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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크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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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리크 4세는 에스트리센 가문 출신으로, 발데마르 2세의 아들이자 덴마크의 국왕이었다. 1232년 부친과 공동 군주가 되었고, 1241년 단독 국왕이 되었으나, 재위 기간 내내 형제, 농민, 성직자들과의 갈등에 시달렸다. 특히 동생 아벨과의 갈등이 심했으며, 농민들에게 세금을 부과하여 '푼돈 농민왕'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1250년, 에스토니아 원정 후 귀국하던 중 아벨의 저택에서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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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크 4세
기본 정보
링스테드 성 벤트 교회의 프레스코화
이름에리크 발데마르센
로마자 표기Erik Valdemarsen
별칭에리크 플로우페닝
로마자 표기Erik Plovpenning
통치
칭호덴마크 국왕 및 벤드족의 왕
재위 기간1232년–1241년 (공동 통치)
대관식1232년 5월 30일
선임 국왕발데마르 2세 빅토리아 & 젊은 발데마르
후임 국왕아벨
섭정발데마르 2세
섭정 유형상위 국왕
가문
왕가에스트리센 가문
결혼 및 자녀
배우자유타 폰 작센
자녀스웨덴 왕비 소피아
노르웨이 왕비 잉에보르
성 아그네타 수도원장 유타
성 아그네타 수도원장 아그네스
출생 및 사망
출생일1216년경
사망일1250년 8월 10일
사망 장소슐라이 만, 고토르프 성 근처
매장 장소처음에는 슐레스비히 대성당, 그 다음 성 벤트 교회
가족 관계
아버지발데마르 2세
어머니베렌가리아 데 포르투갈

2. 생애

에스트리센가 출신인 에리크 4세는 발데마르 2세와 그의 두 번째 아내인 포르투갈의 베렝가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1232년 5월 30일 룬드 성당에서 즉위식을 거행하면서 발데마르 2세와 함께 덴마크의 공동 군주가 되었으며, 같은 해에 동생인 아벨에게 슐레스비히 공작위를 넘겨줬다. 1241년 자신의 아버지인 발데마르 2세가 사망하면서 덴마크의 유일한 국왕이 되었다. 그의 재위 기간은 형제들 간의 갈등, 농민들, 성직자들과의 분쟁이 지속된 시기였다.

1249년 에리크 4세는 에스토니아의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군대를 편성하여 출항했다.[9][10] 1250년 귀국 도중 홀슈타인으로 군대를 이끌고 가 렌츠부르크 국경 요새 점령을 막고 독일 백작들에게 누가 왕인지를 알리려 했다.[9][10]

그의 동생인 슐레스비히 공작 아벨은 슐레스비히 고토르프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에리크 4세를 대접했다.[9][10] 그날 밤, 왕이 독일 기사 중 한 명과 도박을 하고 있을 때, 아벨의 시종과 다른 귀족 무리가 달려들어 왕을 붙잡았다.[9][10] 시종들은 에리크 4세를 묶어 아벨의 저택에서 보트로 끌고 나와 슐라이만으로 배를 저어 나갔다.[9][10] 나머지는 두 번째 보트로 뒤따랐다.[9][10] 에리크 4세는 숙적인 레브 구드문센(1195년경 - 1252년)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자신이 살해될 것을 알았다.[9][10] 포로 중 한 명은 도끼로 한 방에 왕이 살해되었음을 알리기 위해 남겨졌다.[9][10] 에리크 4세는 참수되었고, 그의 시신은 슐라이만에 버려졌다.[9][10]

다음 날 아침, 두 명의 어부가 왕의 머리 없는 시체를 그물로 끌어 올렸다.[9][10] 어부들은 시체를 슐레스비히의 도미니코회 수도원으로 옮겼다.[9][10] 후에 에리크 4세의 유해는 1257년 링스테드의 성 벤드 교회로 옮겨졌다.[9][10]

에리크 4세의 동생 아벨이 덴마크 왕위에 올랐다.[11] 아벨은 왕의 암살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11] 즉위 후 1년 반 만에 아벨 자신도 살해되었다.[11] 아벨 사후 동생 크리스토퍼가 덴마크 왕위를 계승했다.[11]

2. 1. 즉위 초 갈등과 십자군 원정

에리크 4세는 에스트리센가 출신으로, 발데마르 2세와 그의 두 번째 아내인 포르투갈의 베렝가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3] 1218년 이복형 발데마르가 덴마크 왕세자로 임명되면서 에리크는 슐레스비히 공작이 되었으나, 1231년 발데마르가 사망했다.[3] 1232년 5월 30일 룬드 성당에서 즉위식을 거행하며 발데마르 2세와 함께 덴마크의 공동 군주가 되었고, 같은 해에 동생인 아벨에게 슐레스비히 공작위를 넘겨줬다.[3] 1239년 11월 17일에는 작센의 유타와 결혼하여 6명의 자녀를 두었다.[3] 1241년 아버지 발데마르 2세가 사망하면서 덴마크의 유일한 국왕이 되었다.[3]

에리크 4세의 통치는 형제들, 특히 슐레스비히 공작 아벨과의 격렬한 갈등으로 특징지어진다.[3] 아벨은 홀슈타인 백작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독립적인 지위를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3] 1242년, 왕위에 오른 지 약 1년 만에 에리크 4세는 아벨과 처음 충돌했다.[3] 1244년, 2년간의 분쟁 끝에 휴전에 합의하고 에스토니아 십자군 원정을 함께 계획하기도 했다.[3]

하지만 1246년, 에리크 4세가 홀슈타인을 침공하면서 갈등이 재발했다.[6] 아벨은 에리크 4세에게 침공 중단을 요구했고,[6] 1247년에는 홀슈타인 주민들과 함께 윌란반도, 퓐섬을 장악하고 라네르스, 오덴세를 약탈했다.[6] 같은 해 에리크 4세는 리베와 아벨의 본거지 스벤보르를 점령하며 반격했다.[6]

한편, 에리크 4세는 농민들에게 세금을 부과하여 "푼돈 농민왕"(Plovpenning)이라는 별칭을 얻었다.[3] 특히 쟁기세는 농민들의 반발을 샀는데, 1249년 스코네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에리크 4세는 셸란섬의 도움을 받아 진압했다.[7] 그러나 이 과정에서 아벨 공작, 교회, 윌란반도 남부의 독일 출신 백작들이 에리크 4세에 대항하는 세력을 구축했다.[7]

에리크 4세는 교회와도 갈등을 빚었다.[4] 1245년 로스킬레의 닐스 스티센 주교를 추방하고 셸란섬코펜하겐의 교회 재산을 몰수했다.[4] 교황 인노첸시오 4세가 중재에 나섰지만, 분쟁은 해결되지 않았다.[5]

2. 2. 교회와의 분쟁

에리크 4세의 재위 기간은 에스트리센가(Estridsen) 출신으로 발데마르 2세포르투갈의 베렝가리아(Berengaria) 사이에서 태어난 그의 배경에서 시작되었다.[3] 그는 형제들, 농민, 성직자들과의 분쟁으로 점철된 시기를 보냈다.[3] 특히, 독립적인 지위를 원했던 슐레스비히 공작 아벨과의 갈등이 두드러졌으며, 아벨은 홀슈타인 백작들의 지지를 받았다.[3]

에리크 4세는 1242년, 즉위 1년 만에 동생 아벨과 처음 충돌했다.[4] 이 갈등은 2년 동안 지속되다가 1244년에 휴전 협정을 맺고 에스토니아 십자군 원정을 함께 하기도 했다.[4]

한편, 에리크 4세는 교회 재산에 대한 과세 문제로 성직자들과도 갈등을 빚었다.[4] 그는 다른 토지 소유주와 마찬가지로 교회 토지에도 세금을 부과하려 했고, 교황 인노첸시오 4세1245년 오덴세 주교와의 협상을 위해 사절을 파견했지만, 분쟁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4][5] 교회는 고대 권리와 특권을 침해하는 자에게 파문으로 경고했고, 에리크 4세의 교회 재산 과세 시도를 용납하지 않았다.[4]

1249년 에리크 4세는 로스킬레의 주교 닐스 스티센(Niels Stigsen)을 추방하고 코펜하겐을 포함한 셸란섬의 재산을 몰수했다.[5] 교황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닐스 스티센 주교는 1249년 클레르보 수도원에서 사망했다.[5] 몰수된 재산은 에리크 4세 사후인 1250년에 반환되었다.[5]

1246년 에리크 4세와 아벨 간의 분쟁이 다시 발생했다.[6] 에리크 4세가 홀슈타인을 침공하자 아벨은 윌란반도와 퓐섬을 공격했고, 오덴세까지 약탈했다.[6] 에리크 4세는 즉시 리베를 점령하고 스벤보르(Svendborg)를 점령하며 보복했다.[6] 1247년에는 아레스코 성을 점령하고, 에리크 4세의 누이 소피아 덴마크의 중재로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6]

1249년 스코네 농민들이 농업세, 특히 쟁기세에 반대하는 반란을 일으켰다.[7] 에리크 4세는 셸란섬의 도움으로 질서를 회복했지만, 교회, 아벨 공작, 윌란반도 남부의 독일 출신 백작들은 다시 연합하여 에리크 4세에 대항했다.[7][8] 이 쟁기세로 인해 에리크 4세는 "푼돈 농민왕"(Plovpenning)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3]

2. 3. 농민 반란과 왕권 약화

에리크 4세의 통치는 에스트리센 가문 출신으로서 발데마르 2세포르투갈의 베렝가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배경에서 시작되었다.[3] 1232년 룬드 성당에서 즉위식을 거행하며 발데마르 2세와 공동 군주로 덴마크를 다스리기 시작했고, 1241년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단독 군주가 되었다.[3] 그의 재위 기간은 형제들, 농민, 성직자들과의 지속적인 분쟁으로 점철되었다.[3] 특히, 농민들에게 부과한 세금 때문에 "푼돈 농민왕"(Plovpenning)이라는 별칭을 얻었다.[3]

1242년, 에리크 4세는 슐레스비히 공작인 동생 아벨과 처음으로 갈등을 겪었다.[3] 이 갈등은 2년간 지속되었으나, 1244년에 휴전 협정을 맺고 에스토니아 십자군 원정을 함께 추진하기도 했다.[3] 그러나 1246년에 다시 갈등이 발생하여, 에리크 4세는 홀슈타인을 침공했고, 아벨은 윌란반도와 퓐섬을 공격하며 내전이 격화되었다.[6] 에리크 4세는 즉시 리베스벤보르를 점령하며 반격했고,[6] 1247년에는 아레스코 성을 점령하고 크리스토페르와 크누트를 포로로 잡았다.[6] 이후 에리크 4세의 누이 소피아의 중재로 휴전이 성립되었지만,[6] 1249년 스코네 농민들이 세금에 반대하는 반란을 일으키자, 아벨 공작은 교회, 윌란반도 남부의 독일 출신 백작들과 함께 에리크 4세에 대항하는 세력을 구축했다.[7][8]

에리크 4세는 교회와의 갈등도 겪었는데, 1245년 로스킬레의 닐스 스티센 주교를 추방하고 그의 재산을 몰수했다.[4]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스티센 주교의 복권을 요구했지만, 분쟁은 해결되지 않았다.[4]

2. 4. 홀슈타인 침공과 아벨과의 재충돌

에리크 4세의 통치는 에스트리센가 출신으로, 발데마르 2세와 그의 두 번째 아내인 포르투갈의 베렝가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3] 1232년 룬드 성당에서 즉위식을 거행하며 발데마르 2세와 함께 덴마크의 공동 군주가 되었고, 동생인 아벨에게 슐레스비히 공작위를 넘겨주었다.[3] 1241년 아버지 발데마르 2세가 사망하면서 덴마크의 유일한 국왕이 되었다. 그의 재위 기간은 형제들 간의 갈등, 농민들, 성직자들과의 분쟁이 지속된 시기였다.[3] 특히 독립적인 지위를 원했던 슐레스비히 공작 아벨과의 갈등이 심했다.[3]

1242년, 에리크 4세는 슐레스비히 공작 아벨과 처음 충돌했는데, 이 갈등은 2년 동안 지속되었다.[3] 1244년에 휴전에 합의하고 에스토니아로의 공동 십자군 원정을 계획하기도 했다.[3] 1246년에는 홀슈타인을 침공하면서 아벨과의 분쟁이 다시 일어났다.[3] 아벨은 에리크 4세에게 홀슈타인 침공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고,[3] 1247년에는 홀슈타인 주민들과 함께 윌란반도, 퓐섬을 장악하고 북쪽에 위치한 라네르스, 오덴세에서 약탈을 자행했다.[3] 같은 해, 에리크 4세는 리베를 정복하고 아벨의 본거지였던 스벤보르를 점령했다.[3]

에리크 4세는 농민들에게 세금을 부과했기 때문에 "푼돈 농민왕"(Plovpenning)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3] 특히 쟁기세에 반발한 스코네 농민들이 1249년에 반란을 일으켰다.[3] 에리크 4세는 셸란섬의 도움으로 반란을 진압했지만, 아벨 공작은 교회, 윌란반도 남부에 거주하던 독일 출신 백작들과 함께 에리크 4세에 대항하는 세력을 구축했다.[3]

한편, 에리크 4세는 로스킬레의 닐스 스티센 주교를 추방하고 코펜하겐을 포함한 그의 재산을 몰수하는 등 교회와도 갈등을 빚었다.[3]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닐스 스티센 주교의 복권을 요구했지만, 분쟁은 해결되지 않았다.[3]

2. 5. 암살

1249년 에리크 4세는 에스토니아의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군대를 편성하여 출항했다.[9][10] 1250년 귀국 도중 홀슈타인으로 군대를 이끌고 가 렌츠부르크 국경 요새 점령을 막고 독일 백작들에게 누가 왕인지를 알리려 했다.[9][10]

그의 동생인 슐레스비히 공작 아벨은 슐레스비히 고토르프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에리크 4세를 대접했다.[9][10] 그날 밤, 왕이 독일 기사 중 한 명과 도박을 하고 있을 때, 아벨의 시종과 다른 귀족 무리가 달려들어 왕을 붙잡았다.[9][10] 시종들은 에리크 4세를 묶어 아벨의 저택에서 보트로 끌고 나와 슐라이만으로 배를 저어 나갔다.[9][10] 나머지는 두 번째 보트로 뒤따랐다.[9][10] 에리크 4세는 숙적인 레브 구드문센(1195년경 - 1252년)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자신이 살해될 것을 알았다.[9][10] 포로 중 한 명은 도끼로 한 방에 왕이 살해되었음을 알리기 위해 남겨졌다.[9][10] 에리크 4세는 참수되었고, 그의 시신은 슐라이만에 버려졌다.[9][10]

다음 날 아침, 두 명의 어부가 왕의 머리 없는 시체를 그물로 끌어 올렸다.[9][10] 어부들은 시체를 슐레스비히의 도미니코회 수도원으로 옮겼다.[9][10] 후에 에리크 4세의 유해는 1257년 링스테드의 성 벤드 교회로 옮겨졌다.[9][10]

에리크 4세의 동생 아벨이 덴마크 왕위에 올랐다.[11] 아벨은 왕의 암살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11] 즉위 후 1년 반 만에 아벨 자신도 살해되었다.[11] 아벨 사후 동생 크리스토퍼가 덴마크 왕위를 계승했다.[11]

3. 가족 관계

에리크 4세는 1239년 11월 17일 작센 공작 알베르트 1세의 딸 유타와 결혼했다.[12][24] 슬하에 일찍 죽은 크누트와 크리스토퍼 외에 소피아, 잉게보르, 유타, 아그네스를 두었다. 소피아는 스웨덴 국왕 발데마르와 혼인했고, 잉게보르는 노르웨이 국왕 마그누스 6세와 결혼했다. 유타와 아그네스는 로스킬레의 성 아그네스 수도원장을 역임했다.

참조

[1] 웹사이트 Erik 4. Plovpenning, 1216-50 http://danmarkshisto[...] Danmarks Historien 2018-08-01
[2] 웹사이트 Berengaria (ca. 1197-1221) http://www.kvinfo.dk[...] Dansk Kvindebiografisk Leksikon 2018-08-01
[3] 웹사이트 Erik Plovpenning http://www.danmarksk[...] Danmarks Konger 2018-08-01
[4] 웹사이트 Den hellige Erik Plovpenning (1216-1250) http://www.katolsk.n[...] Den katolske kirke 2018-08-01
[5] 웹사이트 Niels Stigsen http://www.roskildeh[...] roskildehistorie.dk 2018-08-01
[6] 웹사이트 Christoffer 1., ca. 1219-1259 http://danmarkshisto[...] Danmarks Historien 2018-08-01
[7] 웹사이트 Arreskov Slot https://danskefilm.d[...] 2020-08-01
[8] 서적 Johann I. (Markgraf von Brandenburg) https://de.wikisourc[...] Duncker & Humblot 2020-08-01
[9] 웹사이트 The Monastery of Ringsted and the St. Bendt's Church https://www.visitrin[...] Visit Ringsted 2018-08-01
[10] 웹사이트 Lave Gudmundsen http://denstoredansk[...] Dansk Biografisk Leksikon 2018-08-01
[11] 웹사이트 Christoffer 2. 1276-1332 http://danmarkshisto[...] Danmarks Historien (Aarhus University) 2018-08-01
[12] 웹사이트 Albrecht I. (Albert) https://www.deutsche[...] Deutsche Biographie 2018-08-01
[13] 웹사이트 Erik 4. Plovpenning, 1216-50 http://danmarkshisto[...] Danmarks Historien 2018-08-01
[14] 웹사이트 Berengaria (ca. 1197-1221) http://www.kvinfo.dk[...] Dansk Kvindebiografisk Leksikon 2018-08-01
[15] 웹사이트 Erik Plovpenning http://www.danmarksk[...] Danmarks Konger 2018-08-01
[16] 웹사이트 Den hellige Erik Plovpenning (1216-1250) http://www.katolsk.n[...] Den katolske kirke 2018-08-01
[17] 웹사이트 Niels Stigsen http://www.roskildeh[...] roskildehistorie.dk 2018-08-01
[18] 웹사이트 Christoffer 1., ca. 1219-1259 http://danmarkshisto[...] Danmarks Historien 2018-08-01
[19] 웹사이트 Arreskov Slot https://danskefilm.d[...] 2020-08-01
[20] 서적 Johann I. (Markgraf von Brandenburg) https://de.wikisourc[...] 2020-08-01
[21] 웹사이트 The Monastery of Ringsted and the St. Bendt's Church https://www.visitrin[...] Visit Ringsted 2018-08-01
[22] 웹사이트 Lave Gudmundsen http://denstoredansk[...] Dansk Biografisk Leksikon 2018-08-01
[23] 웹사이트 Christoffer 2. 1276-1332 http://danmarkshisto[...] Danmarks Historien (Aarhus University) 2018-08-01
[24] 웹사이트 Albrecht I. (Albert) https://www.deutsche[...] Deutsche Biographie 2018-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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