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시오스 4세 앙겔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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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렉시오스 4세 앙겔로스는 1203년부터 1204년까지 비잔틴 제국의 황제였다. 그는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의 아들로, 삼촌 알렉시오스 3세에게 폐위당한 후 망명 생활을 했다. 제4차 십자군과 동맹을 맺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여 황위에 올랐지만, 십자군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시민들의 불만을 사 1204년 쿠데타로 폐위되어 처형당했다. 그의 재위 기간은 십자군과의 갈등, 과도한 세금 부과, 가톨릭 개종 시도 등으로 혼란스러웠으며, 결국 제4차 십자군 전쟁으로 이어져 비잔틴 제국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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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시오스 4세 앙겔로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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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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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로마인의 황제 및 전제자 |
로마자 표기 | Aléxios Ángelos |
그리스어 표기 | Αλέξιος Άγγελος |
통치 | |
즉위 | 1203년 8월 1일 |
재위 기간 | 1203년 7월 19일 ~ 1204년 1월 27일 |
공동 통치자 |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 |
이전 통치자 |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 |
다음 통치자 | 알렉시오스 5세 두카스 |
개인 정보 | |
출생 | 1182년경 |
사망 | 1204년 2월 (21세) |
사망 장소 | 콘스탄티노폴리스 (튀르키예 이스탄불) |
가문 | |
왕가 | 앙겔로스 가문 |
아버지 |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 |
어머니 | 이레네 (팔라이올로고스?) |
종교 | 동방 정교회 |
2. 생애
1182년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와 에이레네의 아들로 태어났다.[2] 1195년 아버지 이사키오스 2세가 숙부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에 의해 폐위되자, 제국을 탈출하여 매형인 슈바벤 공작 필리프에게 도망쳤다. 1201년 군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던 제4차 십자군에 대해, 원정 자금 부담과 동서 교회의 통일을 조건으로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침공하여 1203년 7월 숙부를 추방하고, 유폐되어 있던 부친을 구출하여 공동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알렉시오스 4세는 제4차 십자군의 원정 자금을 부담하기 위해 국민과 귀족에게 중과세를 부과하여 반감을 샀다. 1203년 12월, 폭동으로 외국인들이 살해되었고, 십자군은 알렉시오스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느꼈다. 알렉시오스는 "나는 내가 한 것 이상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라며 십자군의 요구를 거절했다. 비잔티움 제국 시민과 아버지에게 미움을 받았으며, 성적 변태설에 대한 소문이 퍼졌다. 니케타스 코니아테스는 알렉시오스를 "어린애 같다"고 비판했다. 1204년 1월 초, 알렉시오스 4세는 베네치아 함대에 방화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3]
1204년 1월 말,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은 반란을 일으켜 니콜라스 카나부스를 황제로 옹립하려 했고, 그는 하기아 소피아로 피신했다. 알렉시오스 4세는 십자군과의 화해를 시도하며 반서방 궁정 신하인 알렉시오스 두카스 무르추플루스에게 십자군의 지원을 얻는 임무를 맡겼으나, 알렉시오스 두카스는 1204년 1월 27일 밤에 알렉시오스 4세와 그의 아버지를 투옥했다. 이사키오스 2세는 곧 사망했는데, 노환 또는 독살로 추정되며, 알렉시오스 4세는 (아마도 2월 8일에) 교살되었다. 1204년, 알렉시오스 3세의 사위인 알렉시오스 5세 두카스가 반란을 일으켜 알렉시오스 4세 부자를 살해했다. 알렉시오스 두카스는 알렉시오스 5세로 황제에 즉위했다. 알렉시오스 4세의 짧은 재위 기간 동안, 흑해 연안의 제국 영토는 독립을 선언했고, 이는 트라페준트 제국으로 알려진 비잔티움 제국의 후계 국가를 낳았다.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불안정한 상황은 제국이 트라페준트를 통제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지 못하게 했고, 이는 트라페준트의 사실상 독립을 인정하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법적으로는 제국의 영토로 남아있었다.
2. 1. 망명과 십자군과의 협상
알렉시오스 4세는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와 이리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1195년 큰아버지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황위를 찬탈했을 때 감옥에 갇혔다.[2] 1201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탈출하여 신성로마제국으로 망명, 누나 이레네 앙겔루스의 남편인 매형 슈바벤의 필립에게 의탁하였다.[2] 그곳에서 제4차 십자군 대표로 있던 몬페라토의 보니파치오를 만나 아버지의 제위를 되찾기 위한 협약을 맺었다.협약에는 십자군이 알렉시오스 3세를 몰아내고 아버지의 제위를 되찾아 주면 십자군의 이집트 정복을 위한 병사 1만 명과 기사 500명을 제공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로마 가톨릭 관할로 주겠다는 약속이 포함되었다.
이 제안은 십자군 측에서 받아들여졌고, 특히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가 열렬히 환영했다.
제4차 십자군은 이에 호응하여 목표를 이집트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전환하였다. 알렉시오스는 1203년 4월 십자군과 합류하여 6월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다.
2. 2. 공동 황제 즉위와 통치
1195년 큰아버지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황위를 찬탈했을 때 알렉시오스는 감옥에 갇혔다. 1201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탈출하여 신성로마제국으로 망명, 누나 이레네 앙겔루스의 남편인 매형 슈바벤의 필립에게 의탁하였다. 그곳에서 제4차 십자군 대표 몬페라토의 보니파치오를 만나 아버지의 제위를 되찾기 위한 협약을 맺었다.십자군이 알렉시오스 3세를 몰아내고 아버지의 제위를 되찾아 주면 십자군의 이집트 정복을 위한 병사 1만 명과 기사 500명을 제공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로마 가톨릭 관할로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 제안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를 비롯한 십자군 측에서 받아들였다.
제4차 십자군은 목표를 이집트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바꾸었다. 알렉시오스는 1203년 4월 십자군과 합류하여 6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 십자군의 공격으로 알렉시오스 3세는 도망쳤고, 8월 1일 장님인 이사키오스 2세가 복위했다. 십자군 점령군은 알렉시오스 4세를 공동 황제로 앉혔다.[3]
그러나 알렉시오스는 십자군과의 약속을 지킬 수 없었고, 탐욕스러운 프랑크 군과 비잔티움 백성과의 긴장은 고조되었다. 막대한 세금과 가톨릭 개종 시도에 시민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1204년 1월 25일 쿠데타로 알렉시오스는 지하감옥에 감금되었다가 활줄에 교살되었고, 며칠 후 눈먼 이사키오스도 살해되었다. 제위는 알렉시오스 두카스 무르주풀루스에게 돌아갔다.
알렉시오스 4세는 거창한 약속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재정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교회와 적의 재산을 몰수하여 약속한 금액의 절반(은화 10만 마르크)을 간신히 모았고, 삼촌 알렉시오스 3세를 물리치려 했으나 실패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과 십자군 사이의 적대감은 커져갔다.
1203년 12월, 폭동으로 외국인들이 살해되었고, 십자군은 알렉시오스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느꼈다. 알렉시오스는 "나는 내가 한 것 이상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라며 요구를 거절했다. 로마인 시민과 아버지에게 미움을 받았으며, 성적 변태설에 대한 소문이 퍼졌다. 니케타스 코니아테스는 알렉시오스를 "어린애 같다"고 비판했다. 1204년 1월 초, 알렉시오스 4세는 베네치아 함대에 방화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3]
2. 3. 폐위와 죽음
1204년 1월 25일 수도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알렉시오스는 지하감옥에 감금되었다가 활줄에 교살되었다. 며칠 후 눈먼 황제 이사키오스 2세도 살해되었다.비잔티움의 제위는 알렉시오스 두카스 무르주풀루스에게 돌아갔다.
1204년 1월 말,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시민들은 반란을 일으켜 니콜라스 카나부스를 황제로 옹립하려 했고, 그는 하기아 소피아로 피신했다. 알렉시오스 4세는 십자군과의 화해를 시도하며 반서방 궁정 신하인 알렉시오스 두카스 무르추플루스에게 십자군의 지원을 얻는 임무를 맡겼으나, 알렉시오스 두카스는 1204년 1월 27일 밤에 알렉시오스 4세와 그의 아버지를 투옥했다. 이사키오스 2세는 곧 사망했는데, 노환 또는 독살로 추정되며, 알렉시오스 4세는 (아마도 2월 8일에) 교살되었다. 알렉시오스 두카스는 알렉시오스 5세로 황제에 즉위했다. 알렉시오스 4세의 짧은 재위 기간 동안, 흑해 연안의 제국 영토는 독립을 선언했고, 이는 트라페준트 제국으로 알려진 비잔틴 제국의 후계 국가를 낳았다.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불안정한 상황은 제국이 트라페준트를 통제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지 못하게 했고, 이는 트라페준트의 사실상 독립을 인정하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법적으로는 제국의 영토로 남아있었다.
3. 제4차 십자군과의 관계
1195년 큰아버지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황위를 찬탈했을 때, 알렉시오스는 감옥에 갇혔다. 1201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탈출하여 신성로마제국으로 망명, 누나 이레네 앙겔루스의 남편인 슈바벤의 필립에게 의탁하였다. 그곳에서 제4차 십자군 대표 몬페라토의 보니파치오를 만나 아버지의 제위 회복을 위한 협약을 맺었다.[2]
알렉시오스는 십자군이 알렉시오스 3세를 몰아내고 아버지의 제위를 되찾아주면, 십자군의 이집트 정복을 위한 병사 1만 명과 기사 500명을 제공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로마 가톨릭 관할로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 제안은 십자군, 특히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제4차 십자군은 목표를 이집트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전환했다. 1203년 4월, 알렉시오스는 십자군과 합류하여 6월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다.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 점령했고, 알렉시오스 3세는 도망쳤다. 8월 1일 장님인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가 복위했고, 십자군은 알렉시오스의 약속을 담보하기 위해 알렉시오스 4세로 공동 황제에 앉혔다.
그러나 알렉시오스는 약속을 지킬 수 없었고, 탐욕스러운 프랑크 군과 비잔티움 백성과의 긴장은 고조되었다. 막대한 세금과 가톨릭 개종 시도에 시민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1204년 1월 25일 쿠데타로 알렉시오스는 감금 후 교살되었고, 이사키오스 2세도 살해되었다. 비잔티움 제위는 알렉시오스 두카스 무르주풀루스에게 돌아갔다.[3]
4. 유산 및 평가
알렉시오스 4세의 행동은 제국을 이전보다 훨씬 더 악화된 상태로 만들었다. 제국은 상당한 영토를 잃었고, 권력 투쟁과 그에 따른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계속해서 영토를 잃게 될 것이었다. 제4차 십자군 전쟁 말기에 비잔틴 제국은 지역 강국으로 전락했다. 알렉시오스의 짧은 통치 이후 약 60년 만인 1261년에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되찾으면서 어느 정도 회복될 것이었다. 그러나 제4차 십자군 전쟁의 여파는 결국 250년 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제국이 멸망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알렉시오스가 비잔틴 제국의 쇠퇴와 멸망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지 여부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그의 짧은 통치와 제국의 안전에 대한 위험한 외부 요인과 같은 여러 요인으로 인해 그는 상황을 제대로 처리하는 데 필요한 자금과 경험이 모두 부족했다. 그는 투옥과 망명으로 인해 왕족으로서의 전형적인 성장 과정과 교육을 받지 못했고, 이는 그의 경험 부족에 기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참조
[1]
서적
De la Conquête de Constantinople
https://sourcebooks.[...]
[2]
문서
Philip was married to Irene Angelina a sister of Alexios IV.
[3]
서적
The Fourth Crusade 1202–04 – the Betrayal of Byzantium
Osprey Publishing Lt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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