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에리크 11세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에리크 11세는 에리크 10세의 아들이자 덴마크 국왕 발데마르 1세의 외손으로, 1222년 6세의 나이로 스웨덴의 국왕이 되었다. 크누트 홀름게르손이 섭정 역할을 수행했으며, 1229년 올루스트라 전투에서 패배하여 덴마크로 망명했다. 이후 크누트 2세가 사망한 1234년 스웨덴으로 돌아와 복위했으며, 비엘보의 카타리나 수네스도테르와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1250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왕위는 발데마르 비르예르손이 승계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250년 사망 - 레오나르도 피보나치
    레오나르도 피보나치는 힌두-아라비아 숫자 체계를 유럽에 소개하고 피보나치 수열을 제시하여 중세 수학 발전에 기여했으며, 상업 발달을 돕는 《산반서》를 저술하고 황금비와 관련된 피보나치 수열이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도록 했다.
  • 1250년 사망 - 프리드리히 2세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호엔슈타우펜 왕조 출신의 신성 로마 황제이자 시칠리아 왕국의 왕으로, 교황의 후견 아래 성장하여 제국과 왕국을 다스리며 학문과 예술을 장려했으나 교황과의 갈등, 반란, 전쟁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 에리크가 - 에리크 9세
    에리크 9세는 12세기 스웨덴 국왕으로 핀란드에 기독교를 전파하고 스웨덴 법률 개혁과 교회 지원에 기여하여 성왕으로 숭배받았으나, 1160년 암살당한 인물이다.
  • 에리크가 - 에리크 10세
    에리크 10세는 13세기 초 스웨덴 국왕으로, 레나 전투에서 승리하여 왕위에 올랐고, 덴마크와의 관계 개선 및 교회와의 협력을 통해 통치 기반을 다졌으며, 사후 요한 1세가 왕위를 계승하고 이후 그의 아들 에리크 11세가 왕이 되었다.
  • 1216년 출생 - 기야스 웃딘 발반
    기야스 웃딘 발반은 델리 술탄국의 노예 왕조 술탄으로,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 구축, 공포 정치 시행, 몽골 제국 침입 방어에 힘썼으나 만년에 후계자 문제로 고심하며 그의 사후 왕조는 멸망의 길을 걸었다.
  • 1216년 출생 - 아시카가 야스우지
    아시카가 야스우지는 가마쿠라 시대의 무장으로, 호죠 야스토키의 딸을 어머니로 두고 1236년 탄코노카미에 임명되어 쇼군을 섬겼으며, 36세에 출가하여 아시카가씨 세력 확장에 기여했다.
에리크 11세
기본 정보
인명에리크 에리크손 / 에리크 11세
다른 이름에리크 레스페 오크 할테
스웨덴어 표기Erik Eriksson, Erik läspe och halte
고대 노르드어 표기Eiríkr Eiríksson
군주호스웨덴 국왕
에리크 11세의 인장
에리크 11세의 인장
통치
재위 기간1222년 - 1229년, 1234년 - 1250년
대관일알 수 없음
생애
출생일1216년
사망일1250년2월 2일
매장지,
가족 관계
배우자카타리나 수네스도테르
자녀알 수 없음
왕가에리크 가
왕조에리크 왕조
아버지에리크 10세
어머니리키사 아 단마르크
기타
종교알 수 없음
서명알 수 없음

2. 생애

에리크 10세덴마크 발데마르 1세 국왕의 딸 리헤자 사이에서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 태어났다. 1320년대 초에 쓰인 에리크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다리가 부분적으로 불편했다고 한다. 당시 스웨덴 왕위는 에리크 가문의 경쟁 가문인 스베르케르 가문의 요한 1세가 차지하고 있었다. 로마 교황 파스칼 2세가 에리크의 즉위를 지지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파스칼 2세는 에리크가 태어나기 훨씬 전인 1118년에 사망했으므로 시기적으로 맞지 않아 논란의 여지가 있다.

1222년 요한 1세가 사망하자, 6세의 나이로 스웨덴 국왕 '''에리크 11세'''로 즉위했다.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크누트 홀름게르손, 울프 포세 등이 포함된 후견인회가 섭정을 맡았으며, 이는 훗날 국가 평의회의 기원이 되었다. 그러나 1229년 Slaget vid Olustra|올루스트라 전투sv에서 크누트 홀름게르손에게 패배하여 왕위를 잃고 숙부 발데마르 2세가 다스리던 덴마크로 망명했다. 크누트 홀름게르손은 1231년 크누트 2세로 즉위했으나 1234년 사망했다.

1234년 크누트 2세가 사망하자 에리크 11세는 스웨덴으로 돌아와 왕위에 복위했다. 복위 후 야를 Sune Folkesson|수네 폴케손sv과 헬레나 공주(스베르케르 2세의 딸)의 딸이자 스베르케르 가문의 상속녀인 카타리나와 결혼했다. 일반적으로 자녀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일부 기록에는 일찍 사망한 두 딸이 있었다고도 전해진다.

1250년 사망하여 베스트라 예탈란드의 Varnhem Abbey|바른헴 수도원영어에 안치되었다. 직계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누나 잉에보리와 1236년 결혼한 폴쿵 가문 출신의 비르예르 야를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발데마르 비르예르손이 왕위를 계승했다. 비르예르 야를은 1266년 사망할 때까지 섭정으로서 실권을 행사했다.

『시인 목록』에는 그의 궁정 스칼드 시인 중 한 명으로 Óláfr Þórðarson|올라프 토르다르손non이 언급되어 있다.

2. 1. 초기 생애와 즉위

에리크 10세(Erik X, 에리크 크누트손)와 그의 아내 리헤자(Richeza, 덴마크발데마르 1세 국왕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1222년 요한 1세가 사망하자, 에리크는 6세의 어린 나이에 '''에리크 11세'''로서 스웨덴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즉위 초기에는 크누트 홀름게르손(Knut Holmgersson)을 비롯한 주교, 울프 포세(Ulf Fase) 등 일부 대귀족들이 후견인회를 구성하여 섭정 역할을 수행하며 실권을 잡았다. 이 후견인회는 훗날 국가 평의회의 기원이 되었다.

1229년, 에리크 11세는 쇠데르만란드 지방에서 일어난 Slaget vid Olustra|올루스트라 전투sv에서 반란을 일으킨 크누트 홀름게르손에게 패배하여 왕위를 잃었다. 이후 그는 숙부인 발데마르 2세가 다스리던 덴마크로 망명했다. 크누트 홀름게르손은 1231년 스웨덴의 크누트 2세 국왕으로 즉위했지만, 1234년에 사망했다.

1234년 크누트 2세가 사망하자 에리크 11세는 스웨덴으로 돌아와 다시 국왕으로 복위했다. 복위 후에는 야를인 Sune Folkesson|수네 폴케손sv과 스베르케르 가문의 공주 헬레나(스베르케르 2세의 딸) 사이의 딸인 Katarina Sunesdotter|카타리나 수네스도테르sv와 결혼했다. 일반적으로 에리크 11세는 자녀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일부 자료에 따르면 두 명의 딸이 태어났으나 일찍 사망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2. 2. 망명과 복위

1229년, 에리크 11세는 크누트 홀름게르손이 일으킨 반란으로 인해 쇠데르만란드 지방에서 벌어진 올루스트라 전투에서 패배하여 왕위를 잃었다. 이후 그는 숙부인 발데마르 2세가 다스리던 덴마크로 망명했다. 크누트 홀름게르손은 1231년 크누트 2세로 즉위했으나, 1234년에 사망했다.

1234년 크누트 2세가 사망하자 에리크 11세는 스웨덴으로 돌아와 왕위를 되찾았다. 복위 후, 그는 야를 수네 폴케손과 스베르케르가의 공주인 헬레나(스베르케르 2세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딸 카타리나 수네스도테르와 결혼했다. 일반적으로 에리크 11세에게는 자녀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일부 기록에 따르면 두 딸이 있었으나 일찍 사망했다고도 전해진다.

에리크 11세는 1250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시신은 베스트라 예탈란드의 바른헴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누나 잉에보리와 비르예르 야를의 아들인 조카 발데마르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2. 3. 사망과 계승

에리크 11세는 1250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시신은 베스트라 예탈란드의 바른헴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일반적으로 에리크 11세는 자녀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일부 자료에 따르면 두 명의 딸이 태어났으나 일찍 사망했다고 한다.

직계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에리크 11세의 누나인 잉에보리와 폴쿵 가문 출신의 비르예르 야를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발데마르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비르예르 야를은 1266년 사망할 때까지 섭정으로서 왕국을 지배했다.

3. 가계

에리크 에릭손은 스웨덴 국왕 에리크 10세와 덴마크발데마르 1세의 딸인 리키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 태어난 유복자였다. 1320년대 초반에 쓰여진 에리크 연대기에 따르면, 에리크는 다리가 부분적으로 불편했다고 전해진다. 에리크가 태어났을 당시 스웨덴 왕위는 에리크 가문의 경쟁 가문인 스베르케르 가문의 요한 1세가 차지하고 있었으며, 요한 1세의 통치는 에리크가 15세가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당시 로마 교황 파스칼 2세는 에리크 에릭손의 즉위를 지지했다.

4. 사진

참조

[1] 웹사이트 Kings and Queens of Sweden — A thousand year succession http://www.royalcour[...] Royal Court of Sweden 2010-01-28
[2] 웹사이트 Erik "läspe och halte" Eriksson http://historiska-pe[...]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