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슈 단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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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슈 단다이는 무로마치 막부 시대에 무쓰국과 데와국을 관할했던 직책이다. 오슈 소다이쇼와 오슈 간레이가 전신이며, 1392년 무로마치 막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가마쿠라 공방과 화해하면서 오슈 간레이 직이 폐지된 후 등장했다. 1400년 오사키 아키쓰구에게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오사키 씨가 세습했으나, 다테 다네무네가 무쓰 국 슈고직에 임명된 1514년 이후 무력화되었다. 센고쿠 시대에도 다테 씨가 오슈 단다이를 칭했으며, 다테 마사무네는 도요토미 정권에 신종하며 칭호를 반납하면서 오슈 단다이 제도는 종언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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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슈 단다이 | |
---|---|
개요 | |
명칭 | 오슈 단다이 (奥州探題) |
로마자 표기 | Ōshū Tandai |
관할 지역 | 무쓰 국(陸奥国), 데와 국(出羽国) |
상세 정보 | |
설치 시기 |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 말기 |
폐지 시기 |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 |
역할 |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의 오슈(奥州) 통치 |
임명 대상 | 호조 씨(北条氏) 일문 |
역사 | |
배경 |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의 권력 약화 및 오슈 지역 통제 필요성 증대 |
주요 활동 | 오슈 지역의 치안 유지 반란 진압 세금 징수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에 대한 충성 유지 |
쇠퇴 |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의 혼란 및 아시카가 막부(室町幕府)의 등장으로 폐지 |
관련 인물 | |
주요 인물 | 호조 히데토키(北条英時) 호조 모토토키(北条基時) |
참고 문헌 | |
참고 문헌 | 디지털 다이지센(デジタル大辞泉) 세이센반 니혼 고쿠고 다이지텐(精選版 日本国語大辞典) 가이테이신판 세카이 다이햐카지텐(改訂新版 世界大百科事典) 니혼 햐카 젠쇼 (닛포니카)(日本大百科全書(ニッポニカ)) 부리타니카 국제 대백과사전 소항목 사전(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小項目事典) 햐카지텐 마이페디아(百科事典マイペディア) 야마카와 니혼시 쇼지텐 가이테이신판(山川 日本史小辞典 改訂新版) 오분샤 니혼시 지텐 산테이반(旺文社日本史事典 三訂版) 세카이 다이햐카지텐 나이 겐큐(世界大百科事典内言及) |
2. 역사적 배경
무로마치 시대 奥州|오슈일본어(현재의 도호쿠 지방) 지역의 통치 체제는 중앙의 무로마치 막부와 간토 지방의 가마쿠라 공방 사이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변화를 거듭했다. 초기에는 奥州総大将|오슈 소다이쇼일본어나 奥州管領|오슈 간레이일본어와 같은 직책이 존재했으나, 가마쿠라 공방의 세력이 확대되면서 奥州|오슈일본어 지역 역시 그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에 무로마치 막부는 가마쿠라 공방을 견제하고 奥州|오슈일본어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 또는 강화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으며, 이러한 정치적 배경 속에서 오슈 단다이라는 직책이 설치되고 운영되었다.
2. 1. 전사(前史)
오슈 소다이쇼, 오슈 간레이 등이 오슈 단다이의 전신으로 여겨진다. 겐추 9년(1392년), 무로마치 막부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가마쿠라 공방 아시카가 우지미쓰와 화해하였다. 이 결과 무쓰와 데와 두 지방은 가마쿠라 부의 관할 하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오슈 간레이 직책은 폐지되었다. 무쓰와 데와의 고쿠진(지방 영주)들 역시 가마쿠라 부에 출사하여 섬기는 것이 의무화되었다.오에이 6년(1399년), 가마쿠라 공방 아시카가 미쓰카네는 자신의 동생들인 아시카가 미쓰사다와 아시카가 미쓰나오를 각각 이나무라 고쇼와 시노가와 고쇼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쇼군(막부 중앙 정부)과 가마쿠라 공방 사이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에 막부는 간토와 오슈 지역에서 가마쿠라 부와 대립하고 있던 유력 고쿠진들을 교토 부치슈로 삼아 막부의 직속 신하로 편입시키며 가마쿠라 공방 세력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2. 2. 오사키 씨(大崎氏)의 세습
1400년(응영 7년)에는 오사키 아키쓰구가 오슈 단다이에 임명되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아시카가 씨의 일족인 오사키 씨가 이 직책을 대대로 이어받게 되었다. 오사키 씨는 과거 오슈 간레이 등을 지낸 시바 씨의 후손으로, 이들의 임명에는 당시 세력을 키우던 가마쿠라 구보를 견제하려는 무로마치 막부의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하지만 오슈 단다이의 권한은 실제로는 제한적이었다. 오슈 지방에서는 이미 유력한 구니진(国人)들이 각 군(郡)에서 군사 동원(군세 최촉), 군역 부과 문서 발급(군충장 증판·주진), 막부 명령 전달(사절 준행) 등 수호와 유사한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고 있었다. 또한 오슈 남부는 가마쿠라 구보의 영향력 아래 있는 시노카와 고쇼(篠川御所)와 이나무라 고쇼(稲村御所)의 통제를 받았으며, 다테 씨나 아시나 씨와 같은 일부 강력한 구니진들은 교토 부지슈(京都扶持衆)로서 막부와 직접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오사키 씨가 이들 전체를 강력하게 지배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이러한 유력 구니진들은 점차 자신이 지배하는 군을 기반으로 영토를 확장하며 센고쿠 다이묘로 성장해 나갔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오사키 씨 역시 중앙의 권위보다는 자신의 직접 지배 영역을 확보하고 영토화하는 데 집중하게 되었고, 점차 오슈 지방의 여러 유력 세력 중 하나로 그 위상이 변화하게 되었다.
3. 오사키 씨의 몰락과 다테 씨의 탄다이 취임
다이에이 11년(1514년), 다테 탄네무네가 무쓰 국 슈고직에 임명되면서, 대대로 오슈 탐대직을 세습해 온 오사키 씨의 권위는 크게 약화되어 사실상 그 역할이 끝나게 되었다. 이후 다테 씨는 무력을 통해 오사키 씨를 압도하고 지배하에 두었다.
원래 무쓰 국에는 오슈 탐대가 존재한다는 이유로 슈고가 설치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탐대직을 맡은 오사키 씨 외의 무쓰 국 영주들은 세력의 크기와 관계없이 형식상 '国人|고쿠진일본어'으로 취급받았다. 이는 한 국의 슈고에 버금가는 세력을 가지고 무로마치 막부와 관계를 맺어온 다테 씨에게도 예외는 아니었으며, 이로 인해 書札礼|쇼사쓰레이일본어(서신 교환 시의 격식) 등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분키 3년(1503년)에는 에치고 우에스기 씨와 다테 씨 사이에 서찰례를 둘러싼 분쟁이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다테 씨는 오슈 탐대직 임명을 요구했지만, 당시 무로마치 막부는 아시카가 일문이 아닌 다테 씨가 탐대에 임명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대신 막부는 다테 씨가 '국인' 취급을 받는 것이 오슈 통치에 문제가 된다는 점을 인정하여, 탐대 임명 대신 슈고직에 임명함으로써 다이묘의 격식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타협한 것으로 보인다.[4]
전국 시대에도 오슈 탐대는 막부의 형식적인 관직으로 남아 있었으며, 고지 원년(1555년)에는 탄네무네의 아들인 다테 하루무네가 오슈 탐대에 임명되었다. 하루무네의 탐대 취임 시기를 에이로쿠 2년(1559년)으로 보는 다른 설도 있지만, 이 설 역시 오사키 씨에서 다테 씨로 탐대직이 넘어갔다는 점은 동일하다. 임명이 늦어진 것은 막부가 신중한 절차를 밟았기 때문이며, 실질적으로는 고지 원년(1555년) 단계에서 이미 하루무네는 탐대와 동등한 대우를 받았던 것으로 여겨진다.[5]
무로마치 막부가 멸망한 후 당주가 된 다테 마사무네(하루무네의 손자) 역시 오슈 탐대를 자칭했다. 그러나 덴쇼 18년(1590년), 마사무네가 도요토미 정권에 복속하면서 오슈 탐대 칭호를 반납했다. 한편, 도요토미 정권에 복속하지 않은 오사키 씨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奥州仕置|오슈 시오키일본어). 이로써 오슈 탐대 제도는 명실상부하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참조
[1]
웹사이트
奥州探題(オウシュウタンダイ)とは? 意味や使い方
https://kotobank.jp/[...]
2024-08-09
[2]
웹사이트
奥州(オウシュウ)とは? 意味や使い方
https://kotobank.jp/[...]
2024-08-09
[3]
웹사이트
羽州(ウシュウ)とは? 意味や使い方
https://kotobank.jp/[...]
2024-08-09
[4]
서적
奥州探題考
高志書院
2012
[5]
논문
はるかなる伊達晴宗-同時代史料と近世家譜の懸隔
戎光祥出版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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