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토 산토스뒤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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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베르토 산토스 뒤몽은 브라질 출신의 항공 개척자이자 발명가로, 비행선과 비행기 개발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1890년대 후반부터 비행선 제작에 몰두하여 다양한 모델을 개발했으며, 1901년에는 에펠탑 주변을 비행하는 데 성공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후 비행기 개발에 매진하여 1906년 14-비스로 최초의 동력 비행에 성공하며 유럽 최초의 비행기 비행으로 인정받았다. 말년에는 건강 문제와 비행기의 군사적 사용에 대한 실망감으로 은퇴 후 자살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업적은 브라질에서 기념되고 있으며, 항공 기술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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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토 산토스뒤몽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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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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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알베르투 산투스-두몽 |
원어 이름 | lang: pt text: Alberto Santos-Dumont |
출생 | 1873년 7월 20일 |
출생지 | 미나스제라이스주 파우미라, 브라질 제국 |
사망 | 1932년 7월 23일 (59세) |
사망지 | 상파울루주 과루자 |
안장 장소 | 히우데자네이루 상 주앙 바치스타 묘지 |
직업 | 비행사 발명가 |
활동 기간 | 알려지지 않음 |
알려진 업적 | 산투스-두몽 6호 산투스-두몽 "14-bis" 산투스-두몽 "드모아젤" |
어머니 | ill: v: ib text: 프란시스카 지 파울라 산투스 pt: |
아버지 | 앙리 두몽 |
수상 | ill: v: ib text: 드 위치 상 pt: Prêmio Deutsch ill: v: ib text: 아르슈데콘 상 pt: Prêmio Archdeac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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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 |
알려진 업적 | 유럽 최초의 비행기 제작 |
주요 업적 | |
주요 업적 | 산투스-두몽 6호 산투스-두몽 14-bis 산투스-두몽 Demoiselle |
수상 | ill: v: ib text: 드 위치 상 pt: Prêmio Deutsch ill: v: ib text: 아르슈데콘 상 pt: Prêmio Archdeacon |
2. 생애
2. 1. 어린 시절
알베르토 산토스 뒤몽은 파리의 중앙 예술 및 제조 학교를 졸업한 엔지니어인 엔히키 뒤몽과 프란시스카 데 파울라 산투스의 여섯 번째 자녀였다. 부부는 8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중 알베르토는 여섯째였다.[11] 1873년, 가족은 조앙 아일스 시의 작은 마을인 카방구로 이사했다.[12] 알베르토가 6살이 되었을 때, 가족은 상파울루로 이사했다.[14] 그는 항공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1살 때 풍선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보기 위해 고무 풍선을 찔렀다고 한다.[16] 1877년 2월 20일 발렌사에서 세례를 받았다.[17]

1879년, 뒤몽 가족은 발렌사 (히우 지 자네이루)의 농장을 팔고, 히베이랑 프레투의 시티우 두 카스카벨에 정착하여 3억 레알과 80명의 노예를 소유한 아린데우바 농장[19][15]을 구매하여 1200 부셸을 생산했다.}}

그는 10세까지 누나에게 교육을 받았고,[22] 10세에서 12세까지 Colégio Culto à Ciência에서 공부했다.[19][24][22] 그 후 상파울루와 리우 데 자네이루의 여러 학교에 다녔고,[24] 나중에는 미나스 공과대학에서 과정을 마치지 못했다.[22] 그는 뛰어난 학생은 아니었지만, 아버지의 서재에서 독립적으로 공부를 확장했다.[22] 그는 이미 세련된 매너[22]와 내성적인 성격을 보였다.[22] 1888년 15세의 나이로 상파울루에서 처음으로 인간의 비행을 보았고,[30] 1891년 가족과 함께 파리를 여행한 후, 내연 기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25]
산토스-뒤몽은 아버지 농장에서 보낸 시간을 그리워하며, 그곳에서 가장 큰 자유를 누렸다고 회상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기계적인 것에 대한 큰 사랑을 가지고 있었고, 7세에 농장의 기차를 운전하고, 12세에는 혼자서 기관차를 운전할 수 있었다.[27][28] 커피 기계를 관찰하면서 원형 운동을 하는 기계가 더 효율적이라는 것을 추론했다.[29]
그는 쥘 베른의 작품을 읽으면서 하늘을 정복하려는 열망을 갖게 되었고,[28][30] 뒤틀린 고무 스프링으로 구동되는 프로펠러로 동력을 얻는 연과 소형 비행기를 만들기 시작했다.[14] 매년 6월 24일, 성 요한의 모닥불 위로 작은 실크 풍선 무리를 채워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았다.[34]
미나스제라이스 주의 부유한 커피 농장주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가업의 성공에 힘입어 유복하게 자랐다. 18세 때 아버지 앙리가 낙마 사고로 골반이 골절되어 치료를 받았지만 별세했다. 농장 경영이 불가능해지자 가족과 함께 선조의 나라인 프랑스로 건너갔다.[149]
2. 2. 청년기 (유럽 유학과 초기 경력)
미나스제라이스 주의 부유한 커피 농장주의 막내로 태어났다.가업의 성공으로 유복하게 자란 뒤몽은 18세 때 아버지 앙리가 낙마 사고로 골반이 골절되어 치료를 받았지만 별세했다. 농장 경영이 불가능해지자 가족과 함께 선조의 나라인 프랑스로 건너갔다.[149]
2. 3. 비행선 개발
1897년, 산토스 뒤몽은 독립하여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았다.[40] 그는 이 재산을 자신의 프로젝트 개발에 투자했고,[12] 주식 시장에 적용하여,[36] 어떤 투자자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고 일할 수 있었다.[40] 24세의 산토스 뒤몽은 프랑스로 떠나, ''안드레 – 북극으로의 기구 여행''을 읽은 후 기구를 가르칠 전문 항공사를 고용했다.[12] 1898년 3월 23일, 그는 라샹브 & 마슈론 기구에서 첫 번째 상승을 했다.[38] 1900년까지 그는 9개의 기구를 만들었고, 그 중 브라질과 ''아메리카'' 두 개가 유명해졌다.[4] ''브라질''은 1898년 7월 4일에 처음 비행했고,[14] 당시 만들어진 가장 작은 항공기였다.[19]비행선은 동력을 사용하는 기구로, 1709년 브라질의 사제 바르톨로메우 드 구스마웅에 의해 처음 시연되고 특허를 받았으며, 1783년에는 몽골피에 형제에 의해 비행되었지만,[45] 19세기 말까지는 아직 숙달되지 못했다. 앙리 지파르,[41] 샤를 르나르와 아르튀르 콩스탕탱 크레프스가 전기 모터로 밀폐된 회로에서 비행을 시도했고[40] 프랑스 육군에 의해 포기된 프로젝트, 그리고 브라질인 에 의해 성공하지 못했다.[12]
전기 모터의 무게 때문에 산토스 뒤몽은 내연 기관을 선택했다. 그는 두 개의 실린더를 서로 위에 올려놓아[40] 가볍고 3.5마력의 엔진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항공 분야에서 성공적으로 사용된 최초의 내연 기관이었다.[29]
산토스 뒤몽이 제기한 세부 사항 중 하나는 공기보다 무거운 것의 정의와 관련이 있다. 1902년 6월 그는 ''North American Review''에 기사를 발표하여, 수소 가스 자체는 이륙할 수 없으며 엔진 동력 또한 필요하기 때문에 비행선에 대한 자신의 연구가 항공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했다.[47]

산토스 뒤몽이 설계한 최초의 비행선인 1호는 길이 25미터, 부피 186입방미터였다.[46] 1898년 9월 18일 파리의 불로뉴 숲에서 다시 팽창되었지만, 로프를 잡고 있던 지상 승무원의 판단 착오로 인해 비행 전에 손상되었다. 이틀 후에 수리된 항공기는 이륙하여 비행했다. 외피를 튼튼하게 유지하는 내부 풍선의 공기 펌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24] 400미터 높이에서 비행선이 구부러지기 시작하여 급격히 하강했다.[46]

1899년 산토스 뒤몽은 새로운 항공기 2호를 제작했는데, 길이는 같고 모양도 비슷했지만 직경이 3.8미터로 더 커서 부피가 200입방미터로 증가했다.[14] 첫 번째 테스트는 1899년 5월 11일로 예정되었다. 비행 당시 비로 인해 풍선이 무거워졌다. 시연은 로프로 연결된 항공기로 간단한 기동을 하는 것으로 구성되었지만, 인접한 나무에 부딪혀 끝났다. 수소의 수축과 바람의 힘이 결합되어 비행선이 접혔다.[24]

1899년 9월 산토스 뒤몽은 새로운 길쭉한 비행선인 3호를 제작하기 시작했다.[41] 조명 가스로 팽창되었으며, 길이는 20미터, 직경은 7.5미터, 용량은 500입방미터였다.[14] 11월 13일 오후 3시 30분 산토스 뒤몽은 3호기를 타고 바기라르 비행 공원에서 이륙하여 처음으로 에펠탑을 돌았다.[24] 그는 기념비에서 파르크 데 프랭스, 그리고 롱샹 경마장 근처의 불로뉴 숲의 바가텔 경기장으로 갔다. 그는 1호가 추락했던 정확한 지점에 착륙했는데, 이번에는 통제되었다.[14] 산토스 뒤몽은 생클루 부지에 3호를 완전히 채울 수 있을 만큼 큰 격납고를 건설했고, 수소 가스를 만드는 장비도 갖추었다.[14]

1900년 3월 24일, 백만장자 석유 재벌 앙리 도이치 드 라 메르트는 2년 전에 설립된 프랑스 항공 클럽의 회장에게 효율적인 비행기를 발명할 수 있는 사람에게 10만 프랑을 약속하는 편지를 보냈다.[24] 이 도전은 도이치 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규정에 따르면 항공기는 에펠탑까지 비행하여 기념물을 돌고 30분 이내에 중단 없이 출발 지점으로 돌아와야 했다.[14] 이 상은 알베르토 산토스 뒤몽이 4호기로 더 빠른 비행을 시도하도록 장려했다.[14]

5호는 앙리 도이치 드 라 메르트 상을 놓고 경쟁하기 위해 제작되었으며[12] 생클루의 에어로클럽 드 프랑스 비행장에서 에펠탑까지 왕복 30분 이내에 비행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1901년 7월 13일는 이날 그가 사고를 당하여 "...에드몽 드 로스차일드 씨 공원의 가장 높은 밤나무 위로" 떨어졌다고 말한다.[46]}} 몇 차례의 실험 비행 후, 산토스 뒤몽은 처음으로 도이치 상에서 5호로 경쟁했다. 필요한 코스를 완료했지만 경주 시간 제한을 10분 초과했다.[14] 8월 5일, 그는 다시 상을 타기 위해 시도하다가 트로카데로 호텔에 항공기를 추락시켰고;[19] 풍선이 폭발하여 완전히 파괴되었지만 그는 다치지 않고 탈출했다.[14]

1901년 10월 19일, 622입방미터의 6호 풍선에 20마력 엔진을 장착하고를 참조하십시오.}} 29분 30초 만에 시험을 수행했다.[46] 하지만 착륙하는 데 약 1분이 걸렸고, 위원회는 처음에 상을 거부했다. 이것은 논쟁의 대상이 되었고, 대중과 도이치는 비행사가 우승했다고 믿었다. 얼마 후 비행사가 이 결정에 항의한 후, 이것은 뒤집혔다. 그는 세계 최고의 비행사이자 비행선 발명가로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성인이 된 후 프랑스에서 비행선과 항공기 개발에 열중하여 다양한 비행 기록을 세웠다. 1901년에는 반경식 비행선 6호기로 제한 시간 내에 에펠탑 주위를 도는 비행에 걸린 두치 상을 획득했다. 6호기는 파리 시민들에게 "프티 산토스"라고 불리며 친근하게 여겨졌다[149]。9호기 "발라두즈"로 불로뉴 숲에 있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레스토랑이었던 라 그랑드 카스카드에 착륙하여 점심을 즐겼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2. 4. 도이치 상 수상과 국제적 명성
비행선은 동력을 사용하는 기구로, 1709년 브라질의 사제 바르톨로메우 드 구스마웅에 의해 처음 시연되고 특허를 받았다.[45] 19세기 말까지 비행선은 아직 숙달되지 못했다. 앙리 지파르,[41][20] 샤를 르나르와 아르튀르 콩스탕탱 크레프스가 전기 모터로 밀폐된 회로에서 비행을 시도했고, 프랑스 육군에 의해 프로젝트는 포기되었다. 브라질인 Júlio César Ribeiro de Sousapt에 의해 성공하지 못했다.[12] 다비드 슈바르츠는 금속 클래딩과 연소 엔진을 갖춘 비행선을 개발했지만 테스트를 하지 못하고 사망했다.[46] 산토스 뒤몽이 수행한 것과 같은 대중 시연은 회의적인 학계 환경에서 중요했다.전기 모터의 무게 때문에 산토스 뒤몽은 내연 기관을 선택했다. 초기 테스트에서 그는 파리-암스테르담 경주에서 사용했던 세발 자전거를 나무에 매달아 진동을 확인했는데, 진동이 없었다.[12] 그는 두 개의 실린더를 서로 위에 올려놓아[40] 가볍고 3.5마력의 엔진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항공 분야에서 성공적으로 사용된 최초의 내연 기관이었다.[29]
산토스 뒤몽이 제기한 세부 사항 중 하나는 공기보다 무거운 것의 정의와 관련이 있다. 1902년 6월 그는 ''North American Review''에 기사를 발표하여, 수소 가스 자체는 이륙할 수 없으며 엔진 동력 또한 필요하기 때문에 비행선에 대한 자신의 연구가 항공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비행기는 유충이 날개 달린 나비가 되는 변태와 유사한 일련의 변형을 거쳐 비행선을 통과시키는 진화의 방식으로만 달성될 것이다."라고 썼다.[47]
;1호
|thumb|upright|비행선 2호]]
산토스 뒤몽이 설계한 최초의 비행선인 1호는 길이 25미터, 부피 186입방미터였다.[46] 1898년 9월 18일 파리의 불로뉴 숲에서 1호는 다시 팽창되었지만, 로프를 잡고 있던 지상 승무원의 판단 착오로 인해 비행 전에 손상되었다. 이틀 후에 수리된 항공기는 이륙하여 비행했다. 외피를 튼튼하게 유지하는 내부 풍선의 공기 펌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24] 400미터 높이에서 비행선이 구부러지기 시작하여 급격히 하강했다.[46]
;2호
1899년 산토스 뒤몽은 새로운 항공기 2호를 제작했는데, 길이는 같고 모양도 비슷했지만 직경이 3.8미터로 더 커서 부피가 200입방미터로 증가했다.[14] 그를 거의 죽일 뻔했던 공기 펌프의 신뢰성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압력과 강성을 유지하기 위해 작은 알루미늄 팬을 추가했다.
첫 번째 테스트는 1899년 5월 11일로 예정되었다. 비행 당시 비로 인해 풍선이 무거워졌다. 시연은 로프로 연결된 항공기로 간단한 기동을 하는 것으로 구성되었지만, 인접한 나무에 부딪혀 끝났다. 수소의 수축과 바람의 힘이 결합되어 비행선이 접혔다.[24]
;3호
1899년 9월 산토스 뒤몽은 새로운 길쭉한 비행선인 3호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조명 가스로 팽창되었으며, 길이는 20미터, 직경은 7.5미터, 용량은 500입방미터였다. 바구니는 다른 두 항공기에서 사용했던 것과 동일했다.[14]
|thumb|left|upright|비행선 3호]]
11월 13일 오후 3시 30분 산토스 뒤몽은 3호기를 타고 바기라르 비행 공원에서 이륙하여 처음으로 에펠탑을 돌았다.[24] 그는 기념비에서 파르크 데 프랭스, 그리고 롱샹 경마장 근처의 불로뉴 숲의 바가텔 경기장으로 갔다. 그는 1호가 추락했던 정확한 지점에 착륙했는데, 이번에는 통제되었다.[14]
산토스 뒤몽은 생클루 부지에 3호를 완전히 채울 수 있을 만큼 큰 격납고를 건설했고, 수소 가스를 만드는 장비도 갖추었다.[14] 그는 3호로 23시간의 기록을 깼다.[14] 그는 거의 매일 비행을 시도하여 항공기의 신뢰성과 유용성을 입증했다.[44]
;4호
1900년 3월 24일, 백만장자 석유 재벌 앙리 도이치 드 라 메르트는 2년 전에 설립된 프랑스 항공 클럽의 회장에게 효율적인 비행기를 발명할 수 있는 사람에게 10만 프랑을 약속하는 편지를 보냈다.[24]
이 도전은 도이치 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규정에 따르면 항공기는 에펠탑까지 비행하여 기념물을 돌고 30분 이내에 중단 없이 출발 지점으로 돌아와야 하며, 총 11킬로미터를 최소 하루 전에 소집된 프랑스 항공 클럽의 위원회 앞에서 수행해야 했다. 이는 최소 평균 속도 22km/h를 요구했다.[14]
이 상은 알베르토 산토스 뒤몽이 4호기로 더 빠른 비행을 시도하도록 장려했다.[14] 항공기는 부피가 420입방미터, 길이는 29미터, 직경은 5.6미터였다.[14] 아래에는 9.4미터 대나무 용골이 있었고, 그 중앙에는 일반 자전거의 안장과 페달이 있었다. 안장에 걸쳐 앉은 조종사는 7마력 엔진의 시동 페달을 발 아래에 두었고, 이 엔진은 4미터 길이의 두 개의 실크 블레이드가 있는 전면 프로펠러에 동력을 공급했다. 조종사 옆에는 기화기 및 밸브 설정, 방향타, 밸러스트 및 변위 추를 제어할 수 있는 로프가 있었다.[14] 산토스 뒤몽은 8월 동안 생클루에서 4호기로 거의 매일 비행을 했다. 9월 19일, 국제 항공학자 회의 회원들 앞에서 그는 기름 엔진으로 구동되는 항공 프로펠러의 효과를, 심지어 방향타가 부러진 상태에서도 바람을 거슬러 반복적으로 비행함으로써 입증하여 참석한 과학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14]
;5호와 6호
|left|thumbtime=21|thumb|1901년 알베르토 산토스 뒤몽이 항공의 선구자 중 한 명인 찰스 롤스에게 자신의 비행선 계획을 보여주고 있다.(USP 파울리스타 박물관 소장. 산토스 뒤몽 컬렉션).]]
|thumb|left|upright|1901년 7월 13일, 산토스 뒤몽이 비행선 5호로 에펠탑을 돌고 있다]]
5호는 앙리 도이치 드 라 메르트 상을 놓고 경쟁하기 위해 제작되었으며[12] 생클루의 에어로클럽 드 프랑스 비행장에서 에펠탑까지 왕복 30분 이내에 비행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4호의 확장된 외피를 사용했으며, 소나무로 만든 삼각 곤돌라가 매달려 있었다. 다른 혁신으로는 드래그를 줄이기 위해 곤돌라를 매달기 위한 피아노 와이어의 사용과 물 밸러스트 탱크의 사용이 있었다. 이 비행선은 12마력, 4기통 공랭식 엔진으로 구동되는 프로펠러를 사용했다.[32]
1901년 7월 13일 몇 차례의 실험 비행 후, 산토스 뒤몽은 처음으로 도이치 상에서 5호로 경쟁했다. 필요한 코스를 완료했지만 경주 시간 제한을 10분 초과했다.[14]
8월 5일, 그는 다시 상을 타기 위해 시도하다가 트로카데로 호텔에 항공기를 추락시켰고;[19] 풍선이 폭발하여 완전히 파괴되었지만 그는 다치지 않고 탈출했으며[14] 엔진의 신뢰성을 보여주기 위해 공개적으로 테스트했다.[12]
1901년 10월 19일, 622입방미터의 6호 풍선에 20마력 엔진을 장착하고[46] 29분 30초 만에 시험을 수행했다.[46] 하지만 착륙하는 데 약 1분이 걸렸고, 위원회는 처음에 상을 거부했다. 이것은 논쟁의 대상이 되었고, 대중과 도이치는 비행사가 우승했다고 믿었다. 얼마 후 비행사가 이 결정에 항의한 후, 이것은 뒤집혔다. 그는 세계 최고의 비행사이자 비행선 발명가로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는 상금을 자신의 직원과 실업자[79][56] 그리고 파리 노동자들에게 분배했다. 파리 시청의 도움을 받아.[46]
|thumb|6호 비행선]]
도이치 상을 수상한 후 산토스 뒤몽은 여러 국가로부터 축하 편지를 받았다.;[14]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은 ''뉴욕 헤럴드''와의 인터뷰에서 산토스 뒤몽의 성공 이유, 다른 발명가들에 대한 질투, 그에게 앞선 실험을 탐구했다.;[20] 프랑스, 브라질, 영국에서 찬사가 쏟아졌고, 영국 항공 클럽은 연회를 열었으며,[30] 여러 다른 국가에서도 그랬다. 브라질 대통령인 캄포스 살레스는 그의 초상화와 카몽이스에 대한 언급 "이전에 항해하지 않은 하늘을 통해"가 새겨진 금메달과 함께 1억 레알의 상금을 보냈다.;[32] 1902년 1월 알베르 1세, 모나코 공은 그에게 공국에서 실험을 계속하도록 초청했다. 그는 라 콘다민 해변에 새로운 격납고를 제공했고, 알베르가 그의 편안함과 안전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했다.[14] 이는 수락되었고;[24] 그의 성공은 또한 여러 전기적 인물의 창조에 영감을 주었고, 톰 스위프트와 같은 허구적 인물에게 영향을 미쳤다.;[41] 그 해 4월 산토스 뒤몽은 미국으로 여행하여 뉴욕의 토머스 에디슨 연구소를 방문했다.[58] 그들은 특허에 대해 논의했다. 에디슨과의 만남 후 산토스 뒤몽은 미국 언론에 자신의 항공기에 대한 특허를 낼 의사가 없다고 말했다.[30] 그는 워싱턴 D.C.의 백악관에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으로부터 환영을 받았고[58][55] 잠수함에 대한 방어 도구로 비행선을 사용할 가능성에 대해 미국 해군 및 육군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31]
20세기 초 산토스 뒤몽은 통제된 비행이 가능한 세계 유일의 사람이었다.[41] 미국에서 활동한 후, 그는 영국으로 돌아와 6호를 크리스탈 팰리스에서 전시하고 런던으로 비행할 계획을 세웠다.[44] 비행선의 직물은 풍선 제작자 스탠리 스펜서에 의해 확인된 바와 같이 구멍이 났다.[44]
;모나코
성인이 된 후 프랑스에서 비행선과 항공기 개발에 열중하여 다양한 비행 기록을 세웠다. 1901년에는 반경식 비행선 6호기로 제한 시간 내에 에펠탑 주위를 도는 비행에 걸린 두치 상을 획득했다. 6호기는 파리 시민들에게 "프티 산토스"라고 불리며 친근하게 여겨졌다[149]。9호기 "발라두즈"로 불로뉴 숲에 있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레스토랑이었던 라 그랑드 카스카드에 착륙하여 점심을 즐겼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발라두즈는 산책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미국의 라이트 형제보다 3년 늦은 1906년 10월 23일에 엔테형 동력기 "14-비스" 호의 공개 실험에서 높이 3m, 거리 약 60m를 비행했다. 11월 12일 다시 공개 비행에서 높이 6m, 거리 220m를 비행하여 100m 이상 비행에 걸린 아르슈데크 상(알크데아콩 상)을 획득했다. 이것은 유럽 최초의 비행기 비행이었으며, 당시에는 라이트 형제의 비행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인류 최초의 비행"으로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149]。
2. 5. 비행기 개발
알베르토 산토스뒤몽은 이미 엔진과 관련된 기술적 지식을 축적하고 있었다.[45] 1905년 초, 그는 100년 전 영국의 과학자 조지 케일리가 제작한 자체 안정화 프로토타입에 영감을 받아 No. 11이라는 모형 글라이더를 제작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불안정한 문제로 인해 중단되었다.[45]
1906년 1월 3일, 그는 도이치-아르슈데콩 상에 참가했고, 그 전에 헬리콥터 No. 12를 만들기 시작했지만, 가볍고 강력한 엔진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6월 1일에 포기했다.[14]
상투스-뒤몽 14-비스


그는 이후 14-비스 또는 ''Oiseau de Proie''라는 하이브리드 기계를 제작했다.[46] 14-비스를 완성하기 위해[29] 7월 18일 상투스-뒤몽은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등록했고 다음 날 이국적인 항공기를 처음으로 선보였다.[24] 처음에는 25마력 엔진을 장착했지만, 곧 50마력 Levavaseur 엔진으로 교체했고, 착륙 장치도 세 바퀴에서 두 바퀴로 변경했다.[48]
산토스 뒤몽은 7월 20일에 시험에 등록하고 다음 사흘 동안 기구를 밧줄로 묶어 조종 연습을 하며 비행기를 계속 시험했다. 그는 시험을 통해 기구가 이륙에는 도움이 되지만, 발생하는 항력이 너무 커서 비행을 어렵게 만든다는 것을 깨달았다.[14] 이 비행선은 폐기되었고, 이 복엽기는 언론으로부터 ''Oiseau de Proie'' ("맹금")라는 이름을 받았다.[14]
1906년 10월 23일, 산토스 뒤몽은 최초 모델을 개량한 ''Oiseau de Proie II''를 바가텔에 선보였다. 그는 오전 중에 프로펠러 샤프트가 부러질 때까지 비행기를 활주로를 가로질러 조종하는 데 집중했다. 오후에 수리되었고, 비행기는 공식 시도를 위해 위치를 잡았다. 오후 4시 45분, 산토스 뒤몽은 엔진을 시동했다. 비행기는 60미터를 날아올랐으며,[24] 역풍, 경사로, 캐터펄트, 언덕 또는 기타 장치를 사용하지 않았다. 비행은 전적으로 비행기 자체의 힘으로 이루어졌으며, 당시 유럽인들은 이것이 최초의 업적이라고 믿었다.[78]


프랑스 항공 클럽의 상을 놓고 경쟁하기 위해, 산토스 뒤몽은 더 나은 조종을 위해 날개 사이에 두 개의 팔각형 표면(초보적인 에일러론)을 삽입하고 ''Oiseau de Proie III''를 제작했다. 산토스 뒤몽은 그의 항공기에 에일러론을 구현하는 선구자였다.[41]

산토스 뒤몽은 1906년 11월 12일에 상을 놓고 경쟁했고,[14] 다시 바가텔에서 경쟁했다. 그는 그날 5번의 공개 비행을 했다. 그는 82.60미터를 비행하여 10월 23일의 기록을 넘어섰고 시속 41.3km에 도달했다.[19] 오후 4시 45분에 날이 저물어가면서, 그는 역풍을 뚫고 이륙하여 21초 동안 220미터를 비행했으며, 평균 속도는 시속 37.4km였다.[19] 그는 프랑스 항공 클럽 상을 받았다. 이 비행들은 영화사 파테(Pathé)에 의해 기록된 최초의 비행기 비행이었다.[81]

11월 12일 이후 기체에 다른 변경을 가한 뒤 14-비스로 돌아와 1907년 4월 4일 생시르에서 50미터를 비행했지만, 흔들리다 추락하여 산산조각이 났다. 이 프로젝트는 중단되었다.



그는 또한 캐나드 형식과 반대로, 후방에 장착된 방향타가 있는 복엽기인 15호[40]와 비행선과 비행기를 혼합한 16호, 17호, 그리고 날개 모양을 수중에서 테스트하는 데 사용된 워터 슬라이드인 18호를 제작했다.[14]
15호에서 18호에 만족하지 못한 그는 데모아젤과 같이 크기가 더 작고 더 정교한 새로운 시리즈를 만들었는데, 이 시리즈는 시속 90킬로미터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28][45]
1909년 그는 개선된 데모아젤 20호를 발표했는데, 이것은 "역사상 최초의 초경량기"로 간주되었다.[29] 이 비행기는 스포츠 경기를 위해 설계되었으며 여러 유럽 국가와 미국에서 300대가 제작되었다.[30] 그의 계획은 1910년 6월~7월호 ''포퓰러 메카닉스''에 게재되었다.[46] 이 비행기는 20세기의 항공 탄생에서 산토스-뒤몽의 역할을 굳건히 했다.[30] 그리고 20호 모델은 최대 2킬로미터까지 비행하고 시속 96km를 달성할 수 있었다. 이 항공기는 저렴한 비용과 높은 안전성으로 인해 제1차 세계 대전 중 조종사 훈련에 사용되었다.[39]
이 항공기는 파리 근처의 에어 & 스페이스 박물관에 영구적으로 전시되어 있다.[24]
2. 6. 은퇴와 말년
알베르토 산토스 뒤몽은 다발성 경화증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면서 1910년에 은퇴했다.[94][14] 은퇴 후에도 항공의 대중화를 위해 힘썼으며, 1910년 11월 12일 바가텔에 기념비가 세워졌고, 1913년 10월 4일에는 생클루에 조각가 조르주 콜린이 제작한 데이치 상 수상 기념 이카루스 기념비가 공개되었다.[24] 같은 날 레지옹 도뇌르 훈장 사령관으로 승진했다.[12]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산토스 뒤몽은 프랑스 전쟁부에 자신의 재능을 제공하려 했으나,[24] 운전사로 입대했다.[80] 전쟁에서 비행기가 전투에 사용되는 것을 보며 자신의 꿈이 악몽으로 변하는 것을 느꼈다.[85][29][85] 이후 천문학 연구에 전념했으나, 독일 스파이로 오인받아 체포되기도 했다. 프랑스 정부의 사과를 받았지만,[85] 이 사건으로 우울증을 겪었고, 모든 항공 문서를 파기했다.[24]
1915년 건강 악화로 브라질로 돌아간 그는 제11차 범미 과학 회의에 참가하여 미국의 국가 간 관계 개선을 위한 비행기 사용을 제안했다.[86][24] 1916년에는 제1차 범미 항공 회의의 명예 회장을 맡아 아메리카 대륙 전체의 항공 연맹 창설을 목표로 활동했다. 그는 이과수 국립공원 창설을 제안하기도 했다.[86][24]


1918년 페트로폴리스에 자신의 디자인으로 설계한 집 "A Encantada"를 지었다.[89] 1920년에는 생클루에 있는 이카루스의 복제품으로 자신의 부모와 자신의 묘를 세웠다.[14] 1922년 브라질 독립 100주년 기념 행사에서 아네시아 피네이루 마차도를 훈장했다.[90]
1926년 국제 연맹에 비행기를 전쟁 무기로 사용하는 것을 중단해 달라고 호소했다.[58] 1928년 브라질로 돌아왔으나, 자신의 이름을 딴 수상 비행기 추락 사고로 인해 코파카바나 팰리스에 틀어박혀 지냈다.[58][12]


1931년 프라도 주니어 전 리오데자네이루 시장의 요청으로 조카 조르제 뒤몽 빌라레스가 프랑스에서 그를 데려왔다.[94] 1932년 입헌주의 혁명 당시, 산토스 뒤몽은 비행기가 전쟁에 사용되는 것에 대해 깊은 고통을 느꼈다.[12]
1932년 7월 23일, 산토스 뒤몽은 과루자의 호텔에서 넥타이로 목을 매 자살했다.[24][96] 그의 사망 원인은 심장마비로 기록되었으나,[97] 실제로는 비행기의 군사적 사용으로 인한 우울증과 양극성 장애가 원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99] 그의 시신은 상 조앙 바티스타 묘지에 묻혔다.[24][80]
3. 유산 및 영향
1909년 7월 25일, 루이 블레리오는 영국 해협을 건너 프랑스의 영웅이 되었다. 산토스 뒤몽은 그의 친구 블레리오에게 "지리의 이러한 변화는 해상 항해에 대한 항공 항해의 승리입니다. 언젠가 당신 덕분에 비행기가 대서양을 횡단할 것입니다."라는 축하 편지를 보냈다. 블레리오는 "저는 당신을 따라 하고 모방했을 뿐입니다. 조종사들에게 당신의 이름은 깃발입니다. 당신은 우리의 리더입니다."라고 답했다. 블레리오의 마지막 프로젝트는 ''산토스 뒤몽''으로 명명되었다. 디아스는 산토스 뒤몽의 영향이 항공 개발뿐만 아니라 경비행기든 중비행기든 항공학의 공적 및 개인적 사용을 옹호하는 데 있었다고 말한다.
산토스 뒤몽은 그의 경력 동안 그의 이미지가 제품에 인쇄되었고, 그의 파나마 모자와 칼라가 복제되었으며, 그의 기구가 장난감으로 모델링되었다. 제과업자는 비행선 모양의 케이크를 만들었다. 유럽과 미국 언론은 그를 "프랑스 항공학자"로 묘사하거나 그의 프랑스 혈통을 강조하면서 프랑스인으로 재할당했으며, 브라질 언론은 그의 브라질 뿌리와 국적을 강조했다.
프랑스 항공 클럽은 그에게 두 개의 기념물을 헌정했다. 첫 번째는 1910년, 그가 ''오아조 드 프로이''로 비행했던 바가텔 게임장에 세워졌고, 두 번째는 1913년, 1901년 에어쉽 6호의 비행을 기념하기 위해 생클루에 세워졌다. 생클루 기념비(이카루스 조각상) 제막식에서 그의 오랜 친구 중 한 명인 만화가 조르주 구르사("셈"으로 알려짐)는 잡지 ''일뤼스트라시옹''에 위와 같이 썼다.
1932년 7월 31일, 주 법령 제10,447호는 미나스 제라이스 주 팔미라 시의 이름을 산토스 뒤몽으로 변경했다. 1936년 7월 4일 법률 제218호는 1906년 10월 23일의 역사적인 비행을 기념하여 "항공의 날"을 선포하여 "이 기념 행사가 학교에서 특히 훌륭한 브라질의 산토스 뒤몽의 주도성을 강조하면서 항상 가치 있는 시민, 스포츠 및 문화 축하 행사를 갖도록 한다"고 선언했다. 1936년 10월 16일 리오데자네이루의 첫 번째 공항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947년 12월 5일 법률 제165호는 그에게 명예 계급의 중령 준장을 수여했다. 산토스 뒤몽의 미나스 제라이스 주 카방구 출생지는 1956년 7월 18일 주 법령(MG) 제5,057호에 의해 카방구 박물관으로 지정되었다. 1959년 9월 22일 법률 제3636호는 그를 명예 항공 원수로 만들었다.
1976년, 국제천문연합은 산토스 뒤몽의 이름을 달 분화구 (27.7°N 4.8°E)에 부여했다. 그는 그렇게 영예를 받은 유일한 남미인이다. 1984년 11월 4일 법률 7.243호는 그에게 "브라질 항공의 후원자"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1997년 10월 13일, 당시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은 브라질을 방문하여 이타마라티 궁전에서 연설하면서 산토스 뒤몽을 "항공의 아버지"라고 언급했다.
2005년 10월 18일, 브라질 우주국 (AEB)과 러시아 연방 우주국 (로스코스모스)은 브라질 우주 비행사 마르코스 세자르 폰테스를 국제 우주 정거장으로 데려가는 백년 기념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협정을 체결했다. 이 임무는 1906년 10월 23일 14-bis의 산토스 뒤몽 비행 100주년을 기념하는 것이다. 소유즈 TMA-8 우주선은 2006년 3월 30일 바이코누르 발사 센터(카자흐스탄)에서 발사되었다. 2006년 7월 26일 그의 이름은 브라질리아의 판테아우 다 파트리아의 국가 영웅 강철 서적에 포함되어 국가 영웅 지위를 부여받았다.
1902년 시인 Eduardo das Neves/Eduardo das Nevespt는 산토스 뒤몽의 업적을 기리는 노래 "A Conquista do Ar"를 작곡했다.[119][43] 토마스 스키드모어는 이 노래를 '[브라질] 벨 에포크 시대에 "우파니즘"의 두드러진 예'로 묘사했으며, 는 이 노래가 "...아프로 브라질인들을 비행에 대한 세계적인 비전에 포함시키려는 시도"였다고 평했다.[55] 1924년 타르실라 도 아마랄은 "Carnaval em Madureira"를 그렸다.[55] 2004년 카니발 기간 동안 Unidos da Tijuca는 비행사를 기리기 위해 여러 과학자(그중에는 노벨상 수상자인 로알드 호프만 포함)가 산토스 뒤몽으로 분장했다.[55]
1956년 브라질 우체국은 동력 비행기의 최초 비행 50주년을 기념하는 일련의 우표를 발행했다.[120] 1973년에는 산토스 뒤몽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우표를 발행했다.[121] 2006년 10월 23일에는 14-bis 비행 100주년을 기념하는 우표를 출시했다.[122] 같은 달 브라질 중앙은행은 산토스 뒤몽의 발명품을 기념하는 동전을 발행했다.[123] 그는 크루제이루와 크루제이루 노부 지폐에 묘사되었다.[124]
2012년 까르띠에는 그와 브랜드 간의 파트너십을 기념하여 산토스 뒤몽의 이름을 딴 일련의 시계를 제작했으며, 홍보용으로 프랑스의 Quad Productions에서 제작한 수상 경력에 빛나는 영화 "L'Odyssée de Cartier"가 제작되었다.[125][126]
2015년 작가 아서 자핀은 비행사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의 심장 적출에 관한 역사 소설 ''De gevleugelde'' (브라질에서는 ''O Homem com Asas'')를 출판했다.[127][128]
2016년 하계 올림픽 개막식이 마라카낭 경기장에서 열리는 동안, 산토스 뒤몽의 14-bis 복제품이 경기장에 건설되었으며, 강철 케이블의 도움을 받아 활주로 위를 날아 리우데자네이루 상공으로 "이륙"했다.[129]
산토스 뒤몽은 영화, 텔레비전, 연극에서 등장인물로 묘사되었는데, 마르셀 카뮈의 ''Les faucheurs de marguerites''(1974)에서 Denis Manuel/Denis Manuel프랑스어가,[130] 미니시리즈 Um Só Coração (2004)에서 Cassio Scapin/Cássio Scapinpt이,[131] 단편 영화 (2006)에서 다니엘 지 올리베이라가, Denise Stoklos/Denise Stoklospt의 연극 "Mais Pesado que o Ar – Santos Dumont"(1996)에서 리카르두 나폴레옹이, 그리고 연극 ''Santos-Dumont''(2003년부터)에서 앙리 랄리가 연기했다.[133][134] 페르난다 몬테네그루는 비누 오페라 ''Zazá''(1997)에서 산토스 뒤몽의 트랜스젠더 후손을 연기했다.[135] TV 브라질은 산토스 뒤몽을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 묘사한 베티뇨라는 캐릭터가 등장하는 프로그램 O Teco Teco/O Teco Tecopt를 제작했다.[136]
2019년 11월 10일, HBO는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서 미니시리즈 ''Santos-Dumont''를 방영했다. 이 작품은 비행사가 가족의 커피 농장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미나스 제라이스 주와 상파울루 주에서 시작해 (가족이 정착한 곳), 산토스 뒤몽이 1906년 14-bis로 역사적인 비행을 한 파리의 세련된 살롱과 비행 클럽으로 이어진다. 배우 주앙 페드루 자파가 이 발명가를 연기했다.[137]
현재 브라질에서는 뒤몽의 이름이 크게 남아 있으며, 그의 이름을 딴 공항, 박물관 등 공공 시설과 훈장 외에도 많은 행사들이 존재한다.
- 산토스 뒤몽 공항: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시내에 있는 국내선 발착 공항. 과거 국제선 공항이었다.
- 산토스 뒤몽 상: 브라질에서 개최되는 권위 있는 회화전
- 금상: 우에키 리카르도
- 산토스 뒤몽 훈장: 브라질 공군이 수여하는 훈장
- 수훈자: 오노다 히로오
- 산토스 뒤몽 공로 메달: 교통 분야의 공로자에게 브라질 정부가 수여하는 상.
- 수상자: 마츠자와 쇼지
- 1942년부터 1967년까지 발행된 10,000 크루제이루 지폐 앞면에 뒤몽의 초상이 채택되었다. 이 지폐는 데노미네이션에 따른 통화 단위 개정 후에도 10 신 크루제이루 지폐로 한동안 사용되었다.
4. 기타
산토스 뒤몽은 결혼하지 않았고, 수줍음이 많은 성격이었으며, 그의 성 정체성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논쟁이 있었다.[138] 브라질 물리학 연구 센터의 연구원 엔히키 린스 지 바호스는 산토스 뒤몽이 동성애자였다는 주장을 거부하며, 그가 단지 외모에 신경 쓰는 사람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139] 바호스는 당시 미국 언론이 프랑스적인 세련됨을 동성애적인 가식으로 오해하여 그를 여성스럽게 묘사했다고 말했다.[140] 또한 산토스 뒤몽이 미국 백만장자의 딸인 에드나 파워스와 약혼했다는 사실을 언급했다.[29] 반면, 코스메 데제나르 드루몽은 산토스 뒤몽이 프랑스에서 "정복자로서의 명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141] 루이스 모트가 작성한 "브라질의 VIP 동성애자 100인" 목록에 산토스 뒤몽이 포함되면서 논란이 재점화되었지만, 그의 가족은 이를 부인했다.[142] 1901년 산토스 뒤몽은 친구에게 편지를 통해 한 미국 여성에게 사랑을 느끼고 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144]
산토스 뒤몽은 다발성 경화증을 앓았던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 연구들은 이 진단에 의문을 제기한다.[100][145] 엔히크 린스 지 바호스는 다발성 경화증과 같은 퇴행성 질환을 앓는 사람이 1910년대에 스키를 타고 1920년대에 테니스를 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100] 그의 증손자는 산토스 뒤몽이 심각한 우울증을 겪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100] 최초 진단은 어지럼증과 복시 등의 증상에 기반했지만, 다른 의사들은 그가 정신적인 징후를 보였다고 주장하며 이의를 제기했다.[146] Cheniaux는 산토스 뒤몽이 양극성 장애 또는 조증 증후군을 앓았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그의 기괴한 발명품들이 "비판적 능력의 상실"을 보여준다고 분석한다.[146] 1931년 오르테즈 요양소의 의사는 산토스 뒤몽을 '자책감과 상상의 죄책감에 대한 망상으로 불안한 우울증을 겪고 있으며 처벌을 기다리는' 사람으로 묘사했다.[55]
산토스 뒤몽은 뛰어난 패션 감각으로도 유명했는데, 특히 깃이 높은 하이 칼라 셔츠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까르띠에의 손목시계 '산토스'는 뒤몽의 의뢰로 제작된 파일럿용 손목시계를 원형으로 한다. 브라질에서는 뒤몽을 손목시계 발명가로 믿는 사람이 많다. 1942년부터 1967년까지 발행된 10,000 크루제이루 지폐 앞면에 뒤몽의 초상이 사용되었으며, 데노미네이션 이후에도 10 신 크루제이루 지폐로 통용되었다.
산토스 뒤몽은 다음과 같은 저서와 기사를 남겼다.
'''저서'''
- ''Dans l'air'' (1904, 프랑스어)
- ''O que eu vi, o que nós veremos'' (1918, 포르투갈어)
'''번역서'''
'''기사'''
- Une Ascension au Jardin D'Acclimatation (1898, L'Aéronautique)
- Travel by Balloon (1902-01-05, Baltimore American)
- Air-Ships and Flying-Machines (1902년 6월, The North American Review)
- 나는 어떻게 비행사가 되었는가, 그리고 비행선에 대한 나의 경험 (1902년 9월, McClure's Magazine)
- The Sensations and Emotions of Aerial Navigation (1904년 1월, The Pall Mall Magazine)
- Ce que je ferai, Ce que l'on fera (1905, Je Sais Tout)
- The Future of Air-ships (1905-03-01, The Fortnightly Review)
- The Pleasures of Ballooning (1905-06-01, The Independent)
'''미발표작'''
- ''L'Homme Mécanique'' (1929년)
- 18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항공 사건들을 다룬 제목 없는 책 (13개 챕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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