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엔 마르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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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티엔 마르셀은 14세기 프랑스의 부유한 부르주아 출신으로, 파리 상인 두령을 역임하며 백년 전쟁 시기 프랑스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그는 삼부회에서 국왕과 대립하며 개혁을 추진했고, 1357년 대칙령 작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장 2세가 포로로 잡힌 후에는 왕태자 샤를과 대립하며 나바라 왕 카를로스 2세와 협력하려 했으나, 자크리의 난 실패 이후 암살당했다. 그의 죽음 이후 샤를 5세가 파리로 돌아와 권력을 되찾았다. 파리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 지하철역, 기마상이 있으며, 문화적으로도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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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엔 마르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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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출생 | 1310년대 |
사망 | 1358년 7월 31일 |
사망 장소 | 파리 |
국적 | 프랑스 |
직업 | 상인, 정치인 |
배우자 | 잔 드 피엔 |
상세 이력 | |
활동 시기 | 14세기 |
주요 역할 | 파리 상인 조합장, 프랑스 왕국의 삼부회 지도자 |
주요 사건 | 파리 봉기 (1358년) 주도 왕세자 샤를의 섭정 시도 |
사상적 배경 | 도시 자치, 왕권 견제 |
기타 정보 | |
기념 | 파리 지하철역 이름으로 기념 |
관련 인물 | 샤를 5세 장 2세 카를 4세 |
2. 생애
에티엔 마르셀은 파리의 부유한 상인 가문 출신으로, 1354년 파리 상인 조합의 대표가 되어 정치에 참여했다. 당시 프랑스는 백년 전쟁 중이었고, 1355년 장 2세는 전쟁 비용 마련을 위해 삼부회를 소집했다. 에티엔 마르셀은 삼부회에서 왕권 강화를 견제하고 재정 개혁을 추진했다.
1356년 푸아티에 전투에서 장 2세가 잉글랜드군에 포로로 잡히자, 에티엔 마르셀은 1357년 대칙령을 통해 왕태자 샤를의 권한을 제한하려 했다. 그러나 샤를은 이를 거부했고, 에티엔 마르셀은 나바라 왕 카를로스 2세와 연합하여 왕권에 대항했다.
1358년 자크리의 난이 일어났고, 에티엔 마르셀은 이를 이용하여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그는 잉글랜드에 지원을 요청하려다 파리 시민들에게 암살당했다.[1]
2. 1. 초기 생애
에티엔 마르셀은 파리의 부유한 부르주아지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 포목상 시몽 마르셀과 어머니 이자벨 바르부 사이에서 태어났다.[1] 야코프 판 아르테벨데처럼 도시 상류층에서 성장하여 권력자들과 가까이 지냈으며, 도시들이 정치 세력으로 부상하던 시기에 성장했다.[1] 특히 서유럽 최대 도시였던 파리는 더욱 그러했는데, 1328년경 인구가 약 20만 명으로 추산되었다.[1]에티엔 마르셀은 잔 드 다마르탱과 처음 결혼했고, 이후 마르그리트 데 자르와 결혼했다.[1] 그는 의류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조부 대에는 상권이 전 유럽으로 확장되었다.[1] 1333년부터 가업인 상업에 종사했으며, 1350년 노트르담 대성당의 참사회원이 되었고, 1354년 파리 시장과 같은 직위인 "파리 상인 두령"이 되었다.[1]
2. 2. 정치 활동
마르셀은 1350년에 노트르담 대교우회의 지방 장관으로 언급된다. 1354년, 그는 장 드 파시의 뒤를 이어 삼부회의 상업 지도자들을 대표하는 파리 상인들의 지방 장관이 되었다.[1] 이는 격변의 시기였다. 그의 초기 회의 중 하나인 1355년 회의는 왕국의 재정을 통제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1356년, 푸아티에 전투 이후 잉글랜드군에게 존 왕이 포로로 잡혔다. 그해 10월 17일, 그의 상속자인 도팽 샤를은 삼부회를 소집했다. 로베르 르 코크, 라옹 주교와 함께 마르셀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두 사람이 구성한 80명의 위원회는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라는 요구를 끈질기게 압박했고, 결국 도팽은 이 기구를 해산했다. 한편, 파리의 동쪽 접근을 보호하기 위해 마르셀은 요새화된 관문(원래의 바스티유)을 건설했다.
존 왕의 몸값 문제를 포함한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도팽은 1357년 2월 3일에 다시 삼부회를 소집해야 했고, 그 결과 개혁에 대한 대칙령이 공포되었다. 선량왕 존은 이 칙령의 시행을 금지했고, 이에 따라 마르셀과 도팽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으며, 마르셀은 나바라 왕 샤를을 존에게 반대하도록 하려고 했다. 삼부회는 1358년 1월 13일에 다시 소집되었고, 2월 22일 마르셀이 이끄는 파리 시민들은 궁전에 침입하여 왕자의 눈앞에서 상파뉴 원수 장 드 콩플랑과 노르망디 원수 로베르 드 클레르몽을 살해했다.
삼부회는 왕국의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귀족들의 살해는 마르셀에 대한 귀족들의 지지를 약화시켰다.[1] 도팽 샤를은 이제 권력을 잡고 발루아 왕조를 위해 왕위를 지킬 수 있었다.
그 후, 마르셀은 공개적으로 왕위에 적대적이었다. 자크리 반란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갈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품은 후, 그는 다음으로 파리 인근을 침략한 나바라 왕의 무장 세력을 지원했다. 7월 31일 밤, 마르셀은 수도의 문을 그들에게 열려고 했지만, 장 마이야르가 이 계획의 실행을 막았다. 마르셀은 생-앙투안 문의 경비병에게 암살당했다.[1] 파리의 부르주아들은 그가 왕에게 지나치게 반대했고, 그가 도시를 잉글랜드에게 넘겨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 후 며칠 동안 그의 지지자들도 마찬가지로 죽임을 당했고, 도팽은 다시 파리에 들어갈 수 있었다.
2. 3. 자크리의 난과 연계, 그리고 최후
1358년, 자크리의 난의 지도자 기욤 칼르와 제휴했으나, 이 반란이 6월에 진압되면서 에티엔의 인기와 세력은 붕괴되었다. 플랑드르, 나아가서는 적국이었던 잉글랜드의 지원까지 요청하려 했다.[1] 최후의 시기에는, 최초의 목적 의식에서 벗어나 자신의 안위를 위해 프랑스 왕위를 노리던 나바라 왕 카를로스 2세의 이익을 지원했다고 한다.그 후, 마르셀은 공개적으로 왕위에 적대적이었다. 자크리 반란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갈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품은 후, 파리 인근을 침략한 나바라 왕의 무장 세력을 지원했다. 7월 31일 밤, 마르셀은 수도의 문을 그들에게 열려고 했지만, 장 마이야르가 이 계획을 저지했다. 마르셀은 생-앙투안 문의 경비병에게 암살당했다.[1] 파리의 부르주아들은 그가 왕에게 지나치게 반대했고, 도시를 잉글랜드에게 넘겨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 후 며칠 동안 그의 지지자들도 마찬가지로 죽임을 당했고, 도팽은 다시 파리에 들어갈 수 있었다. 같은 해 7월, 카를로스 2세를 맞이할 준비를 하던 중 수비대장 중 한 명에게 암살당했다. 마르셀 일당은 체포되었고, 왕태자 샤를이 파리로 초대되었다.
3. 평가와 유산
에티엔 마르셀은 파리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기억된다. 그의 이름을 딴 거리, 지하철역, 동상이 파리 시내 곳곳에 남아 있다. 앙드레 브르통의 시에는 에티엔 마르셀의 상이 등장하기도 한다.
3. 1. 문화적 유산
1981년 파리 1구와 2구 사이의 에티엔 마르셀 거리가 명명되었다. 이 거리는 Halles de Paris프랑스어(레 알) 유적에 있는 쇼핑 센터 포럼 데 알 북쪽에 위치한다.파리 메트로 4호선의 에티엔 마르셀 역은 거리 이름을 따서 1908년 설치되었다.
1888년 파리 시청 남쪽 정원에 에티엔 마르셀의 기마상이 설치되었다. 이 기마상은 에티엔 마르셀 역에서 도보로 15분 거리에 있다.
앙드레 브르통의 시 '해바라기'에는 에티엔 마르셀의 상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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