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발트 아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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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발트 아멘데는 리보니아 출신의 소수 민족 권익 옹호가이자 작가이다. 그는 1925년 유럽 민족 회의(ENK)의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어 소수 민족의 권리를 옹호했으며, 《러시아는 굶주려야 하는가? 소련의 인민과 운명》을 통해 홀로도모르를 포함한 소련 내 소수 민족의 억압 실태를 고발했다. 1936년 베이징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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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에발트 아멘데는 리보니아의 부유하고 영향력 있으며 오랜 역사를 가진 상인 가문 출신이었다. 패르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10년부터 리가의 폴리테크닉에서 상업을, 쾰른과 튀빙겐에서 경제학을 공부했으며, 킬의 크리스티안 알브레히트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남부 러시아의 도시들을 위한 급식 사업에 종사했다. 역사적인 리보니아 지역이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로 분할된 후, 아멘데는 국제 정치에서 소수 민족을 위한 캠페인을 시작했다. 1919년부터 1922년까지 그는 "Rigasche Rundschau" (리가 리뷰)에서 편집자 및 출판 이사로 일했으며, 그곳에서 또 다른 유명한 소수 민족 옹호자인 파울 시만과 협력했다. 유럽 독일 소수 민족 협회의 공동 설립자로서 아멘데는 1925년 "에스토니아 소수 민족의 문화 자치법" 제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같은 해에 여러 국가의 소수 민족 대표들이 그를 유럽 민족 회의(ENK)의 사무총장으로 선출했다.
그는 소수 민족의 권리를 강력하게 옹호했으며 소수 민족 조직(독일계 민족뿐만 아니라)을 대표하는 상위 조직을 설립했다. 아멘데는 민족 문제의 해결이 영토 회복주의를 통해서는 실현 가능하지 않다고 가정하고, 상호 인정을 바탕으로 소수 민족 집단과 국민 국가의 이익 사이의 균형을 모색했다. ENK 사무총장으로서 그는 유대인 협회가 베른하임 청원을 제출하는 것을 지원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이로 인해 그는 나치에게 불신을 받았다. 동시에 그는 ENK의 다양한 지원 활동과 캠페인으로 인해 미국 및 소련 정부와 갈등을 겪었다.
에발트 아멘데는 또한 "비엔나 대주교 추기경의 종교 초월적이고 초국가적인 구호 단체"의 명예 이사였다.[5] 그는 추기경 테오도르 이니처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그는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 ''러시아가 굶주려야 하는가? 소련의 사람들과 민족의 운명''[6] 출판을 도왔다. 책 제목의 "러시아"라는 단어는 당시 흔히 그랬듯이 일반적으로 소련을 지칭했지만, 이 책은 주로 우크라이나와 쿠반(서부 코카서스)에서의 사건을 다루었다. 이 책은 소련 기근에 대한 현대적인 묘사(현재는 홀로도모르) 때문에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아멘데는 또한 폴란드인, 헝가리인(마자르인), 루마니아인, 유대인, 벨라루스인, 크림 독일인을 포함한 우크라이나의 다양한 소수 민족에 대한 체계적인 탄압에 대해 그의 저서에서 논했다. 에발트 아멘데가 나치를 거부했다는 것은 이미 출판 당시 알려졌지만, 소련 당국은 ENK가 이 책이 나치 선전을 조장한다고 비난했다. 이러한 오해는 종전 후 동독 역사가들을 비롯하여 현대 연구 문헌에 이르기까지 이어졌다. 일부 역사가들은 기근에 대한 ENK의 국제 캠페인 전체를 나치 정권의 반공산주의 정책의 일부로 규정하기까지 한다. 아멘데는 1933년 하르키우에서 일하면서 알렉산더 비에너버거가 촬영한 무단 사진을 그의 책에 사용했다. 이 사진들은 현재 널리 알려져 있으며 여러 차례 재출판되었다.[7]
에발트 아멘데는 1936년 4월 15일, 발드게임 (유대인 자치주)의 유대인 소수 민족 대표들과 만나기 위해 베이징에서 미스터리한 상황에서 사망했다. 그는 베이징의 독일 병원에서 사망했다는 것만 확실하다. 사망 원인에 대한 세부 사항은 살인, 자살, 심장 마비, 뇌졸중에서 당뇨병(가족력으로 인해 현재 가능한 이유로 간주됨)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많은 신문에 부고가 실렸다. 그의 사후, 그의 형제이자 오른팔인 에리히 아멘데가 ENK의 임시 관리직을 맡았다. 그는 형제보다 7개월 더 오래 살았고 빈에서 사망했다.[8][9] 그는 에스토니아 패르누의 알레비 묘지에 묻혔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에발트 아멘데는 리보니아 지역의 부유하고 영향력 있으며 역사 깊은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패르누에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후, 1910년 리가에 있는 공대에서 상업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후 쾰른, 튀빙겐 등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뒤 크리스티안 알브레히트 대학교에서 정치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남부 러시아에서 케이터링 사업을 통해 돈을 벌었다. 리보니아가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로 분리된 후에는 전 세계의 소수 민족을 위한 캠페인에 뛰어들었다. 1919년에서 1922년까지 《Rigasche Rundschau (리가 평론)》의 편집자이자 출판 감독으로 근무하며, 폴 쉬만 등의 다른 유명한 소수 민족 인권 운동가들과 협업하게 된다. 또한 "유럽의 독일계 소수 민족 연합"의 공동 설립자로서 아멘데는 1925년 "에스토니아에 있는 소수 민족들의 문화적 자치권에 대한 법률"의 제정에 큰 공헌을 하였다. 같은 해 여러 국가의 소수 민족 대표자들이 모여서 그를 유럽 민족 의회(ENK)의 사무총장으로 선출하기에 이른다.
2. 2. 소수민족 인권 운동
에발트 아멘데는 국제 정치에서 소수 민족의 권익 보호를 위해 헌신한 인물이다. 1919년부터 1922년까지 《Rigasche Rundschau (리가 평론)》의 편집자이자 출판 감독으로 근무하며 폴 쉬만과 같은 소수민족 인권운동가들과 협력했다.[8] 그는 "유럽의 독일계 소수민족 연합"의 공동 설립자였으며, 1925년에는 "에스토니아에 있는 소수민족들의 문화적 자치권에 대한 법률" 제정에 크게 기여했다.[8] 같은 해, 여러 국가의 소수민족 대표자들은 그를 유럽 민족의회(ENK)의 사무총장으로 선출했다.[8]아멘데는 민족통일주의가 소수민족 문제의 완전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보았으며, 국가 정부와 소수민족 공동체 간 상호 인식을 바탕으로 한 균형을 추구했다.[8] 그는 ENK의 사무총장으로서 유대인 공동체가 베른하임 청원을 제출하는 것을 도왔고, 이로 인해 국가사회주의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8] 또한 ENK의 활동으로 인해 미국과 소련 정부와도 갈등을 겪었다.[8]
아멘데는 빈의 추기경 테오도르 인니처가 설립한 범국가-종파 구호단체의 명예의장을 맡았다.[5] 인니처 추기경의 도움으로 《''Muss Russland Hungern? Menschen und Völkerschicksale in der Sowjetunion'' (러시아는 굶주려야 하는가? 소련의 인민과 운명)》을 출판했다.[6] 이 책에서 아멘데는 홀로도모르를 포함하여 소련 내 소수민족들의 억압 실태를 고발했다. 특히 알렉산더 비너베르거가 1933년 하르키우에서 촬영한 사진들을 익명으로 소개해[7] 홀로도모르의 참상을 알리는 데 기여했다.
2. 3. 홀로도모르 알리기와 국제적 활동
에발트 아멘데는 1925년 여러 국가의 소수민족 대표자들에 의해 유럽 민족의회(ENK)의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다.[5] 그는 소수민족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기구를 설립하고, 민족통일주의는 소수민족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국가 정부와 소수민족 공동체 간 상호 인식에 기반을 둔 균형을 통해 이를 해결하고자 하였다.[5]아멘데는 ENK의 사무총장으로서 베른하임 청원을 제출하는 것을 도왔는데, 이 일로 국가사회주의자들로부터 평판을 잃게 된다.[5] 또한 ENK의 여러 원조 활동들로 인해 미국과 소련 정부와도 갈등을 겪게 된다.[5]
아멘데는 빈의 저명한 추기경인 테오도르 인니처가 세운 범국가-종파 구호단체의 명예의장직을 맡았다.[1][5] 인니처는 아멘데가 책 《''Muss Russland Hungern? Menschen und Völkerschicksale in der Sowjetunion'' (러시아는 굶주려야 하는가? 소련의 인민과 운명)》[6]을 출판할 때 큰 도움을 주었으며, 이후로도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다.[5] 이 책에서 아멘데는 주로 우크라이나와 쿠반의 서부 코카서스인들의 이야기를 다루는데, 당시 소련에서 발생했던 대기근인 홀로도모르를 다루며 대중의 많은 관심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5] 아멘데는 또한 이 책에서 우크라이나 내부의 폴란드인, 마자르인, 루마니아인, 유대인, 벨로루시인, 크림계 독일인 등 소수민족들에 대한 체계적인 억압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5]
이 시점에서 아멘데가 국가사회주의를 거부하였다는 사실이 이미 알려져 있었지만, 소련 당국은 국가사회주의 프로파간다의 제작을 혐의로 ENK를 고소한다.[5] 이러한 오해는 전후 동독의 역사가들을 비롯하여 현대 연구 문헌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5] 아직까지도 일부 역사학자들은 홀로도모르에 대한 ENK의 국제 캠페인들이 나치 정권의 반 코민테른 정책의 일부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5] 아멘데는 그의 책에서 알렉산더 비너베르거가 하르키우에서 1933년에 찍은 사진들을 익명으로 소개하는데, 이 사진들은 지금까지 홀로도모르를 대표하는 사진들로 남아있다.[2][7]
2. 4. 죽음
에발트 아멘데는 1936년 4월 15일 중국 베이징에서 사망했다.[3][4] 그는 발트게임(유대인 자치주)의 유대인 소수 민족 대표들을 만나기 위해 베이징을 방문했다.[3]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베이징의 독일계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사실만이 알려져 있다.[3] 유럽의 신문들에는 그의 죽음에 대한 부고 기사가 실렸으며, 사인에 대해서는 살인, 자살, 심장마비, 당뇨로 인한 뇌졸중 등 다양한 추측이 있었다.[3] 현재는 가족력을 고려하여 당뇨로 인한 뇌졸중이 사인으로 여겨지고 있다.[3]아멘데의 사후, 그의 형제이자 오른팔이었던 에리히 아멘데(Erich Ammende)가 유럽 민족의회(ENK)의 임시 책임자가 되었으나, 에리히 역시 몇 달 후 빈에서 사망했다.[3][4] 아멘데는 에스토니아 패르누의 알레피 묘지에 안장되었다.
3. 저서
- ''Die Hilfsaktion für Petersburg.'' R. Ruetz Riga, 1920.
- ''Die Agonie einer Weltstadt. Helft Petersburg!'' R. Ruetz Riga, 1920.
- ''Europa und Sowjet-Rußland.'' Curtius-Verlag Berlin, 1921.
- ''Die Gefährdung des europäischen Friedens durch die nationale Unduldsamkeit.'' Karl Jaspers Wien, 1927.
- ''Nationalitäten in den Staaten Europas.'' Braumüller Universitäts-Verlagsbuchhandlung Wien und Leipzig, 1931.
- ''Muss Russland hungern? Menschen und Völkerschicksale in der Sowjetunion.'' Wilhelm Braumüller Universitäts-Verlagsbuchhandlung Wien, 1935.
- ''Human Life in Russia.'' G. Allen & Unwin London, 1936.
- 페테르부르크 원조 활동.de, R. 루츠, 리가, 1920.
- 세계 도시의 고뇌. 페테르부르크를 도우라!de, R. 루츠, 리가, 1920.
- 유럽과 소비에트 러시아.de, 쿠르티우스 출판사, 베를린, 1921.
- 민족적 편협함이 유럽 평화를 위협한다.de, 카를 야스퍼스, 빈, 1927.
- 유럽 국가의 민족.de, 브라우뮐러 대학교 출판사, 빈 및 라이프치히, 1931.
- 러시아는 굶주려야 하는가? 소비에트 연방의 인간과 민족의 운명.de, 빌헬름 브라우뮐러 대학교 출판사, 빈, 1935.
- 러시아의 인간 생활.영어, G. 알렌 & 언윈, 런던, 1936.
참조
[1]
서적
Gegenwelten. Aspekte der österreichisch-sowjetischen Beziehungen 1918–1938
Residenz Verlag
2014
[2]
간행물
Alexander Wienerberger – Fotograf des Holodomor
https://www.doew.at/[...]
Dokumentationsarchiv des österreichischen Widerstandes (Hrsg.), Feindbilder-Verlag
2015
[3]
서적
Der Europäische Nationalitätenkongress 1925 bis 1938
Herder-Institut
2000
[4]
서적
The Baltic States and their region: new Europe or old?
Editions Rodopi B.V.
2005
[5]
서적
Gegenwelten. Aspekte der österreichisch-sowjetischen Beziehungen 1918–1938
Residenz Verlag
2014
[6]
문서
소련(USSR)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당시에는 흔하게들 러시아라고 불렀다.
[7]
간행물
Alexander Wienerberger – Fotograf des Holodomor
https://www.doew.at/[...]
Dokumentationsarchiv des österreichischen Widerstandes (Hrsg.), Feindbilder-Verlag
2015
[8]
서적
Der Europäische Nationalitätenkongress 1925 bis 1938
Herder-Institut
2000
[9]
서적
The Baltic States and their region: new Europe or old?
Editions Rodopi B.V.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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