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가 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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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가 공방은 무로마치 시대에 가마쿠라 공방이 멸망한 후 아시카가 시게우지를 중심으로 시모사국 고가에 세워진 지방 정권이다. 무로마치 막부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려 했으며, 간토 지방의 유력 호족들과의 갈등, 호리고에 공방과의 대립, 그리고 후호조 씨의 간섭을 겪으며 권력 다툼을 벌였다. 1454년 시작된 교토쿠의 난을 거치며 고가에 정착하여 고가 공방으로 불렸으며, 1583년 아시카가 요시우지가 사망하면서 소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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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카가 하루우지는 아시카가 다카모토의 아들로 태어나 간토 교로쿠의 난을 통해 고가 공방의 지위를 확립했고, 호조 우지쓰나와 동맹하여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멸망시켰으나, 호조 우지야스와 대립하며 가와고에 성 전투에서 패배하여 은퇴 후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 간토 아시카가씨 - 가마쿠라 공방
가마쿠라 공방은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간토 지방 통치를 위해 아들 아시카가 모토우지를 가마쿠라로 보내면서 시작된 무로마치 막부의 지방 통치 기구이자 그 수장을 가리키며, 간토 간레이의 보좌를 받아 간토 10개 국을 다스렸으나 막부와 대립, 이후 고가 공방의 등장과 새로운 가마쿠라 공방 파견으로 복잡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 고가시 (이바라키현) - 구마자와 반잔
에도 시대 유학자 구마자와 반잔은 양명학을 바탕으로 사회 현실과 민생 문제에 관심을 갖고 정치 개혁을 주장했으며, 저술 활동을 통해 사회 비판을 이어가 막말 존왕양이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 고가시 (이바라키현) - 아시카가 하루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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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카가 요시아키라는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아들이자 무로마치 막부의 제2대 쇼군으로, 간노의 소란 이후 막부의 정무를 맡아 남북조 시대 혼란 수습과 막부 권력 강화를 위해 소송 제도 정비, 유력 수호 세력 억압 등의 정책을 추진했다. - 간토 공방 - 간토 관령
간토 관령은 무로마치 막부 시대에 간토 지역을 통괄하며 가마쿠라 구보를 보좌하던 직책으로, 우에스기 씨가 세습하다가 센고쿠 시대 혼란을 겪으며 명목상 직위로 남았다.
| 고가 공방 | |
|---|---|
| 개요 | |
| 종류 | 아시카가 씨의 일문 |
| 존속 기간 | 무로마치 시대 ~ 센고쿠 시대 |
| 거점 | 고가 성 |
| 씨족 | 아시카가 씨 |
| 역대 당주 | |
| 초대 | 아시카가 시게우지 |
| 2대 | 아시카가 마사우지 |
| 3대 | 아시카가 다카모토 |
| 4대 | 아시카가 하루우지 |
| 5대 | 아시카가 요시오우지 |
| 계보 | |
| 시조 | 아시카가 시게우지 |
| 주요 인물 | |
| 가신 | 우쓰노미야 씨 오야마 씨 유키 씨 나스 씨 지바 씨 하라 씨 |
| 관련 인물 | |
| 관련 가문 | 고슈 호조 씨 오다 씨 |
| 기타 | |
| 관련 전투 | 교토쿠의 난 |
2. 성립과 배경
무로마치 막부는 간토 지방 통치를 위해 가마쿠라부를 설치했으나, 1439년 에이쿄의 난으로 가마쿠라 공방 아시카가 모치우지가 토벌되면서 멸망했다. 이후 1440년 유키 합전을 거치며 우에스기 씨가 세력을 확대했지만, 전통적인 호족들의 반발을 샀다.
1447년 막부는 모치우지의 아들 아시카가 시게우지를 제5대 가마쿠라 공방으로 임명하여 가마쿠라부를 재건했다. 그러나 1450년 에노시마 전투가 발생하는 등, 호족들과 간토 관령 가문 간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1452년 막부의 정책 변화로 가마쿠라 공방은 더욱 엄격한 통제를 받게 되었다.[4][5][6]
1454년 시게우지가 간토 관령 우에스기 노리타다를 살해하면서 교토쿠의 난이 시작되었다. 1455년 분베가와라 전투 등 초기에는 시게우지 세력이 우세했지만, 막부의 토벌 결정으로 이마가와 노리타다에게 본거지 가마쿠라를 빼앗겼다. 시게우지는 시모사국 고가를 새로운 본거지로 삼았고, 이후 고가 공방이라 불리게 되었다.[4][7][8][9]
2. 1. 가마쿠라부 멸망과 재흥
무로마치 막부는 정과 5년(1349년) 간토 지방 분국 통치를 위해 가마쿠라부를 설치했다. 에이쿄 11년(1439년), 제4대 가마쿠라 공방 아시카가 모치우지와 6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 간토칸레이우에스기 노리자네가 대립하여, 모치우지가 토벌되고 가마쿠라부는 멸망했다(에이쿄의 난).이듬해 에이쿄 12년(1440년), 막부와 간토칸레이·우에스기 씨에 반발하는 유키 씨의 유키 우지토모를 비롯한 여러 호족들이 모치우지의 아들 하루오마루·야스오마루 형제를 받들어 시모사 유키성에 농성하자, 우에스기 기요카타가 이를 진압했다(유키 합전). 에이쿄의 난과 유키 합전으로 우에스기 씨는 소령을 확대했지만, 압박받은 전통적인 호족들의 반발은 이후 대란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아시카가 요시노리 사후, 막부는 모치우지의 옛 신하들의 가마쿠라부 재흥 요청을 받아들여 분안 4년(1447년) 모치우지의 아들 아시카가 시게우지가 제5대 가마쿠라 공방에 취임했다. 막부에서는 전 관령 하타케야마 모치쿠니가 지원했고, 우에스기 씨도 새로운 가마쿠라 공방이 대립하는 여러 호족과의 중재자가 되기를 기대했다. 간토 관령은 우에스기 노리자네의 아들 노리타다로 교체되었다.[4][5][6]
그러나 오야마 씨, 유우키 씨, 우츠노미야 씨, 치바 씨, 나스 씨, 오다 씨 등 전통적인 호족과 간토 관령 야마우치 우에스기 가문, 오기야쓰 우에스기 가문과의 긴장 관계는 개선되지 않았다. 호토쿠 2년(1450년) 야마우치 우에스기 가문의 가재(家宰) 나가오 카게나카 및 오기야쓰 우에스기 가문의 가재 오타 스케키요가 시게우지를 습격하는 사건(에노시마 전투)이 발생했다. 위기를 모면한 시게우지는 양측의 처분을 막부에 호소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쿄토쿠 원년(1452년) 관령이 호소카와 가쓰모토로 바뀌자, 막부의 대(對) 동국(東国) 정책도 변화하여, 간토 관령의 중개 없이 보내는 서신은 받지 않는 등 가마쿠라 공방에 대해 엄격한 자세를 취했다.[4][5][6]
2. 2. 고가 공방 성립 (교토쿠의 난)
교토쿠의 난은 오닌・분메이의 난에 필적하며, 관동에서의 전국 시대를 여는 사건이다.[2] 그 이전의 정치 체제가 크게 동요했고, 신흥 세력인 후호조씨가 대두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후호조씨의 관동 지배는 고가 공방 체제에 접촉하여 그 내부에 들어가고, 이윽고 체제 전체를 변화시켜 자신의 관동 지배 체제의 일부로서 포섭하는 과정이었다.[3]아시카가 요시노리 사후, 막부는 아시카가 모치우지의 옛 신하들의 가마쿠라부(가마쿠라부) 재흥 요청을 받아들여 1447년에 모치우지의 유아들인 하루오마루와 야스오마루 형제의 아시카가 시게우지가 제5대 가마쿠라 공방에 취임했다. 1454년(교토쿠 3년) 아시카가 시게우지에 의한 간토 관령 우에스기 노리타다 모살을 계기로 교토쿠의 난이 발발한다. 1455년(교토쿠 4년) 분베가와라 전투・오구리 성 전투 등, 초전은 시게우지 세력이 유리했지만, 무로마치 막부는 시게우지 토벌을 결정, 같은 해 6월, 우에스기씨 원군의 이마가와 노리타다 세력은 시게우지가 원정으로 부재 중이던 본거지・가마쿠라를 제압했다. 시게우지는 시모사국의 고가를 새로운 본거지로 삼았기 때문에, 이를 고가 공방이라고 부른다.[4][7][8][9] 1455년(교토쿠 4년) 7월, 연호가 고쇼로 개원되었지만, 시게우지는 개원을 정식으로 통지받지 못했다며 교토쿠를 계속 사용했기 때문에, 이때부터 시작된 내란은 "교토쿠의 난"이라고 불리게 되었다.[1]
1483년 1월 6일 시게우지와 막부 사이에 "도비 화목"이 성립했다.[4][7][8][9] 이 화목의 결과, 실질적으로 시게우지는 간토 공방의 지위를 다시 막부로부터 승인받은 것으로 생각된다.[9]
3. 고가의 본거지화
교토쿠의 난은 오닌-분메이의 난에 버금가는 큰 사건으로, 관동 지방에서 전국 시대가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2] 이로 인해 기존 정치 체제가 흔들리고, 후호조씨 같은 새로운 세력이 성장했다.
이전에는 관동 지방의 전국 시대를 주로 후호조씨 중심으로 이해했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가마쿠라 공방의 정통 후계자로 여겨진 고가 공방을 중심으로 한 권력 구조가 존재했다.[3] 후호조씨는 고가 공방 체제에 접근하여 그 내부로 들어가, 결국 체제 전체를 변화시켜 자신의 관동 지배 체제의 일부로 흡수했다.
3. 1. 고가 이전의 배경
아시카가 시게우지가 향토쿠의 난 당시 새로운 거점으로 고가를 선택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경제적 기반: 가마쿠라 공방의 고료쇼는 가신단에 의해 경영되어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주요 거점은 가마쿠라 주변의 사가미국과 시모카베 장원을 중심으로 한 간토 평야 중심부였으며, 시모카베 장원의 거점이었던 고가는 경제적으로 적합했다. 아시카가 가문의 가신 야나기다 씨와 노다 씨는 각각 시모카베 장원의 미즈우미·세키야도와 고가·구리하시를 기반으로 삼아 시게우지의 고가 이전 후에도 세키야도 성 및 구리하시 성을 거점으로 고가 공방을 지지했다.[11][4]
- 지리적 조건(휘하 무가·호족의 결속점): 시게우지의 고가 이전 당시, 시모노국·시모사국 전체, 히타치국 대부분이 고가 공방 세력 하에 있었다. 고즈케국·무사시국 대부분, 사가미국·이즈국 전체는 우에스기 씨 지배 하에 있었다. 고즈케국 동부·무사시국 북동부·히타치국 남부가 분쟁 지역이었다. 따라서 고가는 각지에 산재한 지지 세력의 중심에 있었고, 이들을 묶는 부채꼴의 요지와 같은 위치에 있었다.[12] 고가 공방을 지지한 무가·호족은 시모노의 우쓰노미야 씨(아키쓰나, 마사쓰나)·나스 스케모치·오야마 모치마사, 시모사의 유키 씨(초기에는 나리토모, 이후 우지히로)·지바 씨(야스토·스케타네·지바 타카타네), 히타치의 사타케 요시토시·오다 모치이에, 고즈케 동부의 이와마쓰 모치쿠니 등이다. 특히 오야마 모치마사는 시게우지가 "형제의 계약" 관계라고 부를 정도로 강하게 신뢰했다.[13] 우쓰노미야 씨나 지바 씨는 지지파와 반대파 간의 내분 결과, 고가 공방 측에 서게 되었다. 우에스기 씨의 영향력이 약한 가즈사국·아와국에는 각각 고가 공방 가신의 다케다 노부나가·사토미 씨(요시자네?)가 입부했다. 한편, 히타치국 남부의 쓰쿠바 군·이나시키 군·마카베 군에서는 우에스기 씨의 영향력이 강했다.[12]
- 수상 교통: 고가는 수상 교통의 간선이 되는 하천이 모여 있었다. 당시의 하천은 현재의 철도·자동차에 필적하는 최대의 물류·교통 수단이었다. 와타라세가와·토네가와 수계에서는 상류의 와타라세가와·오모이가와가 아시카가 씨와 관련된 시모노국 아시카가 장원, 그리고 이와마쓰 씨나 오야마 씨 등의 유력 호족 거점과 직결되었다. 하류의 타이히가와(현재의 에도가와)는 고가 공방 고료쇼인 시모카베 장원을 종단했다.(당시 와타라세가와·토네가와 하구는 도쿄만) 히타치 강 (현재의 토네가와 하류, 이바라키·지바현 경계부) 수계에서는 인바누마에 면한 사쿠라를 거점으로 하는 유력 호족의 지바 씨와 연결되었다.[14][9]
- 기타: 토네가와나 와타라세가와를 비롯한 크고 작은 하천과 호소·습지가 우에스기 세력에 대한 천연의 해자가 되어 지키기 쉬운 지형이었다. 남북조 시대부터 전략상의 요충지로 정비되어 온 점도 잘 지적되고 있다.[4][8]
한편, 고가로의 이전은 향토쿠의 난 개시 후 이른 단계에서 어느 정도 계획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설[15]과 오구리 성 공격에 시간을 소비하는 동안 가마쿠라를 빼앗긴 결과론이라는 설[16]이 대립하고 있다. 시게우지는 가마쿠라 함락 후에도 시모노 방면의 평정을 우선시했고, 산하의 군대에도 동요가 보이지 않았던 점을 볼 때, 가마쿠라부의 본거지인 가마쿠라에 마지막까지 얽매였던 아버지 아시카가 모치우지와 일련의 전란으로 가마쿠라 이외의 땅에서 지낸 기간이 길었던 시게우지 사이에는 가마쿠라에 대한 인식이 달랐을 가능성이 있다.[17]
3. 2. 중세 도시 고가의 모습
고하는 가마쿠라에 이어 도고쿠의 새로운 수도가 되었다. 가마쿠라부에서 계승된 정치・권력은 "고가부"라고도 불렸다[18]。조선의 신숙주는 1471년에 저술한 해동제국기에서 "가즈사 주에 있는 가마쿠라도노(고씨)의 거처가 도토라고 불린다"라고 소개했는데, 이 "도토"는 고하를 가리킨다고 여겨진다[19][1][20]。 또한, 공방 휘하의 무장도 고하에 출사하는 것을 "가마쿠라"에 출사한다고 표현하여, 고하가 가마쿠라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쇼인시고』)[21]。
근세(에도 시대)에 마을의 모습이 크게 바뀌어 현재는 당시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몇 가지 밝혀진 사실이 있다. 고가 공방 어소(중세 고가 성)는 근세 고가 성의 혼마루에 해당했다. 근세 이전의 오슈로 향하는 오래된 가도가 고가 성내를 종단하여, 간논지 구루와・사쿠라마치 구루와의 위치에 숙장 마을이 있었다. 『쇼인시고』에는 분메이 연간에 고즈케 국의 이와마쓰 나오즈미가 고하에 출사했을 때, 거성인 가네야마 성에서 고하까지 도네 강을 배로 왕래했고, 어소에는 큰 "사족어문"이 있었으며, 어소 주변에 숙소라고 불리는 가신단의 집락이 있었고, 자토・마이마이・사루가쿠 등의 예능 집단이 활동했다는 기록이 있다. 제2대 마사우지 때에는 렌가사인 이나시로 겐사이가 공방가 시의다시로 미키의 치료를 위해 체재하여 전중에서 구회를 개최하기도 했다[22][1][23][24]。
고하에는 가마쿠라에서 많은 호코슈와 기타 가신, 승려・문화인이 이주해 왔다. 고가 성을 중심으로 전개된 성하 마을에는 회선・육운업, 창고・금융업을 운영하는 특권 상인, 및 마구 제작 등의 장인 집단이 살고 있었으며, 경제・의료・기술・종교・문화 면에서도 도고쿠의 최첨단 지역으로 성장했다. 가마쿠라가 가지고 있던 정치・경제・문화적 기능을 상당 부분 계승했다고 여겨지며, 그중에서도 가마쿠라부에서 계승된 정치・권력을 "고가부"라고 부르기도 한다[1]。
4. 「공방-관령 체제」의 재구축 (야마노우치・오기야쓰 우에스기 가문)
교토쿠의 난 이후,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과 오기야쓰 우에스기 가문 사이에 항쟁(초쿄의 난)이 일어났다. 1488년 오기야쓰 우에스기 사다마사가 가재인 오타 도칸을 암살하자,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겐테이가 오기야쓰 세력을 공격했다. 사다마사는 고가 공방 시게우지, 마사우지 등의 지원을 받아 반격했지만, 1494년 사다마사가 진중에서 급사하고 우에스기 토모요시가 가독을 이었다. 토모요시는 이마가와 우지치카와 호조 소운 등의 지원을 받았고, 겐테이는 제2대 고가 공방이 된 마사우지 등의 지원을 받아 대립했다. 1504년 무사시 다치가와라에서 오기야쓰 세력이 크게 이겼지만, 야마노우치 세력이 토모요시의 본거지 가와고에 성을 공격하자, 토모요시는 겐테이에게 화친을 청하여 난이 끝났다.[8][27]
이 항쟁 중에 우에스기 겐테이는 고가 공방과의 유착을 강화했다. "호리코시 공방의 멸망", "우에스기 토모요시와 외부 세력(호조 소운 등)의 유착" 등의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자, 겐테이는 간토 간레이로서 마사우지 곁으로 출사했다. 나아가 마사우지의 동생을 양자로 맞아 후계자(겐지쓰)로 삼는 등, 간토 간레이를 고가 공방 "고이카"로 삼아, 이른바 "공방-간레이 체제"의 재구축과 질서 회복을 추진했다.[28][29]
4. 1. 양 우에스기씨 간의 항쟁 (초쿄의 난)
교토쿠의 난이 끝난 후,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씨와 오기야쓰 우에스기 씨 사이에 항쟁(초쿄의 난)이 일어났다. 1488년(초쿄 2년), 오기야쓰 우에스기 사다마사가 가재인 오타 도칸을 암살하자,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겐테이가 오기야쓰 세력을 공격했다. 사다마사는 고가 공방 시게우지, 마사우지 등의 지원을 받아 반격하여, 사가미 실마키하라, 무사시 스가야하라, 무사시 다카미하라 전투에서 우세했다.[8][27]그러나 1494년(메이오 3년) 사다마사가 진중에서 급사하고, 우에스기 토모요시가 가독을 이었다. 토모요시는 스루가 국의 이마가와 우지치카와 이세 소운(호조 소운) 등의 지원을 받았다. 한편, 겐테이는 제2대 고가 공방이 된 마사우지 등의 지원을 받아 대립했다. 1504년(에이쇼 원년) 무사시 다치가와라에서 오기야쓰 세력이 크게 이겼지만, 에이쇼 2년에 야마노우치 세력이 토모요시의 본거지 가와고에 성을 공격하자, 토모요시는 겐테이에게 화친을 청하여 난이 끝났다.[8][27]
이 항쟁 중에 우에스기 겐테이는 고가 공방과의 유착을 강화했다. "호리코시 공방의 멸망", "우에스기 토모요시와 외부 세력(이세 소운 등)의 유착" 등의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 구 질서가 불안정해지자, 겐테이는 간토 간레이로서 마사우지 곁으로 출사했다. 나아가 마사우지의 동생을 양자로 맞아 후계자(겐지쓰)로 삼는 등, 간토 간레이를 고가 공방 "고이카"로 삼아, 이른바 "공방-간레이 체제"의 재구축과 질서 회복을 추진했다.[28][29]
4. 2. 공방가 내분 (에이쇼의 난)
에이쇼 3년(1506년), 아시카가 마사우지의 적자(嫡子)인 타카모토는 마사우지와의 불화로 인해 장인인 우츠노미야 시게츠나를 의지하여 시모쓰케 우츠노미야로 옮겨가면서 공방가를 동요시키는 내분(에이쇼의 난)이 시작되었다.[30] 불화의 원인은 명확하지 않지만, 타카모토가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아키사다에게 이심이 없음을 맹세하는 기청문을 제출한 것으로 보아 마사우지를 지지했던 아키사다와 타카모토 사이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30] 또한, 마사우지가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씨와의 연계를 중시한 반면, 타카모토는 대립 관계에 있던 고호조 씨를 중시했다는 견해도 있다.[31]에이쇼 6년(1509년), 아키사다 등의 조정으로 타카모토는 마사우지와 화해하고 고가로 돌아왔지만, 이듬해 아키사다가 에치고에서 전사하자 타카모토는 다시 고가 성을 떠나 공방가의 중신 야나다 타카스케의 세키야도 성으로 옮겨갔다. 이와 동시에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에서도 가독 다툼이 벌어져 마사우지는 아키자네를, 타카모토는 노리후사를 지원하면서 공방가와 간토 간레이 가문에 걸친 내분으로 확대되었다.[35][36]
에이쇼 9년(1512년), 노리후사가 아키자네의 본거지인 무사시 하치카타 성을 공략하자 아키자네는 마사우지를 의지해 고가 성으로 도망쳤고, 곧이어 마사우지도 오야마 마사나가를 의지해 오야마 기온 성으로 옮겨갔다. 그 대신 타카모토가 고가 성에 들어가 제3대 고가 공방의 지위를 확립하면서, "공방-간레이 체제"는 마사우지·아키사다(아키자네) 체제에서 타카모토·노리후사 체제로 전환되었다. 이후 노리후사는 타카모토의 아들을 양자로 맞아 간토 간레이의 후계자(노리카즈)로 삼았다.[35][36]
에이쇼 13년(1516년), 타카모토 측의 중심인물인 우츠노미야 시게츠나가 나와츠리의 싸움에서 마사우지를 지지하는 사타케 요시스미·이와키 요시타카에게 승리하고, 마사우지를 지지하던 나스 씨가 우츠노미야 씨와 동맹을 맺고 타카모토 측으로 돌아서는 등, 오야마 씨 내부에서도 타카모토를 지지하는 오야마 마사나가 등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마사우지의 패배는 결정적이 되었다. 마사우지는 오기야 우에스기 토모요시를 의지해 이와츠키 성으로 옮겨갔고, 같은 해 15년(1518년) 토모요시가 사망한 후에는 칸토인 (사이타마현쿠키시)에서 은거했다.[35][36]
한편, 아시카가 타카모토의 동생인 요시아키는 쓰루오카 하치만구 와카미야 별당인 설하전의 지위에 있었고, 처음에는 공연(空然)이라 칭했으나 환속하여 요시아키로 개명했다. 요시아키는 에이쇼의 난 초기에 타카모토에게 협력했지만, 타카모토가 고가 공방의 지위를 확립하자 독자적인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37][35]
에이쇼 14년(1517년), 가즈사의 마리야 다케다 씨가 타카모토 측의 시모사·하라 씨로부터 오유미 성을 탈취하자, 요시아키는 시모카베노 장 타카야나기(구키시 타카야나기)에서 오유미 성으로 옮겨[38] 스스로를 마사우지의 후계자라 칭하며 타카모토와 대립했고, 이로 인해 오유미 공방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 결과 공방 권력은 분열되었고, 오유미 공방은 오기야쓰 우에스기 토모요시 및 아와국의 사토미 씨, 히타치국의 오다 씨·타가야 씨 등에게도 지지를 받는 큰 세력이 되었다. 호조 우지쓰나 역시 마리야 다케다 씨와의 관계 때문에 오유미 공방을 지지했다.[35][8]
에이쇼 16년(1519년), 타카모토는 오유미 측의 거점인 시이즈 성(이치하라시)을 공격했지만, 요시아키는 사토미 씨의 군세로 반격했다. 이후에도 고가 측의 타카기 씨 거점 네기우치 성과 오유미 측의 나토카리 성(나가레야마시) 등 각지에서 격전이 벌어졌고, 고가 측의 중요 거점인 세키야도 성도 오유미 세력의 위협에 시달렸다.[35][8]
5. 공방 권력의 분열 (고가・오유미의 적류 다툼)
고가 공방과 오유미 공방은 권력을 두고 분열되어 대립하였다. 1538년 고후다이 전투에서 오유미 공방이 멸망하면서 이러한 분열 상태는 해소되었다.
5. 1. 오유미 공방의 멸망 (고후다이 전투)
1538년(덴분 7년), 아시카가 하루우지의 뜻을 얻은 후호조 세력이 시모사국 국부대에 진출한 소궁 세력을 격파하면서 (고후다이 전투) 요시아키가 패사하여 소궁공방은 멸망하였다. 이로써 고가・소궁 분열 상태가 해소되었다.[35][8]6. 호조씨와의 관계
아시카가 하루우지는 호조 우지쓰나의 지원으로 코다이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고가 공방은 호조씨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1539년, 우지쓰나의 딸이 하루우지에게 시집가면서 후호조 씨는 고가 공방 가문과 혈연 관계를 맺었다.[39] 이 혼인은 아시카가 다카모토와 후호조 씨 사이에 맺어진 약속이었으나, 하루우지는 이를 무시해왔다. 그러나 코다이 전투 이후 우지쓰나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혼인을 받아들였다. 이후 우지쓰나는 스스로를 고가 공방 아시카가 씨의 "어일가(御一家)"이자 간토 간레이(관동관령)라고 칭하며, 후호조 씨의 간토 지배 정통성을 주장했다.[40]
하루우지는 가와고에 성 전투에서 호조 우지야스와 대립하기도 했지만, 결국 후호조 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552년, 하루우지는 아들 아시카가 후지우지를 폐적하고, 우지야스의 조카이자 사위인 아시카가 요시우지를 제5대 고가 공방으로 삼았다.[39][41][40] 요시우지는 후호조 씨의 보호 아래 권력을 행사하며, 후호조 씨의 간토 지배에 기여했다.
이후 우에스기 겐신과 호조 우지마사는 각자 다른 고가 공방을 옹립하며 대립했다. 1561년, 겐신은 아시카가 후지우지를, 우지마사는 아시카가 요시우지를 옹립하여 간토 간레이의 정통성을 주장했다.[46][41][47] 1569년, 에쓰소 동맹이 성립되면서 요시우지가 고가 공방의 지위를 확립하는 듯했으나, 이는 "공방-간레이 체제"의 기능 상실을 의미했다.[48]
1583년, 요시우지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고가 공방은 자연스럽게 소멸했다.[46][41][40][47]
6. 1. 공방 체제 내 호조씨 대두
제4대 공방 아시카가 하루우지는 호조 우지쓰나의 도움으로 코다이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이를 계기로 고가 공방 체제 내에서 후호조 씨의 영향력이 커졌다. 덴분 8년(1539년), 우지쓰나의 딸이 하루우지에게 시집을 갔다.[39] 그녀는 훗날 호슌인으로 불렸으며, 다음 고가 공방인 아시카가 요시우지의 어머니이다. 이 혼인은 아시카가 다카모토가 후호조 씨와 약속했던 것이었지만, 하루우지는 이를 방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코다이 전투 이후 고가 성 바로 근처까지 세력을 넓힌 우지쓰나의 거듭된 요청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이후 우지쓰나는 스스로를 고가 공방 아시카가 씨의 "어일가(御一家)"이자, 간토 간레이(관동관령)라고 칭하며 후호조 씨를 경계하는 주변의 전통적인 호족들에게 간토 지배의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40]6. 2. 하루우지, 호조 우지야스와 대립 (가와고에 전투)
오기야쓰 우에스기 씨는 후호조 세력의 계속된 공격에 1524년 에도성과 이와쓰키성을 잇달아 잃었고, 1537년에는 본거지인 가와고에성마저 함락당했다. 그러나 1541년 우지쓰나가 사망하자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씨와 오기야쓰 우에스기 씨는 반격을 시작했다. 오기야쓰 우에스기 도모사다와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노리마사는 스루가의 이마가와 요시모토와 협력하여 후호조 세력을 협공하려 했고, 1545년에는 가와고에성을 포위했다.[39][40][8]하루우지는 후호조 가문을 이은 호조 우지야스의 요청에 처음에는 상황을 지켜보았으나, 결국 노리마사의 요청에 응하여 직접 군사를 이끌고 가와고에성 공격에 참여했다. 그러나 1546년 가와고에 전투에서 양 우에스기·고가 공방 연합군은 적은 수의 후호조 세력에게 패배했다. 도모사다는 전사하고, 노리마사는 고즈케 히라이성으로, 하루우지도 고가성으로 패주했다. 이후 노리마사는 에치고국으로 도망갔고, 고즈케국도 후호조 씨의 세력권에 들어갔다.[39][40][8]
열세에 놓인 하루우지는 후호조 씨의 개입을 막을 수 없게 되어, 다음 고가 공방이 될 예정이었던 아시카가 후지우지를 폐적하고, 1552년에는 자신도 물러나 우지야스의 조카이자 사위인 아시카가 요시우지를 제5대 고가 공방으로 삼았다. 요시우지는 후호조 씨의 보호 아래 권력을 행사하며, 후호조 씨가 간토의 여러 호족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39][41][40][8]
6. 3. 우에스기 겐신과 호조 우지마사의 공방 옹립 다툼
1560년(영록 3년), 호조 우지야스가 은거하고, 호조 우지마사가 가독을 계승한 직후, 나가오 가게토라(후의 우에스기 겐신)가 관동 침공을 시작했다. 가게토라는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로부터 어내서를 얻은 후, 에치고로 도망친 우에스기 노리마사를 받들고, 미쿠니 고개에서 고즈케로 진출했다. 1561년(영록 4년), 아시카가 요시우지의 세키야도 성을 포위하고, 고가 성에는 가게토라가 정통 고가 쿠보로 옹립한 아시카가 후지우지가 들어갔다. 이때, 노리마사 및 가게토라를 지원하는 코노에 사키히사도 고가 성에 들어갔다. 한편, 요시우지는 후호조 측에 참진하도록, 관동 여러 무사들에게 다수의 군세 독촉장을 발급했지만, 결국 고가 성에 가까운 세키야도 성에서 퇴거했다.[46][41][47][8]같은 해, 가게토라는 더욱이 후호조 씨 본거지인 오다와라성을 공격했지만, 함락에는 이르지 못하고 철수한다. 그 직후, 가게토라는 우에스기 노리마사로부터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의 명적을 양도받아, 간토 칸레이도 계승했다. 우에스기 마사토라, 후에 테루토라로 개명한 가게토라와, 호조 우지마사는 각각 다른 고가 쿠보를 받들고 스스로의 관동 관령의 정통성을 다투게 되었다. 그 후에도 양자는 서로 공방을 반복하여, 1562년(영록 5년)에는, 호조 우지테루의 공세를 받아, 후지우지·노리마사 등이 고가 성에서 퇴거했다.[46][41][47][8]
6. 4. 고가 공방의 소멸
1569년(영록 12년), 다케다 신겐의 동향을 경계한 우에스기 겐신과 호조 우지마사 사이에 에쓰소 동맹이 성립되었다. 그 결과, 요시우지는 고가성에 들어가 고가 공방의 지위를 확립했다. 그러나 고가 공방 및 간토 간레이의 정통성 다툼이 타협으로 종결된 것은 양측 모두 간토 간레이에 대한 관심이 낮아졌다는 것, "공방-간레이 체제"가 기능을 상실했음을 보여준다.[48] 에쓰소 동맹 이후, 후호조 씨의 간토 지배가 확정되면서 고가 공방을 옹립할 필요성도 낮아졌다. 고가 공방 가신들의 영지 분배도 구리하시성에 들어간 호조 우지테루에 의해 실시되었고, 야나다 씨, 잇시키 씨 등의 중신 가문에서는 고가 공방을 지지했던 야나다 하루스케, 잇시키 나오토모 대신 호조 씨에게 충실한 서류가 요직을 차지하게 된다.[49]1582년(덴쇼 10년), 다케다 가쓰요리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멸망하고, 고즈케국은 노부나가의 중신 다키가와 가즈마스에게 주어졌다. 아시카가 요시우지는 가즈마스에게 서장을 보내 오다 정권과의 관계를 확립하려 했지만, 가즈마스는 사토미 요시요리나 요시요리가 옹립했던 아시카가 요리즈미(요시아키의 아들)와 교섭을 가졌지만, 고가 공방의 서장에 대해서는 묵살했다. 이 때문에 오다 정권이 도고쿠를 평정한 후에 호조 씨에 가까운 고가 공방을 폐하고, 고유미 공방을 부흥하는 것을 검토했다는 설이 있다.[50]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노부나가는 혼노지의 변으로 죽임을 당하고, 가즈마스도 호조 씨에게 패하여 간토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이 위기는 회피되었다.
1583년(덴쇼 11년), 요시우지가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한 후에도, 아무런 대책이 취해지지 않은 채 고가 공방은 자연스럽게 소멸했다.[46][41][40][47][8] 그 후에도 고가성에는 요시우지의 딸(씨히메)을 옹립한 고가 공방 숙로 · 가신단이 있었고, 고가 아시카가 가문 자체는 계속 존속했다. 간토 지방의 구니진(국인)에 대한 관직 임명 권한은 후호조 씨에게 넘어갔지만, 아시카가 씨에게 인정된 특권이었던 고잔의 공첩 발급 권한(고가 공방의 경우 가마쿠라 고잔)을 후호조 씨가 계승할 수는 없었고, "새로운 공방이 결정될 때까지"라는 명목으로 숙로들이 임시 공첩을 계속 발급했다.[51]
7. 역대 고가 공방
노리타다 모살 후에는 간토칸레이(후사아키·아키사다)와 대립.
우에스기 아키자네(공방가에서 양자)
우에스기 노리카즈(공방가에서 양자)
우에스기 노리마사(노리후사의 친자)
우츠노미야 나리츠나, 유우키 마사토모 등 타카모토를 지지하는 다이묘들의 지원으로 취임.
호조 우지츠나(아시카가 하루우지 보임)[55]
호조 우지야스(아시카가 하루우지 보임)
호조 우지마사(아시카가 요시우지 보임)
우에스기 테루토라(겐신)
통상, 역대에는 세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