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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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샤를 5세는 프랑스의 왕으로, 백년 전쟁 시기 프랑스 왕국의 섭정으로 어려운 시기를 이끌었다. 그는 1356년 푸아티에 전투에서 아버지 장 2세가 포로로 잡히자 섭정을 맡아, 에티엔 마르셀의 반란과 자크리의 난을 진압하고 런던 조약 체결을 거부했다. 이후 브레티니 조약을 맺어 잉글랜드와 휴전하고, 명장 베르트랑 뒤 게클랭을 중용하여 잃었던 영토를 회복했다. 그는 또한 상비군과 관료층을 확립하여 프랑스 절대왕정의 기초를 다졌으며, 고전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고 왕실 도서관을 확장하는 등 문화적으로도 기여했다. 말년에는 서구 교회 대분열이 발생하고, 1380년 사망하여 아들 샤를 6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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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를 5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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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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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샤를 5세 |
별칭 | 현명왕 |
프랑스어 별칭 | le Sage |
라틴어 별칭 | Sapiens |
왕조 | 발루아 가문 |
재위 시작 | 1364년 4월 8일 |
재위 종료 | 1380년 9월 16일 |
대관식 | 1364년 5월 19일 |
이전 군주 | 장 2세 |
다음 군주 | 샤를 6세 |
섭정 | 프랑스의 섭정 (1356–1360) |
이전 섭정 | 장 2세 |
출생일 | 1338년 1월 21일 |
출생지 | 뱅센, 프랑스 |
사망일 | 1380년 9월 16일 |
사망지 | 보테쉬르마른, 프랑스 |
매장일 | 1380년 9월 26일 |
매장지 | 생드니 대성당 |
가족 | |
배우자 | 잔 드 부르봉 (1350년 4월 8일 결혼, 1378년 2월 사망) |
자녀 | 샤를 6세 루이 1세 드 발루아 카트린 드 몽팡시에 장 드 몽타귀 (사생아) |
아버지 | 장 2세 |
어머니 | 본 드 룩셈부르크 |
서명 |
2. 생애
1349년에 앓았던 병(장티푸스 또는 결핵으로 추정)의 후유증으로 허약한 체질이 되어 기마창시합이나 전장과는 멀어졌다. 오른손은 부어 있었고 무거운 것을 들 수 없었다.[4]
정신적으로는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고, 활기찬 정신을 가진 마치 마키아벨리주의자였다. 샤를 5세의 전기 작가인 크리스틴 드 피잔은 그를 “현명하고 교활한(sage et visseux)”이라고 묘사했고, 랭커스터 공작존 오브 폰트는 “국왕의 대리인(royal attorney)”이라고 인정했다. 그의 성격은 아버지 장 2세와는 완전히 달랐는데, 장 2세는 허황된 분노를 드러내거나, 자신의 주변에는 아첨꾼들만을 두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매우 교양이 깊은 인물이었으며, 7과(교양 과목, 문법·수사·변증법과 산술·기하·음악·천문학)를 모두 섭렵했다. 한편으로는 경건하지만 미신적인 국왕이기도 했다. 오랫동안 닥쳐오는 운명으로 후계자를 얻지 못했고, 당시 의사들도 손쓸 수 없는 여러 건강 문제 때문에 독실한 신자였으며 점성술 신봉자가 되었다. 샤를 5세는 셀레스탱(천상) 수도회의 발전을 후원했고, 그의 도서관의 7분의 1을 점성술, 천문학, 예언에 관한 서적이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당시 교회나 대학의 견해 또는 그의 고문들의 견해와 상충하기도 했다. 샤를 5세의 신앙은 개인적인 영역에 머물렀고, 정치적인 결정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2. 1. 출신 및 가족
장 2세와 이트카[15] 보헤미아 공주 사이에서 태어났다.[16] 동생으로는 앙주공 루이, 베리공 장, 부르고뉴공 필리프(용담공) 등이 있다.샤를 5세는 파리 외곽의 뱅센 성에서 프랑스의 장 왕자와 보느 공주 사이에서 태어났다.[3] 그는 또래 아이들과 함께 궁정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그들과 평생 가까운 사이를 유지했다. 샤를 5세의 삼촌인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샤를보다 두 살 연상), 세 형제인 루이, 장, 필리프, 부르봉의 루이, 에드워드, 바르의 로베르(바르), 브라반트의 고드프루아, 에탕프의 루이, 에브뢰의 루이(악당 샤를의 형제), 장과 샤를(아르투아), 알랑송의 샤를, 루브르의 필리프 등이 있었다.
미래의 왕은 지능이 매우 높았지만 체격이 약하고 창백한 피부에 마른 체형이었다. 이는 키가 크고 건장하며 금발인 아버지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4]
왕비는 피에르 1세 드 부르봉 공작의 딸 잔 드 부르봉 공녀이다. 1350년 4월 8일에 결혼하여 샤를 6세, 오를레앙 공작 루이 1세 등 9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성인이 된 것은 2명뿐이었다.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잔느 | 1357년 | 1360년 | |
장 | 1359년 | 1364년 | |
보느 | 1360년 | 1360년 | |
장 | 1366년 | 1366년 | |
샤를 6세 | 1368년 | 1422년 | 프랑스 왕 |
마리 | 1370년 | 1377년 | |
루이 | 1372년 | 1407년 | 오를레앙 공작 |
이자벨 | 1373년 | 1378년 | |
카트린 | 1378년 | 1388년 | 1386년에 장 2세 드 베리와 결혼 |
애인 비에트 드 카지넬과의 사이에 서자 1명이 있었다.
- 장 드 몽테규 (1365년 - ?)
2. 2. 초기 생애와 섭정
샤를 5세는 1338년 1월 21일, 파리 근교의 뱅센 성에서 프랑스 왕자 장과 보느 사이에서 태어났다.[3] 그는 또래 아이들과 함께 궁정 교육을 받았으며, 평생 이들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그의 삼촌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세 형제 루이, 장, 필리프, 그리고 부르봉의 루이 등이 그들이다. 미래의 왕은 지능이 높았지만, 체격은 약하고 창백한 피부에 마른 체형으로, 건장하고 금발이었던 아버지와는 대조적이었다.[4]움베르트 2세는 중동 원정 실패 후 세금 징수에 어려움을 겪고, 외아들의 죽음으로 후계자가 없게 되자 신성 로마 제국의 봉토였던 도피네를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교황과 황제 모두 관심을 보이지 않아, 결국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에게 매각되었다.
로마 조약에 따라 도피네는 미래의 국왕 잔 2세의 아들이 소유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장 2세의 장남 샤를이 첫 번째 도팽(왕세자)이 되었다. 1349년 12월부터 1350년 3월까지, 12세의 어린 나이에 샤를은 그르노블에서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그르노블 주민들의 충성 맹세를 받았고, 그 대가로 지역 헌장을 존중하고 움베르트 2세의 자유와 특권을 확인하며, 사형수를 제외한 모든 죄수를 사면했다.
1350년 4월 8일, 샤를은 탱 레르미타주에서 사촌인 부르봉의 조안나와 결혼했다. 이 친족 결혼은 교황의 사전 승인을 받았으나, 흑사병으로 인해 결혼식은 비공개로 진행되었다. 샤를 자신도 1349년 8월부터 12월까지 심각한 병을 앓았었다.
도피네는 지중해와 북유럽 사이의 주요 무역로인 론 계곡을 장악하고, 교황령이자 중세 유럽의 외교 중심지였던 아비뇽과 직접 접촉할 수 있었기에 프랑스 왕국에게 매우 중요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샤를은 백성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고, 봉신 가문 간의 분쟁을 중재하는 등 유용한 통치 경험을 쌓았다.
2. 3. 치세와 백년전쟁
백년 전쟁 기간 중 푸아티에 전투(1356년)에서 아버지 장 2세가 패배하여 잉글랜드의 포로가 되자, 왕세자로서 섭정을 맡아 어려운 국정을 운영했다. 당시 프랑스는 전쟁으로 인해 매우 피폐해졌고, 샤를 드 나바르[18]의 음모에 시달렸다. 에티엔느 마르셀이 이끈 파리 봉기와 자크리의 난(1358년)을 진압하고, 부왕이 포로가 된 직후 맺은 런던 조약의 비준 및 이행을 거부하고 잉글랜드와 브레티니 조약(1360년)을 맺는 데 성공했다.현재 세금의 기초가 된 정기적인 임시 징세를 실시하여 상비군과 관료층을 갖추는 등 후세 프랑스 절대왕정의 기초를 마련했다. 또한 샤를 5세를 섬겼던 군인, 관료 중에서 샤를 6세 시대의 마르무젤[19]이라 불리는 관료가 나타났다.
군사면에서는 명장 베르트랑 뒤 게클랭을 중용하여 잉글랜드에게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려 노력했다. 코슈렐 전투(1364년)에서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았던 샤를 드 나바르의 군을 격파했다.[14] 이 승리는 샤를 2세가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는 것을 단념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가 노르망디에 갖고 있던 영토를 빼앗아 이곳을 잉글랜드의 교두보이자 진격로로 쓰는 것을 방지했다. 물론 그 대가로 샤를 2세는 남프랑스에 영지가 내려졌다.
백년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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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주요 인물 |
에드워드 3세 흑태자 에드워드 리처드 2세 헨리 4세 헨리 5세 |
프랑스의 주요 인물 |
필리프 6세 장 2세 샤를 5세 잔 다르크 샤를 7세(승리왕) |
주요 전투 |
크레시 전투 칼레 포위전 푸아티에 전투 아쟁쿠르 전투 오를레앙 포위전 슬로이스 해전 |
또한 브레티니 조약으로 인한 휴전으로 해고되면서 사회불안[20]의 원인이었던 용병대를 카스티야 왕국 원조로 유도하고 이것으로 외교상의 성공을 얻게 되었다. 해고된 용병들은 흑태자 에드워드가 지배하여 치안이 안정되었던 아키텐에서 쫓겨나 아비뇽 교황청 주변에 주둔했다. 이들 용병대를 토벌하려했던 라-마르슈 백작의 군대는 패배했다. 또 오스만 제국에 대한 십자군으로써 동방에 파견된 용병들은 돈을 받은 뒤 신성로마제국에서 약탈을 벌인 후, 다시 프랑스로 돌아왔다.
한편 해상에선 슬로이스 해전이래 괴멸상태에 있던 프랑스 함대를 재건하기 위해 노르망디의 병기공장 크로-데-갈레을 부지런히 움직여 많은 함선을 건조시켰고 또한 프랑스 제독직을 프랑스 대원수와 동등한 특권을 가지는 직책으로 부활시켜, 장 드 비엔느을 그 직위에 임명했다. 드 비엔느는 그의 부관 에티엔느 뒤 무스티에와 더불어 와이트섬 및 라이, 윈첼시, 포츠머스, 헤이스팅스, 그레이브젠드 등 잉글랜드 본토의 연안지대를 습격하는 것을 되풀이해 잉글랜드측을 크게 괴롭혔다. 또 카스티야 왕국과 동맹을 맺는 데 성공하여 그 해군력을 이용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자, 원조를 얻어 1372년 라 로셸 해전은 프랑스측의 승리로 끝났고, 이것으로 잉글랜드의 제해권에 대한 위신을 흔들어 놓았다.
무용과 기사도를 좋아하며 완강했던 아버지 장 2세와 정반대로 불필요한 전투를 피하고, 적의 피로를 기다려 착실하게 성과 도시를 탈환하는 전법, 적절한 타협을 이끌어 내는 뛰어난 수완 등 현실적인 정책으로 인해 치세말에는 브레티니 조약으로 잃었던 영토를 거의 대부분 탈환했다. 그가 칼레, 바이욘, 보르도[21]의 잉글랜드군을 완전히 몰아내지 않고 정전을 맺은 것도 현실적인 계산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병약하였고 독서를 좋아했다. 막대한 장서를 보유하였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의 나라 등의 고전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였다. 그 외에도 톨레도 사교였던 에비라르 트레몽고잉에게 명하여 정치적 팜플렛인 과수원정의 꿈, 늙은 순례자의 꿈 등을 출판시켜, 프랑스 교회의 독립(갈리카니즘의 시작)을 주장했다.
프랑스 왕가의 문장을 변경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작은 백합문장(백합꽃을 무수히 흩어뿌렸던 문장)에서 백합꽃 3개를 나란히 한 문장으로 변경했다.(플뢰르 드 리 참조)
화폐정책에 있어서 리지부 사교 니콜라 오렘의 학설을 따라 화폐가치를 안정시켜 귀금속 함유율이 높은 통화를 발행하는 것을 계속했다. 그의 조부 필리프 6세 및 그의 아버지 장 2세가 화폐의 평가절하로 이익을 얻은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이것이 임시적 과세의 항상화에 반대되기도 했다.
그의 치세중인 1377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에 의해 교황청이 아비뇽에서 로마로 돌아갔으나 이듬해 서방 교회의 대분열 사건이 일어났다.
2. 4. 내치와 개혁
백년 전쟁 기간 중 푸아티에 전투(1356년)에서 패배한 부왕 장 2세가 잉글랜드의 포로가 되자, 왕태자였던 샤를 5세가 섭정을 맡아 어려운 국정을 이끌었다.[17] 당시 프랑스는 전쟁으로 피폐해졌고, 샤를 드 나바르[18]의 회책에 시달렸다. 샤를 5세는 에티엔느 마르셀이 이끈 파리 반란과 자크리의 난을 진압하고, 부왕이 포로가 된 직후 맺었던 런던 조약의 비준과 실행을 거부하고 잉글랜드와 브레티니 조약(1360년)을 맺는 데 성공했다.샤를 5세는 정기적인 임시징세를 실시하여 현재 세금의 기초를 마련하고, 상비군과 관료층을 갖추는 등 후세 프랑스 절대왕정의 기초를 닦았다. 샤를 5세를 섬겼던 군인과 관료 중에는 샤를 6세 시대에 마르무젤[19]이라 불리는 관료들이 나왔다.
군사적으로는 명장 베르트랑 뒤 게클랭을 중용하여 잉글랜드에게 빼앗긴 영토 회복을 꾀했다. 1364년 코쉬레르 전투에서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은 샤를 드 나바르의 군대를 격파하여, 카를로스의 프랑스 왕위 요구를 좌절시키고 노르망디의 영토를 빼앗아 잉글랜드의 교두보로 쓰이는 것을 막았다. 대신 카를로스에게는 남프랑스 영지가 주어졌다.
브레티니 조약으로 인한 휴전으로 해고되어 사회 불안[20]의 원인이었던 용병대를 카스티야 왕국 원조로 유도하여 외교적 성공을 거두었다. 해고된 용병들은 흑태자 에드워드가 지배하던 아키텐에서 쫓겨나 아비뇽 교황청 주변에 주둔했다. 이들을 토벌하려던 라-마르슈 백작의 군대는 패배했다. 오스만 제국에 대한 십자군으로 동방에 파견된 용병들은 돈을 받은 뒤 신성로마제국에서 약탈을 벌이고 프랑스로 돌아왔다.
슬로이스 해전 이후 괴멸 상태였던 프랑스 함대 재건을 위해 노르망디의 병기공장 크로-데-갈레에서 많은 함선을 건조했다. 프랑스 제독직을 프랑스 대원수와 동등한 특권을 가진 직책으로 부활시켜 장 드 비엔느를 임명했다. 드 비엔느는 부관 에티엔느 뒤 무스티에와 함께 화이트섬, 라이, 빈체르시, 포츠머스, 헤이스팅그스, 그레부젠드 등 잉글랜드 연안 지대를 습격했다. 카스티야 왕국과의 동맹으로 해군력을 이용하여 1372년 라 로세르 해안에서 승리하여 잉글랜드의 제해권을 위협했다.
아버지 장 2세와 달리 불필요한 전투를 피하고 적의 피로를 기다려 성과 도시를 탈환하는 전법, 적절한 타협을 이끌어내는 수완 등 현실적인 정책으로 치세 말에는 브레티니 조약으로 잃었던 영토 대부분을 되찾았다. 칼레-바이욘느, 보르도[21]의 잉글랜드군을 완전히 몰아내지 않고 정전을 맺은 것도 현실적인 계산 때문이었다.
병약했던 샤를 5세는 독서를 좋아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국가론,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 등을 프랑스어로 번역했다. 톨레도 사교 에비라르 트레몽고잉에게 과수원정의 꿈, 늙은 순례자의 꿈 등을 출판시켜 프랑스 교회의 독립을 주장했다.
프랑스 왕가의 문장을 작은 백합 문장(백합꽃을 무수히 흩어뿌린 문장)에서 백합꽃 3개를 나란히 한 문장으로 변경했다.
화폐 정책에서는 니콜라 오렘의 학설을 따라 화폐 가치를 안정시키고 귀금속 함유율이 높은 통화를 발행했다. 이는 조부 필리프 6세와 부왕 장 2세가 화폐 저질화로 이익을 얻은 것과 대조적이며, 임시적 과세의 항상화에 반대되기도 했다.
1377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에 의해 교황청이 아비뇽에서 로마로 돌아갔으나, 이듬해 서구 교회 대분열 사건이 일어났다.
장 2세는 독단적인 재판과 의심스러운 인물의 승진으로 귀족들을 소외시킨 경솔한 통치자로 여겨졌다. 1355년 백년전쟁이 재개되고 흑태자 에드워드가 프랑스 남서부를 습격했다. 노르망디로의 영국 침입을 저지한 후, 장 2세는 1356년 9월 루아르 강을 건너 푸아티에에서 흑태자의 군대를 공격하려 했다. 푸아티에 전투(1356년 9월 19일)에서 영국 궁수들은 프랑스 기병대를 전멸시켰고, 장 2세는 포로로 잡혔다.[5] 샤를은 푸아티에 전투에서 일찍 철수한 대대를 이끌었는데, 이 명령이 장 2세로부터 나왔는지, 샤를 자신이 철수 명령을 내렸는지는 불분명하다.[6]
전투 결과는 귀족들 사이에 많은 불만을 야기했다. 샤를과 그의 형제들은 비난을 피했고, 파리로 돌아왔을 때 영예로운 환대를 받았다. 프랑스의 도핀은 10월에 프랑스 삼부회를 소집하여 국가 방위를 위한 자금을 요청했다. 삼부회는 부실한 관리에 분노했고, 에티엔 마르셀이 이끄는 단체로 조직되었다. 마르셀은 7명의 왕실 장관 해임, 28명의 의회 설치, 샤를 악당의 석방을 요구했다. 도핀은 이 요구를 거부하고 삼부회를 해산하고 파리를 떠났다.
샤를은 자금 조달을 위해 화폐 가치를 떨어뜨리려 했지만, 마르셀은 파업을 명령했고, 도핀은 계획을 취소하고 1357년 2월 삼부회를 다시 소집했다. 제3신분은 도핀에게 대칙령을 제출했다.[7] 샤를은 결국 칙령에 서명했지만, 해임된 그의 고문들은 보르도에 투옥된 장 2세에게 이 문서에 대한 소식을 전했다. 왕은 잉글랜드로 흑태자에게 끌려가기 전에 칙령을 거부했다.
샤를은 그해 여름 전국을 순회하며 지방의 지지를 얻고 파리를 되찾았다. 한편 마르셀은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의 주장만큼 프랑스 왕위 계승권이 타당하다고 주장한 샤를 악당을 끌어들였다.
마르셀은 파리에서 신성한 피난처를 찾던 시민의 살해를 이용하여 도핀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그는 3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왕궁에 진입하여 군중이 도핀의 눈앞에서 두 명의 숙위를 살해하도록 했다. 샤를은 공포에 질려 일시적으로 군중을 진정시켰지만, 가족을 데리고 수도를 떠났다. 마르셀의 행동은 귀족들 사이에서 제3신분에 대한 지지를 붕괴시켰고, 자케리를 지원한 것이 도시들로부터의 지지를 약화시켰다. 그는 1358년 7월 31일 폭도에게 살해되었다. 샤를은 그 다음 달에 파리를 되찾았고 마르셀의 측근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사면령을 발표했다.
존의 포로 생활은 푸아티에 전투 이후 평화 협상에서 영국에 유리한 고지를 제공했다. 왕은 1359년에 런던 조약에 서명했는데, 이 조약은 프랑스 서부 대부분을 영국에 할양하고 프랑스에 400만 에퀴라는 막대한 몸값을 부과했다. 도핀(그의 고문들과 삼부회의 지지 하에)은 조약을 거부했고, 에드워드 영국 왕은 그 해 말에 프랑스를 침략했다. 에드워드는 12월에 랭스에, 3월에는 파리에 도착했지만, 샤를은 마르셀에 의해 개선된 파리 시가지 요새화에 의존하여 그의 군대가 영국군과 직접 대결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는 왼쪽 강둑(리브 고슈)의 성벽을 재건하고, 오른쪽 강둑(리브 드와트)에 새로운 성벽을 건설했는데, 이 성벽은 바스티유로 이어졌다. 에드워드는 시골을 약탈했지만 프랑스군을 결정적인 전투로 몰아넣을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조건을 완화하는 데 동의했다. 이 비대결 전략은 샤를 통치 기간 동안 프랑스에 매우 유익했다.
1360년 5월 8일에 체결된 브레티니 조약은 프랑스 서부의 3분의 1(대부분 아키텐과 가스코뉴에 있음)을 영국에 할양하고 왕의 몸값을 300만 에퀴로 낮추었다. 장 왕은 그 해 10월에 석방되었다. 그의 둘째 아들인 앙주의 루이가 인질로 그의 자리를 대신했다.
아버지가 자유를 되찾았지만, 샤를은 거의 동시에 큰 개인적인 비극을 겪었다. 세 살 난 그의 딸 조안과 유아였던 딸 본이 1360년 말 두 달 간격으로 사망했다. 샤를 자신도 심하게 아팠고, 머리카락과 손톱이 빠졌다. 일부는 그 증상이 비소 중독의 증상이라고 제안한다.[8]
장은 포로 생활 이전과 마찬가지로 귀환 후에도 통치에 무능력했다. 앙주의 루이가 영국의 감금에서 탈출하자, 장은 자신이 다시 포로 생활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선언했다. 그는 1364년 1월 런던에 도착하여 병에 걸렸고 4월에 사망했다.
2. 5. 서방 교회의 분열
1377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에 의해 교황청이 아비뇽에서 로마로 돌아갔으나 이듬해 서구교회 대분열 사건이 일어났다.[19]1376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는 교황령 상실을 우려하여, 아비뇽 유수 이후 거의 70년 만에 교황청을 로마로 이전하기로 결정했다. 프랑스의 교황청 영향력을 유지하려던 샤를 5세는 "교황이 계신 곳이 바로 로마다"라고 주장하며 교황에게 프랑스에 남아 있도록 설득하려 했지만, 교황은 거절했다.
1378년 3월 교황이 사망하고 후임자를 선출하기 위해 추기경들이 모였을 때, 로마 시민들은 프랑스 추기경들이 프랑스 교황을 선출하여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다시 옮길 것을 우려하여 바티칸을 포위하고 로마 출신 교황 선출을 요구했다. 4월 9일, 추기경들은 바리 대주교이자 평민 출신인 바르톨로메오 프리가모를 교황 우르바노 6세로 선출했다. 새로운 교황은 추기경들의 악덕을 비난하고, 그들의 수입을 제한하며 심지어 한 추기경을 때리기까지 하는 등의 행동으로 추기경들을 소외시켰다. 프랑스 추기경들은 그해 여름 로마를 떠나, 군중의 위협 때문에 우르바누스 6세의 선출이 무효라고 선언하고, 9월 제네바의 로베르 추기경을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로 선출했다.
프랑스 추기경들은 샤를 5세의 지지를 얻기 위해 재빨리 움직였다. 파리 대학교 신학부는 샤를 5세에게 성급한 결정을 내리지 말라고 조언했지만, 그는 11월 클레멘스를 교황으로 인정하고 우르바누스에게 복종하는 것을 금지했다. 샤를 5세의 지지는 클레멘스가 교황으로 생존할 수 있도록 했고, 거의 40년 동안 유럽을 분열시킨 서방교회 분열을 초래했다.
2. 6. 죽음과 유산
샤를 5세는 1380년 9월 16일에 사망하여 11세의 아들 샤를 6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는 파리에서 북쪽으로 약 8km 떨어진 생드니 바실리카(Basilica of St Denis)에 안장되었다.[9] 그의 말년은 노르망디 통합과 나바라의 샤를을 중립화하는 데 집중되었으며, 잉글랜드와의 평화 협상은 계속 실패했다. 잉글랜드와의 전쟁을 위한 세금은 노동 계급의 불만을 야기했다. 1380년 9월 초, 왼팔의 농양이 말라붙자 샤를 5세는 죽음을 준비하며 정부 재정의 기반이었던 화로세(hearth tax) 폐지를 선포했다. 비록 이 조례는 실행 불가능했지만, 이 소식은 알려졌고, 정부가 다른 세금을 감면하지 않자 1381년 말로탱 봉기(Maillotin)가 일어났다.샤를 5세의 명성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의 통치관념은 신하들이 후계자들에게 따르기를 바랐던 것이다. 1404년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대담공의 의뢰로 크리스틴 드 피잔이 쓴 전기는 왕의 삶에 대한 상세한 정보와 함께 후계자들을 위한 도덕적 본보기를 제공한다. 이 전기는 니콜 오레스메와 로마의 질레스의 저술에 크게 의존한다. 필리프 드 메지에르는 그의 우화 "늙은 순례자의 꿈"에서 도팽(훗날 샤를 6세)에게 경건함에서 현명한 아버지를 본받고 개혁에 대한 열정을 추구할 것을 설득한다.
샤를 5세는 확장된 루브르 궁전에 방대한 도서관을 소장했는데, 이는 왕의 권위와 위엄을 상징하는 동시에 공공선을 위한 통치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는 고문들이 접근할 수 있도록 프랑스어 저술들을 수집하는 데 열심이었다. 이 도서관을 위해 니콜 오레스메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니코마코스 윤리학』, 『경제학』을 프랑스어로 최초로 번역했다. 『정치학』과 『경제학』은 통치 교본이었고, 『윤리학』은 왕이 훌륭한 사람이 되는 방법에 대한 조언을 제공했다. 왕실 도서관을 위해 의뢰된 다른 중요한 저술로는 익명의 법률 논문인 "정원의 꿈", 라울 드 프레슬의 번역본(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 포함), 그리고 1377년에 편집되어 에드워드 3세의 봉신 관계를 강조한 『프랑스 대연대기』가 있다.
샤를 5세의 군주권은 왕실 의식과 과학적인 정치 이론 모두에 중점을 두었으며, 동시대 사람들과 후대 사람들에게 그의 생활 방식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권고한 사색적인 삶과 성 루이 9세, 샤를마뉴, 클로비스 1세로부터 유래한 프랑스 군주권의 모범을 동시에 구현한 것이었다. 그는 1364년에 제작된, 현재 영국 도서관에 있는 그의 '대관식 책'에 이를 예시했다.
샤를 5세는 건축가 군주이기도 했으며, 바스티유, 루브르 궁전, 뱅센 샤토, 생제르맹앙레 샤토 등 여러 중요한 건물을 14세기 후반 양식으로 건설하거나 재건축했다. 이 건물들은 당시 귀족들에 의해 널리 모방되었다.
그는 여러 면에서 전형적인 중세 왕이었지만, 샤를 5세는 그의 실용주의로 인해 브레티니 조약에서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성공은 덧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샤를 5세의 형제들은 서로 다투며 정부를 분열시켰고, 샤를 6세는 군주 직무보다 무술 대회를 선호했으며, 1392년 그의 광기로의 추락은 그의 삼촌들을 다시 권력에 올려놓았다. 1419년까지 프랑스는 아르마냐크와 부르고뉴 파벌로 분열되었고, 잉글랜드의 헨리 5세는 프랑스 북부를 정복하고 있었다. 샤를 5세의 힘겹게 얻은 승리는 그의 후계자들의 부패로 인해 사라졌다.
3. 평가
샤를 5세는 브레티니 조약으로 잃었던 영토를 회복한 왕으로, 그의 실용주의적인 통치 방식은 높이 평가받았다. 그는 대규모 전투보다는 소모전 전략을 선택하여, 프랑스와 카스티야 해군을 통해 1372년 라로셸 해전에서 영국 함대를 격파했다. 베르트랑 뒤 게스클랭을 프랑스 컨스터블로 임명하여 기습, 포위 공격, 결전을 결합한 전략으로 영국군을 격퇴했다. 1375년까지 샤를 5세는 칼레와 가스코뉴를 제외한 대부분의 프랑스 내 영국 영토를 회복했다.[1]
샤를 5세의 통치관은 후대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크리스틴 드 피잔은 그의 전기를 통해 샤를 5세를 도덕적 본보기로 제시했다. 샤를 5세는 니콜 오레스메와 로마의 질레스의 저술에 크게 의존했으며, 필리프 드 메지에르는 샤를 5세를 현명한 아버지로 묘사하며 그의 개혁 정신을 본받을 것을 권고했다.[2]
샤를 5세는 학문과 예술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루브르 궁전에 방대한 도서관을 설립하여 1,200권이 넘는 책을 소장했다. 특히 니콜 오레스메에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니코마코스 윤리학』, 『경제학』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게 했다. 또한, 라울 드 프레슬에게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을 번역하게 하고, 『프랑스 대연대기』를 편집하여 에드워드 3세와의 봉신 관계를 강조했다.[3]
샤를 5세는 바스티유, 루브르 궁전, 뱅센 샤토, 생제르맹앙레 샤토 등 중요한 건물을 건설하거나 재건축한 건축 군주이기도 했다.[4]
크리스틴 드 피잔은 샤를 5세를 "현명하고 교활한" 왕으로 묘사했으며, 랭커스터 공작 존 오브 폰트는 그를 "국왕의 대리인"이라고 평가했다. 샤를 5세는 마키아벨리주의적인 면모를 보였으며, 교양 과목을 모두 섭렵한 매우 교양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점성술에도 관심이 많아 도서관의 7분의 1을 점성술, 천문학, 예언에 관한 서적으로 채웠다.[5]
하지만 샤를 5세의 성공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의 사후, 형제들 간의 권력 다툼과 샤를 6세의 광기로 인해 프랑스는 다시 혼란에 빠졌다. 아르마냐크파와 부르고뉴파의 분열, 그리고 잉글랜드의 헨리 5세의 침략으로 샤를 5세가 이룩한 성과는 사라졌다.[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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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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