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두아르 에리오
1. 개요
에두아르 에리오는 프랑스의 정치인으로, 급진당 대표를 역임하며 여러 정부 직책을 수행했다. 그는 1904년 리옹 시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리옹 시장을 지냈으며, 1924년, 1926년, 1932년 세 차례 총리를 역임했다. 또한, 프랑스 국민의회 의장과 프랑스 대의원 의장 등을 역임하며 활발한 정치 활동을 펼쳤다. 외교적으로는 소련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홀로도모르를 부정하는 입장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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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에두아르 마리 에리오 |
|---|---|
| 로마자 표기 | Édouard Marie Herriot |
| 출생일 | 1872년 7월 5일 |
| 출생지 | 트로와, 프랑스 |
| 사망일 | 1957년 3월 26일 |
| 사망지 | 생제니스라발, 프랑스 |
| 안장 장소 | 로야스 묘지, 리옹 |
| 정당 | 급진당 |
| 배우자 | 블랑슈 르바텔 |
| 직업 | 역사가 |
| 서명 | Signature Édouard Herriot.svg |
| 각료평의회 의장 | 1924년 6월 15일 – 1925년 4월 17일 1926년 7월 20일 – 1926년 7월 23일 1932년 6월 3일 – 1932년 12월 18일 |
|---|---|
| 국민의회 의장 | 1947년 1월 21일 – 1954년 1월 11일 |
| 하원 의장 | 1925년 4월 22일 – 1926년 7월 20일 1936년 6월 4일 – 1940년 7월 10일 |
| 공공 교육 및 미술부 장관 | 1926년 7월 23일 – 1928년 11월 1일 |
| 리옹 시장 | 1905년 11월 3일 – 1940년 9월 20일 1945년 5월 18일 – 1957년 3월 26일 |
| 국민의회 의원 (론 선거구) | 1945년 11월 6일 – 1957년 3월 26일 |
| 하원 의원 (론 선거구) | 1919년 11월 20일 – 1942년 5월 31일 |
| 외무부 장관 | 1924년 6월 14일 – 1925년 4월 10일 1926년 7월 19일 – 1926년 7월 21일 1932년 6월 3일 – 1932년 12월 14일 |
| 상원 의원 | 1912년 11월 7일 – 1919년 12월 23일 |
| 공공 사업부 장관 | 1916년 12월 12일 – 1917년 3월 17일 |
| 교육 | 루이르그랑 고등학교 |
|---|---|
| 모교 | 고등사범학교 |
| 1번째 임기 시작 | 1924년 6월 15일 |
|---|---|
| 1번째 임기 종료 | 1925년 4월 17일 |
| 1번째 대통령 | 가스통 두메르그 |
| 1번째 이전 총리 | 프레데리크 프랑수아마르살 |
| 1번째 다음 총리 | 폴 팽르베 |
| 2번째 임기 시작 | 1926년 7월 20일 |
| 2번째 임기 종료 | 1926년 7월 23일 |
| 2번째 대통령 | 가스통 두메르그 |
| 2번째 이전 총리 | 아리스티드 브리앙 |
| 2번째 다음 총리 | 레몽 푸앵카레 |
| 3번째 임기 시작 | 1932년 6월 3일 |
| 3번째 임기 종료 | 1932년 12월 18일 |
| 3번째 대통령 | 알베르 르브룅 |
| 3번째 이전 총리 | 앙드레 타르디외 |
| 3번째 다음 총리 | 조제프 폴봉쿠르 |
| 임기 시작 | 1947년 1월 21일 |
|---|---|
| 임기 종료 | 1954년 1월 11일 |
| 이전 의장 | 뱅상 오리오 |
| 다음 의장 | 앙드레 르 트로케르 |
| 1번째 임기 시작 | 1936년 6월 4일 |
|---|---|
| 1번째 임기 종료 | 1940년 7월 10일 |
| 1번째 이전 의장 | 페르낭 부이송 |
| 1번째 다음 의장 | 펠릭스 구앵 (1943년 임시 자문 의회 의장) |
| 2번째 임기 시작 | 1925년 4월 22일 |
| 2번째 임기 종료 | 1926년 7월 20일 |
| 2번째 이전 의장 | 폴 팽르베 |
| 2번째 다음 의장 | 라울 페레 |
| 대통령 | 가스통 두메르그 |
|---|---|
| 총리 | 레몽 푸앵카레 |
| 임기 시작 | 1926년 7월 23일 |
| 임기 종료 | 1928년 11월 1일 |
| 이전 장관 | 에두아르 달라디에 |
| 다음 장관 | 피에르 마로 |
| 1번째 임기 시작 | 1945년 5월 18일 |
|---|---|
| 1번째 임기 종료 | 1957년 3월 26일 |
| 1번째 이전 시장 | 쥐스탱 고다르 |
| 1번째 다음 시장 | 루이 프라델 |
| 2번째 임기 시작 | 1905년 11월 3일 |
| 2번째 임기 종료 | 1940년 9월 20일 |
| 2번째 이전 시장 | 빅토르 오가뉴르 |
| 2번째 다음 시장 | 조르주 코앙디 |
| 임기 시작 | 1945년 11월 6일 |
|---|---|
| 임기 종료 | 1957년 3월 26일 |
| 임기 시작 | 1919년 11월 20일 |
|---|---|
| 임기 종료 | 1942년 5월 31일 |
| 1번째 임기 시작 | 1932년 6월 3일 |
|---|---|
| 1번째 임기 종료 | 1932년 12월 14일 |
| 1번째 대통령 | 알베르 르브룅 |
| 1번째 총리 | 본인 |
| 1번째 이전 장관 | 앙드레 타르디외 |
| 1번째 다음 장관 | 조제프 폴봉쿠르 |
| 2번째 임기 시작 | 1926년 7월 19일 |
| 2번째 임기 종료 | 1926년 7월 21일 |
| 2번째 대통령 | 가스통 두메르그 |
| 2번째 총리 | 본인 |
| 2번째 이전 장관 | 아리스티드 브리앙 |
| 2번째 다음 장관 | 아리스티드 브리앙 |
| 3번째 임기 시작 | 1924년 6월 14일 |
| 3번째 임기 종료 | 1925년 4월 10일 |
| 3번째 대통령 | 가스통 두메르그 |
| 3번째 총리 | 본인 |
| 3번째 이전 장관 | 에드몽 르페브르 뒤 프레이 |
| 3번째 다음 장관 | 아리스티드 브리앙 |
| 임기 시작 | 1912년 11월 7일 |
|---|---|
| 임기 종료 | 1919년 12월 23일 |
| 이전 의원 | 에두아르 미요 |
| 다음 의원 | 외젠 뤼피에 |
| 임기 시작 | 1916년 12월 12일 |
|---|---|
| 임기 종료 | 1917년 3월 17일 |
| 대통령 | 레몽 푸앵카레 |
| 총리 | 아리스티드 브리앙 |
| 이전 장관 | 마르셀 상바 |
| 다음 장관 | 조르주 데플라 |
-
1872년 출생 -
폴 랑주뱅
폴 랑주뱅은 프랑스의 물리학자로서 상자성 및 반자성 연구, 초음파 발생, 상대성 이론 전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겼으며, 반파시즘 운동에 참여하고 프랑스 인권연맹 회장을 역임하다가 1946년 사망하여 1948년 파리의 팡테옹에 안장되었다. -
1872년 출생 -
마이클 조지프 새비지
마이클 조지프 새비지는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으로 뉴질랜드 노동당 창당에 기여하고 총리직에 올라 사회 보장 제도 도입, 방송 국영화 등 정책을 추진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을 결정하고 뉴질랜드 복지 국가 설계자로 평가받았다. -
프랑스의 외무장관 -
폴 레노
폴 레노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 대의원으로 활동하며 독일 배상금 문제에 관여했고, 세계 대공황 시기에는 영국과의 동맹을 지지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 총리로 임명되었으나 독일의 침공으로 사임하고 수감되었다가 해방된 후 유럽 연합 구성을 지지했다. -
프랑스의 외무장관 -
프랑스 유럽외교부
프랑스 유럽외교부는 1547년 프랑스 왕실 기구로 설립되어 대외관계부, 외무국제개발부 등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콰이 도르세라고도 불리는 프랑스의 외교 부처이다. -
1957년 사망 -
최남선
최남선은 1890년에 태어나 1957년에 사망한 대한민국의 문인이자 독립운동가, 언론인, 역사학자이며, 《소년》을 창간하고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여 현대 한국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으며, 3·1 운동 독립선언서 기초, 친일 행적, 단군 연구, 《단군론》, 《불함문화론》 저술 등의 활동을 했다. -
1957년 사망 -
존 폰 노이만
헝가리 출신의 존 폰 노이만은 수학, 물리학, 컴퓨터 과학, 경제학 등 다양한 분야에 혁신적인 업적을 남겼으며, 특히 폰 노이만 아키텍처는 현대 컴퓨터 설계의 기초가 되었고 게임 이론의 창시자로도 알려진 20세기 과학기술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2. 생애
에두아르 에리오는 1872년 7월 5일 프랑스 트루아에서 태어났다.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급진사회당에 참여했다. 드레퓌스 사건에서는 에밀 졸라를 지지하는 활동을 리옹을 중심으로 전개하여 1904년 리옹 시의원에 처음 당선되며 정치인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이후 리옹 시장을 역임하면서 급진사회당의 지도자로서 세 차례(1924년, 1926년, 1932년) 내각을 구성했다. 초기에는 아리스티드 브리앙과 함께 레몽 푸앵카레가 강행한 루르 문제의 수습에 나서는 등 대독 협조 정책을 취하는 한편, 소비에트 연방과의 외교 관계를 강화했다.
이후 사회당, 공산당과 함께 인민전선에 참여했다. 레옹 블룸 내각이 구성되자 자신은 하원 의장에 취임했다. 독일 점령 하에서는 침묵을 강요받았지만, 연합군이 프랑스에 상륙하자 비시 정권으로부터 후임 총리를 제안받았으나 이를 거부했다. 제4공화국 하에서도 국민의회 의장을 역임했다.
리옹 시장으로 재직 당시, 에리오는 지방 정부와 지역 노조 간의 관계 개선, 공공 부조 기금 증액, 도시 재생 프로그램 시작 등 다양한 조치를 취했다. 그는 1957년 3월 26일 리옹에서 사망했다. 피에르-마리 제를리에 추기경과 함께 임종 직전 가톨릭으로 개종했으며, 로와스 묘지에 "교회 의식"으로 매장되었다.
3. 정치 경력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에두아르 에리오는 급진사회당에 참여하여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드레퓌스 사건 당시 에밀 졸라를 지지하는 활동을 리옹 중심으로 펼쳐 1904년 리옹 시의원에 당선되었다. 이후 리옹 시장을 역임하며 당의 지도자로 성장, 세 차례(1924년, 1926년, 1932년) 내각을 구성했다.
초기에는 아리스티드 브리앙과 함께 레몽 푸앵카레의 루르 문제 수습에 참여하는 등 독일과의 협조 정책을 추진했고, 소비에트 연방과의 외교 관계를 강화했다.
이후 사회당, 공산당과 함께 인민전선에 참여했으며, 레옹 블룸 내각이 구성되자 하원 의장을 맡았다. 독일 점령 기간 동안 침묵을 강요받았으나, 연합군 상륙 후 비시 정권의 총리 제안을 거부했다. 제4공화국에서도 국민의회 의장을 역임했다.
3.1. 정부 직책
| 직책 | 재임 기간 |
|---|---|
| 국무회의 의장 겸 외무부 장관 | 1924년–1925년 |
| 교통·공공사업·물자부 장관 | 1916년–1917년 |
| 외무부 장관 겸 국무회의 의장 | 1926년 7월 19일–21일 |
| 국무회의 의장 겸 외무부 장관 | 1932년 6월–12월 |
| 국무장관 | 1934년–1936년 |
| 교육·미술부 장관 | 1926년–1928년 |
3.2. 선출직
* 프랑스 하원
* 프랑스 국민의회 의장: 1947년–1954년
* 론 선출 프랑스 국민의회 의원: 1946년–1957년 (1957년 사망). 1946년 선출, 1951년, 1956년 재선.
* 헌법 제정 의회
* 론 선출 헌법 제정 의회 의원: 1945년–1946년. 1945년 선출, 1946년 6월 재선.
* 프랑스 하원
* 프랑스 대의원 의회 의장: 1925년–1926년 / 1936년–1940년
* 론 선출 프랑스 대의원 의회 의원: 1919년–1942년 (1942년 필리프 페탱에 의한 의회 해산). 1919년 선출, 1924년, 1928년, 1932년, 1936년 재선.
* 프랑스 원로원
* 론 상원의원: 1912년–1919년. 1911년 선출.
* 론 종합위원회
* 론 종합위원회 위원: 1945년–1951년
* 시의회
* 리옹 시장: 1905년–1940년 (1940년 비시 정권에 의해 축출) / 1945년–1957년 (1957년 사망). 1908년, 1912년, 1919년, 1925년, 1929년, 1935년, 1945년, 1947년, 1953년 재선.
* 리옹 시의원: 1904년–1940년 (1940년 비시 정권에 의해 축출) / 1945년–1957년 (1957년 사망). 1908년, 1912년, 1919년, 1925년, 1929년, 1935년, 1945년, 1947년, 1953년 재선.
* 1939년 대통령 선거: 급진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5.86%(53표) 득표에 그쳐 4위로 낙선.
| | 직책명 || 대수 ||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 결과 || 당락 | |||||||
|---|---|---|---|---|---|---|---|
| 1939년 선거 | 대통령 | 15대 | 급진당 | 5.86% | 53표 | 4위 | 낙선 |
3.3. 정당 활동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급진사회당에 참여했다. 드레퓌스 사건에서는 에밀 졸라를 지지하는 활동을 리옹을 중심으로 전개하여 1904년 리옹 시의원에 처음 당선되며 정치인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이후 리옹 시장을 역임하면서 급진사회당의 지도자로서 세 차례(1924년, 1926년, 1932년) 내각을 구성했다. 초기에는 아리스티드 브리앙과 함께 레몽 푸앵카레가 강행한 루르 문제의 수습에 나서는 등 대독 협조 정책을 취하는 한편, 소비에트 연방과의 외교 관계를 강화했다.
이후 사회당, 공산당과 함께 인민전선에 참여했다. 레옹 블룸 내각이 구성되자 자신은 하원 의장에 취임했다. 독일 점령 하에서는 침묵을 강요받았지만, 연합군이 프랑스에 상륙하자 비시 정권으로부터 후임 총리를 제안받았으나 이를 거부했다. 제4공화국 하에서도 국민의회 의장을 역임했다.
급진당 대표직은 1919년–1926년, 1931년–1936년, 1948년–1953년, 1955년–1957년 동안 역임했다.
3.4. 외교 정책
에두아르 에리오는 급진사회당 소속으로, 소비에트 연방과의 외교 관계를 강화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초기에는 아리스티드 브리앙과 함께 레몽 푸앵카레가 강행한 루르 문제의 수습에 나서는 등 독일과의 협조 정책을 취했다.
1933년 우크라이나를 방문한 에리오는 기근에 대한 증언을 부인하고 소비에트 우크라이나가 "만개한 정원과 같다"고 말했다. 그는 언론에 우크라이나에는 기근이 없으며, 자신은 기아의 흔적을 전혀 보지 못했고, 수백만 명이 굶주리고 있다는 주장은 소련의 적대자들이 퍼뜨린 것이라고 발표했다. 프라우다는 에리오가 "소련의 기근과 관련하여 부르주아 언론의 거짓말을 단호히 반박했다"고 보도했다.
3.5. 국내 정책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급진사회당에 참여했다. 드레퓌스 사건에서는 에밀 졸라를 지지하는 활동을 리옹을 중심으로 전개하여 1904년 리옹 시의원에 처음 당선되며 정치인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이후 리옹 시장을 역임하면서 급진사회당의 지도자로서 세 차례(1924년, 1926년, 1932년) 내각을 구성했다.
에두아르 에리오 내각의 각료 명단은 다음과 같다.
| 직책 | 이름 |
|---|---|
| 총리 겸 외무부 장관 | 에두아르 에리오 |
| 육군부 장관 | 샤를 놀레 |
| 내무부 장관 | 카미유 쇼통 |
| 재무부 장관 | 에티엔 클레망텔 |
| 노동·위생·복지·사회보장부 장관 | 쥐스탱 고다르 |
| 사법부 장관 | 르네 르누 |
| 해군부 장관 | 자크 루이 뒤메닐 |
| 교육·미술부 장관 | 프랑수아 알베르 |
| 연금부 장관 | 에두아르 아메데 보비에 라피에르 |
| 농업부 장관 | 앙리 퀴유 |
| 식민부 장관 | 에두아르 달라디에 |
| 공공사업부 장관 | 빅토르 페이트랄 |
| 상공부 장관 | 외젠 레이널디 |
| 해방지역부 장관 | 빅토르 달비에 |
1925년 4월 3일, 아나톨 드 몽지가 클레망텔의 뒤를 이어 재무부 장관이 되었다. 이후 내각 명단은 다음과 같다.
이후 에두아르 에리오는 다시 내각을 구성하였다.
이후 사회당·공산당과 함께 인민전선에 참여했다. 레옹 블룸 내각이 구성되자 자신은 하원 의장에 취임했다.
홀로도모르 부정의 절정은 1933년 8월 26일부터 9월 9일까지 에리오가 우크라이나를 방문했을 때 나타났다. 에리오는 기근에 대한 증언을 부인하고 소비에트 우크라이나가 "만개한 정원과 같다"고 말했다. 그는 언론에 우크라이나에는 기근이 없으며, 자신은 기아의 흔적을 전혀 보지 못했고, 수백만 명이 굶주리고 있다는 주장은 소련의 적대자들이 퍼뜨린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는 "우크라이나가 기근으로 황폐해졌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어깨를 으쓱하고 싶다"고 선언했다. 1933년 9월 13일자 프라우다(Pravda)는 에리오가 "소련의 기근과 관련하여 부르주아 언론의 거짓말을 단호히 반박했다"고 보도했다.
4. 역대 선거 결과
| | 직책명 || 대수 || 정당 || 득표율 || 득표수 || 결과 || 당락 | |||||||
|---|---|---|---|---|---|---|---|
| 1939년 선거 | 대통령 | 15대 | 급진당 | 5.86% | 53표 | 4위 | 낙선 |
6. 기타
에두아르 에리오는 1933년 베리키 베체렉(오늘날의 즈렌야닌) 시의 명예 시민으로 선포되었다. 즈렌야닌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도 있다.
그가 키이우의 한 교회를 방문했던 일화는 당시를 위해 조작된 종교 의식이 거행되었던 내용으로, 다닐로 키시(Danilo Kiš)의 소설 보리스 다비도비치를 위한 무덤에 수록된 "기계 사자들" 이야기에 묘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