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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레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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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레 전투는 1364년 브르타뉴 계승 전쟁 중 발생한 전투로,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은 장 드 몽포르와 프랑스-브르타뉴 연합군 간의 대결이었다. 전투는 몽포르 군의 승리로 끝났으며, 샤를 드 블루아는 사망하고 베르트랑 뒤 게클랭은 포로로 잡혔다. 이 전투의 결과로 1365년 게랑드 조약이 체결되어 브르타뉴 계승 전쟁이 종결되었고, 장 4세가 브르타뉴 공작으로 인정받으면서 잉글랜드는 외교적 패배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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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레 전투
오레 전투 정보
오레 전투 그림
전투명오레 전투
전역백년 전쟁
분쟁브르타뉴 계승 전쟁
날짜1364년 9월 29일
장소프랑스 오레
결과잉글랜드의 결정적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브르타뉴 몽포르 파벌
잉글랜드 동맹
교전국 2브르타뉴 블루아 파벌
프랑스 동맹
지휘관
지휘관 1장 드 몽포르
존 샨도스
지휘관 2샤를 드 블루아
베르트랑 뒤 게클랭
병력
병력 13,500명
병력 24,000명
사상자
사상자 1알 수 없음, 그러나 비교적 경미한 수준
사상자 2전사: 1,000+
기타
관련 전투브르타뉴 계승전쟁
주요 지휘관 (다른 정보)
지휘관 1 (추가 정보)로버트 놀스, 올리비에 드 클리송
지휘관 2 (추가 정보)오셀 백작 장 3세
추가 사상자 정보
사상자 2 (추가 정보)포로: 1,500

2. 배경

1360년 브르타뉴-칼레 조약으로 잉글랜드프랑스가 휴전했지만, 브르타뉴에서는 평화 협상이 결렬되어 1364년 전쟁이 재개되었다. 장 드 몽포르(장 4세)는 잉글랜드의 존 챈더스의 지원을 받아 1342년 이후 프랑스-브르타뉴 측의 지배하에 있던 오레를 공격, 포위했다.[1] 성 측은 식량이 부족했기에 미가엘 축일(9월 29일)까지 원군이 오지 않으면 항복하기로 약속했다.[1]

9월 27일, 샤를 드 블루아와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이끄는 프랑스-브르타뉴 구원군이 도착했다.[1] 9월 28일, 뒤 게클랭은 성 앞을 흐르던 강의 좌측 강변에 병력을 배치했다.[1] 몽포르군은 성 측 병사와 블루아 원군에게 협공당할 것을 우려해 오레에서 벗어나 강의 오른쪽 강변에 진을 쳤다.[1]

9월 29일, 협상은 결렬되었고 샤를 드 블루아군은 공격을 준비했다.[1] 샤를의 군대는 강을 건너 남쪽에 위치했는데, 이는 성과 도시 북쪽의 늪지 평원에 위치하여 일부 지휘관들은 불리한 위치라고 생각했다.[1] 몽포르는 샤를의 움직임에 따라 북쪽을 향해 위치했고, 이는 전장을 지배할 수 있는 위치였다.[1] 뒤 게클랭의 조언을 거부하고, 샤를 드 블루아는 몽포르군에 대한 불리한 공격을 감행했다.[1]

3. 교전 전력

오레 전투에서 양측 군대는 비슷한 규모였으나, 예비대 운용에서 차이를 보였다.

구분브루아-프랑스군몽포르-잉글랜드군
좌익오세르 백작 (약 1,000명)로버트 놀스
중앙샤를 드 블루아 (약 1,000명)장 4세, 존 샹도스
우익베르트랑 뒤 게클랭 (약 1,000명)올리비에 드 클리송
예비대없음휴 칼벌리 지휘하의 예비대


3. 1. 샤를 드 블루아의 브르타뉴-프랑스군

오세르 백작(오세르 백작령)이 이끄는 부대가 좌익,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이끄는 부대가 우익, 샤를 드 블루아 본인이 이끄는 부대가 중앙에 위치했다. 각 부대는 약 1,000명 규모였으며, 예비대는 운용하지 않았다.[1]

좌익중앙우익예비대
오세르 백작 | 샤를 드 블루아 | 베르트랑 뒤 게클랭 | 없음
약 1,000명 | 약 1,000명 | -


3. 2. 장 드 몽포르의 브르타뉴-잉글랜드군

우익에는 올리비에 드 클리송, 좌익에는 잉글랜드의 로버트 놀스, 중앙에는 몽포르의 장과 존 샹도스가 위치했으며, 휴 칼벌리 지휘하의 상당한 규모의 예비대가 있었다.[1]

4. 전투

프랑스 측의 석궁과 잉글랜드 측 궁병과의 소규모 접전으로 시작되어, 얼마 안 가 중무장 병사들의 정면 격전으로 이어졌다. 양 진영 모두 장기간 벌어진 전쟁의 결판을 지을 의도가 있었기에, 포로를 잡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1]

몽포르 군은 각 부대에 상당한 피해를 입었으나, 예비대의 보충으로 지탱할 수 있었다. 반면 블루아 군은 우익이 붕괴되고 오세르 백작이 사로잡히는 등 전세가 불리해졌다. 샤를 드 블루아는 전사하고, 베르트랑 뒤 게클랭은 모든 무기가 부서질 때까지 분전했으나 존 챈더스에게 항복했다. 샤를 5세는 게클랭을 해방시키기 위해 을 몸값으로 지불해야 했다.[1]

오레 전투

5. 결과

이 전투의 결과로 게랑드 조약이 체결되면서 브르타뉴 계승 전쟁이 종결되었다. 1365년 프랑스 왕 샤를 5세는 장 4세를 브르타뉴 공작으로 공식 인정했고, 장 4세는 프랑스의 샤를 5세에게 충성을 서약하였다. 이는 몽포르의 보호자였던 잉글랜드 왕국에드워드 3세에게는 외교적 패배였다. 샤를 5세는 베르트랑 뒤 게클랭의 몸값으로 100000FRF을 지불해야 했다.[1]

이 승리는 외세(잉글랜드)의 개입보다는 지역 세력(프랑스-브르타뉴) 간의 협상으로 마무리되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6. 전투의 영향

브르타뉴 계승 전쟁은 이 전투의 승리로 종식되었다. 1365년 제1차 게랑드 조약에 따라 프랑스 국왕은 몽포르의 장의 아들인 장 4세를 브르타뉴 공작으로 인정했다.[1] 그러나 장 4세는 잉글랜드 왕국에드워드 3세가 아닌 샤를 5세에게 봉신 의례를 치러, 잉글랜드-브르타뉴 연합군의 군사적 승리가 프랑스 국왕에게는 외교적 쿠데타가 된 셈이었다.[1]

6. 1. 정치적 영향

1365년 게랑드 조약이 체결되어 브르타뉴 계승 전쟁이 종결되었다. 샤를 5세는 장 4세를 브르타뉴 공작으로 공식 인정하였고, 장 4세는 프랑스의 샤를 5세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1] 이는 잉글랜드 왕국에드워드 3세가 아닌 프랑스 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것이므로, 결과적으로 프랑스가 이긴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1]

6. 2. 군사적 영향

석궁병을 배치한 프랑스군과 장궁병을 배치한 잉글랜드군 사이에 벌어진 소규모 접전은 곧 중무장 병사 간의 격전으로 이어졌다. 양측 모두 전쟁의 결판을 짓고자 포로를 잡지 말라는 명령을 내릴 정도로 치열하게 전투에 임했다.[1]

몽포르군은 각 부대에 큰 피해를 입었지만 예비대의 보충으로 버텼다. 반면 블루아군의 우익은 피해를 보충받지 못해 무너졌고, 중앙으로 밀려 들어갔다. 좌익마저 무너지면서 오세르 백작이 포로로 잡혔다. 중앙 부대는 전장에서 도망치려 했으나, 샤를 드 블루아는 잉글랜드 병사에게 살해되었다. 뒤 게클랭은 모든 무기가 부서질 때까지 싸웠지만 결국 존 챈더스에게 항복했다. 샤를 5세는 게클랭을 해방시키기 위해 10만 프랑을 몸값으로 지불해야 했다.[1]

이 승리로 브르타뉴 계승 전쟁은 종식되었다. 1년 후인 1365년, 제1차 게랑드 조약에 따라 프랑스 국왕은 몽포르의 장의 아들인 장 4세를 브르타뉴 공작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장 4세는 자신의 후원자인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가 아닌 프랑스의 샤를 5세에게 봉신 의례를 치렀다. 잉글랜드-브르타뉴 연합군의 군사적 승리가 프랑스 국왕에게는 외교적 쿠데타로 이어진 셈이다.[1]

6. 3. 사회적 영향

오레 전투는 브르타뉴 계승 전쟁을 종결지었지만, 당시 사회에 만연했던 전쟁 포로의 몸값 문제를 드러냈다. 특히 귀족 계층에게 전쟁 포로는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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