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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토리움 빌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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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디토리움 빌딩은 시카고의 사업가 페르디난드 펙이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와 경쟁하고 노동 계급에게 고급 문화를 제공하기 위해 1886년 설립한 시카고 오디토리움 협회에 의해 건설되었다. 이 건물은 호텔과 오피스 빌딩을 포함하는 복합 용도로 계획되었으며, 당시 유명 건축가 당크마르 애들러와 루이스 설리번이 설계를 맡았고, 젊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도 설계에 기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오디토리움은 웅장한 외관과 혁신적인 기초 기술로 주목받았으며, 1888년 공화당 전당대회와 1889년 벤자민 해리슨 대통령의 헌정식 등 다양한 행사에 사용되었다. 이후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본거지로 사용되었으며, 록 콘서트 공연장으로도 활용되었고, 1975년에는 국립 역사 랜드마크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루즈벨트 대학교가 사용하고 있으며, 2001년 복원 공사를 거쳐 2015년 NFL 드래프트가 개최되는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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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토리움 빌딩
지도
기본 정보
2012년 건물의 외관
2012년 건물의 외관
위치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시 미시간 애비뉴 430번지
좌표41°52′34″N 87°37′31″W
면적67699.5 제곱피트 (6289.4 제곱미터)
건축 시작1889년
건축가루이스 설리번, 단크마르 아들러
건축 양식19세기 후반 및 20세기 초 미국 건축 양식
등재 정보
국가 사적지 등재일1970년 4월 17일
국가 사적지 등록 번호70000230
국가 역사 랜드마크 지정일1975년 5월 15일
시카고 랜드마크 지정일1976년 9월 15일
관련 지구역사적인 미시간 대로 지구
건축 세부 정보
완공1889년
높이82m
층수17층

2. 역사

1887년 10월 5일,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이 오디토리움 빌딩의 초석을 놓았다. 1888년 공화당 전당대회는 부분적으로 완공된 건물에서 열렸으며, 벤자민 해리슨이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1889년 12월 9일, 벤자민 해리슨 대통령이 건물을 헌정했으며, 오페라 스타 아델리나 패티는 "Home Sweet Home"을 불러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설리번과 애들러는 오디토리움 타워의 16층과 17층에 사무실을 열었다.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1891년 10월 16일에 데뷔하여, 1904년 오케스트라 홀로 이전할 때까지 오디토리움 극장을 본거지로 사용했다.[8] 오페라 극단은 1929년 시빅 오페라 하우스로 이사했고, 오디토리움 극장은 대공황 동안 문을 닫았다. 1941년, 시카고 시에 인수되어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용사 센터로 사용되었다. 1946년 루즈벨트 대학교가 오디토리움 빌딩으로 이전했지만,[8] 극장은 이전의 영광을 되찾지 못했다.

1952년, 의회 파크웨이가 확장되면서 건물 남쪽 가장자리까지 연석이 설치되었다. 보도를 만들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1층의 일부 객실과 극장 로비의 일부가 제거되었고 보도 아케이드가 만들어졌다.[10]

2008년 선거 밤 오바마의 그랜트 공원 집회 동안 오디토리움 극장 밖의 군중


1967년 10월 31일, 오디토리움 극장이 재개장했고, 1975년까지 록 콘서트 공연장으로 사용되었다. 그레이트풀 데드는 1971년부터 1977년까지 10번 공연했다. 도어스는 1969년 6월 14일 짐 모리슨이 체포된 후 오디토리움 빌딩에서 첫 콘서트를 열었다.

1975년 미국 내무부에 의해 국립 역사 랜드마크로 지정되었다. 이 건물에는 최초의 중앙 에어컨 시스템이 설치되었고, 극장은 백열전구로 완전히 조명된 최초의 극장이었다.[8] 2001년, 다니엘 P. 코피 앤 어소시에이츠는 에버그린 건축 예술과 협력하여 오디토리움 극장의 대대적인 복원을 시작하여 극장을 원래의 색상과 마감으로 되돌렸다.

2015년 4월 30일, 미국 프로 미식축구 리그는 2015년 NFL 드래프트를 오디토리움 극장에서 개최했는데, 이는 50년 이상 만에 시카고에서 열린 리그의 연례 드래프트였다.

2. 1. 건립 배경 및 목적

페르디난드 펙은 시카고의 사업가로, 1886년 12월에 시카고 오디토리움 협회를 설립하여 세계에서 가장 크고 웅장하며 가장 비싼 극장을 건설하고자 했다. 그는 이 극장이 뉴욕 시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와 경쟁할 수 있기를 바랐으며, 시카고의 노동 계급이 고급 문화를 접할 수 있도록 하고 싶어했다.[5]

이 건물은 오피스 빌딩과 일류 호텔을 포함하도록 계획되었다. 펙은 마셜 필드, 에드슨 키스, 마틴 A. 라이어슨, 찰스 L. 허친슨, 조지 풀먼을 포함한 많은 시카고 재벌들을 설득하여 그의 계획에 참여시켰다. 협회는 당크마르 애들러와 루이스 설리번의 유명 건축 회사를 고용하여 건물을 설계하게 했다. 당시 젊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이 회사에서 도안가로 근무하고 있었으며, 그는 설계에 기여했을 가능성이 있다.[5]

오디토리움은 대규모 시민 오페라 하우스를 수용하기 위해 사업가들의 신디케이트를 위해 건설되었다. 경제적 기반을 제공하기 위해 오디토리움을 호텔 및 오피스 블록으로 감쌌다. 따라서 애들러 & 설리번은 복합적인 다중 용도 건물을 계획해야 했다. 호수를 내려다보는 미시간 애비뉴를 따라 호텔 (현재 루즈벨트 대학교)이 위치해 있었고, 오피스는 와바시 애비뉴 서쪽에 배치되었다. 오디토리움 입구는 18층의 키 큰 블록형 타워 아래 남쪽에 위치해 있다. 건물의 나머지는 리처드슨의 마셜 필드 도매점과 동일한 방식으로 구성된 10층 높이로 통일되어 있다. 그러나 내부 장식은 완전히 설리번의 작품이며, 연속적인 곡선 형태의 잎새 모티프로 인해 일부 세부 사항은 유럽의 아르누보 건축과 가장 유사하다.[6]

2. 2. 설계 및 건축

설리번과 애들러는 하중 지지 외벽이 있는 고층 구조물을 설계했으며, 외부 외관은 부분적으로 H.H. 리처드슨의 또 다른 시카고 랜드마크인 마셜 필드 창고의 설계를 기반으로 했다.[7] 오디토리움은 외관상 웅장하고 인상적인 구조물이었으며, 당시 이 정도 규모의 건물이 흔하지 않았을 때 더욱 눈에 띄었다. 완공 당시 시카고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자 미국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다.[8]

이 건물의 가장 혁신적인 특징 중 하나는 엔지니어 폴 뮬러와 함께 애들러가 설계한 거대한 뗏목 기초였다. 오디토리움 아래 토양은 약 30.48m 이상 깊이의 부드러운 파란색 점토로 구성되어 있어 기존의 기초를 사용할 수 없었다. 애들러와 뮬러는 콘크리트에 매립된 강철 레일 이중층으로 덮인 엇갈린 철도 침목의 부동 매트를 설계했으며, 전체 조립체는 피치로 코팅했다.

결과적인 뗏목은 거대한 외벽의 무게를 넓은 지역에 분산시켰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가벼운 내부와 관련된 석조 외벽의 무게는 세기 동안 뗏목을 변형시켰고, 오늘날 건물의 일부는 최대 약 73.66cm나 침하되었다. 이러한 처짐은 극장 로비에서 분명히 볼 수 있는데, 모자이크 바닥이 외벽에 가까워질수록 뚜렷한 경사를 띤다. 이러한 침하는 부실한 기술 때문이 아니라 건설 중에 설계가 변경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계획은 외관을 가벼운 테라코타로 덮는 것이었지만, 기초가 건설 중인 동안 돌로 변경되었다. 침하는 대부분 건설 후 10년 이내에 발생했으며, 한때 바닥을 수평하게 하기 위해 내부 지지대를 줄이는 계획이 있었지만 실행되지 않았다.

건물 중앙에는 원래 주로 그랜드 오페라 제작을 위해 설계된 4,300석 규모의 오디토리움이 있었다. 펙의 민주주의적 이상에 따라 오디토리움은 모든 좌석에서 시야와 음향이 좋도록 설계되었다. 원래 계획에는 박스석이 없었고, 박스석이 계획에 추가되었을 때 주요 위치를 얻지 못했다.

중앙 공간 주변 건물에는 1890년에 136개의 사무실과 400개의 객실을 갖춘 호텔이 추가되었으며,[8][9] 그 목적은 오페라를 지원하는 데 필요한 많은 수익을 창출하는 것이었다. 오디토리움 빌딩은 상업용 건물로 의도된 것은 아니지만 펙은 자급자족하기를 원했다. 사무실과 호텔의 수익은 티켓 가격을 적절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호텔과 사무실 블록은 몇 년 안에 수익성이 없어졌다.

2. 3. 개장 및 초기 역사

페르디난드 펙은 시카고의 사업가로, 1886년 12월에 시카고 오디토리움 협회를 설립하여 세계에서 가장 크고 웅장하며 가장 비싼 극장을 짓고자 했다. 그는 이 극장이 뉴욕 시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와 경쟁할 수 있기를 바랐으며, 시카고의 노동 계급도 고급 문화를 접할 수 있게 하고자 했다.[5]

건물은 오피스 빌딩과 일류 호텔을 포함하도록 계획되었다. 펙은 마셜 필드, 에드슨 키스, 마틴 A. 라이어슨, 찰스 L. 허친슨, 조지 풀먼 등 시카고의 여러 재벌들을 설득하여 자신의 계획에 참여시켰다. 협회는 당크마르 애들러와 루이스 설리번의 유명 건축 회사를 고용하여 건물을 설계하게 했다. 당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이 회사에서 도안가로 근무하고 있었으며, 설계에 기여했을 가능성이 있다.[5]

1887년 10월 5일,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이 오디토리움 빌딩의 초석을 놓았다. 1888년 공화당 전당대회는 부분적으로 완공된 건물에서 열렸으며, 벤자민 해리슨이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1889년 12월 9일, 벤자민 해리슨 대통령이 건물을 헌정했으며, 오페라 스타 아델리나 패티는 "Home Sweet Home"을 불러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애들러 앤 설리번은 오디토리움 타워의 16층과 17층에 사무실을 열었다.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1891년 10월 16일에 데뷔했으며, 1904년 오케스트라 홀로 이전할 때까지 오디토리움 극장을 본거지로 사용했다.[8]

3. 디자인 및 특징

설리번과 애들러는 하중 지지 외벽이 있는 고층 구조물을 설계했으며, 외부 외관은 H.H. 리처드슨의 마셜 필드 창고 설계를 일부 참고했다.[7] 오디토리움은 웅장하고 인상적인 외관을 가졌으며, 당시 이 정도 규모의 건물이 흔하지 않아 더욱 눈에 띄었다. 완공 당시 시카고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자 미국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다.[8]

이 건물의 혁신적인 특징 중 하나는 엔지니어 폴 뮬러와 애들러가 설계한 뗏목 기초였다. 오디토리움 아래 토양은 약 30.48m 이상 깊이의 부드러운 파란색 점토로 구성되어 기존 기초를 사용할 수 없었다. 애들러와 뮬러는 콘크리트에 매립된 강철 레일 이중층으로 덮인 엇갈린 철도 침목의 부동 매트를 설계하고, 전체를 피치로 코팅했다.

그 결과 뗏목은 무거운 외벽의 무게를 넓게 분산시켰다. 그러나 가벼운 내부에 비해 무거운 석조 외벽 때문에 뗏목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형되었고, 오늘날 건물의 일부는 최대 약 73.66cm나 침하되었다. 이러한 침하는 극장 로비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모자이크 바닥이 외벽에 가까워질수록 경사가 뚜렷하다. 이는 부실한 기술 때문이 아니라 건설 중 설계 변경으로 인해 발생했다. 원래 외관은 가벼운 테라코타로 덮을 계획이었지만, 기초 건설 중 돌로 변경되었다. 침하는 대부분 건설 후 10년 이내에 발생했으며, 바닥을 수평하게 하기 위해 내부 지지대를 줄이는 계획이 있었지만 실행되지 않았다.

건물 중앙에는 그랜드 오페라 제작을 위해 설계된 4,300석 규모의 오디토리움이 있었다. 펙의 민주주의적 이상에 따라 모든 좌석에서 좋은 시야와 음향을 확보하도록 설계되었다. 원래 박스석은 없었으나, 이후 추가되었을 때 주요 위치를 얻지 못했다.

1890년, 중앙 공간 주변 건물에는 136개의 사무실과 400개의 객실을 갖춘 호텔이 추가되었다.[8][9] 이는 오페라를 지원하기 위한 수익 창출이 목적이었다. 오디토리움 빌딩은 상업용 건물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펙은 자급자족하기를 원했다. 사무실과 호텔 수익으로 티켓 가격을 적절하게 유지하고자 했으나, 실제로 호텔과 사무실은 몇 년 안에 수익성이 없어졌다.

3. 1. 복합 용도 건물

설리번과 애들러는 하중 지지 외벽이 있는 고층 구조물을 설계했으며, 외부 외관은 부분적으로 H.H. 리처드슨의 또 다른 시카고 랜드마크인 마셜 필드 창고의 설계를 기반으로 했다.[7] 오디토리움은 외관상 웅장하고 인상적인 구조물이었으며, 당시 이 정도 규모의 건물이 흔하지 않았을 때 더욱 눈에 띄었다. 완공 당시 시카고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자 미국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다.[8]

이 건물의 가장 혁신적인 특징 중 하나는 엔지니어 폴 뮬러와 함께 애들러가 설계한 거대한 뗏목 기초였다. 오디토리움 아래 토양은 약 30.48m 이상 깊이의 부드러운 파란색 점토로 구성되어 있어 기존의 기초를 사용할 수 없었다. 애들러와 뮬러는 콘크리트에 매립된 강철 레일 이중층으로 덮인 엇갈린 철도 침목의 부동 매트를 설계했으며, 전체 조립체는 피치로 코팅했다.

결과적인 뗏목은 거대한 외벽의 무게를 넓은 지역에 분산시켰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가벼운 내부와 관련된 석조 외벽의 무게는 세기 동안 뗏목을 변형시켰고, 오늘날 건물의 일부는 최대 약 73.66cm나 침하되었다. 이러한 처짐은 극장 로비에서 분명히 볼 수 있는데, 모자이크 바닥이 외벽에 가까워질수록 뚜렷한 경사를 띤다. 이러한 침하는 부실한 기술 때문이 아니라 건설 중에 설계가 변경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계획은 외관을 가벼운 테라코타로 덮는 것이었지만, 기초가 건설 중인 동안 돌로 변경되었다. 침하는 대부분 건설 후 10년 이내에 발생했으며, 한때 바닥을 수평하게 하기 위해 내부 지지대를 줄이는 계획이 있었지만 실행되지 않았다.

건물 중앙에는 원래 주로 그랜드 오페라 제작을 위해 설계된 4,300석 규모의 오디토리움이 있었다. 펙의 민주주의적 이상에 따라 오디토리움은 모든 좌석에서 시야와 음향이 좋도록 설계되었다. 원래 계획에는 박스석이 없었고, 박스석이 계획에 추가되었을 때 주요 위치를 얻지 못했다.

중앙 공간 주변 건물에는 1890년에 136개의 사무실과 400개의 객실을 갖춘 호텔이 추가되었으며,[8][9] 그 목적은 오페라를 지원하는 데 필요한 많은 수익을 창출하는 것이었다. 오디토리움 빌딩은 상업용 건물로 의도된 것은 아니지만 펙은 자급자족하기를 원했다. 사무실과 호텔의 수익은 티켓 가격을 적절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호텔과 사무실 블록은 몇 년 안에 수익성이 없어졌다.

3. 2. 기술적 혁신

설리번과 애들러는 하중 지지 외벽이 있는 고층 구조물을 설계했으며, 외부 외관은 부분적으로 헨리 홉슨 리처드슨의 또 다른 시카고 랜드마크인 마셜 필드 창고의 설계를 기반으로 했다.[7]

이 건물의 가장 혁신적인 특징 중 하나는 엔지니어 폴 뮬러와 함께 애들러가 설계한 거대한 뗏목 기초였다. 오디토리움 아래 토양은 약 30.48m 이상 깊이의 부드러운 파란색 점토로 구성되어 있어 기존의 기초를 사용할 수 없었다. 애들러와 뮬러는 콘크리트에 매립된 강철 레일 이중층으로 덮인 엇갈린 철도 침목의 부동 매트를 설계했으며, 전체 조립체는 피치로 코팅했다.

결과적인 뗏목은 거대한 외벽의 무게를 넓은 지역에 분산시켰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가벼운 내부와 관련된 석조 외벽의 무게는 세기 동안 뗏목을 변형시켰고, 오늘날 건물의 일부는 최대 약 73.66cm나 침하되었다. 이러한 처짐은 극장 로비에서 분명히 볼 수 있는데, 모자이크 바닥이 외벽에 가까워질수록 뚜렷한 경사를 띤다. 이러한 침하는 부실한 기술 때문이 아니라 건설 중에 설계가 변경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계획은 외관을 가벼운 테라코타로 덮는 것이었지만, 기초가 건설 중인 동안 돌로 변경되었다. 침하는 대부분 건설 후 10년 이내에 발생했으며, 한때 바닥을 수평하게 하기 위해 내부 지지대를 줄이는 계획이 있었지만 실행되지 않았다.

4. 용도 변경 및 복원

1887년 10월 5일,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이 오디토리움 빌딩의 초석을 놓았다. 1888년 공화당 전당대회가 부분적으로 완공된 건물에서 열려 벤자민 해리슨이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1889년 12월 9일, 벤자민 해리슨 대통령이 건물을 헌정했으며, 오페라 스타 아델리나 패티가 "Home Sweet Home"을 불러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애들러 앤 설리번은 오디토리움 타워 16층과 17층에 사무실을 열었다. 이 건물에는 최초의 중앙 에어컨 시스템이 설치되었고, 극장은 백열전구로 완전히 조명된 최초의 극장이었다.[8]

루즈벨트 대학교 오디토리움 빌딩 10층에 있는 머레이-그린 도서관


4. 1. 용도 변경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1891년 10월 16일에 데뷔하여, 1904년 오케스트라 홀로 이전할 때까지 오디토리움 극장을 본거지로 사용했다.[8] 1929년 오페라 극단은 시빅 오페라 하우스로 이사했고, 오디토리움 극장은 대공황 동안 문을 닫았다. 1941년, 시카고 시에 인수되어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용사 센터로 사용되었다. 1946년까지 루즈벨트 대학교가 오디토리움 빌딩으로 이전했지만,[8] 극장은 이전의 영광을 되찾지 못했다.

1952년, 의회 파크웨이가 확장되면서 건물 남쪽 가장자리까지 연석이 설치되었다. 보도를 만들기 위해 1층의 일부 객실과 극장 로비의 일부가 제거되었고 보도 아케이드가 만들어졌다.[10]

1967년 10월 31일, 오디토리움 극장이 재개장했고, 1975년까지 록 콘서트 공연장으로 사용되었다. 그레이트풀 데드는 1971년부터 1977년까지 10번 공연했다. 1969년 6월 14일 도어스는 가수 짐 모리슨이 체포된 후 오디토리움 빌딩에서 첫 콘서트를 열었다.

1975년 미국 내무부에 의해 국립 역사 랜드마크로 지정되었다.

2001년, 다니엘 P. 코피 앤 어소시에이츠는 에버그린 건축 예술과 협력하여 오디토리움 극장의 대대적인 복원을 시작하여 극장을 원래의 색상과 마감으로 되돌렸다.

2015년 4월 30일, 미국 프로 미식축구 리그는 2015년 NFL 드래프트를 오디토리움 극장에서 개최했는데, 이는 50년 이상 만에 시카고에서 열린 리그의 연례 드래프트였다.

4. 2. 재개장 및 복원

1888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벤자민 해리슨이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후, 1889년 12월 9일 그가 대통령으로서 오디토리움 빌딩을 헌정했으며, 오페라 스타 아델리나 패티가 "Home Sweet Home"을 불러 큰 박수를 받았다.[8]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1891년 10월 16일에 데뷔하여 1904년 오케스트라 홀로 이전할 때까지 오디토리움 극장을 사용했다.[8]

1929년 오페라 극단이 시빅 오페라 하우스로 이전하면서 오디토리움 극장은 대공황 동안 문을 닫았다. 1941년 시카고 시에 인수되어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용사 센터로 사용되었고, 1946년에는 루즈벨트 대학교가 오디토리움 빌딩으로 이전했지만,[8] 극장은 이전의 영광을 되찾지 못했다.

1952년, 의회 파크웨이 확장으로 건물 남쪽 가장자리에 연석이 설치되면서 1층 일부 객실과 극장 로비 일부가 제거되고 보도 아케이드가 만들어졌다.[10]

1967년 10월 31일, 오디토리움 극장이 재개장했고, 1975년까지 록 콘서트 공연장으로 사용되었다. 그레이트풀 데드는 1971년부터 1977년까지 10번 공연했다. 1969년 6월 14일에는 도어스짐 모리슨 체포 이후 오디토리움 빌딩에서 첫 콘서트를 열었다.

1975년 미국 내무부에 의해 국립 역사 랜드마크로 지정되었다. 2001년, 다니엘 P. 코피 앤 어소시에이츠는 에버그린 건축 예술과 협력하여 오디토리움 극장의 대대적인 복원을 시작, 극장을 원래의 색상과 마감으로 되돌렸다.

2015년 4월 30일, 미국 프로 미식축구 리그는 2015년 NFL 드래프트를 오디토리움 극장에서 개최했는데, 이는 50년 이상 만에 시카고에서 열린 리그의 연례 드래프트였다.

5. 현대의 오디토리움 빌딩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1891년 10월 16일에 데뷔했으며, 1904년 오케스트라 홀로 이전할 때까지 오디토리움 극장을 본거지로 사용했다.[8]

1929년 오페라 극단은 시빅 오페라 하우스로 이사했고, 오디토리움 극장은 대공황 동안 문을 닫았다. 1941년, 시카고 시에 인수되어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용사 센터로 사용되었다. 1946년까지 루즈벨트 대학교가 오디토리움 빌딩으로 이전했지만,[8] 극장은 이전의 영광을 되찾지 못했다.

1952년, 의회 파크웨이가 확장되면서 건물 남쪽 가장자리까지 연석이 설치되었다. 보도를 만들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1층의 일부 객실과 극장 로비의 일부가 제거되었고 보도 아케이드가 만들어졌다.[10]

1967년 10월 31일, 오디토리움 극장이 재개장했고, 1975년까지 오디토리움은 록 콘서트 공연장으로 사용되었다. 그레이트풀 데드는 1971년부터 1977년까지 10번이나 그곳에서 공연했다.

도어스 또한 1969년 6월 14일 가수 짐 모리슨이 체포된 후 오디토리움 빌딩에서 첫 콘서트를 열었다.

1975년 미국 내무부에 의해 국립 역사 랜드마크로 지정되었다.

이 건물에는 최초의 중앙 에어컨 시스템이 설치되었고, 극장은 백열전구로 완전히 조명된 최초의 극장이었다.[8] 2001년, 다니엘 P. 코피 앤 어소시에이츠는 에버그린 건축 예술과 협력하여 오디토리움 극장의 대대적인 복원을 시작하여 극장을 원래의 색상과 마감으로 되돌렸다.

2015년 4월 30일, 미국 프로 미식축구 리그는 2015년 NFL 드래프트를 오디토리움 극장에서 개최했는데, 이는 50년 이상 만에 시카고에서 열린 리그의 연례 드래프트였다.

6. 갤러리

참조

[1] 웹사이트 Auditorium Building http://tps.cr.nps.go[...] National Park Service 2011-12-08
[2] 간행물 National Register of Historic Places Inventory/Nomination: Auditorium Building "{{NHLS url|id=70000[...] National Park Service 2011-12-08
[3] NRISref
[4] 웹사이트 Auditorium Building http://webapps.cityo[...] Chicago Department of Housing and Economic Development, Historic Preservation Division 2011-12-08
[5] 문서 A History of Architecture Banister Fletcher
[6] 서적 A Concise History of American Architecture
[7] 서적 The Idea of Louis Sullivan Bulfinch Press
[8] 웹사이트 Form Follows Function, Elegantly: Louis Sullivan designed the Auditorium Theatre's interior to complement its acoustics-driven shape https://www.wsj.com/[...] Dow Jones & Company 2008-09-07
[9] 백과사전 Auditorium Building http://www.encyclope[...] Chicago Historical Society 2008-09-07
[10] 웹사이트 Auditorium Building http://www.empori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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