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크 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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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리크 9세는 1156년 스웨덴 국왕으로 즉위하여 스웨덴 고유의 법전인 《에리크 법전》을 제정하고 핀란드를 정복했으며, 이후 "성왕"으로 불리며 스톡홀름의 수호성인이 된 인물이다. 잉글랜드 출신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덴마크 오덴세 출신 베네딕도회 신자들에게 수도원 건립을 지시하는 등 기독교 신앙을 전파했다. 1160년 웁살라에서 살해당했으며, 그의 유해는 웁살라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는 스웨덴과 스톡홀름의 수호성인으로 숭배받고 있으며, 5월 18일에는 기념일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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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크 9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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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칭호 | 스웨덴 국왕 |
재위 기간 | 1156년경 – 1160년 5월 18일 |
계승 순서 | 스웨덴 국왕 |
이전 국왕 | 스베르케르 1세 |
다음 국왕 | 마그누스 2세 |
왕가 | 에리크 가문 |
아버지 | 예드바르드 |
배우자 | 덴마크의 크리스티나 |
자녀 | 크누트 1세 필리프 에리크손 카타리나 에리크스도테르 노르웨이의 마르가레타 |
출생 | 1120년경–1125년경 |
사망일 | 1160년 5월 18일 |
사망 장소 | 웁살라, 스웨덴 |
매장 장소 | 감라 웁살라 교회, 이후 웁살라 대성당으로 이전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이름 | |
스웨덴어 | Erik den helige |
스웨덴어 (다른 표기) | Sankt Erik |
스웨덴어 (다른 표기) | Erik Jedvardsson |
2. 생애
잉글랜드 왕국의 영향을 받은 선교사인 예드바르드(Jedvard)의 아들로 태어났다. 1156년 스베르케르가(Sverker) 출신의 스베르케르 1세 국왕이 피살되면서 스웨덴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잉글랜드 출신의 웁살라 대주교인 헨리크(Henrik)와 함께 제1차 스웨덴 십자군을 일으켜 핀란드를 정복했으며, 헨리크 대주교는 핀란드에 기독교를 전파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재위 기간 동안 스웨덴 고유의 법전인 《에리크 법전》을 제정했다. 또한 덴마크 오덴세 출신 베네딕도회 신자들에게 웁살라 구 시가지에 수도원 건립을 지시하는 등 유럽 전역에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는 데 힘썼다. 이러한 업적으로 "성왕"(聖王)이라는 별칭을 얻었으며, 스웨덴의 수도인 스톡홀름의 수호성인으로 여겨지고 있다.
1160년 5월 18일 웁살라에서 스베르케르가(Sverker) 출신의 칼 7세의 지원을 받은 망누스 2세에 의해 살해당했다.
덴마크의 에스트리센가(Estridsen) 출신인 크리스티나 비에른스도테르(Kristina Björnsdotter)와 결혼했으며, 슬하에 아들인 크누트 에릭손(Knut Eriksson, 훗날 스웨덴 국왕 크누트 1세)과 딸인 마르가레타 에릭스도테르(Margareta Eriksdotter, 노르웨이 국왕 스베레 시구르손의 아내) 등을 두었다.
2. 1. 출생과 가계
스웨덴의 베스트예틀란드 지방에서 1120년경 태어났다는 설이 있다. 아버지는 예드바르드(Jedvard)로, 잉글랜드 왕국의 영향을 받은 선교사의 아들이거나[3] 스웨덴 군의 기사였다고 전해진다. 아버지의 이름 예드바르드(Edward)는 스칸디나비아식이 아니어서 잉글랜드 선교의 영향을 시사할 수 있다. 후기 중세 스웨덴 전통에서는 에리크를 에리크 예드바르드손으로 부르며,[5] 스베리르 사가에서는 "야트바르드의 아들, 성 에이리크"라고 언급된다.[4]어머니는 14세기 기록에 따르면 스웨덴 국왕 블로트 스벤(혹은 블로트-스베인)의 딸인 세실리아라고 하지만, 이 정보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6] 에리크에게는 요아르 예드바르드손이라는 형제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4] 또한 남동생이 훗날 칼마르 연합 시대의 왕 칼 8세의 조상이 된다는 전승도 있다. 외사촌으로는 훗날 에리크 가문과 경쟁하는 스베르케르 가문의 시조 스베르케르 1세가 있었다고도 전해진다.
에릭 가문은 예타인에 뿌리를 둔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후대의 왕들이 베스테르예틀란드 스카라 인근의 베르넴 수도원에 지속적으로 묻혔다는 사실에서 추정된다.[3] 에리크의 유해에 대한 골학적 조사 결과, 그가 사망한 웁랜드보다는 생애 마지막 10~15년을 베스테르예틀란드에서 보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3] 그러나 그가 소유했던 유일한 영지는 스베알란드의 베스트만란드에 위치해 있었다.[3] 베스테르예틀란드 중부의 에릭스베리가 원래 가족 영지였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에리크는 20대 후반 즈음 덴마크의 에스트리센가(Estridsen) 출신인 크리스티나 비에른스도테르(Kristina Björnsdotter)와 결혼했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스웨덴 국왕 잉에 1세의 손녀이자 에리크의 사촌인 크리스티나라고도 한다. 외조부가 블로트 스벤 왕이라는 점과 더불어 이 결혼은 그가 왕위 계승을 통해 스웨덴 국왕이 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슬하에는 4명의 자녀를 두었다. 아들인 크누트 에릭손(Knut Eriksson)은 훗날 스웨덴 국왕(크누트 1세)이 되었고, 딸인 마르가레타 에릭스도테르(Margareta Eriksdotter)는 노르웨이의 스베레 시구르손 국왕과 결혼했다.
2. 2. 즉위와 통치
1156년 크리스마스에 스웨덴 국왕 스베르케르 1세가 암살되면서 왕위가 공석이 되자, 그의 외사촌이자 지방 왕이었던 에리크가 스웨덴 국왕으로 즉위했다. 에리크 9세에 대한 동시대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으며, 그의 생애에 대한 정보는 주로 13세기 후반에 작성된 성인전에 의존한다. 이 성인전의 역사적 사실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7] 성인전에 따르면 에리크는 왕족 출신이며 왕위 공백 시기에 만장일치로 왕으로 선출되었고, 10년 동안 통치했다고 한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그의 통치는 1150년경 시작되었을 수 있으나, 1132년경 즉위한 스베르케르 1세와의 관계를 고려하면 1156년 이후 대부분의 지역에서 왕으로 인정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7] 그는 덴마크 공주이자 잉에 1세 왕의 손녀인 크리스티나 비외른스도테르와 결혼하여 왕위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강화했다.[7]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에리크 9세는 잉글랜드 출신의 웁살라 대주교 헨리크와 함께 제1차 스웨덴 십자군을 일으켜 핀란드를 정복했다. 이는 이교도를 제압하고 기독교를 전파하는 한편, 세력을 확장하려는 목적으로 여겨진다. 헨리크 대주교는 에리크 9세의 명령에 따라 핀란드에 기독교를 전파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 원정 중에 "푸른 하늘에 떠 있는 금색 십자가"를 보았다는 전설은 스웨덴 국기의 기원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십자군 활동은 로마 교황에게 긍정적으로 평가받았고, 에리크 9세는 교황이라는 강력한 후원자를 얻게 되었다. 이에 감사하는 의미로 아들 크누트를 로마에 사절로 보내기도 했다.
국내 정책 면에서는 스웨덴 고유의 법전인 《에리크 법전》을 제정하고, 기혼 여성의 유산 상속을 가능하게 하는 등 법률 개혁에 힘썼다. 또한 덴마크 오덴세 출신의 베네딕도회 신자들에게 웁살라 구 시가지에 수도원 건립을 지시하는 등 기독교 신앙 전파에 기여했다. 이러한 업적으로 인해 그는 "성왕"(聖王)이라는 별칭을 얻었으며, 스웨덴의 수도인 스톡홀름의 수호성인으로 여겨지고 있다.[8]

그러나 그의 종교 정책에 대한 상반된 기록도 존재한다. 1200년경 시토회 연대기에 따르면, 에리크 왕과 크리스티나 왕비가 베스테르예틀란드의 바른헴 수도원 수도사들을 괴롭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인해 일부 수도사들은 덴마크로 피신하여 1158년 비츠쾰 수도원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에리크 부부는 입장을 바꾸어 알바스트라 수도원의 게르하르트 수도원장의 중재 하에 바른헴 수도원의 재건을 허용했다.[9] 또한 13세기 초 자료에 따르면 그는 스몰란드의 뉘달라 수도원에도 기증을 했다.[10]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스베르케르 가문의 칼 스베르케르손 (칼 7세)이 외스테르예틀란드 지역을 다스리며 경쟁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7] 1160년 5월 18일, 에리크 9세는 웁살라에서 칼 7세의 지원을 받은 망누스 2세에 의해 살해당했다.
2. 3. 죽음
1160년 5월 18일, 에리크 9세는 웁살라에서 스베르케르 가문(House of Sverker)의 칼 스베르케르손의 지원을 받은 마그누스 헨릭센에게 살해당했다.[37] 전설에 따르면, 마그누스는 악마의 사주를 받아 스웨덴 귀족들을 선물과 약속으로 매수하여 음모를 꾸몄으며[21], 경쟁 가문인 스베르케르 가문의 칼 스베르케르손과 동맹을 맺었을 가능성이 있다.[22]동맹군은 1160년 5월 승천 대축일에 웁살라 인근 외스트라 아로스(Östra Aros)에서 미사를 드리던 에리크를 기습했다. 에리크는 적의 접근을 보고받고 미사를 마친 후, 소수의 측근과 함께 마그누스 군대에 맞서 싸웠으나 수적 열세로 인해 패배했다. 그는 반군에 의해 말에서 끌어내려져 조롱과 칼에 찔린 뒤 참수되었다고 전해진다.[23] 다른 기록에는 웁살라에서 예배를 마치고 성으로 돌아가던 중 습격당했다고도 한다.[37]
에리크의 비극적인 최후에 대한 일부 세부 사항은 그의 유골에 대한 과학적 조사 결과와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의 아들 크누트 에릭손(Knut Eriksson)에게 보내진 교황 칙서는 그가 불특정 적들에 의해 살해되었음을 확인시켜 준다.[28] 1250년경의 ''베스트예탈라겐(Västgötalagen)'' 연대기는 그가 "불행한 시기에 너무 일찍 죽음을 맞이했다"고 기록하며, 그의 유골이 웁살라에 안치되어 있고 그곳에서 많은 기적을 행했다고 전한다.[24] 1172년 교황 알렉산데르 3세(Pope Alexander III)는 스웨덴 일부 사람들이 "사치와 연회에서 살해된 사람"을 숭배한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서한을 보냈는데, 일부 학자들은 이것이 승천 대축일 연회 중 살해된 에리크를 가리킬 수 있다고 추정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25]
에리크 9세 사후 마그누스가 마그누스 2세로 즉위했으나, 그 역시 왕위를 노리던 칼 스베르케르손에게 1년 만에 살해당하고 왕위를 빼앗겼다.
2. 4. 가족 관계
에리크 9세는 잉글랜드 왕국의 영향을 받은 선교사 예드바르드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전 스웨덴 국왕 블로트 스벤의 딸 세실리아였다. 그의 남동생은 훗날 칼마르 연합 시대의 왕이 되는 칼 8세의 조상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스베르켈 가문의 시조인 스베르케르 1세는 그의 외사촌이었다.그는 20대 후반 즈음에 덴마크의 에스트리센 가문 출신이자 스웨덴 국왕 잉에 1세의 손녀인 크리스티나 비에른스도테르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그의 왕위 계승 가능성을 높이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7]
크리스티나와의 사이에서 슬하에 4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름 | 설명 |
---|---|
크누트 에릭손 | 스웨덴의 국왕 (크누트 1세, 1167년 ~ 1196년 재위) |
필리프 에릭손 | 스웨덴 국왕 크누트 2세의 할아버지로 여겨짐. |
카타리나 에릭스도테르 | 스웨덴의 귀족 닐스 블레이크와 결혼. |
마르가레타 에릭스도테르 | 1185년 노르웨이 국왕 스베레 시구르손과 결혼하였으며, 1209년에 사망함. |
에리크 9세는 잉글랜드 왕국 출신의 웁살라 대주교인 헨리크와 함께 핀란드를 대상으로 제1차 스웨덴 십자군을 일으켰다. 이 십자군의 명목상 목표는 당시 이교도 지역이었던 핀란드를 정복하고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에리크 9세는 핀란드인들에게 개종을 권유했으나 거부당하자 무력으로 정복했으며, 이후 헨리크 대주교를 핀란드에 남겨 선교 활동을 하도록 했다고 전해진다.[11][12][13]
3. 제1차 스웨덴 십자군
그러나 이 "십자군"에 대한 직접적인 동시대 역사 기록은 부족하다. 1170년대 초의 교황 칙서나 1216년 교황 서한 등 간접적인 자료들을 통해 당시 스웨덴과 핀란드 사이에 군사적 충돌 및 기독교 전파 시도가 있었음을 추정할 뿐이다.[14][15] 일부에서는 이 원정이 실제로는 대규모 십자군이라기보다는 발트해를 통한 해상 약탈 수준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활동은 로마 교황에게 긍정적으로 평가받아 에리크 9세의 종교적 권위를 높이는 데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3. 1. 배경
1156년 크리스마스에 스웨덴 왕 스베르케르 1세가 암살되면서 스웨덴 왕위는 공석이 되었다. 이에 스베르케르 1세의 외사촌이자 지방 왕이었던 에리크가 지지를 받아 즉위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에리크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북유럽의 기독교화를 목표로 삼았다.
전설에 따르면, 에리크는 당시 스웨덴에 위협이 되던 이교도 지역인 핀란드에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고자 했다.[11] 이를 위해 그는 발트해 동쪽으로 제1차 스웨덴 십자군을 이끌었다고 전해진다. 전설 속에서 에리크는 핀란드인들에게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평화를 맺을 것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하자 무력으로 그들을 정복했다고 한다. 승리 후 에리크는 전투에서 죽은 이교도들의 영혼을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묘사된다.[12] 그는 잉글랜드 출신의 헨리 주교를 웁살라에서 데려와 핀란드에 남아 선교 활동을 하도록 설득했으며, 헨리 주교는 이후 순교자가 되었다.[13]
이 "십자군"에 대한 직접적인 역사적 증거는 부족하지만, 1170년대 초 교황 칙서에는 핀란드인들이 위협을 받을 때만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척하고, 위협이 사라지면 다시 신앙을 버리고 선교사들을 박해한다는 불만이 기록되어 있다.[14] 이는 스웨덴과 핀란드 사이에 이미 관계가 있었고, 스웨덴이 핀란드를 상대로 군사 활동을 벌였음을 시사한다. 또한 1216년 교황 서한은 에리크의 손자인 에리크 크누트손에게 그의 조상들이 이교도 땅에서 얻은 권리를 인정해주었는데,[15] 이는 에리크 9세와 그의 아들 크누트 에릭손이 핀란드에서 정복 활동을 벌였음을 암시할 수 있다. 만약 이 십자군이 실제로 있었다면, 대규모 원정보다는 해상 습격 형태였을 가능성이 높다.[16]
십자군 원정 중 에리크가 "푸른 하늘에 떠 있는 금색 십자가"를 보았다는 이야기는 스웨덴 국기의 기원으로 전해진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로마 교황에게도 알려져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고, 에리크는 교황이라는 강력한 지지자를 얻게 되었다. 이에 감사하며 아들 크누트를 로마에 사절로 보내기도 했다.
국내 정치 면에서 에리크는 중요한 법률 개혁을 단행했는데, 특히 기혼 여성도 유산 상속을 받을 수 있도록 하여 여성의 권리를 일부 신장시키는 공적을 남겼다.
3. 2. 십자군 원정
잉글랜드 왕국 출신의 웁살라 대주교인 헨리크와 함께 제1차 스웨덴 십자군을 일으켜 핀란드를 정복하고 기독교를 전파하고자 했다. 전설에 따르면, 에리크는 당시 이교도였으며 스웨덴에 해를 끼치던 핀족에게 기독교 신앙을 처음으로 전파하려 했으며,[11] 이를 위해 발트해 동쪽으로 제1차 스웨덴 십자군을 이끌었다고 전해진다. 전설 속에서 성 에리크는 핀란드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평화를 제안했으나, 그들이 거부하자 무력으로 정복하여 기독교인들의 피에 대한 복수를 했다고 한다. 승리 후 그는 핀족 영혼들의 손실을 슬퍼하며 기도했다고 전해진다.[12] 에리크의 명령 혹은 설득으로 헨리크 대주교는 핀란드에 남아 전도 활동을 했으며, 나중에 순교자가 되었다.[13] 이 원정 중에 "푸른 하늘에 떠 있는 금색 십자가"를 보았다는 전설은 스웨덴 국기의 기원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또한 에리크는 이 원정을 통해 북유럽의 기독교화를 공고히 하는 동시에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려 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 "십자군"에 대한 다른 역사적 자료의 직접적인 확인은 부족하다. 1170년대 초의 교황 칙서에는 핀족이 위협을 받을 때만 기독교 신앙을 약속하고 군대가 물러가면 신앙을 부인하며 설교자를 박해한다는 불만이 언급되어 있다.[14] 이는 스웨덴인들이 이미 핀족과 관계를 맺고 원정을 벌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또한 1216년의 교황 서한은 에리크의 손자 에리크 크누트손에게 그의 조상들이 정복한 이교도 땅에 대한 권리를 부여했는데,[15] 이는 성 에리크와 그의 아들 크누트 에릭손이 핀란드에서 정복 활동을 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만약 이 "십자군"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그것은 대규모 원정보다는 해상 습격의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16]
제1차 북방 십자군에서의 활동은 로마 교황에게 알려졌고, 교황은 에리크의 행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그에게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었다. 이에 감사한 에리크는 아들 크누트 에릭손을 로마에 사절로 보냈다.
3. 3. 결과
1156년 스베르케르 1세가 암살되자, 그의 외사촌이었던 에리크는 스웨덴 왕으로 추대되어 즉위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에리크는 왕위에 오른 후 북유럽 지역의 기독교 전파와 세력 확장을 위해 핀란드에 대한 제1차 스웨덴 십자군을 이끌었다. 이는 이교도 제압 목적도 포함했다.[11]
전설에 따르면, 에리크는 핀란드 원정 중 "푸른 하늘에 떠 있는 금색 십자가"를 목격했으며, 이는 훗날 스웨덴 국기의 모델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그는 핀란드인들에게 기독교 수용과 평화를 제안했으나 거부당하자 무력으로 정복했다고 한다. 정복 후에는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이교도들의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2] 에리크는 잉글랜드 출신의 헨리 주교를 설득하여 웁살라에서 핀란드로 보내 기독교 전파 활동을 계속하도록 했으며, 헨리 주교는 이후 순교했다.[13]
이 '십자군'에 대한 직접적인 동시대 기록은 부족하지만, 몇 가지 간접적인 증거가 존재한다. 1170년대 초의 교황 칙서에는 핀란드인들이 위협을 받을 때만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위협이 사라지면 다시 신앙을 버리고 선교사들을 박해한다는 불만이 기록되어 있어[14], 당시 스웨덴과 핀란드 사이에 이미 관계가 있었고 스웨덴이 군사적 원정을 감행했음을 시사한다. 또한 1216년 교황의 서한은 에리크의 손자인 에리크 크누트손에게 그의 조상들이 정복한 이교도 땅에 대한 권리를 인정했는데[15], 이는 에리크 9세와 그의 아들 크누트 에릭손이 핀란드에서 정복 활동을 벌였음을 암시할 수 있다. 다만, 이 원정의 실제 규모는 발트해를 통한 해상 습격 정도였을 가능성도 제기된다.[16]
에리크 9세의 이러한 활동은 로마 교황에게도 알려져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이를 통해 에리크는 교황이라는 강력한 지지자를 얻게 되었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들 크누트를 로마에 사절로 보내기도 했다.
국내 정책 면에서는 기혼 여성의 유산 상속을 가능하게 하는 등 스웨덴의 법률을 개혁하는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4. 에리크 법전
에리크 9세는 재위 기간 동안 스웨덴 고유의 법전인 《에리크 법전》(Erik den heliges lagsv)을 제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3][18] 전설에 따르면 그는 스웨덴 왕국의 법률을 성문화했으며,[13] 특히 기혼 여성의 유산 상속을 가능하게 하는 등 법률 개혁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12]
4. 1. 내용
에리크는 전설 속에서 강력한 자들에게 억압받는 약자를 지지하고, 왕국에서 무례하고 불공정한 자들을 추방하는 정의로운 통치자의 이상으로 묘사된다.[17] 그는 또한 왕국의 법을 성문화한 것으로 여겨지며,[13] 이는 '에리크 왕의 법'으로 알려지게 되었다.[18] 또한, 구 웁살라에 베네딕토회 수도원을 설립했다는 가설도 있는데, 이는 오덴세의 덴마크 수도원이나 브레타 수도원에서 유래했을 수 있다.[19] 만약 이 가설이 사실이라면, 그는 유럽 다른 지역처럼 교회를 지원하기 위해 당시에는 인기가 없었던 십일조 제도를 도입했을 가능성이 있다.전설은 에리크의 개인적인 경건함을 강조한다. 그는 많은 기도를 드리고 단식을 했으며, 고통받는 이들에게 연민을 보이고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었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육체 단련을 위해 말털 셔츠를 입었으며, 금욕을 지키기 위해 겨울에도 차가운 물통에서 목욕했다고 한다.[12] 이러한 내용은 성인(聖人) 전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묘사이지만, 그의 유해에 대한 과학적 조사 결과 담수어를 많이 섭취한 흔적이 발견되어 실제로 단식을 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20]
1156년 크리스마스에 스웨덴 왕 스베르케르 1세가 암살되면서 왕위가 비게 되었다. 이에 스베르케르 1세의 외사촌이자 지방의 유력자였던 에리크가 지지를 받아 즉위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에리크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북유럽의 기독교화를 공고히 하고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핀란드에 대한 제1차 북방 십자군을 이끌고 이교도 정벌에 나섰다. 이 원정 중에 '푸른 하늘에 떠 있는 금색 십자가'를 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이는 훗날 스웨덴 국기의 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제1차 북방 십자군에서의 활동은 로마 교황에게도 알려졌고, 교황은 에리크의 공적을 높이 평가했다. 이를 통해 에리크는 교황이라는 강력한 후원자를 얻게 되었다. 이에 감사하며 에리크는 아들 크누트를 로마에 사절로 보냈다. 국내 정치에서는 기혼 여성의 유산 상속을 허용하는 등 스웨덴 법률 개혁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4. 2. 의의
에리크는 전설 속에서 강자에게 억압받는 약자를 지지하고, 왕국에서 무례하고 불공정한 자들을 추방하는 정의로운 통치자의 이상적인 모습으로 묘사된다.[17] 그는 왕국의 법률을 성문화하여 '에리크 왕의 법'으로 알려지게 했으며,[13][18] 기혼 여성의 유산 상속을 가능하게 하는 등 국내법 개혁에도 힘썼다.[12]종교적인 측면에서도 여러 업적을 남겼다. 구 웁살라에 오덴세의 덴마크 수도원이나 브레타 수도원에서 유래한 베네딕토회 수도회를 설립했다는 가설이 있으며,[19] 만약 사실이라면 유럽 다른 지역처럼 교회를 지원하기 위한 십일조 제도를 도입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19]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북유럽의 기독교화를 위해 핀란드의 이교도를 제압하고자 제1차 북방 십자군을 이끌었으며, 이를 통해 세력 확장을 도모한 것으로 여겨진다.[12] 이 원정에서의 활약은 로마 교황에게도 알려져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고, 에리크는 교황이라는 든든한 후원자를 얻게 되었다. 이에 감사하는 의미로 아들 크누트를 로마에 사절로 보내기도 했다.[12]
에리크의 개인적인 경건함 또한 전설을 통해 강조된다. "우리의 이 성스러운 왕은 많은 경건한 기도와 회의를 진행했으며, 단식도 했다. 그는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보였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었으며, 육체를 단련할 때 사용했던 말털 셔츠를 입었다... 그가 성적인 부분에 있는 그의 은밀한 적과 어떻게 대처했는지는, 그가 단식이나 종교 행사에서 독신을 지켰을 때, 겨울에도 차가운 물통에서 은밀히 목욕을 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으며, 그렇게 차가운 물로 용납할 수 없는 체온을 몰아냈다."[12] 이는 성인전의 전형적인 묘사로 볼 수도 있지만, 그의 유해에 대한 과학적 조사 결과 담수어를 많이 섭취한 흔적이 발견되어 실제로 단식을 지켰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20]
한편, 제1차 북방 십자군 원정 중에 목격했다는 "푸른 하늘에 떠 있는 금색 십자가"는 훗날 스웨덴 국기의 모델이 되었다는 설이 전해진다.[12]
5. 성인 추대와 숭배
에리크 9세는 재위 기간 동안 스웨덴 고유의 법전인 《에리크 법전》을 제정하고 기독교 신앙 전파에 기여하여 "성왕"(聖王)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는 스웨덴의 수도인 스톡홀름의 수호성인으로 여겨진다.
1160년 암살된 후, 그는 올드 웁살라 교회에 묻혔다. 그의 아들인 크누트는 아버지를 순교자로 숭배하도록 장려했으며,[28] 에리크 9세의 머리가 잘린 곳에서 샘이 솟아났다는 기적 이야기도 전해진다. 1273년 그의 유물과 왕관은 웁살라 대성당으로 옮겨져 안치되었으며, 이는 그에 대한 종교적 추종이 깊어졌음을 보여준다.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와 로마 가톨릭교회는 5월 18일을 에리크 9세의 기념일로 지킨다.[29][30] 스웨덴 전통에는 그의 축일에 풍년을 기원하며 웁살라 대성당에서 올드 웁살라까지 행렬하는 관습이 있었다. 스톡홀름의 가톨릭 성 에릭 대성당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5. 1. 성인 추대
에리크 9세는 재위 기간 동안 스웨덴 고유의 법전인 《에리크 법전》을 제정하고, 덴마크 오덴세 출신 베네딕도회 신자들에게 웁살라 구 시가지에 수도원을 건립하도록 지시하는 등 유럽 전역에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는 데 기여했다. 이러한 업적으로 인해 "성왕"(聖王)이라는 별칭을 얻었으며, 스웨덴의 수도인 스톡홀름의 수호성인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에리크 9세에 대한 정보를 담은 동시대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그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아들 크누트 에릭손의 통치 기간 중 편지에 나타난다. 이 편지에서 에릭은 "스웨덴의 왕"으로 언급되었을 뿐이다. 그의 삶에 대한 유일한 완전한 기록은 13세기 후반에 작성된 성인전인데, 이 기록의 역사적 사실 여부는 스웨덴 역사가들 사이에서 많은 논의가 이루어져 왔다.[7]
성인전 기록에 따르면 에리크는 왕족 출신이며 왕위 공백 시 스웨덴의 왕으로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고 한다. 또한 10년 동안 통치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이를 바탕으로 그의 통치 시작 시점을 대략 1150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1132년경 왕위에 오른 스베르케르 1세의 경쟁자였을 수 있다. 어쨌든 1156년 이후 대부분의 지방에서 에릭을 왕으로 인정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부계는 불분명하지만, 덴마크 공주이자 잉에 1세 왕의 손녀인 크리스티나 비외른스도테르와 결혼하여 왕위에 대한 정통성을 강화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 그의 영토에는 스베르케르의 아들 칼 스베르케르손이 1150년대 후반에 통치했던 외스테르예틀란드는 포함되지 않았다.[7]
전설에 따르면 에리크는 그의 왕국에서 기독교를 공고히 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전해진다.[8] 그러나 그의 통치를 언급하는 유일한 신뢰할 만한 자료인 1200년경의 시토회 연대기는 에릭 전설에서 보이는 친교회적인 정책과는 상반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연대기는 에릭 왕과 크리스티나 왕비가 베스테르예틀란드의 바른헴 수도원 수도사들을 괴롭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부 수도사들은 이로 인해 덴마크로 가서 1158년 비츠쾰 수도원을 세웠다. 하지만 이후 에릭과 크리스티나는 입장을 바꿔 알바스트라 수도원의 게르하르트 수도원장의 지휘 아래 바른헴 수도원을 재건하도록 허용했다.[9] 또한 13세기 초 자료에 따르면 그는 스몰란드의 뉘달라 수도원에 기증을 하기도 했다.[10]
5. 2. 숭배

암살당한 에리크 9세는 그의 이교도 선조들의 고분 주위에 재건된 올드 웁살라 교회에 묻혔다. 약 1167년, 그의 아들 크누트 에릭손이 스베르케르 왕조를 몰아내고 권력을 잡기 시작하면서 에리크의 시신을 성유물로 안치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이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1220년경까지는 나타나지 않는다. 크누트 에릭손은 1198년의 발렌투나 달력에서도 확인되듯이, 자신의 아버지를 순교자로 숭배하도록 장려했다.[28] 그의 삶에 대한 사실과 허구는 떼려야 뗄 수 없이 뒤섞여 있으며, 왕의 머리가 잘린 후 떨어진 곳에서 샘이 솟아났다는 기적 이야기도 포함된다. 1273년, 크누트가 스웨덴을 통합한 지 약 1세기 후, 에리크의 유물과 왕관은 순교지에 세워진 현재의 웁살라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이러한 유물 이전은 그에 대한 종교적 추종이 깊어지고 확장되었음을 보여준다.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는 5월 18일을 "스웨덴의 왕, 순교자 에릭, 1160년"으로 기념하며,[29]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도 같은 날 그를 기념한다.[30] 스웨덴 전통에는 그의 축일에 웁살라 대성당에서 올드 웁살라까지 행렬을 하며 풍년을 기원하는 관습이 있었다. 스톡홀름에 있는 가톨릭 성 에릭 대성당은 에리크 왕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웁살라 대성당( Uppsala domkyrka|웁살라 돔쉬르카sv )은 계속해서 에리크 9세의 성유물이 담긴 성유물함(chasse)을 전시하고 있다. 중세 시대 동안, 스웨덴의 새로운 국왕은 이 성유물함에 손을 얹고 취임 선서를 했다.[31] 원래의 중세 시대 성유물함은 요한 3세에 의해 녹여졌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1570년 슈체친 조약에 의해 요구된 엘브스보리 몸값을 지불하고 러시아와의 전쟁에 자금을 대기 위해서였다. 현재의 르네상스 양식 성유물함은 1570년대에 요한 3세의 폴란드 가톨릭 왕비였던 카타리나 야기에우워가 그의 유해를 담기 위해 의뢰한 것이다.[32]
2014년 4월, 스웨덴 연구자들은 내용물을 조사하기 위해 현재의 성유물함을 열었고, 대성당은 법의학적 조사 기간 동안 유골함을 대중에게 전시했다.[35][33] 2016년 3월 19일, 연구자들은 에리크의 유해에 그의 죽음에 대한 전설과 일치하는 부상이 있었다고 발표했다. 성유물함에 있는 24개의 뼈 중 23개는 동일한 35세에서 40세 사이의 남성에게서 나왔다(다른 뼈 하나인 정강이뼈는 같은 시대의 다른 남성에게서 나왔다).[35] 사망자는 키가 약 171cm의 건장한 체격의 남성이었으며,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고 잘 훈련받은 것으로 추정되었다.[34] 뼈에는 핀란드 십자군 참전 등 평생의 전투와 일치하는 치유된 상처뿐만 아니라, 사망 시점에 여러 번 등에 찔린 상처가 있었다.[35] 목의 척추에는 참수 외에 전투 중 호버크가 목을 보호했을 경우에는 입기 어려운 추가적인 베인 상처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전투 상황 밖에서 상처를 입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35]
5. 3. 현대적 의의
암살당한 에리크 왕은 이교도 선조들의 고분 주위에 재건된 올드 웁살라 교회에 묻혔다. 약 1167년, 그의 아들 크누트가 권력을 잡기 시작하면서 에리크의 시신을 성인으로 안치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이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1220년경까지 나타나지 않는다. 크누트는 1198년의 발렌투나 달력에서 볼 수 있듯이 자신의 아버지를 순교자로 숭배하도록 장려했다.[28] 에리크 9세의 삶에 대한 사실과 허구는 분리하기 어렵게 섞여 있으며, 왕의 머리가 잘린 후 그 자리에서 샘이 솟아났다는 기적 이야기도 전해진다. 1273년, 크누트가 스웨덴을 통합한 지 약 한 세기 후, 에리크의 유물과 왕관은 그가 순교한 자리에 세워진 현재의 웁살라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이러한 유물 이전은 에리크에 대한 종교적 추종이 깊어졌음을 보여준다.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는 5월 18일을 "스웨덴의 왕, 순교자 에릭, 1160년"으로 기념하며,[29]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도 같은 날인 5월 18일에 그를 기념한다.[30] 스웨덴의 전통에는 그의 축일에 풍년을 기원하며 대성당에서 올드 웁살라까지 행렬하는 의식이 포함되어 있었다. 가톨릭 성 에릭 대성당, 스톡홀름은 에리크 왕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에리크 9세는 스웨덴과 수도 스톡홀름의 수호 성인이며, 왕관을 쓴 그의 머리는 스톡홀름 시의 문장에도 묘사되어 있다.
성 에리크는 예술 작품에서 종종 웁살라의 헨리 주교와 함께 미사 중에 살해당하는 젊은 왕으로 그려진다. 웁살라 대성당에는 에리크와 웁살라의 헨리를 묘사한 중세 후기의 그림들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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マグヌスはインゲ1世の曾孫で、スウェーデンの王位請求者だった。さらにこの暗殺には、先王スヴェルケル1世の子カール・スヴェルケルソンも加担してい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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