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크 1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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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리크 10세는 1208년 레나 전투에서 스베르케르 2세를 물리치고 스웨덴 국왕으로 즉위했다. 크누트 1세의 아들로, 1210년 덴마크의 리키사와 결혼하여 덴마크와의 관계를 회복했으며, 같은 해 게스틸렌 전투에서 스베르케르 2세를 다시 물리쳤다. 1210년 웁살라 대주교에 의해 대관식을 치렀으며, 1216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로부터 통치를 인정받았다. 에리크 10세는 1216년 비싱쇠 섬에서 사망했으며, 요한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의 자녀로는 잉에보리 에릭스도테르와 에리크 11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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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크 10세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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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 기간 | 1208년 – 1216년 |
계승 | 스웨덴 국왕 |
이전 통치자 | 스베르케르 칼손 |
다음 통치자 | 요한 스베르케르손 |
왕가 | 에리크 가 |
아버지 | 크누트 에릭손 |
어머니 | 아마도 세실리아 요한스도테르 |
배우자 | 리키사 아브 단마르크 |
자녀 | 소피아 에리크스도테르 마르타 에리크스도테르 잉에보리 에리크스도테르 아브 스웨덴 마리아나 에리크스도테르 에리크 에릭손 |
출생일 | 1180년경 |
사망일 | 1216년 4월 10일 |
사망 장소 | 비싱쇠 섬의 네스 성 |
매장 장소 | 바른헴 수도원 교회 |
이름 | |
고대 노르드어 | 에이리크르 크누트손(Eiríkr Knútsson) |
별칭 | 에리크 솜 외베를레브데(Erik som överlevde) |
2. 생애
크누트 1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세실리아 요한스도테르(Cecilia Johansdotter)로 추정된다.[7] 1208년 레나 전투에서 덴마크의 지원을 받은 스베르케르 2세를 물리치고 스웨덴 국왕으로 즉위했다.[7]
=== 왕위 쟁탈전 ===
크누트 1세의 아들로 태어난 에리크 10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1180년경 에릭스베리 왕실 영지에서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1195년 또는 1196년에 크누트 1세가 사망했을 때, 그의 아들들은 모두 어렸지만 유아는 아니었다.[2] 그들 중 한 명은 크누트 1세가 살아있을 때 왕국의 귀족들에게 왕위 계승자로 추대되었지만, 에리크였는지는 알 수 없다.[15] 크누트 1세의 경계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들들은 경쟁 왕조인 스베르케르 가문의 수장인 스베르케르 칼손에게 밀려났다. 이는 강력한 제2인자인 야를 비르예르 브로사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왕위 계승은 유혈 사태 없이 이루어졌다.
크누트 에릭손의 아들들은 스웨덴 왕실에서 계속 살았으며 스베르케르 왕에 의해 양육되었다. 몇 년 후, 비르예르 브로사가 사망한 후, 형제들과 그 지지자들은 왕위를 요구했다. 스베르케르 왕이 이에 동의하지 않자, 에리크와 그의 형제들은 노르웨이로 도망쳐 1204-05년 겨울을 그곳에서 보냈다. 에리크와 그의 형제들은 야를 호콘 갈렌이 그들의 사촌과 결혼했기 때문에 노르웨이의 비르케베이너 파와 친족 관계를 맺고 있었고, 그들의 지원을 구했다. 1205년, 형제들은 노르웨이의 지원을 받아 스웨덴으로 돌아왔지만, 티베덴에서 일어난 엘가로스 전투에서 스베르케르 왕에게 패배했고, 에리크의 세 형제 모두 사망했다. 에리크는 살아남아 다시 노르웨이로 도망쳐 3년 동안 머물렀다.[3][16]
1208년 그는 비르케베이너의 지원을 받아 스웨덴으로 돌아왔다. 스베르케르는 덴마크의 발데마르 세이르 왕으로부터 군대를 지원받았다. 1208년 1월, 에리크는 레나 전투에서 스베르케르를 물리치고 덴마크 사령관 에베 수네센을 죽였으며, 그의 군대는 큰 손실을 입었다.[4] 민간 전승에서는 이 사건을 스웨덴과 덴마크 간의 전투로 묘사하며, "덴마크인 두 명이 스웨덴인 한 명을 향해 도망갔고, 그들의 등은 스웨덴 사람들에게 심하게 얻어맞았다"고 한다.[5] 덴마크 민요는 "영주들의 말은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오고, 안장은 비어 있다"고 묘사한다.[6]
=== 권력 강화 및 통치 ===
에리크 10세는 즉위 후, 교회의 지원 없이도 단기간에 추종자들을 규합하여 덴마크 군대를 격파하는 등 놀라운 업적을 이루었다.[11] 이후 덴마크 국왕 및 가톨릭 교회와 빠르게 화해하였다.[11] 1210년에는 덴마크의 발데마르 1세 국왕의 딸인 리키사와 결혼하여 덴마크와의 관계를 회복했다.[3][12] 이는 전통적으로 스베르케르 왕조를 지지했던 덴마크가 노르웨이의 지원을 받은 에리크 왕조에 대항하는 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것이었다.
1210년 7월 게스틸렌 전투에서 스베르케르 2세가 다시 한번 왕위를 되찾기 위해 스웨덴을 침공했지만, 에리크 10세는 이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스베르케르 2세는 폴케 야를과 그의 당에 의해 살해되었고, 폴케 또한 많은 폴쿵들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9] 전투 장소는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9] 에리크 국왕의 군대가 싸운 깃발은 비옐보 가문 출신의 법관 에스킬 마그누손에 의해 스카라에 보존되었다.[10]
1210년 11월, 에리크 10세는 전 적이었던 발레리우스 대주교에 의해 대관식을 치른 최초의 스웨덴 국왕이 되었다.[3][12]
에리크 10세의 치세에 대해서는 기록된 문서가 거의 없어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3] 그러나 1216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에리크 10세의 통치를 그의 왕국뿐만 아니라 그가 미래에 정복할 수 있는 모든 이교도 영토까지 확인했다.[3] 이는 에리크 왕이 발트해 건너편의 비기독교 지역으로의 군사적 확장을 계획했음을 시사한다. 스웨덴 역사학에서 에리크 10세는 좋은 ''årkonung''(풍작의 왕)이라고 불리며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3]
=== 죽음과 계승 ===
1216년 비싱쇠섬의 네스 성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시신은 바른헴 수도원에 안치되었다.[13] 그의 왕위는 스베르케르가 출신의 요한 1세가 승계받았다.[13] 그의 자녀 중에는 스웨덴의 귀족인 비르예르 얄의 아내인 잉에보리 에릭스도테르(Ingeborg Eriksdotter), 스웨덴의 에리크 11세 국왕인 에리크 에릭손(Erik Eriksson)이 있다.
2. 1. 왕위 쟁탈전
크누트 1세의 아들로 태어난 에리크 10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1180년경 에릭스베리 왕실 영지에서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1195년 또는 1196년에 크누트 1세가 사망했을 때, 그의 아들들은 모두 어렸지만 유아는 아니었다.[2] 그들 중 한 명은 크누트 1세가 살아있을 때 왕국의 귀족들에게 왕위 계승자로 추대되었지만, 에리크였는지는 알 수 없다.[15] 크누트 1세의 경계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들들은 경쟁 왕조인 스베르케르 가문의 수장인 스베르케르 칼손에게 밀려났다. 이는 강력한 제2인자인 야를 비르예르 브로사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왕위 계승은 유혈 사태 없이 이루어졌다.크누트 에릭손의 아들들은 스웨덴 왕실에서 계속 살았으며 스베르케르 왕에 의해 양육되었다. 몇 년 후, 비르예르 브로사가 사망한 후, 형제들과 그 지지자들은 왕위를 요구했다. 스베르케르 왕이 이에 동의하지 않자, 에리크와 그의 형제들은 노르웨이로 도망쳐 1204-05년 겨울을 그곳에서 보냈다. 에리크와 그의 형제들은 야를 호콘 갈렌이 그들의 사촌과 결혼했기 때문에 노르웨이의 비르케베이너 파와 친족 관계를 맺고 있었고, 그들의 지원을 구했다. 1205년, 형제들은 노르웨이의 지원을 받아 스웨덴으로 돌아왔지만, 티베덴에서 일어난 엘가로스 전투에서 스베르케르 왕에게 패배했고, 에리크의 세 형제 모두 사망했다. 에리크는 살아남아 다시 노르웨이로 도망쳐 3년 동안 머물렀다.[3][16]
1208년 그는 비르케베이너의 지원을 받아 스웨덴으로 돌아왔다. 스베르케르는 덴마크의 발데마르 세이르 왕으로부터 군대를 지원받았다. 1208년 1월, 에리크는 레나 전투에서 스베르케르를 물리치고 덴마크 사령관 에베 수네센을 죽였으며, 그의 군대는 큰 손실을 입었다.[4] 민간 전승에서는 이 사건을 스웨덴과 덴마크 간의 전투로 묘사하며, "덴마크인 두 명이 스웨덴인 한 명을 향해 도망갔고, 그들의 등은 스웨덴 사람들에게 심하게 얻어맞았다"고 한다.[5] 덴마크 민요는 "영주들의 말은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오고, 안장은 비어 있다"고 묘사한다.[6]
2. 2. 권력 강화 및 통치
에리크 10세는 크누트 1세의 아들로, 어머니는 세실리아 요한스도테르(Cecilia Johansdotter)로 추정된다.[7] 1208년 레나 전투에서 덴마크의 지원을 받은 스베르케르 2세를 물리치고 스웨덴 국왕으로 즉위했다.[7]에리크 10세는 즉위 후, 교회의 지원 없이도 단기간에 추종자들을 규합하여 덴마크 군대를 격파하는 등 놀라운 업적을 이루었다.[11] 이후 덴마크 국왕 및 가톨릭 교회와 빠르게 화해하였다.[11] 1210년에는 덴마크의 발데마르 1세 국왕의 딸인 리키사와 결혼하여 덴마크와의 관계를 회복했다.[3][12] 이는 전통적으로 스베르케르 왕조를 지지했던 덴마크가 노르웨이의 지원을 받은 에리크 왕조에 대항하는 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것이었다.
1210년 7월 게스틸렌 전투에서 스베르케르 2세가 다시 한번 왕위를 되찾기 위해 스웨덴을 침공했지만, 에리크 10세는 이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스베르케르 2세는 폴케 야를과 그의 당에 의해 살해되었고, 폴케 또한 많은 폴쿵들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9] 전투 장소는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9] 에리크 국왕의 군대가 싸운 깃발은 비옐보 가문 출신의 법관 에스킬 마그누손에 의해 스카라에 보존되었다.[10]
1210년 11월, 에리크 10세는 전 적이었던 발레리우스 대주교에 의해 대관식을 치른 최초의 스웨덴 국왕이 되었다.[3][12]
에리크 10세의 치세에 대해서는 기록된 문서가 거의 없어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3] 그러나 1216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에리크 10세의 통치를 그의 왕국뿐만 아니라 그가 미래에 정복할 수 있는 모든 이교도 영토까지 확인했다.[3] 이는 에리크 왕이 발트해 건너편의 비기독교 지역으로의 군사적 확장을 계획했음을 시사한다. 스웨덴 역사학에서 에리크 10세는 좋은 ''årkonung''(풍작의 왕)이라고 불리며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3]
에리크 10세는 1216년 비싱쇠 섬의 네스 성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시신은 바른헴 수도원에 안치되었다.[13] 그의 왕위는 스베르케르가 출신의 요한 1세가 승계받았다.[13]
2. 3. 죽음과 계승
크누트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가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세실리아 요한스도테르(Cecilia Johansdotter)로 추정된다.1208년 1월 레나 전투에서 덴마크의 지원을 받은 스베르케르 2세 국왕을 물리치고 스웨덴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1210년에는 덴마크의 발데마르 1세 국왕의 딸인 리헤자(Richeza)와 결혼했다. 그의 자녀 중에는 스웨덴의 귀족인 비르예르 얄의 아내인 잉에보리 에릭스도테르(Ingeborg Eriksdotter), 스웨덴의 에리크 11세 국왕인 에리크 에릭손(Erik Eriksson)이 있다.
1216년 비싱쇠섬의 네스 성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시신은 바른헴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그의 왕위는 스베르케르가 출신의 요한 스베르케르손이 승계받았다.
3. 자녀
- 소피아(1241년 사망)는 로스토크 영주 하인리히 볼빈 3세(메클렌부르크 가문)와 결혼했다.[14]
- 잉에보리(1212년경 - 1254년)는 비르예르 야를과 결혼하여 발데마르 1세 및 마그누스 3세를 낳았다.[14]
- 마리아나는 포메라니아 공작바르님 1세와 결혼한 것으로 추정된다.[14]
- 마르타는 원수 닐스 시크텐손 스파레와 결혼한 것으로 추정된다.[14]
- 에릭 11세(1216년 - 1250년)는 스웨덴 국왕이었다.[14]
참조
[1]
문서
Referring to Erik Knutsson as King Eric X is a later invention, counting backwards from [[Eric XIV of Sweden|Eric XIV]] (1560–68). He and his brother [[Charles IX of Sweden|Charles IX]] (1604–1611) adopted numerals according to a [[Historia de omnibus Gothorum Sueonumque regibus|fictitious history of Sweden]]. The number of Swedish monarchs named Eric before Eric XIV (at least seven) is unknown, going back into [[prehistory]], and none of them used numerals.
[2]
문서
Gillingstam, "Knut Eriksson".
[3]
문서
Bolin, "Erik Knutsson".
[4]
간행물
Sverige i utländsk annalistik 900–1400
[5]
간행물
Sveriges sköna litteratur
[6]
간행물
Gestilren 1210
[7]
문서
Gillingstam, "Folkungaätten".
[8]
간행물
Från svensk medeltid
[9]
간행물
Gestilren 1210
[10]
서적
Svenska folkets historia
Hörbergska Boktryckeriet
1852
[11]
서적
Sveriges historia; medeltiden
[12]
서적
Coronations: Medieval and Early Modern Monarchic Ritual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0
[13]
웹사이트
Erik Eriksson
https://sok.riksarki[...]
2024-06-22
[14]
간행물
Utomnordiskt och nordiskt i de äldsta svenska dynastiska förbindelserna
[15]
문서
Gillingstam, "Knut Eriksson".
[16]
문서
Bolin, "Erik Knutsson".
[17]
문서
Gillingstam, "Folkungaät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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