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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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태일은 1948년 대구에서 태어나 가난한 환경 속에서 성장했으며, 1960년대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의류 제조업체 시다로 일하며 열악한 노동 환경을 목격했다. 근로기준법의 부당함을 알게 된 그는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바보회'를 조직하고 노동운동에 헌신했으나,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하여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노동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고,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현재까지도 노동 운동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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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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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전태일 |
로마자 표기 | Jeon Tae-il |
한자 표기 | 全泰壹 |
출생일 | 1948년 9월 28일 |
출생지 | 대구, 대한민국 |
사망일 | 1970년 11월 13일 |
사망지 | 동대문구, 서울, 대한민국 |
사망 원인 | 분신자살 |
국적 | 대한민국 |
직업 | 재봉사 노동자 노동운동가 인권운동가 |
종교 | 감리교 |
부모 | 아버지 전상수, 어머니 이소선 |
친척 | 남동생 전태삼 남동생 전태이 (요절) 여동생 전순옥 여동생 전순덕 외할아버지 이성조 외할머니 김분이 |
웹사이트 | (재) 전태일재단 |
소속 | 바보회 |
관련 활동 | 노동운동 인권운동 |
이념 | 반공주의 |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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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wikitext
전태일은 1948년 9월 28일 대구 남산동에서 가난한 노동자인 전상수와 그의 부인 이소선의 아들로 태어났다.[3] 그의 아버지는 가내수공업에 실패하고,[3] 재봉사 일을 하다가 사기를 당해 가족은 서울로 이주했다.[3] 초기에는 서울역 근처 염천교 밑에서 노숙 생활을 했고,[3] 어머니는 만리동 일대에서 동냥을 하기도 했다.[3] 이후 아버지가 봉제 일자리를 얻어 월세방을 구했지만, 1960년 다시 대구로 내려갔다.[3]
전태일은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하고, 거리에서 삼발이를 만들어 파는 등 행상을 하며 어려운 유년기를 보냈다. 1963년 3월 대구 청옥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3] 가정 형편으로 그해 12월 자퇴했다.[3] 아버지는 전태일에게 학교를 그만두고 재봉일을 도울 것을 강요했고, 이에 반발한 전태일은 가출했다가 3일 만에 돌아왔지만, 아버지의 폭력으로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3]
1964년 동생 전태삼과 함께 다시 가출하여 서울 청계천으로 올라온 전태일은 평화시장 의류제조회사에서 시다(견습공)로 일하게 되었다.[3]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배운 재봉 기술 덕분에 평화시장의 피복점 보조로 취업하여 14시간 노동을 하며 차 한 잔 값에 해당하는 50원을 일당으로 받았다.[3] 1965년에는 삼일사에 시다로 입사하여, 이후 1년간 회사를 다니면서 노동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1965년 평화시장 내 삼일사의 미싱사로 일하며 어린 여공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저임금, 과중한 노동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3] 특히, 한 여공이 폐렴으로 해고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지만, 자신도 여공을 도왔다는 이유로 1966년 여름 해고되었다.[3] 1966년 8월, 한미사 재단보조로 취직했다가 그해 말 재단사가 되었다.[3]
1968년에는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10] 해설서를 통해 공부하며 현실의 부당함에 분노를 느꼈다. 그는 '바보회'를 만들어 평화시장 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과 노동 조건의 부당함을 알리고 설문 조사를 통해 실태를 파악하려 했다.[10]
2. 1. 어린 시절과 노동
전태일은 1948년 9월 28일 대구 남산동에서 가난한 노동자인 전상수와 그의 부인 이소선의 아들로 태어났다.[37] 그의 아버지는 가내수공업에 실패하고,[37] 재봉사 일을 하다가 사기를 당해 가족은 서울로 이주했다.[37] 초기에는 서울역 근처 염천교 밑에서 노숙 생활을 했고,[37] 어머니는 만리동 일대에서 동냥을 하기도 했다.[37] 이후 아버지가 봉제 일자리를 얻어 월세방을 구했지만, 1960년 다시 대구로 내려갔다.[37]전태일은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하고, 거리에서 삼발이를 만들어 파는 등 행상을 하며 어려운 유년기를 보냈다. 1963년 3월 대구 명덕초등학교(당시 청옥고등공민학교)에 입학했으나,[38] 가정 형편으로 그해 12월 자퇴했다.[38] 아버지는 전태일에게 학교를 그만두고 재봉일을 도울 것을 강요했고, 이에 반발한 전태일은 가출했다가 3일 만에 돌아왔지만, 아버지의 폭력으로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37]
1964년 동생 전태삼과 함께 다시 가출하여 서울 청계천으로 올라온 전태일은 평화시장 의류제조회사에서 시다(견습공)로 일하게 되었다.[3]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배운 재봉 기술 덕분에 평화시장의 피복점 보조로 취업하여 14시간 노동을 하며 차 한 잔 값에 해당하는 50원을 일당으로 받았다.[3] 1965년에는 삼일사에 시다로 입사하여, 이후 1년간 회사를 다니면서 노동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1965년 평화시장 내 삼일사의 미싱사로 일하며 어린 여공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저임금, 과중한 노동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3] 특히, 한 여공이 폐렴으로 해고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지만, 자신도 여공을 도왔다는 이유로 1966년 여름 해고되었다.[3] 1966년 8월, 한미사 재단보조로 취직했다가 그해 말 재단사가 되었다.[3]
1967년 2월, 전태일은 고등학교 복학을 꿈꾸며 통신강의록을 구입하고 금식하며 공부할 결심을 하기도 했다. 1968년에는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39] 해설서를 통해 공부하며 현실의 부당함에 분노를 느꼈다. 그는 '바보회'를 만들어 평화시장 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과 노동 조건의 부당함을 알리고 설문 조사를 통해 실태를 파악하려 했다.[39]
2. 2. 노동 운동
1965년 평화시장 내 삼일사의 미싱사로 일하며 어린 여공들이 열악한 근무 환경과 과중한 노동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졌다.[39] 1966년 8월 17일 평화시장 한미사 재단보조로 취직하였다가, 그해 말 재단사가 되었다.1968년,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된[10] 그는 해설서를 구입해 공부하며 법에 규정된 최소한의 근로조건조차 지켜지지 않는 현실에 분노했다. 1969년 6월, 평화시장 최초의 노동조직인 바보회를 설립했다.[10] "바보회"라는 이름은 착취적인 노동 환경에 순응하는 노동자들이 바보라는 전태일의 믿음을 반영했다.[10] 그는 평화시장 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 내용과 현재 노동 조건의 부당성을 알리고 설문조사를 통해 노동 실태를 조사했다.[10] 그는 재단회사 시다들과 인근 공장 노동자들의 생활을 듣고 집에 와서 말하는 일이 잦아지다가 노동 운동에 본격 투신하였다.
1969년 6월부터 재단사 친구들, 근처 공장의 노동자들을 찾아다니며 바보회의 회원을 모집하였다. 그는 바보회의 취지에 대해 지금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처럼 당하고 살지만 우리도 깨우쳐서 바보로 남지 말자는 뜻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여러가지로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는데, 친구들을 규합하는 어려움, 주변의 냉소와 비야냥거림, 노동청과 근로감독관, 언론들의 기만극, 생계를 책임져주기를 바라는 가족들의 간절한 바람 속에 서있었다.[40] 하지만 그의 죽음은 민주노조 운동이 자라는 밑거름이 되었으며, 경향신문에서 전태일의 죽음을 상세히 보도하는 등 노동자들의 인권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도록 하였다.
그는 밤이 새도록 근로기준법 조문을 찾아 암기하며 현장에서 발생하는 노동자 불이익에 저항하였다. 동대문구청과 시청 근로감독관실, 노동청을 찾아가 열악한 환경에 대해 호소하고 근로기준법 상의 감독권 행사를 요청했지만, 번번히 거절당하거나 무시당했다.[42] 그는 청계천 일대의 노동 실태를 직접 조사, 설문하여 이를 토대로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는 청원서를 노동청에 냈으나 돌아온 답변은 경멸과 비웃음 뿐이었다.
1969년 7월 열악한 노동조건과 근로기준법 위반에 관한 설문조사를 하여 노동청에 진정을 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1969년 9월부터 1970년 4월까지 일용직 건축 노동자로 일하였다. 이때 그는 감리교회의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했다. 1970년 4월부터는 평일에는 자신이 다니던 감리교회의 신축 공사장에서 일하며 밤에는 노동자 동지들에게 근로기준법을 가르치는 야학당 교사가 되었다.
1970년 9월, 바보회를 발전시킨 삼동친목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임되었다. 그 뒤 다시 노동실태 조사 설문지를 돌려 126장의 설문지와 90명의 서명을 받아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조건개선 진정서'라는 이름으로 노동청에 진정서를 제출한다. 이 내용이 경향신문에 실려[28] 주목을 받자, 전태일 등 삼동회 회원들은 본격적으로 임금, 노동 시간, 노동환경의 개선과 노동 조합 결성 등을 위해 사업주 대표들과 협의를 벌였으나, 정부의 약속 위반으로 인해 번번이 무위로 돌아갔다.
그는 언론사들을 찾아다니면서도 노동자들의 참상을 전달했다. 1970년 10월 7일, 평화시장의 참상에 관한 보도가 대대적으로 실렸다.[28]
1970년 10월 8일, 삼동회 대표들을 이끌고 평화시장 사무실에 찾아가 노동 8개 항의 요구를 제출하였으나 거절당했다.[28] 박정희 대통령 앞으로도 탄원서를 보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44][45][46] 10월 24일, 서울 도심에서 근로 조건 개선 거리시위를 기도했으나 경찰의 방해로 무산되었다.
노동청에서는 11월 7일까지 법을 개정해주겠다고 약속하였으나[29]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11월 8일 전태일은 동료들에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근로기준법 책을 화형하자"고 제의했고, 거사 날짜는 11월 13일로 계획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구호를 작성하였다.
2. 3. 분신과 죽음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은 삼동회 회원들과 함께 평화시장 앞에서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29] 그러나 경찰과 고용주 측의 방해로 시위가 무산될 위기에 처하자, 전태일은 오후 1시 30분경 몸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붙인 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를 혹사하지 말라"라고 외치며 평화시장 앞길로 달려나왔다.[2] 불길은 순식간에 전태일의 전신을 휩쌌고, 그는 "정부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쓰러졌다.조영래에 의하면, 쓰러진 전태일의 몸 위로 불길은 약 3분가량 타올랐고,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당황하여 아무도 불을 끌 엄두를 못 냈다고 한다.[47] 뒤늦게 한 친구가 잠바를 벗어 불길을 덮었다.[47] 전태일은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어머니 이소선에게 "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 주세요"라는 유언을 남기고[48] 쓰러졌다.
전태일은 응급 치료를 받았지만 화상으로 굳어진 몸은 움직일 수 없었다. 의사는 전태일의 어머니에게 치료 주사 비용이 1만 5천 원(당시 전태일 급여의 약 2년치 연봉)이라고 말했지만, 어머니는 돈이 없었다. 서울시청 근로감독관은 보증을 서 달라는 요청을 거절하고 자리를 피했다.[49] 결국 전태일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몇 시간을 방치되었고,[49] 오후 4시경 성모병원 응급실로 옮겨졌으나 11월 13일 오후 10시에 사망했다.[10] 그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배고프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49]
전태일의 분신은 박정희 정권의 경제 성장의 부정적인 측면을 드러냈고, 침체되었던 노동 운동을 활발하게 만들었다.[25] 학생과 지식인들의 시선을 노동 문제로 돌리게 하여, 1970년대~80년대 민주화 운동에서 노동자와 학생 및 지식인들의 연대를 낳는 데에도 기여했다.[26]
3. 전태일의 유산
1972년 기독청년 전태일 1주기 추도식으로 시작된 전태일 추도식은 1980년대에 와서 노동운동가 전태일 추도식으로 제목이 바뀌었다. 그의 어머니 이소선은 아들의 유언에 따라 별세 직전까지 청계천 노조 지원과 노동 운동 지원에 헌신하여 '노동자들의 어머니'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11] 1981년 서울에서 노동운동가들 중심으로 전태일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고,[12] 이후 전태일재단이 조직되어 '전태일문학상'과 '전태일노동상'을 제정하여 수여하기 시작하였다.
1987년 6.10 항쟁 이후 노동단체들이 모여 그해 7월부터 8월까지 노동자 대회를 열었으며, 7월 15일에는 그의 어록, 초안 등을 참고하여 '87 노동자계급 해방선언'이 개최되었다. 1988년 11월 전태일의 분신 자살을 기념하기 위한 '전태일 정신 계승 전국 노동자 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어 매년 11월 전국 노동자대회가 열리고 있다.
전태일의 죽음은 당시 노동자들의 참혹한 노동 현장의 상황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노동자, 학생, 지식인 등 각계각층의 연대를 이끌어내어 노동문제를 사회 이슈화했다.[64] 신문, 방송이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게 되고, 정치계와 정당들도 정부의 반노동자 정책에 비판을 가하게 되었다. 그의 항거는 민주노동운동의 고양과 훗날 사회 민주화의 시금석이 되었다.[64]
민주노총 김영훈 위원장은 전태일 열사의 삶을 비정규직 노동운동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보았다.[65] 김영훈 위원장은 한겨레 21과의 인터뷰에서 "전태일 열사는 그 자신도 어려웠지만 자신보다 더 어려운 여성노동자들의 편에서 살다가 죽었다. 노동운동도 가장 고통받는 비정규직 노동자들,특히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연대해야 한다.이것이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올바르게 계승하는 것이다.전태일 열사는 노동자가 사람답게 사는 삶을 생각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사람답게 사는 삶'이다."라고 말했다.[65]
2002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전태일을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승인하였다.[14] 1996년 9월 19일에는 서울 중구 을지로6가에서 '전태일 거리'를 선포하였고, 이를 기념하여 민예총 회원들이 전태일 열사가 분신하고 있는 모습을 담은 걸개그림 앞에서 추모공연을 하였다.[57] 이 '전태일 거리'에서는 전태일을 추모하기 위한 '전태일 거리문화제'가 진행되고 있다. 1999년부터는 민주열사를 비롯해 의롭게 숨진 시민의 기념표석을 세우는 서울시'유적지 사업'에 포함되어 평화시장 분신장소에 기념표석이 세워졌다. 하지만 2003년 청계천 복원공사로 철거되기도 하였다.[58]
2019년 4월 30일에는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전태일기념관이 정식 개관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https://imnews.imbc.com/replay/2020/nw1200/article/5972706_32496.html 2019년 11월 12일 전태일 50주기]를 맞이하며 노동계 최초로 [https://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20/11/12/2020111201772.html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여 그의 공적을 기리고 노동존중사회를 향한 의지를 표명하였다.[17]
2020년 10월 14일, 전태일 사망 50주기를 한 달 앞두고 서울 종로구 전태일다리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전태일 열사 기념의 달"이 선포되었다. 기념식에서 디지털 미디어 아티스트 배호연은 전태일을 모티브로 한 디지털 아트 작품을 전태일 50주년 기념사업위원회와 함께 공개했다.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배호연은 "[전태일은] 큰 감명을 주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순교자다."라고 말했다.[16]
전태일의 투쟁을 자세히 다룬 전기 영화 ''돌아오지 않는 강''가 제작되었다. 2001년에는 그를 다룬 베스트셀러 전기가 출판되었다.[10] 2012년 다큐멘터리 영화 ''마더''는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의 이야기를 다룬다. 2012년 4월, 그의 여동생 전순옥은 대한민국 국회의 민주통합당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변영규, 홍준표 감독의 2021년 대한민국 애니메이션 영화 ''태일이''에서 전태일은 장동윤이 연기했다.[18][19][20] 이 영화는 아네시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21][22]와 판타지아 국제 영화제에서 수상했다.[23]
3. 1. 노동 운동의 기폭제
전태일의 죽음은 노동계에 큰 영향을 주어 본격적인 노동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53] 회사의 착취와 해고를 당하면서도 단결하여 투쟁할 생각을 못하던 노동자들이 죽음으로써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한 전태일을 보면서 각성한 것이다. 그의 자살 이후 평화시장에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되었으며, 다른 공장들에도 노동조합 결성의 계기가 마련되었다.[5] 1970년 11월 25일 조선호텔 노동자 이상찬의 분신 기도, 1971년 9월 한국회관(음식점) 노동자 김차호의 분신 기도, 8월 신진자동차 노조 조합원과 가족 1900여명의 파업투쟁, 한진상사 파월 노동자 400여명의 대한항공 빌딩 옥상 방화 농성 등이 주요한 사건들이었다. 1971년의 노동자의 단결투쟁은 1600여건에 이르렀는데, 이는 전년도 165건에 비해 10배가 넘는 규모였다.[53]1970년 8월~9월에 일하던 모 미싱회사의 사장은 전태일 때문에 자신이 조사를 받을까봐 고민했다 한다. 그의 외삼촌은 "우리 공장에 있다 그런 일 났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라고 나중에 말했다.[37] 일부 미싱사 등은 냉소적으로 반응하였는데, 일부 노동자와 미싱사들은 "자기 하나 죽는다고 뭐가 해결되느냐"라고 말하기도 했다.[37]
전태일의 죽음은 11월 16일, 서울대학교 법대생 100명 이상이 그의 시신을 인수하여 장례를 치르고, 전국적으로 400명이 넘는 학생들이 무기한 단식 시위에 돌입하는 등 큰 사회적 영향을 미쳤다. 11월 20일, 서울대학교, 성균관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등의 학생들이 서울대학교 법대에 모여 전태일을 추모하고 시위를 벌였으며, 고려대학교와 연세대학교 학생들도 집회에 참여했다.[7] 11월 22일에는 약 40명의 대학생들이 새문안교회에서 사회가 전태일의 죽음에 책임이 있으며 자신들 또한 공범이라고 말하며 속죄를 위한 단식 기도를 올렸다.[8] 1971년 1월 23일, 신민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은 기자회견에서 대통령이 된다면 "전태일의 정신을 구현하겠다"고 약속했다.[8]
1972년 기독청년 전태일 1주기 추도식으로 시작된 이래 1980년대에 와서 노동운동가 전태일 추도식으로 제목이 바뀌었다. 그의 어머니 이소선은 아들의 유언에 따라 별세 직전까지 청계천 노조 지원과 노동 운동 지원에 헌신하여 노동자들의 어머니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1981년 서울에서 노동운동가들 중심으로 전태일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고, 이후 전태일재단이 조직되어 '전태일문학상'과 '전태일노동상'을 제정하여 수여하기 시작하였다. 1987년 6.10 항쟁 이후 노동단체들이 모여 그해 7월부터 8월까지 노동자 대회를 열었으며, 7월 15일에는 그의 어록, 초안 등을 참고하여 '87 노동자계급 해방선언'이 개최되었다. 1988년 11월 전태일의 분신자살을 기념하기 위한 '전태일 정신 계승 전국 노동자 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어 매년 11월 전국 노동자대회가 열리고 있다.
1996년 9월 19일에는 서울 중구 을지로6가에 '전태일 거리'를 선포하였고, 이를 기념하여 민예총 회원들이 전태일 열사가 분신하고 있는 모습을 담은 걸개그림 앞에서 추모공연을 하였다.[57] 2002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전태일을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승인하였다.[14] 2019년 4월 30일에는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전태일기념관이 정식 개관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9년 11월 12일 전태일 50주기를 맞이하며 노동계 최초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여 그의 공적을 기리고 노동존중사회를 향한 의지를 표명하였다.[17]
전태일의 분신자살을 계기로, 박정희 정권 하의 경제 성장의 부정적 측면이 드러나고 침체되어 있던 노동 운동이 활발해졌다.[25] 또한, 학생과 지식인들의 시선을 노동 문제로 돌리게 하여, 1970년대~80년대 민주화 운동에서 노동자와 학생 및 지식인들의 연대를 낳는 데에도 기여했다.[26] 현재에도 민주노총 등에서는 전태일을 ‘열사’라 부르며, 그의 행위를 ‘전태일 정신’으로 삼아 노동 운동가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다.[27]
3. 2. 민주화 운동과의 연대
전태일의 죽음은 기본적인 인권을 존중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삶을 고발하며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54] 1970년 11월 16일 서울대 법대생 1백여명은 그의 유해를 인수하여 학생장을 거행하겠다고 주장했고, 상대생 4백여명은 무기한 단식 농성을 벌였다. 11월 20일 서울대생, 성균관대생, 이화여대생 등과 기타 서울시내 학생운동가들이 모여 서울대 법과대학에서 전태일 추도식을 거행하고 공동으로 시위를 벌였다가 해산되었으며, 고려대, 연세대생들도 집회를 열었다.[54] 시위 직후 서울대 측은 무기한 휴업령을 내렸으나 서울대생들은 계속해서 철야 농성을 벌였다.[54]1970년 11월 22일 새문안교회(예장통합)대학생부 신도 40여명은 전태일의 죽음에 사회가 책임이 있고 자신들도 공모자라며 속죄를 위한 금식 기도회를 열었다. 23일에는 기독교계에서 개신교와 천주교의 공동집전으로 추모 예배를 거행하였는데, 고(故) 장공 김재준 목사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여기에 전태일의 죽음을 위해 애도하기 위해 모인 게 아닙니다. 한국 기독교의 나태와 안일과 위선을 애도하기 위해 모였습니다."라고 하였다.[55]
당시 신민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은 1971년 1월 23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전태일 정신의 구현'을 공약으로 발표하기도 했다.[56] 이후 신민당은 노동 운동에 호의적인 정책을 펼쳤고, 노동자 시위는 경찰과 정부의 탄압을 피해 신민당의 당사로 피신하는 일도 종종 발생하였다.
전태일의 분신자살을 계기로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이 보도되면서, 박정희 정권 하의 경제 성장의 부정적 측면이 드러나고 침체되어 있던 노동 운동이 활발해졌다.[25] 또한, 학생과 지식인들의 시선을 노동 문제로 돌리게 하여, 1970년대~80년대 민주화 운동에서 노동자와 학생 및 지식인들의 연대를 낳는 데에도 기여했다.[26] 이후, 문제 의식을 가진 많은 대학생들이 이력을 속이고 공장에 들어가 일하면서 노동 운동을 조직하는 ‘의식화’ 작업을 전개하여 노동 운동 발전에 기여하게 되었다.[26]
1984년 서울에서 노동 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전태일 열사 기념 사업회가 조직되었다.[12] 1985년에는 전태일 기념관이 개관했다.[13] 이후 전태일재단이 설립되어 전태일 문학상과 전태일 노동상을 제정하여 시상하고 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노동 단체들은 그해 7월부터 8월까지 노동자 회의를 열었다. 7월 15일에는 전태일의 발언을 참고하여 1987년 노동계급 해방 선언이 발표되었다. 1988년 11월 서울에서 전태일의 분신자살을 기리는 전국 노동자 회의가 열렸고, 그 이후 매년 11월에 개최되고 있다.
2001년 전태일은 정부로부터 민주화 운동 인사로 인정받았다.[14]
현재에도 민주노총 등에서는 전태일을 ‘열사’라 부르며, 그의 행위를 ‘전태일 정신’으로 삼아 노동 운동가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다.[27]
3. 3. 전태일 정신
1972년 기독청년 전태일 1주기 추도식으로 시작된 전태일 추도식은 1980년대에 와서 노동운동가 전태일 추도식으로 제목이 바뀌었다. 그의 어머니 이소선은 아들의 유언에 따라 별세 직전까지 청계천 노조 지원과 노동 운동 지원에 헌신하여 '노동자들의 어머니'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11] 1981년 서울에서 노동운동가들 중심으로 전태일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고,[12] 이후 전태일재단이 조직되어 '전태일문학상'과 '전태일노동상'을 제정하여 수여하기 시작하였다.1987년 6.10 항쟁 이후 노동단체들이 모여 그해 7월부터 8월까지 노동자 대회를 열었으며, 7월 15일에는 그의 어록, 초안 등을 참고하여 '87 노동자계급 해방선언'이 개최되었다. 1988년 11월 전태일의 분신 자살을 기념하기 위한 '전태일 정신 계승 전국 노동자 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어 매년 11월 전국 노동자대회가 열리고 있다.
전태일의 죽음은 당시 노동자들의 참혹한 노동 현장의 상황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노동자, 학생, 지식인 등 각계각층의 연대를 이끌어내어 노동문제를 사회 이슈화했다.[64] 신문, 방송이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게 되고, 정치계와 정당들도 정부의 반노동자 정책에 비판을 가하게 되었다. 그의 항거는 민주노동운동의 고양과 훗날 사회 민주화의 시금석이 되었다.[64]
민주노총 김영훈 위원장은 전태일 열사의 삶을 비정규직 노동운동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보았다.[65] 김영훈 위원장은 한겨레 21과의 인터뷰에서 "전태일 열사는 그 자신도 어려웠지만 자신보다 더 어려운 여성노동자들의 편에서 살다가 죽었다. 노동운동도 가장 고통받는 비정규직 노동자들,특히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연대해야 한다.이것이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올바르게 계승하는 것이다.전태일 열사는 노동자가 사람답게 사는 삶을 생각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사람답게 사는 삶'이다."라고 말했다.[65]
2002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전태일을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승인하였다.[14] 1996년 9월 19일에는 서울 중구 을지로6가에서 '전태일 거리'를 선포하였고, 이를 기념하여 민예총 회원들이 전태일 열사가 분신하고 있는 모습을 담은 걸개그림 앞에서 추모공연을 하였다.[57] 이 '전태일 거리'에서는 전태일을 추모하기 위한 '전태일 거리문화제'가 진행되고 있다. 1999년부터는 민주열사를 비롯해 의롭게 숨진 시민의 기념표석을 세우는 서울시'유적지 사업'에 포함되어 평화시장 분신장소에 기념표석이 세워졌다. 하지만 2003년 청계천 복원공사로 철거되기도 하였다.[58]
2019년 4월 30일에는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전태일기념관이 정식 개관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https://imnews.imbc.com/replay/2020/nw1200/article/5972706_32496.html 2019년 11월 12일 전태일 50주기]를 맞이하며 노동계 최초로 [https://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20/11/12/2020111201772.html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여 그의 공적을 기리고 노동존중사회를 향한 의지를 표명하였다.[17]
2020년 10월 14일, 전태일 사망 50주기를 한 달 앞두고 서울 종로구 전태일다리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전태일 열사 기념의 달"이 선포되었다. 기념식에서 디지털 미디어 아티스트 배호연은 전태일을 모티브로 한 디지털 아트 작품을 전태일 50주년 기념사업위원회와 함께 공개했다.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배호연은 "[전태일은] 큰 감명을 주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순교자다."라고 말했다.[16]
전태일의 투쟁을 자세히 다룬 전기 영화 ''돌아오지 않는 강''가 제작되었다. 2001년에는 그를 다룬 베스트셀러 전기가 출판되었다.[10] 2012년 다큐멘터리 영화 ''마더''는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의 이야기를 다룬다. 2012년 4월, 그의 여동생 전순옥은 대한민국 국회의 민주통합당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변영규, 홍준표 감독의 2021년 대한민국 애니메이션 영화 ''태일이''에서 전태일은 장동윤이 연기했다.[18][19][20] 이 영화는 아네시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21][22]와 판타지아 국제 영화제에서 수상했다.[23]
4. 전태일 관련 논란
1970년 당시 전태일은 봉제 노동자들의 월급 액수를 설문 조사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1970년도 당시 전태일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대체로 시다가 월 1천8백 원에서 3천 원, 미싱사가 7천원에서 2만 5천원, 미싱보조는 3천원에서 1만 5천원, 그리고 재단사가 1만 5천원에서 3만원까지 받고 있었다.
동아일보의 1983년 뉴스에도 그가 조사한 조사자료와 비슷한 기록이 전한다. 동아일보 기자가 1983년 설문한 자료에도 "70년대 초만 하더라도 평화시장 근로자들은 하루평균 14~15시간을 높이 1.5m의 다락방에서 일하고 재단사가 월1만5천원에서 3만원, 미싱사가 월7천원에서 1만5천원, 시다 라는 이름의 견습공이 월1천8백원에서 3천원정도 받았다.[59]"고 한다. 참고로 당시 1972년 9급 공무원(현재 5급) 1호봉은 월급 1만7300원을 받았다. 재단사가 5급공무원보다 월급이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시다는 그에 못미친다.[60]
==== 방조 및 방치 논란 ====
인권변호사 조영래에 의하면 전태일에게 불을 붙인 제3의 인물이 있었다 한다.[61] 《전태일 평전》을 처음 집필한 조영래는 전태일의 몸에 불을 붙였다는 그의 친구의 이름을 알지 못하여 김개남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61] 1970년 11월 13일 시위가 무산당하자, 그는 김개남에게 성냥불을 켜서 자신의 몸에 갖다 대어 달라고 부탁했다.[61] 조영래에 의하면 '그 전날 저녁에 김개남은 전태일이 내일 "누구 한 사람 죽는 것처럼 쇼를 한판 벌려서 저놈들 정신을 번쩍 들게 하자"라고 하는 말을 들은 일이 있었다.[61]' 한다. "설마…"하는 생각에 그는 성냥불을 켜서 전태일의 옷에 갖다 대었고, 순간 전태일의 옷 위로 불길이 확 치솟았다. 친구들 보고 먼저 내려가라고 한 뒤 그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한 되가량의 석유를 온 몸에 끼얹고 내려왔던 것이다.[47]
그의 몸에 불이 붙은 뒤에도 현장에 사람이 있었으나 3분가량 방치되었다. 조영래에 의하면 "(석유를 온 몸에 뿌린 그의 몸에) 불길은 순식간에 전신을 휩쌌다. 불타는 몸으로 그는 사람들이 많이 서성거리고 있는 국민은행 앞길로 뛰어나갔다. 그는 몇 마디 구호를 외치다가 그 자리에 쓰러졌다.[47]" 한다. 그러나 전태일은 현장에서 3분가량 방치되었다. 도리어 근로기준법 화형식이라 하여 근로기준법 법전들을 불타는 전태일을 향해 던졌다. 쓰러진 전태일의 몸 위로 불길은 약 3분가량 타고 있었는데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당황하여 아무도 불을 끌 엄두를 못 내었다.[47] 그러다가 한 친구가 뛰어와서 무어라고 소리를 지르며 잠바를 벗어서 불길을 덮었다.[47]
서울 성모병원 응급실에 후송되었으나, 그는 3~4시간 동안 방치되었다. 그는 치료다운 치료를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채 응급실 한 구석에 방치되었다.[62] 그는 병원 도착 직전까지 요절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전태일은 구급차로 인근 병원에 후송되었다가 다시 서울 성모병원으로 후송된 뒤에도 3~4시간 정도 방치되었다고 한다. 성모병원에서는 전태일을 응급실에 얼마간 두었다가 입원실로 옮겼는데, 이미 회생할 가망이 없다고 의사는 진단했다.[49] 의사는 전태일에게 회생 가능성이 없다는 이유로 3~4시간가량 그를 진료하지 않았다.
입원실에서도 별다른 치료없이 환자를 거의 방치해두다시피 하였다.[49] 어머니 이소선은 목이 마르다면서 물을 달라고 수없이 졸라대며 죽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지켜 보고 있었다. 물을 마시면 화기가 입 속으로 들어가서 영영 살릴 수 없게 된다는 생각에 물을 줄 수가 없었다. 나중에는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어서 갈증이라도 면하게 해주려고 물을 적셔서 입에 축여주었다.[49] 저녁이 되면서부터 전태일은 기력이 탈진해 가는 듯 잠잠히 누워 있었다. 한동안 혼수상태에 빠진 듯하더니 눈을 떠서 힘없는 목소리로 "배고프다…" 라고 하였다.[49] 그리고 누구도 전태일의 진료비를 내지 않았다.
이를 두고 환자를 살려야 되는 의사들이 책임을 방관했다는 비판이 있다. "그 당시 전태일의 담당 의사는 한 개인이 아니었다. 1970년 11월의 대한민국 의료계 전체가 전태일의 마지막 길을 동반한 주치의였다. 그 글(전태일의 입원 과정)을 읽었던 1987년의 의료계도 사회적 책무라는 면에서는 1970년의 의료계와 별반 달라질 게 없었던 듯 했다.[63]"는 비판이 있다.
==== 보상금 문제 ====
2002년 11월 28일 전태일은 보상금 930만원을 받았다. 그러나 1991년 분신자살한 노동운동가 윤용하가 2억 3천만원을 받은 것과 비교되어 형평성 문제가 제기되었다.[66] 위원회는 "국가배상법은 희생 당시 월급액을 기준으로 보상금을 정하도록 돼 있어 당시 월급이 2만원에 불과한 전태일씨와 90년대 들어 노동자의 월급이 급격히 오른 후의 대상자와 보상금이 수십 배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라고 설명했다.[66][67]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등 민주화운동 관련자 유가족 8명은 12월 31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 보상금 지급 현실화를 요구하며 재심을 청구했다.[68] 이소선은 "태일이가 보상금으로 930만원으로 받는데 비해 1991년 분신 자살한 윤용하씨는 2억 3천만원을 받는다"며 "이는 태일이의 보상금을 물가상승률을 고려하지 않고 당시 임금만을 단순 반영한 호프만식 계산법으로 산정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68] 재심청구를 주선한 전국민주민족유가족협의회(유가협)도 보상금심의위원회가 당시 전문 기술자였던 전씨를 단순일용직 근로자로 분류해 보상금을 지급한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68]
2005년 4월 정부는 국무회의를 열어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법률 일부 개정령'을 의결, 전태일 유족들에게 1억 4천여만원을 추가로 보상했다.[69]
4. 1. 방조 및 방치 논란
인권변호사 조영래에 의하면 전태일에게 불을 붙인 제3의 인물이 있었다 한다.[61] 《전태일 평전》을 처음 집필한 조영래는 전태일의 몸에 불을 붙였다는 그의 친구의 이름을 알지 못하여 김개남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61] 1970년 11월 13일 시위가 무산당하자, 그는 김개남에게 성냥불을 켜서 자신의 몸에 갖다 대어 달라고 부탁했다.[61] 조영래에 의하면 '그 전날 저녁에 김개남은 전태일이 내일 "누구 한 사람 죽는 것처럼 쇼를 한판 벌려서 저놈들 정신을 번쩍 들게 하자"라고 하는 말을 들은 일이 있었다.[61]' 한다. "설마…"하는 생각에 그는 성냥불을 켜서 전태일의 옷에 갖다 대었고, 순간 전태일의 옷 위로 불길이 확 치솟았다. 친구들 보고 먼저 내려가라고 한 뒤 그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한 되가량의 석유를 온 몸에 끼얹고 내려왔던 것이다.[47]그의 몸에 불이 붙은 뒤에도 현장에 사람이 있었으나 3분가량 방치되었다. 조영래에 의하면 "(석유를 온 몸에 뿌린 그의 몸에) 불길은 순식간에 전신을 휩쌌다. 불타는 몸으로 그는 사람들이 많이 서성거리고 있는 국민은행 앞길로 뛰어나갔다. 그는 몇 마디 구호를 외치다가 그 자리에 쓰러졌다.[47]" 한다. 그러나 전태일은 현장에서 3분가량 방치되었다. 도리어 근로기준법 화형식이라 하여 근로기준법 법전들을 불타는 전태일을 향해 던졌다. 쓰러진 전태일의 몸 위로 불길은 약 3분가량 타고 있었는데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당황하여 아무도 불을 끌 엄두를 못 내었다.[47] 그러다가 한 친구가 뛰어와서 무어라고 소리를 지르며 잠바를 벗어서 불길을 덮었다.[47]
서울 성모병원 응급실에 후송되었으나, 그는 3~4시간 동안 방치되었다. 그는 치료다운 치료를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채 응급실 한 구석에 방치되었다.[62] 그는 병원 도착 직전까지 요절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전태일은 구급차로 인근 병원에 후송되었다가 다시 서울 성모병원으로 후송된 뒤에도 3~4시간 정도 방치되었다고 한다. 성모병원에서는 전태일을 응급실에 얼마간 두었다가 입원실로 옮겼는데, 이미 회생할 가망이 없다고 의사는 진단했다.[49] 의사는 전태일에게 회생 가능성이 없다는 이유로 3~4시간가량 그를 진료하지 않았다.
입원실에서도 별다른 치료없이 환자를 거의 방치해두다시피 하였다.[49] 어머니 이소선은 목이 마르다면서 물을 달라고 수없이 졸라대며 죽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지켜 보고 있었다. 물을 마시면 화기가 입 속으로 들어가서 영영 살릴 수 없게 된다는 생각에 물을 줄 수가 없었다. 나중에는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어서 갈증이라도 면하게 해주려고 물을 적셔서 입에 축여주었다.[49] 저녁이 되면서부터 전태일은 기력이 탈진해 가는 듯 잠잠히 누워 있었다. 한동안 혼수상태에 빠진 듯하더니 눈을 떠서 힘없는 목소리로 "배고프다…" 라고 하였다.[49] 그리고 누구도 전태일의 진료비를 내지 않았다.
이를 두고 환자를 살려야 되는 의사들이 책임을 방관했다는 비판이 있다. "그 당시 전태일의 담당 의사는 한 개인이 아니었다. 1970년 11월의 대한민국 의료계 전체가 전태일의 마지막 길을 동반한 주치의였다. 그 글(전태일의 입원 과정)을 읽었던 1987년의 의료계도 사회적 책무라는 면에서는 1970년의 의료계와 별반 달라질 게 없었던 듯 했다.[63]"는 비판이 있다.
4. 2. 보상금 문제
2002년 11월 28일 전태일은 보상금 930만원을 받았다. 그러나 1991년 분신자살한 노동운동가 윤용하가 2억 3천만원을 받은 것과 비교되어 형평성 문제가 제기되었다.[66] 위원회는 "국가배상법은 희생 당시 월급액을 기준으로 보상금을 정하도록 돼 있어 당시 월급이 2만원에 불과한 전태일씨와 90년대 들어 노동자의 월급이 급격히 오른 후의 대상자와 보상금이 수십 배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라고 설명했다.[66][67]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등 민주화운동 관련자 유가족 8명은 12월 31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 보상금 지급 현실화를 요구하며 재심을 청구했다.[68] 이소선은 "태일이가 보상금으로 930만원으로 받는데 비해 1991년 분신 자살한 윤용하씨는 2억 3천만원을 받는다"며 "이는 태일이의 보상금을 물가상승률을 고려하지 않고 당시 임금만을 단순 반영한 호프만식 계산법으로 산정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68] 재심청구를 주선한 전국민주민족유가족협의회(유가협)도 보상금심의위원회가 당시 전문 기술자였던 전씨를 단순일용직 근로자로 분류해 보상금을 지급한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68]
2005년 4월 정부는 국무회의를 열어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법률 일부 개정령'을 의결, 전태일 유족들에게 1억 4천여만원을 추가로 보상했다.[69]
5. 전태일 관련 시설 및 행사
1970년 전태일이 분신자살한 지 35년 후인 2005년, 청계천 복원 사업과 함께 청계 6~7가를 "전태일거리"로 명명하고, 그의 동상과 銅板이 깔린 다리가 건설되었다.[30] 같은 해 9월 30일, 전태일의 어머니이자 노동운동가인 이소선[31]도 참석한 가운데 동상 제막식이 거행되었다(거리 준공은 11월 12일[32]). 2019년 3월 20일에는 평화시장 근처에 "전태일기념관"이 개관했다. 2020년 10월 14일,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앞두고 "전태일 기념의 달"[33]이 선포되었다. 세계적인 디지털 미디어 아티스트인 Hooranky[34]는 같은 날 서울 종로구 전태일다리에서 열린 선포식에서 전태일 열사 50주기 행사위원회와 함께 전태일 열사를 모티브로 한 디지털 아트 작품을 공개했다.[35] Hooranky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큰 감동이다. 그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순교자다"라고 말했다.[36]
6. 전태일에 대한 평가
성서학자 정승우에게 "전태일이 없었다면 한국 노동자들의 인권은 수십 년 뒤에나 존중받았을 것"[76]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그는 대한민국의 노동 인권과 민주주의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노동계에서는 전태일을 부를 때 흔히 '열사'나 '동지'[77] 호칭을 붙인다.
한편 이후 노동운동과 반정부 운동의 상징이 되면서 대단히 급진적이고 전투적인 인물인 것처럼 이미지가 만들어졌다[78]는 시각도 있다. 역사학자 함규진에 의하면 "노동운동과 반정부 운동의 상징이 되면서 대단히 급진적이고 전투적인 인물인 것처럼 이미지가 만들어졌지만, 그가 쓴 글은 아주 소박하고 온건하다. '대통령 전상서'의 내용을 보면 골자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고, 악덕 기업주들을 단속해 달라는 것이다. 마지막은 이렇게 맺고 있다. '각하께서는 국부이십니다. 곧 저희들이 아버님이십니다. 소자 된 도리로서 아픈 곳을 알려드립니다. 소자의 아픈 곳을 고쳐주십시오. 아픈 것을 알리지도 않고 아버님을 원망한다면 도리에 틀린 일입니다.'[78]"라는 것이다. 전태일 평전을 읽어보면, 전태일은 급진적이거나 생각이 편향된 사람이 아니라 기독교인의 양심으로써 노동인권운동에 헌신했다고도 볼 수 있다. 전태일 평전에 전태일이 쓴 일기가 실려있는데, 십계명으로써 하나님이 안식일을 정하셨으니 노동자들은 휴식할 권리가 있다고 했다.
6. 1. 긍정적 평가
전태일이 없었다면 한국 노동자들의 인권은 수십 년 뒤에나 존중받았을 것이라는 성서학자 정승우의 말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로,[76] 전태일은 대한민국의 노동 인권과 민주주의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노동계에서는 전태일을 부를 때 흔히 '열사'나 '동지'라는[77] 호칭을 붙인다.한편 이후 노동운동과 반정부 운동의 상징이 되면서 대단히 급진적이고 전투적인 인물인 것처럼 이미지가 만들어졌다[78]는 시각도 있다. 역사학자 함규진에 의하면 "노동운동과 반정부 운동의 상징이 되면서 대단히 급진적이고 전투적인 인물인 것처럼 이미지가 만들어졌지만, 그가 쓴 글은 아주 소박하고 온건하다. '대통령 전상서'의 내용을 보면 골자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고, 악덕 기업주들을 단속해 달라는 것이다. 마지막은 이렇게 맺고 있다. '각하께서는 국부이십니다. 곧 저희들이 아버님이십니다. 소자 된 도리로서 아픈 곳을 알려드립니다. 소자의 아픈 곳을 고쳐주십시오. 아픈 것을 알리지도 않고 아버님을 원망한다면 도리에 틀린 일입니다.'[78]"라는 것이다. 전태일 평전을 읽어보면, 전태일은 급진적이거나 생각이 편향된 사람이 아니라 기독교인의 양심으로써 노동인권운동에 헌신했다고도 볼 수 있다. 전태일 평전에 전태일이 쓴 일기가 실려있는데, 십계명으로써 하나님이 안식일을 정하셨으니 노동자들은 휴식할 권리가 있다고 했다.
6. 2. 비판적 시각
전태일은 대한민국의 노동 인권과 민주주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노동계에서는 그를 '열사'나 '동지'로 부른다.[77] 성서학자 정승우는 "전태일이 없었다면 한국 노동자들의 인권은 수십 년 뒤에나 존중받았을 것"이라고 평가했다.[76]하지만 전태일이 노동운동과 반정부 운동의 상징이 되면서 급진적이고 전투적인 인물처럼 이미지가 만들어졌다는 시각도 있다.[78] 역사학자 함규진은 전태일의 글이 소박하고 온건하며, '대통령 전상서'의 내용도 근로기준법 준수와 악덕 기업주 단속을 요청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함규진에 따르면, 전태일은 '각하께서는 국부이십니다. 곧 저희들이 아버님이십니다. 소자 된 도리로서 아픈 곳을 알려드립니다. 소자의 아픈 곳을 고쳐주십시오. 아픈 것을 알리지도 않고 아버님을 원망한다면 도리에 틀린 일입니다.'라고 썼다.[78] 전태일 평전에 실린 전태일의 일기를 보면, 그는 십계명에 따라 노동자들이 안식일에 휴식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 기독교인으로서 노동인권운동에 헌신했음을 알 수 있다.
7. 가족 관계
전상수(1923년 12월 7일 ~ 1969년 6월)와 이소선(1929년 12월 30일 ~ 2011년 9월 3일)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이소선은 전태일이 죽은 후 노동운동가로 활동하였다.[79] 여동생 전순옥 역시 노동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2012년 민주통합당 소속 국회의원이 되었다. 전순옥은 영국 유학 후 노동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2001년 영국인 영어 어학자 크리스 조엘(Chris Joel, 1942년 ~ )과 결혼하였다.[79]
전태일의 외할아버지 이성조는 1933년 어머니 이소선이 4살 때 별세하였고, 외할머니 김분이는 정씨 남자와 재혼하였다. 따라서 전태일에게는 성이 다른 이모와 외삼촌이 있다.
전태일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75][79]
- 증조할머니(? ~ 1962년)
- 할아버지(? ~ 1955년 또는 1965년)
- 할머니(? ~ 1965년)
- 큰아버지(? ~ 1964년 1월 이후)
- 아버지 전상수(全相洙, 1923년 12월 7일 ~ 1969년 6월)
- 작은아버지(? ~ 1964년 1월 이후)
- 외할아버지: 이성조(1901년 ~ 1933년)
- 외할머니: 김분이(1899년 ~ 1968년)
- 이모(1920년 ~ 1964년)
- 이모부(? ~ 1968년)
- 이종사촌여동생(1949년 ~ )
- 이종사촌동생(1952년 ~ )
- 이종사촌동생(1955년 ~ )
- 이종사촌동생(1958년 ~ )
- 이종사촌동생(1961년 ~ )
- 외삼촌 이상일(1924년 ~ 1981년 이후)
- 어머니 이소선(李小仙, 1929년 12월 30일 ~ 2011년 9월 3일)
- 남동생 전태삼(全泰三, 1950년 ~ )
- 남동생 전태이(全泰ニ, 1952년 ~ 1958년)
- 여동생 전순옥(全順玉, 1953년 5월 5일 ~ ), 노동운동가, 노동학자, 정치인
- 매부 크리스 조엘(Chris Joel, 1942년 ~ ), 영국인, 영어 어학자
- 여동생 전태리(개명 전 이름: 전순덕(全順德), 1958년 ~ )
- 새외할아버지 정씨(1879년 ~ 1934년 이후)
- 이복이모(1934년 이후 ~ )
- 이복외삼촌(1934년 이후 ~ )
어머니 이소선은 전태일에 대해 "사람을 참 좋아했으며, 같은 노동자를 너무도 사랑했다"고 회고하며, "'열사'나 '투사'보다 그냥 '''동지'''라고 불러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한, 전태일이 공장에서 남은 천으로 만들어 준 내의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고 밝혔다.[79]
8. 관련 작품
조영래 변호사의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1983년)으로 그의 삶이 널리 알려졌으며, 전태일재단에서 전태일 평전이 개정판으로 다시 출판되었다.[70] 1990년대에는 전태일의 생애를 다룬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제작되었는데, 전태일 역을 맡은 배우 홍경인과 내레이션 역할을 맡은 배우 문성근은 이 영화에 무료로 출연하였다.[70] 2000년에는 전태일 30주기에 맞춰 제작된, 전태일열사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의 인터뷰를 엮은 영화 《전태일의 기억》이 개봉하였다.[71]
무대 작품으로는 음악극 '태일'이 있다. 전태일의 기일에 맞춰 2017년 11월 6일부터 11월 13일까지, 2018년 11월 13일부터 11월 30일까지 두 차례 상연되었으며 전 제작진이 노개런티로 참여하였다.[72] 연극으로는 자유학교 물꼬 학생들의 연극모임 '터'의 9기 학생들이 선보인 《스물 한살》이 있다.[73]
역사저널 그날도 2020년 11월이 전태일이 분신항거를 한 1970년으로부터 50주년이 됨을 기억하여 전태일의 삶을 기억하는 방송 역사저널그날 283회 "인간선언-우리는 재봉틀이 아니다!"을 제작하였다.[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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