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디 페티트
1. 개요
앤디 페티트는 1995년부터 2013년까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활동한 왼손 투수이다. 뉴욕 양키스에서 주로 활약하며 3번의 올스타 선정, 1996년 아메리칸 리그 다승왕, 2001년 ALCS MVP, 2003년 워렌 스판 상을 수상했다. 5번의 월드 시리즈 우승을 경험했으며, 포스트시즌 통산 최다승(19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2011년 은퇴 후 2012년 복귀하여 2013년 은퇴했으며, 2015년 양키스에서 그의 등번호 46번이 영구 결번되었다. 2023년에는 뉴욕 양키스 고문 코치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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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지션 | 투수 |
|---|---|
| 타석 | 좌타 |
| 투구 | 좌투 |
| 출생일 | 1972년 6월 15일 |
| 출생지 | 미국루이지애나주배턴루지 |
| 데뷔 리그 | MLB |
| 데뷔일 | 1995년 4월 29일 |
| 데뷔팀 | 뉴욕 양키스 |
| 마지막 리그 | MLB |
| 마지막 경기일 | 2013년 9월 28일 |
| 마지막 팀 | 뉴욕 양키스 |
| 승패 기록 | 256승 153패 |
|---|---|
| 평균 자책점 | 3.85 |
| 탈삼진 | 2,448 |
| 선수 경력 | 뉴욕 양키스 (1995–2003) 휴스턴 애스트로스 (2004–2006) 뉴욕 양키스 (2007–2010, 2012–2013) |
|---|
| 올스타 선정 | 3회 (1996년, 2001년, 2010년) |
|---|---|
| 월드 시리즈 우승 | 5회 (1996년, 1998년–2000년, 2009년) |
| ALCS MVP | 2001년 |
| AL 승리 1위 | 1996년 |
| 영구 결번 | 뉴욕 양키스 No. 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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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지애나주 출신 야구 선수 -
케니 레이번
케니 레이번은 미국 출신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일본, 대만, 한국 프로 야구에서 활동하며 150km/h가 넘는 강속구를 던졌고, 2007년 SK 와이번스에서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했지만, NPB와 KBO 리그에서는 기복 있는 성적을 보였다. -
루이지애나주 출신 야구 선수 -
론 워싱턴
론 워싱턴은 전직 야구 선수이자 현직 야구 감독으로, 선수 시절 유격수로 메이저 리그에서 활동했으며 텍사스 레인저스 감독을 거쳐 현재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감독을 맡고 있다. -
1972년 출생 -
나르게스 모하마디
이란의 인권 운동가이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나르게스 모하마디는 여성 인권과 사형 제도 폐지를 위해 활동하며 이란 정부에 의해 여러 차례 투옥되었고, 2023년에는 이란 여성 억압에 맞선 투쟁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으며, 수감 중에도 저술 활동을 통해 인권 유린 실태를 고발하고 있다. -
1972년 출생 -
김여진
김여진은 1998년 영화 데뷔 후 청룡영화상 신인여우상을 수상하고 다양한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했으며, 2000년대 후반부터는 사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배우이다. -
2000년 야구 -
데이비드 저스티스
데이비드 저스티스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서 뛰어난 타격 능력으로 활약하며 신인왕, 실버 슬러거 상, 챔피언십 시리즈 MVP 등을 수상하고 두 차례 월드 시리즈 우승을 경험한 야구 선수이자, 은퇴 후 야구 해설가로도 활동했으며,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나 미첼 보고서에 언급되어 명예의 전당 입성에는 실패했다. -
2000년 야구 -
이숭용
이숭용은 경희대학교 1루수로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하여 현대 유니콘스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며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했고, 넥센 히어로즈를 거쳐 KBO 리그 통산 2000경기 출장을 달성한 후 해설가, 코치, 단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SSG 랜더스 감독이다.
2. 선수 경력
앤디 페티트는 1990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드래프트에서 22라운드에 뉴욕 양키스에 지명되었고, 1991년 5월 양키스와 계약을 맺고 마이너 리그 생활을 시작했다. 1995년 4월 29일 메이저 리그에 데뷔하여 불펜에서 시즌을 시작했지만, 5월 16일 마이너 리그로 내려갔다가 11일 후 부상 선수 대체 선수로 다시 메이저 리그로 올라왔다. 이후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하여 12승 9패, 평균자책점 4.17을 기록하며 아메리칸 리그 올해의 신인상 투표에서 3위를 차지했다.
1996년에는 21승을 거두며 아메리칸 리그 다승왕을 차지했고, 사이 영 상 투표에서 2위를 기록했으며, 양키스는 그해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했다. 1997년에는 18승, 1998년에는 16승, 2000년에는 19승을 기록하는 등 꾸준한 활약을 펼쳤다. 1998년과 2000년에도 양키스는 월드 시리즈,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2001년에는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MVP로 선정되었고, 2003년에는 개인 통산 두 번째 21승을 달성하며 워런 스판 상을 수상했다. 페티트는 양키스에서 뛰는 동안 1996년, 1998년, 1999년, 2000년, 총 4번의 월드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2003년 시즌 후 자유 계약 선수가 된 페티트는 휴스턴 애스트로스와 3년 3,150만 달러(31.5)에 계약했다. 2004년에는 왼쪽 팔꿈치 부상으로 잦은 부상을 당하며 6승에 그치며 9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 기록이 중단되었다. 2005년에는 17승 9패, 평균자책점 2.39를 기록하며 부활했고, 휴스턴 애스트로스를 창단 첫 월드 시리즈 진출로 이끌었다. 2006년에는 14승 13패, 평균자책점 4.20을 기록했다.
2006년 시즌 후, 페티트는 뉴욕 양키스와 1년 1,600만 달러(16) 계약을 맺고 복귀했다. 2007년에 그는 아메리칸 리그에서 가장 많은 경기(34경기)에 선발 등판했고, 15승 9패로 정규 시즌을 마쳤다. 2008년 9월 21일, 페티트는 양키 스타디움에서 양키스의 마지막 선발 투수였다.
2009년 1월, 페티트는 인센티브를 포함하여 1년 550만 달러(5.5) 계약에 합의했다. 2009년 월드 시리즈 6차전에서 승리 투수가 되어 통산 시리즈 결정 경기 승리 기록을 6승으로, 포스트시즌 통산 승리 기록을 18승으로 늘렸다.
2009년 시즌 후 자유 계약을 신청한 그는 양키스와 재계약하여 1년 1,175만 달러(11.75) 계약을 맺었다. 2010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전에 출전했다.
2011년 2월 4일 은퇴를 발표했으나, 2012년 3월 양키스와 마이너 리그 계약을 체결하며 복귀했다. 계약금은 2.5였다. 2012년 6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의 경기에서 땅볼 타구에 발목을 강타당해 왼쪽 종아리뼈 골절로 최소 6주간 결장했다. 그는 12번의 선발 등판에서 5승 4패, 평균자책점 2.87로 시즌을 마쳤다.
2013 시즌을 앞두고 양키스와 재계약했으며, 1년 12 계약에 합의했다. 그해 6월, 페티트는 시애틀 매리너스를 상대로 통산 250승을 기록하여 메이저 리그 역사상 47번째로 많은 승리를 거둔 투수가 되었다. 9월 20일 시즌 종료 후 은퇴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9월 28일 휴스턴에서 휴스턴 애스트로스를 상대로 한 페티트의 마지막 메이저 리그 선발 등판은 화이티 포드와 함께 양키스 역사상 최다 선발 등판 기록(438경기)과 타이를 이루었다. 페티트는 완투하며 5안타 1실점만을 허용하고 승리를 거두었다.
2.1. 아마추어 시절
루이지애나주 배턴루지에서 태어난 페티트는 이탈리아와 케이준 혈통을 가졌으며, 초등학교 3학년 때 텍사스주로 이주하였다. 그는 텍사스 주 디어파크 고등학교에서 야구 팀 투수와 미식축구 팀 센터, 노즈 가드로 활약했다. 그의 패스트볼은 85mph에서 87mph 사이로 측정되었다.
1990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드래프트에서 뉴욕 양키스는 22번째 라운드에서 페티트를 지명하였다. 휴스턴에 있는 샌재신토 칼리지 노스의 코치 웨인 그레이엄이 그를 로저 클레멘스에 비교하며 대학 야구를 하는 것을 권유하였다. 페티트가 4년제 대학이 아닌 주니어 칼리지에 등록하면서 양키스는 드래프트 권한을 유지하였다. 1991년 5월 25일 그는 양키스와 계약을 맺어 8만 달러의 계약 보너스를 받았다.
2.2. 뉴욕 양키스 (1995–2003)
Andy Pettitte영어는 1990년 메이저 리그 드래프트에서 22라운드에 뉴욕 양키스에 지명되었다. 1991년 5월 양키스와 계약을 맺고 마이너 리그 생활을 시작했다. 1991년 걸프 코스트 양키스와 오네온타 양키스에서 각각 6번의 선발 등판을 했다. 1992년에는 그린즈버러 호네츠에서 27번 선발 등판하여 10승 4패, 평균자책점 2.20을 기록했다. 1993년에는 프린스 윌리엄 캐넌스에서 26번 선발 등판하여 11승 9패, 평균자책점 3.04를 기록했고, 올버니-콜로니 양키스에서도 한 번 선발 등판했다. 1994년에는 올버니-콜로니에서 11번 선발 등판하여 7승 2패, 평균자책점 2.71을 기록한 후 콜럼버스 클리퍼스로 승격되어 16번 선발 등판, 7승 2패, 평균자책점 2.98을 기록했다.
1995년 4월 29일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데뷔하여 불펜에서 시즌을 시작했지만, 5월 16일 마이너 리그로 내려갔다가 11일 후 부상 선수 대체 선수로 다시 메이저 리그로 올라왔다. 이후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하여 12승 9패, 평균자책점 4.17을 기록하며 아메리칸 리그 올해의 신인상 투표에서 3위를 차지했다.
1996년에는 21승을 거두며 아메리칸 리그 다승왕을 차지했고, 사이 영 상 투표에서 2위를 기록했다. 양키스는 그해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했다. 1997년에는 18승, 1998년에는 16승, 2000년에는 19승을 기록하는 등 꾸준한 활약을 펼쳤다. 1998년과 2000년에도 양키스는 월드 시리즈,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2001년에는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MVP로 선정되었다. 2003년에는 개인 통산 두 번째 21승을 달성하며 워런 스판 상을 수상했다. 양키스에서 뛰는 동안 1996년, 1998년, 1999년, 2000년, 총 4번의 월드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2.3. 휴스턴 애스트로스 (2004–2006)
2003년 시즌 후 자유 계약 선수가 된 페티트는 텍사스 주 디어파크에 있는 자택과 가까운 곳에서 뛰고 싶어했다. 뉴욕 양키스가 재계약에 큰 관심이 없다고 느낀 그는 내셔널 리그의 휴스턴 애스트로스와 3년 3,150만 달러(31.5)에 계약했다. 이는 양키스 팬들에게 놀라움을 안겨줬는데, 페티트가 양키스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양키스는 페티트의 잔류 실패 후 케빈 브라운을 영입하며 선발 투수를 보강했다. 페티트의 양키스 시절 동료였던 로저 클레멘스도 은퇴를 번복하고 애스트로스로 이적했다. 휴스턴에서 페티트는 보스턴 레드삭스와 토론토 블루제이스에서 클레멘스가 사용했던 등번호 21번을 사용했다.
2004년에는 왼쪽 팔꿈치 부상으로 3번이나 부상자 명단에 올랐다. 4월 29일 피츠버그 파이리츠와의 경기에서 통산 150승을 달성했지만, 잦은 부상으로 6승에 그치며 9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 기록이 중단되었다.
2005년에는 17승 9패, 평균자책점 2.39(로저 클레멘스에 이어 리그 2위)를 기록하며 부활했다. 27번의 퀄리티 스타트(리그 2위)를 기록했고, 7월과 9월에는 이달의 투수상을 두 차례나 수상했다. 7월에는 6경기에 등판해 5승 무패, 평균자책점 0.90(구단 역대 3위)을 기록했다. 8월 21일부터 9월 20일까지는 자신의 최장 기록인 7연승을 달리기도 했다. 이러한 활약으로 페티트는 휴스턴 애스트로스를 창단 첫 월드 시리즈 진출로 이끌었고, 컴백상 최종 후보에도 올랐다.
2006년에는 35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14승 13패, 평균자책점 4.20을 기록했다. 팀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1.5경기 차로 뒤지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시즌 첫 등판이었던 4월 4일 플로리다 말린스와의 경기에서는 10실점(7자책점)을 하며 부진했고, 4월부터 6월까지 월간 평균자책점이 5점 이상이었다. 하지만 8월에는 평균자책점 2.27, 49탈삼진(리그 최다)을 기록하며 반등했다.
2.4. 뉴욕 양키스 복귀 (2007–2010)
2006년 시즌 후, 페티트는 뉴욕 양키스와 1년 1,600만 달러(16) 계약을 맺고 복귀했다. 이 계약에는 2008년에 대한 1,600만 달러(16)의 선수 선택권이 포함되어 있었다. 휴스턴 애스트로스는 페티트에게 1년 1,200만 달러(12)를 제안했었다. 2007년 9월 19일, 페티트는 자신의 통산 200번째 경기에서 승리 투수가 되었다. 2007년에 그는 아메리칸 리그에서 가장 많은 경기(34경기)에 선발 등판했고, 상대 타자 수(916명)에서 7위, 투구 이닝(이닝)에서 9위를 기록하며 15승 9패로 정규 시즌을 마쳤다.
시즌 후, 페티트는 2008년 선수 선택권을 거부하고 자유 계약 선수가 되었다. 양키스는 페티트에게 연봉 조정을 제안했고, 페티트는 이를 수락했다. 그는 2007년 12월 12일 양키스와 1년 1,600만 달러(16) 계약을 맺었다.
2008년 9월 21일, 페티트는 양키 스타디움에서 양키스의 마지막 선발 투수였다. 그는 2회에 통산 2,000번째 삼진을 기록하며 볼티모어 오리올스 포수 라몬 에르난데스를 삼진 처리했다. 페티트는 2008년에 204이닝을 투구하며 양키스 투구 이닝 1위를 기록했다. 14시즌 동안 페티트는 한 시즌 평균 158개의 삼진을 기록했는데, 이는 2008년에 그가 기록한 삼진 수와 같다.
페티트는 2009년 1월 26일, 인센티브를 포함하여 1년 550만 달러(5.5) 계약에 합의했다. 페티트는 투구 이닝과 같은 인센티브를 바탕으로 2009년에 총 1,050만 달러(10.5)를 벌었다. 페티트는 CC 사바시아, A. J. 버넷, 왕첸밍에 이어 조바 챔벌린의 뒤를 잇는 양키스의 4번째 선발 투수로 2009년 시즌을 시작했다.
페티트는 2009년 10월 25일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6차전에서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를 꺾고 시리즈를 결정지으며 월드 시리즈에 진출,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상대로 승리 투수가 되었다. 이 승리로 그의 통산 시리즈 결정 경기 승리는 5승이 되어, 로저 클레멘스, 캣피시 헌터, 데이브 스튜어트와 함께 보유했던 기록을 경신했다.
페티트는 2009년 월드 시리즈 3차전에서 중전 안타를 쳐 닉 스위셔를 득점시키며 자신의 첫 포스트시즌 득점을 올렸다. 그는 그 경기에서 승리 투수가 되었다. 페티트는 2009년 월드 시리즈 6차전에서 3일 휴식 후 등판했다. 전문가들은 37세의 그를 짧은 휴식 후에 등판시킨 결정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페티트는 다시 6차전에서 승리 투수가 되어 필리스를 7-3으로 꺾었다. 그는 통산 시리즈 결정 경기 승리 기록을 6승으로, 포스트시즌 통산 승리 기록을 18승으로 늘렸다. 그는 같은 해에 세 번의 시리즈 결정 플레이오프 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모두 승리한 최초의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투수가 되었다. 데릭 로위 또한 2004년에 3개의 시리즈에서 승리했지만, 그의 승리 중 하나는 구원 등판이었다. 또한, 9월 27일 보스턴 레드삭스전에서 페티트는 지구 우승을 확정 짓는 경기에서 승리 투수가 되었다.
페티트는 2009년 시즌 후 자유 계약을 신청했다. 그는 양키스와 재계약하여 1년 1,175만 달러(11.75) 계약을 맺었다. 2010년 시즌 전반기에 페티트는 11승 2패, 평균자책점 2.70을 기록하며 2010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전에 출전했다. 페티트는 시즌을 11승 3패, 평균자책점 3.28로 마감했는데, 이는 2005년 이후 가장 낮은 기록이었다.
2.5. 은퇴와 복귀 (2011–2013)
몇 달간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한 후, 페티트는 2011년 2월 4일 은퇴를 발표했다. 그는 프로 야구에서 떠나 한 해를 보냈다.
페티트는 2012년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게스트 강사로 뉴욕 양키스에 합류하기로 합의했다. 복귀가 자신에게 "가려움"을 느끼게 했다고 말하며, 페티트는 2012년 3월 16일 양키스와 마이너 리그 계약을 체결했으며, 계약금은 2.5였다. 페티트는 시즌을 마이너 리그에서 시작하며 여러 산하 팀의 경기에 출전하여 지구력과 투구 수를 늘렸다. 페티트는 5월 13일 복귀하여 시애틀 매리너스와의 경기에서 6⅔이닝 동안 4실점하며 2-6으로 패했다. 2012년 6월 27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의 경기에서 페티트는 땅볼 타구에 발목을 강타당했다. 곧 페티트가 왼쪽 종아리뼈 골절로 최소 6주간 결장할 것이라고 발표되었다. 페티트는 2012년 9월 19일 토론토 블루제이스를 상대로 복귀하여 5이닝 무실점을 기록했다. 그는 12번의 선발 등판에서 5승 4패, 평균자책점 2.87로 시즌을 마쳤다. 또한 두 번의 포스트시즌 출전을 기록했다.
페티트는 2013 시즌을 앞두고 양키스와 재계약했으며, 1년 12 계약에 합의했다. 2013년 5월 17일, 페티트는 왼쪽 승모근 염좌로 15일짜리 부상자 명단에 올랐다. 그는 6월 3일에 복귀했다. 6월 8일, 페티트는 시애틀 매리너스를 상대로 통산 250승을 기록하여 메이저 리그 역사상 47번째로 많은 승리를 거둔 투수가 되었다. 7월 1일, 미네소타 트윈스와의 경기에서 페티트는 저스틴 모노를 삼진으로 잡아내며, 1958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화이티 포드를 제치고 양키스 역대 탈삼진 1위가 되었다. 그는 9월 6일 양키스 소속으로 2000번째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페티트는 9월 20일 시즌 종료 후 은퇴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동료 마리아노 리베라는 그에게 시즌이 끝나기 전에 발표하도록 설득했다. 페티트는 9월 22일 양키 스타디움에서 마지막 정규 시즌 선발 등판을 했다. 9월 28일 휴스턴에서 휴스턴 애스트로스를 상대로 한 페티트의 마지막 메이저 리그 선발 등판은 포드와 함께 양키스 역사상 최다 선발 등판 기록(438경기)과 타이를 이루었다. 페티트는 완투하며 5안타 1실점만을 허용하고 승리를 거두었다. 애스트로스는 경기 중 그의 경력을 기렸다.
3. 플레이 스타일
앤디 페티트(Andy Pettitte영어)는 포심 패스트볼, 커터, 커브, 싱커, 체인지업, 슬라이더 등 다양한 구종을 던졌으며, 뛰어난 제구력을 갖춘 투수였다. 그의 주무기는 시속 84~88마일(약 135~142km)의 커터로, 우타자 몸쪽으로 휘어져 들어가 많은 땅볼과 병살타를 유도했다. 2011년 은퇴 전에는 그의 패스트볼 구속이 90마일(약 145km) 초반, 커브 구속은 시속 약 74~76마일(약 119~122km)로 측정되었다. 왼손 투수인 페티트는 1루 견제 동작이 뛰어나 통산 98개의 견제사를 기록했다.
장신에서 나오는 시속 90마일(약 145km) 전후의 빠른 공과 휘어짐이 큰 커브에 커터나 체인지업 등 다채로운 변화구를 구사했으며, 뛰어난 제구력으로 공을 코너에 꽂아 넣는 능력이 탁월했다.
여유로운 투구 폼에서 나오는 빠른 견제구는 메이저리그 최고 수준으로, 1974년 이후 2012년까지 메이저리그 최다인 102개의 견제를 성공시켰다.
포스트시즌에도 강하여 통산 19승을 거두었는데, 이는 포스트시즌 단독 역대 1위 기록이다.
어린 시절 영웅이었던 로저 클레멘스가 1999년 뉴욕 양키스로 이적한 후, 페티트는 클레멘스를 스승으로 삼고 함께 훈련했다. 클레멘스가 은퇴를 번복하고 휴스턴 애스트로스로 이적했을 때에도 페티트의 설득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4. 수상 및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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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개인사
앤디 페티트는 고등학교 시절 아내 로라를 만났다. 슬하에 조슈아 블레이크, 제러드, 렉시 그레이스, 루크 4명의 자녀를 두었다. 페티트와 그의 아내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다. 가족은 휴스턴에 거주하며, 페티트는 2020년까지 뉴욕주 웨스트체스터 카운티에 집을 소유했다.
페티트의 세 아들 모두 야구를 했다. 조쉬는 2013년 MLB 드래프트에서 양키스에 37라운드로 지명되었지만, 프로 계약 대신 베일러 대학교에 입학했다. 2014년 4월 베일러에서 전학한 후 라이스 대학교에서 뛰었으며, 2018년 2월 부상으로 인해 인스타그램을 통해 은퇴를 발표했다. 제러드는 휴스턴 대학교에서 뛰다가 2020년 달라스 침례대학교로 전학했다. 그는 마이애미 말린스와 프로 계약을 맺었다. 2022년 기준, 루크는 세컨드 침례교 학교 야구팀의 3학년이다. 페티트의 딸은 달라스 침례대학교에서 배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