었고, 점차 영구적인 도시와 마을로 바뀌면서 개발 도시로 알려지거나, 부속된 마을의 지역으로 흡수되어 주석으로 된 가옥이 영구적인 주택으로 대체되었다.
1950년대 초에 이민 물결이 잦아들고 이민이 증가했다. 궁극적으로 이민자의 약 10%가 다음 해에 다른 국가로 이스라엘을 떠날 것이다. 1953년에는 이스라엘로의 이민이 한 달에 평균 1,200명인 반면 이민은 한 달에 평균 700명이었다. 대량 이민 기간의 종료로 이스라엘은 임시 수용소에 여전히 살고 있는 이민자들을 더 빠르게 흡수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를 얻었다.[38] 이스라엘 정부는 이민자를 수용하기 위해 260개의 새로운 정착촌과 78,000채의 주택을 건설했으며, 1950년대 중반까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영구적인 주택에 거주했다.[39] 마지막 ''마아바롯''은 1963년에 폐쇄되었다.
1950년대 중반에는 모로코, 튀니지, 알제리, 이집트와 같은 북아프리카 국가에서 더 작은 이민 물결이 시작되었으며, 이 중 많은 국가가 민족주의 투쟁을 겪고 있었다. 1952년부터 1964년까지 약 24만 명의 북아프리카 유대인이 이스라엘로 왔다. 이 기간 동안 공산주의 폴란드에서 온 소규모이지만 상당한 숫자가 도착했는데, 이는 "고물카 알리야"로 알려졌다. 1956년부터 1960년까지 폴란드는 자유로운 유대인 이민을 허용했고, 약 50,000명의 폴란드 유대인이 이스라엘로 이민을 왔다.[40]
3. 3. 2. 1960년대 이후
1960년대 이후, 이스라엘 건국 초기 대규모 이민의 물결은 잦아들었지만, 여전히 다양한 지역에서 이민자들이 이스라엘로 향했다. 소련에서는 1960년대 말부터 시오니즘 감정이 고조되면서 이민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딤시츠-쿠즈네초프 항공기 납치 사건 이후 국제적인 비난이 쏟아지자, 소련 당국은 이민 쿼터를 늘려 1970년대에만 25만 명이 이스라엘로 이주했다.[53]
1980년대 후반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개방 정책과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약 100만 명의 구소련 출신 사람들이 이스라엘로 이주했다.[55] 2014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우크라이나에서 이스라엘로 이주하는 우크라이나 유대인의 수가 급증했다.[57][58]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에는 "이민자들이 고향으로 돌아온다" 작전이 발표되어, 2022년 6월 현재 25,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우크라이나, 러시아, 벨라루스, 몰도바에서 이스라엘에 도착했다.[67]
프랑스에서는 2000년대 이후 반유대주의 심화로 인해 이스라엘로 이주하는 유대인들이 늘어났다. 특히 2012년 툴루즈 유대인 학교 총격 사건 이후 반유대주의 공격이 증가하면서 이민을 고려하는 프랑스 유대인들이 많아졌다.[73] 2015년 샤를리 에브도 총격 사건과 포르트 드 뱅센 인질 사태 이후에는 프랑스 유대인 공동체에 공포감이 확산되면서 이민이 더욱 증가했다.[85][86]
3. 3. 3. 1990년대 이후
1960년대 말까지 소련 내 유대교 문화 및 종교 생활은 사실상 불가능했고, 대다수의 소련 유대인은 문화 동화되고 무신론자가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국가가 후원하는 새로운 반유대주의 물결과, 다른 한편으로는 소련이 무장한 아랍 군대에 대한 승리한 유대 국가에 대한 자부심이 시오니즘 감정을 자극했다.[51]딤시츠-쿠즈네초프 항공기 납치 사건과 그 뒤를 이은 탄압 이후, 강력한 국제적 비난으로 인해 소련 당국은 이민 쿼터를 늘리게 되었다. 1960~1970년 사이에 소련은 4,000명만 출국을 허용했고, 그 다음 10년 동안 그 숫자는 250,000명으로 증가했다.[53] 소련 유대인의 탈출은 1968년에 시작되었다.[52]
1989년 미국은 소련 유대인에게 무조건 난민 지위를 부여하는 이민 정책을 변경했다. 그해 소련 총리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유대인 이민에 대한 제한을 해제했고, 1991년 소련 자체가 붕괴되었다. 그 이후로 약 100만 명의 구 소련 출신 사람들이 이스라엘로 이민했다.[55] 여기에는 랍비법에 따르면 유대인이 아니지만, 귀환법에 따라 이스라엘 시민권을 받을 자격이 있는 약 240,000명이 포함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후, 우크라이나에서 알리야를 한 우크라이나 유대인은 2014년 처음 4개월 동안 전년 대비 142% 증가했다.[57][58] 2014년, 구 소련에서 알리야는 전년 대비 50% 증가했으며, 약 11,430명, 즉 전체 유대인 이민자의 약 43%가 구 소련에서 도착했는데, 이 중 5,840명의 새로운 이민자가 우크라이나에서 왔다.[59][60]
1999년~2002년 아르헨티나 정치 및 경제 위기로 은행들이 대거 파산하고 수십억 달러의 예금이 사라지면서 아르헨티나의 중산층이 몰락했고, 아르헨티나에 거주하는 약 20만 명으로 추산되는 유대인 대부분이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약 4,400명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2000년 이후 1만 명이 넘는 아르헨티나 유대인이 이스라엘로 이민을 갔으며, 이미 그곳에 정착한 수천 명의 아르헨티나 이민자 대열에 합류했다. 우루과이의 경우 약 4만 명 규모의 유대인 공동체의 절반이 같은 기간에 주로 이스라엘로 떠났다.
베네수엘라에서는 반유대주의 폭력을 포함하여, 점점 심화되는 반유대주의로 인해 2000년대에 더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이주하게 되었다. 베네수엘라 역사상 처음으로 수백 명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떠나기 시작했다. 2010년 11월까지, 베네수엘라의 2만 명 규모의 유대인 공동체의 절반 이상이 이 나라를 떠났다.[68][69]
2000년부터 2009년까지 13,000명 이상의 프랑스 유대인이 이스라엘로 이민을 갔는데, 이는 주로 프랑스에서 반유대주의가 심화된 결과였다. 2005년에는 2,951명으로 정점을 찍었다. 하지만, 20~30%는 결국 프랑스로 돌아갔다.[70]
2014년 첫 몇 달 동안, 이스라엘의 유대인 기구는 알리야 박람회, 히브리어 강좌, 잠재적 이민자들이 이스라엘에서 일자리를 찾도록 돕는 세션, 이스라엘에서의 이민자 적응 등을 통해 프랑스 알리야 증가를 계속 장려했다.[79] 2014년 5월 설문조사 결과, 프랑스 유대인의 74%가 이스라엘로 떠나는 것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히브리력 5774년(2013년 9월 - 2014년 9월) 동안, 사상 처음으로 프랑스에서 다른 어떤 국가보다 많은 유대인이 알리야를 했는데, 그 수는 약 6,000명에 달하며, 반유대주의, 친팔레스타인 및 반시온주의 폭력, 경제적 침체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83][84]
20만 명 이상의 북미 이민자들이 이스라엘에 거주하고 있다. 이스라엘 건국(1948년) 이후 북미로부터의 꾸준한 이민이 있어 왔다.[98][99]
1967년 6일 전쟁 이후, 그리고 전 세계 유대인들 사이의 그에 따른 흥분으로,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에 상당한 수가 도착했으며, 이전에는 단지 소수에 불과했다. 1967년부터 1973년 사이에 6만 명의 북미 유대인이 이스라엘로 이민했다. 그러나 그들 중 많은 수가 나중에 원래 국가로 돌아갔다.
서유럽 이민자들처럼 북미인들은 경제적 또는 안보적 목적이 아닌 종교적, 이념적,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스라엘로 이민하는 경향이 있다.[103]
2002년 랍비 예호슈아 파스와 토니 겔바르트에 의해 설립된 네페쉬 베네페쉬는 재정 지원, 취업 서비스, 간소화된 정부 절차를 제공하여 북미 및 영국으로부터의 알리야를 장려하기 위해 노력한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남아프리카 출신, 미국 출신, 프랑스 출신 유대인들이 알리야를 하거나, 향후 이민을 위해 이스라엘에 부동산을 구매하는 꾸준한 흐름이 있었다. 인도 출신의 브네 메나셰 유대인들은 최근 주류 유대교에서 잃어버린 10지파의 후손으로 인정받았지만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1990년대 초 알리야를 시작하여 적은 수로 계속 도착하고 있다.[107] 네페쉬 베네페쉬와 샤베이 이스라엘과 같은 단체들은 일자리 찾기, 히브리어 학습, 동화와 같은 다양한 주제에 대한 재정 지원 및 지침을 제공하여 알리야를 지원한다.
2007년 초 ''하레츠''는 2006년 알리야가 2005년보다 약 9% 감소하여 "1988년 이후 가장 낮은 이민자 수"를 기록했다고 보도했다.[108] 2008년에는 약 15,452명의 이민자가 이스라엘에 도착했고, 2009년에는 16,465명이 도착했다.[110]
4. 알리야의 날
알리야의 날(יום העלייה|욤 하알리야he)은 이스라엘의 국경일로, 매년 유대력에 따라 히브리력 니산월 10일에 기념하며, 히브리 성경에 기록된 대로 유대인이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온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는 히브리력 니산월 10일(י' ניסן|요드 니산he)에 일어났다.[116] 이 공휴일은 이스라엘 국가의 핵심 가치로서의 알리야, 즉 유대 국가로의 이민을 인정하고, 이스라엘 사회에 대한 올림(유대인 이민자)들의 지속적인 기여를 기리기 위해 제정되었다. 알리야의 날은 히브리력 헤쉬반월 7일에도 이스라엘 학교에서 기념된다.[117]
알리야의 날 법 첫머리에는 이 법의 목적이 이스라엘 국가의 존립, 발전 및 다문화 사회로서의 설계를 위한 기반으로서 이스라엘 땅으로의 유대인 이민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니산 10일에 일어난 이스라엘 땅으로의 진입 날짜를 기념하기 위해 연례 공휴일을 제정하는 것이라고 명시되어 있다.[118]
알리야의 날로 선택된 니산 10일은 상징적 의미가 깊다. 이스라엘 크네세트가 제정한 현대 공휴일이지만, 니산 10일은 히브리 성경과 전통적인 유대교 사상에 기록된 유대 민족에게 종교적 의미가 있는 날짜이다.[119]
여호수아기에 따르면, 니산 10일에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궤를 들고 길갈에서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다. 이는 최초의 기록된 "집단 알리야"였다. 그날,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토라의 내용을 새겨 넣은 12개의 돌을 세움으로써 이 사건을 기념하고 축하하도록 명령하셨다. 돌들은 유대 민족의 12 지파 전체와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이스라엘 땅에 대한 감사를 나타냈다.[120]
현대적인 공휴일로서의 알리야의 날은 2009년 암 이스라엘 재단의 TLV 인터내셔널 조직이 주도한 텔아비브의 풀뿌리 커뮤니티 이니셔티브이자 젊은 올림의 자발적인 운동으로 시작되었다.[121] 2016년 6월 21일, 제20대 크네세트는 이 풀뿌리 이니셔티브를 법제화하여 알리야의 날을 이스라엘 국경일에 공식적으로 추가하는 데 찬성표를 던졌다.[122] 알리야의 날 법안[123]은 야당과 연립의 정치적 스펙트럼 전반에 걸쳐 드문 협력 사례로, 여러 정당의 크네세트 의원들이 공동 발의했다.[124]
5. 통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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