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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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를(Jarl)은 고대 노르드어로 지도자를 의미하는 칭호로, 특히 스칸디나비아 지역에서 사용되었다. 노르웨이에서는 국왕 다음가는 지위였으며, 국왕이 미성년이거나 질병으로 통치할 수 없을 때 섭정 역할을 하거나, 왕위 찬탈 시도를 막기 위한 회유책으로 활용되었다. 스웨덴, 덴마크, 아이슬란드, 잉글랜드에서도 야를 칭호가 사용되었으며, 덴마크에서는 공작 칭호로 대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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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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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를 (Jarl) | |
![]() | |
개요 | |
유형 | 귀족, 통치자 |
문화적 기원 | 북유럽 |
존속 기간 | 바이킹 시대 ~ 중세 |
지역 | 스칸디나비아, 잉글랜드 (데인로), 노르만디 |
역사적 역할 | |
역할 | 군사 지도자 영토 통치자 왕의 대리인 |
사회적 지위 | |
계급 | 귀족 |
관련 작위 | 왕 헤르시르 백작 |
어원 및 의미 | |
어원 | 고대 노르드어 "jarl" |
의미 | 족장 귀족 통치자 |
지역별 변형 | |
노르웨이어 | jarl |
스웨덴어 | jarl |
덴마크어 | jarl |
아이슬란드어 | jarl |
같이 보기 | |
관련 항목 | 헤르시르 콘눙가르 드뢰트세테 |
2. 어원
"야를"이라는 용어는 헤룰리의 이름과 비교되었으며, 룬 문자 "에릴라즈"와도 관련이 있다.[1] 원시 노르드어 "에릴" 또는 후기 고대 노르드어 jarl|야를non은 지도자의 지위를 나타내게 되었다.
2. 1. 어원과 룬 문자
"야를"이라는 용어는 헤룰리의 이름과 비교되었으며, 룬 문자 "에릴라즈"와도 관련이 있다.[1] 원시 노르드어 "에릴" 또는 후기 고대 노르드어 jarl|야를non은 지도자의 지위를 나타내게 되었다.3. 노르웨이
후기 중세 노르웨이에서 야를(jarl)은 국왕 다음 가는 높은 지위였다. 노르웨이 본토에는 보통 한 번에 한 명의 야를만 있었고, 아예 없는 경우도 있었다. 노르웨이 속령 오크니 통치자는 야를 칭호를 가졌으며, 1261년 아이슬란드가 노르웨이의 종주권을 인정하자 국왕의 고위 대표로서 야를이 파견되기도 했다.
1237년, 야를 스쿨레 보르드손에게 공작(hertug) 지위가 주어지면서 변화가 생겼다. 이 칭호는 노르웨이에서 처음 사용되었으며, 야를이 더 이상 국왕 다음으로 가장 높은 지위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대륙 유럽의 새로운 귀족 칭호가 도입되어 오래된 노르드 칭호를 대체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노르웨이 본토의 마지막 야를은 1295년에 임명되었다.[1]
3. 1. 노르웨이 야를의 역할
노르웨이에서 야를(jarl) 칭호는 국왕 다음으로 가장 높은 지위였다. 노르웨이 본토에는 보통 한 번에 한 명 이상의 야를이 없었으며, 때로는 아예 없기도 했다. 노르웨이의 속령이었던 오크니의 통치자는 야를 칭호를 가졌고, 아이슬란드가 1261년 노르웨이의 종주권을 인정하자 국왕의 고위 대표로서 야를이 그곳에 파견되기도 했다.[1]노르웨이 본토에서 야를 칭호는 일반적으로 다음 두 가지 목적으로 사용되었다.[1]
- 국왕이 미성년자이거나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을 때, 사실상의 통치자를 임명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구토름 왕이 미성년이었던 1204년에는 호콘 갈렌이, 잉게 보르손 왕이 질병을 앓았던 1217년에는 스쿨레 보르드손이 야를로서 섭정을 맡았다.[1]
- 왕위를 찬탈하려는 자에게 국왕 칭호를 주지 않고 회유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스베레 왕의 형제 에이리크가 이에 해당한다.[1]
1237년, 야를이었던 스쿨레 보르드손에게 공작("hertug") 지위가 주어졌다. 이는 노르웨이에서 처음 사용된 칭호였으며, 야를 칭호가 더 이상 국왕 다음으로 가장 높은 지위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이는 오래된 노르드 칭호를 대체할 대륙 유럽의 새로운 귀족 칭호 도입을 알렸다. 노르웨이 본토의 마지막 야를은 1295년에 임명되었다.[1]
3. 2. 주요 노르웨이 야를
- 스쿨레 토스테손: 12세기에 헤베뢰 교회 근처에서 농민들에게 살해당했다.
- 에를링 스카케: 마그누스 5세 국왕의 아버지이다.
- 알브 에를링손: 사르스보르의 백작이자 보르가르시셀의 총독이었다.
- 호콘 갈렌: 구토름 국왕의 미성년 기간(1204년)에 섭정이었다.
- 오크니의 야를
- 뫼레의 야를
- 라데의 야를
3. 3. 공작 칭호의 등장
1237년, 야를 스쿨레 보르드손에게 공작(hertug)의 지위가 주어졌다. 이는 노르웨이에서 처음 사용된 칭호였으며, 야를의 칭호가 더 이상 국왕 다음으로 가장 높은 지위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이는 오래된 노르드 칭호를 대체할 대륙 유럽의 새로운 귀족 칭호 도입을 알렸다. 노르웨이 본토의 마지막 야를은 1295년에 임명되었다.4. 스웨덴
스웨덴에서 야를 칭호의 사용은 노르웨이와 유사했다. 12세기와 13세기부터 알려진 주요 야를로는 비르예르 브로사, 욘 야를, 폴케 비르예르손, 칼 데프, 울프 파세 등이 있으며, 이들 중 가장 강력했고 마지막 야를은 비르예르 야를이었다.
4. 1. 주요 스웨덴 야를
비르예르 브로사, 욘 야를, 폴케 비르예르손, 칼 데프, 울프 파세, 비르예르 야를은 12세기와 13세기부터 야를로 알려진 인물들이다.5. 덴마크
덴마크에서 야를(jarlda)은 국왕의 대리인이었다. 크누트 대왕의 대리인이었던 울프 야를(1026년 사망)이 그 예시이다.[1]
5. 1. 덴마크 야를의 역할
크누트 대왕의 대리인이었던 울프 야를(1026년 사망)의 예시처럼, 덴마크에서 야를은 국왕의 대리 역할을 수행했다.[1] 남부 유틀란트의 마지막 야를인 크누트 라바르(1131년 사망)는 최초의 덴마크 공작으로, "헤르투그 아프 슐레스비히"(슐레스비히 공작)라는 칭호를 받았다.[1] 이로써 공작(hertug)이라는 칭호가 옛 노르드 칭호인 야를을 대체했다.[1]5. 2. 공작 칭호로의 전환
크누트 라바르(1131년 사망)는 남부 유틀란트의 마지막 야를이자 최초의 덴마크 공작으로, "슐레스비히 공작" 칭호를 받았다.[1] 이로써 공작(hertug) 칭호가 옛 노르드 칭호인 야를을 대체하게 되었다.[1]6. 아이슬란드
아이슬란드에서 야를 칭호를 받은 유일한 사람은 기수르 토르발드손이다. 그는 1258년 노르웨이 국왕 호콘 4세에 의해 아이슬란드 야를로 임명되었으며, 스톨룬 시대에 아이슬란드를 노르웨이 왕의 통치 하에 두려는 그의 노력을 돕기 위함이었다.[1]
6. 1. 기수르 토르발드손
1258년 노르웨이 국왕 호콘 4세는 스톨룬 시대의 기수르 토르발드손에게 아이슬란드를 노르웨이 왕의 통치 하에 두도록 하는 노력을 돕게 하기 위해 야를 칭호를 수여했다. 기수르 토르발드손은 1268년 사망할 때까지 이 칭호를 유지했다.7. 잉글랜드
크누트 대왕은 1016년 잉글랜드 국왕이 된 후 왕국을 스칸디나비아식으로 재편하면서 4개의 백작령으로 나누었다. 이때 각 백작령의 통치자에게 '야를'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7. 1. 잉글랜드의 야를 제도
크누트는 1016년 잉글랜드 국왕이 된 후, 왕국을 스칸디나비아식으로 재편하였다. 왕국을 4개의 반독립 백작령으로 나누었는데, 노섬브리아는 노르웨이인 라데의 에리크에게, 동앵글리아 왕국은 장신 토르켈에게, 머시아는 에드릭 스트레오나에게 맡겼다. 크누트는 웨섹스를 자신이 직접 통치했다.참조
[1]
룬 문자
Järsberg Runestone
6세기
[2]
뉴스
Hver var Gissur jarl Þorvaldsson og hvaða hlutverki gegndi hann á Sturlungaöld?
https://www.visindav[...]
University of Iceland
2014-02-12
[3]
서적
Viking Age Iceland
Penguin Books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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