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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폰 발트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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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토 폰 발트부르크는 16세기 인물로, 스와비아 출신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튀빙겐 대학교 등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파비아 대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543년 아우크스부르크의 교구장이 되었으며, 교황 바오로 3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그는 카를 5세를 지지하며 슈말칼덴 전쟁에 관여했고, 아우크스부르크 교구의 개혁을 위해 노력했다. 딜링겐 대학교와 신학교를 설립했으며, 로마에서 종교 재판 수장과 알바노 추기경 주교를 역임했다. 1568년부터 로마에서 거주하다 사망했으며, 드라마 튜더스에 등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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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폰 발트부르크
기본 정보
람베르트 수스트리스가 그린 오토 폰 발트부르크의 초상화
람베르트 수스트리스가 그린 오토 트루크세스 폰 발트부르크의 초상화 (동시대)
존칭 접두사각하
직함추기경, 아우크스부르크 주교후
종교로마 가톨릭
출생일1514년 2월 25일
출생지셰어 성
사망일1573년 4월 2일
사망지로마, 교황령
직책
추기경 임명교황 바오로 3세
추기경 서임일1544년 12월 19일
아우크스부르크 주교1543년 – 1573년
이전 주교크리스토프 폰 슈타디온
주교 임명1543년 10월
다음 주교요한 에글로프 폰 크뇌링겐

2. 유년 시절과 교육

오토 폰 발트부르크는 신성 로마 제국카를 5세 황제를 도와 독일 농민 전쟁 때 농민 반란군을 진압하였던 스와비아의 귀족 발트부르크 가문 출신으로 셰어 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성직자가 되기 위해 튀빙겐 대학교, 돌 대학교, 파도바 대학교, 볼로냐 대학교 등에서 공부하였으며, 1534년 파비아 대학교에서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동기생으로는 크리스토포로 마드루초, 스타니슬라우스 호시우스, 비르질리우스 등이 있다.

3. 경력

1543년, 오토는 카를 5세의 지원으로 아우크스부르크 주교가 되었다. 1544년 교황 바오로 3세는 그를 추기경에 서임했지만, 오토는 군사 원정을 주장했다. 1546년 슈말칼덴 전쟁이 발발했고, 오토는 카를 5세를 지지했지만 아우크스부르크 잠정 합의에는 불만을 가졌다.[1]

오토는 아우크스부르크 교구 상황을 개선하고자 노력했으나, 프로테스탄티즘 확산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딜링겐 대학교와 신학교를 설립하고 예수회에 관리를 맡겼다.[1]

1549-50년과 1555년 교황 선거에 참여했고, 1552년에는 작센 선제후 모리츠 군대의 공격을 받았다. 페르디난트 1세는 파사우 평화 조약과 아우크스부르크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카를 5세 퇴위 후 오토는 로마로 가서 종교 재판 수장이 되었고, 1562년 알바노 추기경 주교가 되었다. 1567년 딜링겐에서 교구 시노드를 열었고, 1568년부터 로마에서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1]

3. 1. 추기경 서임과 슈말칼덴 전쟁

1543년 5월 10일, 카를 5세 황제의 지원을 받은 오토는 아우크스부르크 교구장이 되었다. 1544년 교황 바오로 3세는 카를 5세와 슈말칼덴 동맹의 루터파 제후들 간의 분쟁을 해결하고자 오토를 산 발비나 성당의 추기경에 서임하였다.[1] 그러나 오토는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에 대한 군사 원정을 촉구했다. 1546년, 프로테스탄트교도들이 아우크스부르크 대교구장의 영지인 퓌센 마을에서 난동을 부려 슈말칼덴 전쟁이 발발했다.

오토는 카를 5세의 충실한 지지자였지만, 아우크스부르크 잠정 합의 조건에는 불만을 품었다.[1]

3. 2. 아우크스부르크 교구 개혁 노력

오토는 아우크스부르크 교구의 상황을 개선하고 가톨릭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아우크스부르크 교구는 사제들의 무지와 비리로 인해 신자들이 프로테스탄티즘으로 개종하는 등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1]

오토는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했다.

  • 교리 교육 개선
  • 사목 방문 실시
  • 교구 시노드 개최
  • 사목 교서 및 종교 지침 개선[1]


또한, 그는 딜링겐 대학교와 신학교를 설립하여 성직자 양성에 힘썼다. 1564년에는 이 시설들의 관리를 예수회에 맡겼다.[1]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우크스부르크는 자유 제국 도시로서 주민들을 다루기 어려웠고, 프로테스탄트교가 널리 퍼져 있어 어려움은 계속되었다.

3. 3. 로마에서의 활동과 말년

오토는 1543년 5월 10일 카를 5세 황제의 지원을 받아 아우크스부르크의 교구장이 되었다. 1544년 교황 바오로 3세는 카를 5세가 슈말칼덴 동맹의 일부 루터파 제후들에게 양보해준 사안에 대하여 논쟁이 빚어지자 황제와의 논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오토를 산 발비나 성당의 추기경에 서임하였다. 하지만 오토는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을 징벌해야 한다며 군사원정을 촉구하였다. 때마침 카를 5세가 루터파인 작센 공작과 동맹을 맺으려고 하던 중 프로테스탄트교도들이 이를 저지하고자 1546년 아우크스부르크 대교구장의 영지인 퓌센 마을에서 난동을 피웠으며, 이는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1]

오토는 끝까지 카를 5세의 지지자로 남아 있었지만, 아우크스부르크 잠정 합의의 조항들에 대해서는 불만을 표하였다. 특히 그의 교구 소재지인 아우크스부르크 내에 난동을 피우는 자들을 다룰 때 더욱 그러하였다. 당시 아우크스부르크 교구의 상황은 참담하였다. 교구 사제들은 대부분 무식하고 비열하였으며, 이러한 사제들에게 실망한 신자들은 차츰 프로테스탄티즘에 동조되어갔다. 오토는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교리 교육, 사목 방문, 교구 시노드, 사목교서 및 종교 지침을 개선하는 것 등을 통하여 가톨릭 신앙을 다시 회생시키기 위하여 부던히 노력하였다. 또한 그는 자신의 거주지에 딜링겐 대학교와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1564년 오토는 이러한 업무 및 시설 관리를 예수회에 일임하였다.[1]

1549-50년과 1555년에 그는 로마에서 열린 교황 선거에 참여했다. 주교 관할 구역의 상황은 1552년에 악화되었는데, 이는 이전 동맹국인 작센 선제후 모리츠의 군대에 의해 황폐화되었기 때문이다. 황제의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는 이제 책임을 맡고 타협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모리츠와 파사우 평화 조약을 체결했고, 이는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평화 조약으로 이어져 루터교 공작들과 맺어졌다.

오토의 조언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고, 카를 5세의 퇴위로 다음 해에 그의 강력한 지위는 마침내 잃게 되었다. 그는 1559년 다시 로마로 갔고, 그곳에서 종교 재판의 수장이 되었으며, 1562년에는 알바노 추기경 주교가 되었다. 1567년에는 딜링겐에서 교구 시노드를 열었다.

1568년부터 그는 로마에서 상시 거주하며 사망했다.[1]

4. 대중 문화

가상의 오토 폰 발트부르크는 쇼타임의 에미상 수상작인 드라마 ''튜더스''의 세 번째 시리즈에 등장한다. 스웨덴 배우 막스 폰 쉬도우가 그 역할을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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