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바오로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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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황 바오로 3세는 1534년부터 1549년까지 재위한 로마 가톨릭교회 교황이다. 그는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 추기경으로 활동했으며,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 후원자로서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성당의 '최후의 심판'을 의뢰하고, 바티칸의 파울리나 성당을 건설하는 등 예술 발전에 기여했다. 종교 개혁에 대응하여 예수회를 인가하고 트리엔트 공의회를 소집하여 가톨릭 교회의 쇄신을 시도했으나, 아들들의 영토 문제를 둘러싸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와 갈등을 겪기도 했다. 또한, 아메리카 원주민의 노예화를 금지하는 교황 칙서를 발표하는 등 인권 보호에도 힘썼다. 그의 예수회 인가는 이후 조선에 천주교가 전파되는 데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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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바오로 3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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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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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
출생일 | 1468년 2월 29일 |
출생지 | 교황령, 라치오 주, 카니노 |
사망일 | 1549년 11월 10일 |
사망지 | 교황령, 로마 |
매장지 | 성 베드로 대성전 |
자녀 | 피에르 루이지 2세 파르네세 파올로 파르네세 라누치오 파르네세 코스탄차 파르네세 루크레치아 파르네세 |
정부인 | 실비아 루피니 (정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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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정보 | |
직함 | 로마 주교 |
재임 시작 | 1534년 10월 13일 |
재임 종료 | 1549년 11월 10일 |
선임자 | 클레멘스 7세 |
후임자 | 율리오 3세 |
서품 | 1519년 6월 26일 |
주교 서임 | 1519년 7월 2일 |
주교 서임자 | 레오 10세 |
추기경 임명 | 1493년 9월 20일 |
추기경 임명자 | 알렉산데르 6세 |
이전 직책 | 산티 코스마 에 다미아노 교회 추기경 (1493–1503) 코르네토와 몬테피아스코네 주교 (1499–1509) 산트 에우스타키오 교회 추기경 (1503–1519) 라테라노 대성전 수석 사제 (1508–1534) 파르마 주교 (1509–1534) 추기경단 수석 부제 (1516–1519) 프라스카티 주교 추기경 (1519–1523) 팔레스트리나 주교 추기경 (1523) 사비나 주교 추기경 (1523–1524) 포르토 주교 추기경 (1524) 오스티아 주교 추기경 (1524–1534) 추기경단 부단장 (1524)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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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초기와 성직 생활
교황 클레멘스 7세가 1534년에 선종하자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콘클라베가 열렸다. 당시 추기경단 단장이자 오스티아의 주교급 추기경이었던 알레산드로 파르네세는 여러 파벌 중 어느 곳에도 뚜렷하게 속하지 않은 중립적인 위치에 있었다. 또한, 이전 여섯 명의 교황을 모시며 쌓은 오랜 경험과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바오로 3세가 교황으로 선출된 시기는 1527년 로마 약탈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았고, 알프스 이북에서는 종교 개혁의 물결이 거세게 일어나 가톨릭교회의 존립 기반마저 위협받던 혼란기였다. 중세 말부터 누적된 교회 내부의 폐단으로 인해 교회 쇄신은 시대의 가장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고, 바오로 3세는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교회 개혁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알레산드로 파르네세는 1468년 당시 교황령이었던 라티움 지방의 카니노에서 태어났다.[30] 아버지는 몬탈토의 영주 피에르 루이지 1세 파르네세 (1435–1487)였고, 어머니 조반나 가에타니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1]와 교황 젤라시오 2세를 배출한 유서 깊은 가에타니 가문 출신이었다. 파르네세 가문은 오랫동안 명맥을 이어왔으나, 알레산드로가 교황이 된 후 가문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면서 가문의 부와 권력이 크게 늘어났다.
알레산드로는 피사 대학교와 피렌체의 로렌초 데 메디치 궁정에서 인문주의 교육을 받으며 소양을 쌓았다.[31][2] 이 시기 메디치 가문과 좋은 관계를 맺었으며, 훗날 교황 레오 10세가 되는 조반니 데 메디치와도 친분을 쌓았다. 처음에는 사도적 공증인으로 교육받았고, 1491년 로마 교황청에 교황의 공증인으로 등용되었다.[31]
1493년, 교황 알렉산데르 6세에 의해 산티 코스마 에 다미아노 성당의 부제급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31] 당시 알렉산데르 6세의 정부(情婦)로 알려진 줄리아 파르네세가 알레산드로의 누이였기 때문에, 그의 추기경 서임 배경에는 논란이 있었고[3] 이로 인해 ‘속치마 추기경’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32]
성직에 입문하기 전, 젊은 시절의 알레산드로는 다소 세속적인 생활을 했으며,[6] 귀족 여성 실비아 루피니를 정부(情婦)로 두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1500년에서 1510년 사이에 피에르 루이지, 파올로, 라누치오, 코스탄차 등 네 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이 자녀들은 1505년 교황 율리오 2세[4]와 1513년 교황 레오 10세[5]에 의해 적자로 인정받아 파르네세 가문의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1513년경 실비아 루피니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사생활을 바로잡았다. 1509년 파르마의 주교로 임명되었으나,[6] 실제 사제 서품은 1519년 6월 26일에, 주교 서임은 같은 해 7월 2일에 받았다. 이후 자신의 대리인 바르톨로메오 기디치오니의 영향을 받아 교구 개혁에 힘쓰는 등 종교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였다.[6]
교황 클레멘스 7세(재위 1523-1534) 치세에는 오스티아의 주교급 추기경이자 추기경단 단장의 지위에 올랐다. 클레멘스 7세가 1534년에 선종하자 소집된 콘클라베에서, 여러 교황을 모신 경험과 능력을 인정받아 만장일치로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고, 교황 바오로 3세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3. 교황 선출
파르네세 추기경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기 때문에, 그가 교황이 되더라도 재위 기간이 길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있었다. 이는 일부 추기경들에게 다음 콘클라베에서 시간을 가지고 더 적합한 후보를 선택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이러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파르네세 추기경은 1534년 10월 13일 콘클라베에서 폭넓은 지지를 받아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으며, 교황명을 바오로 3세로 선택했다.
같은 해 11월 3일, 수석 부제였던 인노첸초 키보 추기경의 집전 하에 공식적인 교황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4. 정치 및 종교 활동
그는 교회 쇄신을 위해 공의회 개최를 추진하여 1537년 만토바에서의 공의회 소집을 선언하고 개신교 측의 참여까지 독려했으나, 개신교 지도자들의 반대와 정치적 문제로 인해 무산되었다.[1] 또한 1536년에는 가스파로 콘타리니, 레지날드 폴 등 개혁 성향의 고위 성직자들로 구성된 위원회를 임명하여 교회 문제점을 진단하고 개혁 방안을 모색하게 했다. 이 위원회가 1537년에 제출한 보고서 ''Consilium de emendanda ecclesia''는 교황청과 교회 행정의 부패를 신랄하게 지적하며 대담한 개혁안을 제시했으나,[7] 즉각적인 실행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이러한 초기 개혁 시도와 개신교와의 대화 노력(레겐스부르크 회의 등)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바오로 3세는 점차 반종교개혁의 기틀을 다지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540년 예수회를 공식 인가하고[9] 1542년 로마 종교 재판소(검사성성)를 재조직하여 개신교 확산에 대응했으며, 마침내 1545년 트리엔트 공의회를 소집하여 가톨릭 교리를 재확인하고 교회 개혁의 중요한 발판을 마련했다.
바오로 3세는 국제 정치 무대에서도 적극적인 행보를 보였다. 1538년에는 잉글랜드 국교회의 수장을 자처한 잉글랜드의 헨리 8세를 최종적으로 파문했다. 또한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인디언) 보호에도 관심을 보여, 1537년 교황 칙서 《수블리미스 데우스》(Sublimus Deus)를 반포하여 원주민을 노예로 삼는 행위를 비판하고 그들의 인간적 권리를 옹호했다.[10] 이 칙서는 원주민의 자유와 재산권을 인정하는 중요한 선언이었으나, 스페인 왕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11] 실제적인 효력은 제한적이었다는 평가도 있다.[12][13] 한편으로는 로마의 노예 부족 문제에 대응하여 노예 관련 규제를 완화하거나[21] 무슬림 노예의 구매 및 소유를 허가하는[22] 등 현실적인 정책을 펴기도 했다. 또한 안코나에 다양한 국적과 종교의 상인들이 정착하도록 장려하여 도시의 무역 발전에 기여했다.[8]
그러나 교황의 정치 활동은 족벌주의(네포티즘)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사생아인 아들 피에르 루이지 파르네세를 교회군 총사령관과 카스트로 공작에 임명하고, 나중에는 파르마와 피아첸차 공작으로 만들었다. 손자들인 알레산드로 파르네세와 귀도 아스카니오 스포르차를 각각 14세, 16세의 어린 나이에 추기경으로 서임했으며, 또 다른 손자 오타비오 파르네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딸과 혼인시키고 카메리노 공작령을 주었다. 이러한 노골적인 가족 중심 정책과 과중한 세금 부과는 페루자와 콜론나 가문 등 교황령 내 도시 및 가신들과의 무력 충돌을 야기하기도 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와의 관계는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초기에는 개신교 공동 대응을 위해 협력하여 슈말칼덴 전쟁을 지원하기도 했으나, 아들 피에르 루이지의 영지 문제(파르마와 피아첸차)를 둘러싸고 갈등이 깊어졌다. 특히 1547년 피에르 루이지가 황제의 묵인 하에 암살당했다고 의심하면서 양자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말년에 교황은 피에르 루이지의 영지 상속 문제로 황제 및 손자 오타비오와 대립했으며, 총애했던 손자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추기경마저 황제와 타협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고 병을 얻어 1549년 11월 10일 81세의 나이로 선종했다. 그의 시신은 성 베드로 대성전에 안장되었다.
4. 1. 예수회 인가와 종교 재판
1540년 9월 27일, 교황 바오로 3세는 교황 칙서 ''Regimini militantis Ecclesiae''(교회의 군사적 통치)를 통해 로욜라의 이냐시오와 그를 따르는 이들의 모임을 공식적으로 승인하여 예수회의 설립을 인가했다.[9][25] 처음에는 칙서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에서 신생 수도회의 회원을 60명으로 제한했지만, 그들이 선교 활동에서 얼마나 효과적인지를 보고 이 제한을 해제했다.[25] 이렇게 설립된 예수회는 이후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등지에서 활발한 선교 활동의 길을 열었으며,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한 대응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1548년에는 이냐시오 데 로욜라가 그의 저서 ''영신 수련''을 인쇄하는 것을 허락하기도 했다.
이 무렵부터 가톨릭교회는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해 보다 체계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는데, 그 첫 단계 중 하나로 1542년 바오로 3세는 로마에 검사성성(Congregation of the Holy Office, 로마 종교 재판소)을 신설 또는 재조직하여 종교 재판을 실행에 옮겼다. 이는 반종교개혁 과정의 중요한 단계로 여겨진다.
4. 2. 프로테스탄트와의 대화와 갈등
종교 개혁 시대의 네 번째 교황인 바오로 3세는 프로테스탄트에 대응하여 적극적인 개혁 조치를 취한 최초의 교황이었다.[6] 그가 즉위할 당시 알프스 이북에서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종교 개혁 운동이 확산되며 가톨릭교회의 기반을 위협하고 있었다. 교회 쇄신은 시대적 요구였고, 바오로 3세는 이 문제에 열성적으로 임했다.
교황은 가톨릭교회와 프로테스탄티즘의 화해와 재일치를 시도했다. 1536년 6월 2일, 그는 이듬해 만토바에서 공의회를 소집하겠다는 교황 칙서를 반포하고 개신교도들에게도 참석을 요청했다.[1] 그러나 마르틴 루터는 개신교도의 공의회 참석을 반대했고, 독일 프로테스탄트들은 초대장을 개봉하지 않고 돌려보냈다. 참석 설득을 위해 공의회 개최가 연기되는 동안, 만토바 공작마저 공의회 개최에 소극적으로 변하면서 결국 만토바 공의회 계획은 정치적 이해관계로 인해 무산되었다.[1]
1536년, 바오로 3세는 학식과 신앙심이 뛰어난 9명의 고위 성직자로 위원회를 구성하여 교회 쇄신 방안 보고서를 준비하게 했다. 1537년 제출된 ''Consilium de emendanda ecclesia'' 보고서는 교황청과 교회 행정의 폐단을 지적하고 대담한 개혁안을 제시했다.[7] 이 보고서는 널리 퍼졌으나, 프로테스탄트 측에서는 미흡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마르틴 루터는 이 보고서의 독일어판(1538) 서문에 추기경들이 로마 교회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다고 비꼬는 삽화를 넣었다. 결국 이 보고서의 권고는 즉각적인 성과로 이어지지 못했다.
화해를 위한 또 다른 시도로, 1540년 교황특사 조반니 모로네를 아그노와 보름스에 파견했고, 1541년에는 가스파로 콘타리니 추기경을 레겐스부르크 회의에 보내 조정 역할을 맡겼다. 콘타리니는 신앙과 선행을 모두 강조하는 '이중 의화설'이라는 타협안을 제시했지만, 성찬례의 성변화 교리에 대한 합의 실패로 완전한 타협은 이루어지지 못했다.[33] 프로테스탄트 내부에서도 성변화에 대한 입장이 통일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1541년 5월 27일 로마에서 열린 추기경회의에서는 프로테스탄트와의 타협을 거부하기로 결정했고, 루터 역시 가톨릭교회의 공개적인 잘못 인정 없이는 타협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대화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자, 바오로 3세는 점차 강경 노선으로 기울었다. 1540년, 그는 로욜라의 이냐시오와 그 추종자들의 모임을 공식적으로 승인하여 예수회 창립의 길을 열었다.[9] 예수회는 이후 선교 활동뿐 아니라 프로테스탄티즘에 맞서는 가톨릭교회의 중요한 세력이 되었다. 1542년에는 로마에 검사성성을 신설하여 종교 재판을 강화하며 반종교개혁의 기틀을 마련했다.
1544년 크레스피 평화 조약 이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 역시 프로테스탄트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1545년 보름스 제국 회의에서 카를 5세는 교황특사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추기경과 만나 프로테스탄트에 공동 대응하기로 합의했다. 바오로 3세는 독일 프로테스탄트 제후들과의 전쟁을 지원하기로 동의했는데, 이는 황제가 독일 문제에 몰두하는 동안 아들 피에르 루이지에게 파르마와 피아첸차 공작령을 확보해주려는 계산도 있었다. 교황은 이들 영지를 교황령 내 다른 영지와 교환하는 방식으로 추기경들의 반대를 무마하려 했고, 황제에게 보병 12,000명, 기병 500명 및 상당한 자금을 지원하는 대가로 협력을 약속받았다.
같은 해인 1545년 3월 15일, 바오로 3세는 교황 칙서 《기뻐하라, 예루살렘이여!》(Laetare Hierusalem)를 통해 트리엔트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 공의회는 프로테스탄트의 주장을 반박하고 전통적인 가톨릭 교리를 재확인하며 교회 내부 개혁을 추진하는 등 가톨릭 근세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공의회에서는 성경, 의화, 성사, 원죄 등에 대한 교리가 확정되었고, 그 결과는 1564년 《트리엔트 신앙 고백》으로 발표되었다.
한편, 카를 5세는 슈말칼덴 동맹과의 전쟁(슈말칼덴 전쟁)을 시작했다. 1546년에는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했던 쾰른 대주교 헤르만 폰 비트를 파문하고, 1547년에는 황제가 그를 영주 자리에서 추방했다. 1547년 4월 24일 뮐베르크 전투에서 카를 5세가 슈말칼덴 동맹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독일 남부를 장악하고 동맹 지도자들을 사로잡았다. 이후 황제는 아우크스부르크 잠정 협정을 통해 독일 내 가톨릭 세력 회복과 함께 프로테스탄트와의 타협을 시도했다.
그러나 황제가 교황의 아들 피에르 루이지의 영토 문제(파르마, 피아첸차)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않고, 오히려 황제의 부관 페란테 곤차가가 피에르 루이지를 추방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교황과 황제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1547년 피에르 루이지가 피아첸차에서 암살당하자, 바오로 3세는 황제가 배후에 있다고 의심했다. 같은 해 동맹을 모색하던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가 사망하면서 정치적으로 고립된 교황은 결국 황제의 아우크스부르크 잠정 협정을 받아들여야 했다.
피에르 루이지 사후 파르마와 피아첸차 계승 문제에서도 교황은 자신의 손자이자 황제의 사위인 오타비오 파르네세가 상속받기를 원했지만, 황제와 오타비오 본인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문제로 손자인 파르네세 추기경과 격렬하게 다툰 후, 바오로 3세는 큰 충격을 받고 병을 얻어 1549년 11월 10일 81세의 나이로 선종했다.
바오로 3세는 프로테스탄티즘의 확산을 막지는 못했지만, 그의 치세 동안 트리엔트 공의회 소집과 예수회 인가 등을 통해 가톨릭교회 내부 개혁과 반종교 개혁의 중요한 기반이 마련되었다. 또한 1538년에는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임을 선언한 헨리 8세를 최종적으로 파문하기도 했다.
4. 3. 트리엔트 공의회 소집
교황 바오로 3세가 즉위한 시기는 1527년 로마 약탈의 충격이 가시지 않았고, 알프스 이북에서는 종교 개혁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 가톨릭교회의 기반을 흔들던 어려운 때였다. 중세 말부터 교회 내부에 누적된 폐단으로 인해 교회 쇄신은 시대의 가장 시급한 과제였고, 바오로 3세 역시 이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6]
바오로 3세는 교회 쇄신에 대한 열의를 보이며, 1536년 6월 2일 교황 칙서를 통해 이듬해인 1537년 만토바에서 공의회를 개최할 것을 선언했다. 그는 개신교 측에도 공의회 참여를 요청하며 대화를 통한 해결을 모색했으나,[1] 마르틴 루터를 비롯한 독일 개신교 지도자들은 교황 주도의 공의회 참여를 거부했다. 설상가상으로 공의회 개최 예정지였던 만토바의 공작마저 정치적 이유로 협조를 꺼리면서, 만토바 공의회 계획은 결국 무산되었다.[1]
공의회 개최 시도가 좌절된 후에도 바오로 3세는 교회 개혁 노력을 이어갔다. 1536년, 그는 학식과 신앙심이 깊은 고위 성직자 9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를 조직하여 교회 개혁 방안을 연구하도록 했다. 1537년, 위원회는 ''Consilium de emendanda ecclesia''라는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이 보고서는 교황청과 교회 행정, 전례 등에서 나타나는 권력 남용과 부패를 신랄하게 지적하고 대담한 개혁안을 제시했다.[7] 이 보고서는 로마뿐 아니라 스트라스부르크 등 여러 지역에서 인쇄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으나, 마르틴 루터는 이를 교회의 근본적인 변화가 아닌 미봉책으로 여기며 비판하기도 했다. 보고서의 제안들은 이후 트리엔트 공의회의 중요한 의제가 되었다.
한편, 바오로 3세는 개신교와의 화해 가능성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1540년 조반니 모로네를 아그노와 보름스에 교황특사로 파견했고, 1541년에는 가스파로 콘타리니 추기경을 레겐스부르크 회의에 보내 조정 역할을 맡겼다. 콘타리니 추기경은 가톨릭과 개신교의 입장을 절충한 '이중칭의론'을 제시하며 타협을 시도했지만, 성변화 교리와 같은 핵심 쟁점에서 양측의 입장 차이를 좁히지는 못했다.[33] 결국 로마 추기경회의의 강경한 반대와 루터 측의 완고한 태도로 인해 대화를 통한 화해 시도는 최종적으로 실패했다.
대화 노력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공의회를 통한 교리 확립과 교회 개혁의 필요성은 더욱 커졌다. 마침 1544년 크레스피 조약으로 프랑스와의 전쟁을 마무리지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 역시 개신교에 대한 무력 대응으로 입장을 바꾸면서 공의회 개최에 힘이 실렸다. 1545년 보름스 제국회의에서 카를 5세는 교황 특사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추기경과 만나 개신교에 공동 대응하기로 합의했다. 바오로 3세는 카를 5세의 슈말칼덴 동맹 토벌 전쟁을 지원하기로 약속했는데, 여기에는 황제가 독일 문제에 집중하는 동안 아들 피에르 루이지 파르네세에게 파르마 공국과 피아첸차 공국을 확보해주려는 개인적인 계산도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1545년 3월 15일, 바오로 3세는 교황 칙서 Laetare Hierusalem|레타레 예루살렘la을 반포하며 제19차 세계 공의회인 트리엔트 공의회를 공식적으로 소집했다. 여러 정치적 난관 속에서 어렵게 개막한 트리엔트 공의회는 이후 가톨릭교회 근세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된다. 공의회는 개신교의 주장을 반박하고 성경과 성전, 의화, 성사, 원죄 등 가톨릭의 핵심 교리를 재확인하고, 교회 내부의 각종 폐단을 개혁하기 위한 규범들을 마련하는 등 가톨릭 개혁의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6] 공의회에서 결정된 신앙 고백은 1564년 《트리엔트 신앙 고백》으로 발표되었고, 기타 개혁 조치는 후임 교황들에 의해 실행에 옮겨졌다.
5. 예술의 후원자
교황 바오로 3세는 예술과 학문, 사냥 등 귀족적인 취향을 가졌으며, 특히 예술 분야에 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미켈란젤로를 ‘하느님이 보내 주신 사람’이라고 격찬하며[34] 시스티나 경당의 제대화로 최후의 심판을 그리도록 의뢰했다. 이 작품은 전임 교황 교황 클레멘스 7세 때 시작되었으나, 바오로 3세가 의뢰를 이어받아 1541년에 완성하는 과정을 감독했다.[23] 또한 1546년 소안토니오 다 상갈로가 사망하자, 노년의 미켈란젤로를 성 베드로 대성전 건축 공사의 총감독으로 임명했다.[34][24] 미켈란젤로는 바오로 3세의 명으로 바티칸의 바오로 경당에 그의 마지막 프레스코화인 ‘성 베드로의 십자가형’과 ‘성 바오로의 회심’(1542–1550)을 그리기도 했다.[34][24] 바오로 3세는 미켈란젤로에게 고대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청동 기마상을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옮겨 캄피돌리오 광장의 중심에 세우도록 지시하기도 했다.[24]
건축 분야에서도 바오로 3세의 후원은 두드러졌다. 추기경 시절부터 로마 중심부에 짓기 시작한 파르네세 궁전은 교황 즉위 후 더욱 규모가 커지고 화려해졌다. 초기 설계는 소안토니오 다 상갈로가 맡았고, 이후 미켈란젤로가 개선했으며 자코모 델라 포르타가 완공했다.[34][24] 이 웅장한 궁전은 당시 교황 가문인 파르네세 가문의 부와 권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그의 개인 저택인 카프라롤라의 빌라 파르네세 역시 비슷한 위용을 자랑한다.[34][24]
바오로 3세는 미켈란젤로 외에도 여러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베네치아 출신의 화가 티치아노에게 1543년 자신의 초상화를, 1546년에는 두 손자인 알레산드로 파르네세 추기경, 파르마 공작 오타비오 파르네세와 함께 있는 유명한 초상화를 그리도록 의뢰했다. 이 작품들은 현재 나폴리의 카포디몬테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34][24]
이 외에도 바오로 3세는 유능한 학자들을 로마 대학교에 초빙하고, 산탄젤로 성을 프레스코화로 장식했으며, 바티칸 도서관의 장서를 확충하는 등 학문과 문화 발전에도 기여했다.[34] 이러한 광범위한 예술 및 문화 후원 활동으로 인해 그는 르네상스 시대의 마지막 교황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34]
6. 유산
바오로 3세는 "르네상스 교황"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의 주요 유산 중 하나는 1537년 6월 2일에 반포된 교황 칙서 《수블리무스 데우스》이다. 이 칙서를 통해 그는 "신대륙(아메리카 대륙)의 주민 역시 진정한 인간이다"라고 선언하며, 아메리카 원주민을 비롯한 모든 사람을 노예로 삼는 행위를 금지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선언으로, 그의 인도주의적 면모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산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바오로 3세는 르네상스 예술과 건축의 후원자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시스티나 성당에 유명한 최후의 심판 벽화(1541년 완성)를 그리도록 의뢰했다. 이 외에도 로마의 캄피돌리오 광장 정비 사업과 성 베드로 대성당 건설에도 미켈란젤로를 참여시켜 로마의 도시 미관과 가톨릭 교회의 상징적인 건축물 조성에 기여했다.
말년에 바오로 3세는 자신의 가족 문제와 파르마 공국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에게 넘어간 일 등으로 인해 심적인 고통을 겪었다. 그는 1549년 11월 10일 카타르로 인해 사망했으며[27], 임종 시에는 자신의 족벌주의를 뉘우쳤다고 전해진다.
그의 청동 묘는 조각가 구리엘모 델라 포르타가 제작했으며, 현재 성 베드로 대성당 내부에 안치되어 있다.
6. 1. 한국과의 관계
교황 바오로 3세가 직접적으로 한국과 관계를 맺거나 언급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그의 재위 기간 중 중요한 결정이었던 예수회 인가는 이후 동아시아 선교 역사에 영향을 미쳤고, 이는 간접적으로 한국 천주교 전파와 연결된다.바오로 3세는 1537년 이냐시오 데 로욜라가 이끄는 그룹을 알현하고 이후 이들을 수도회로 인가했는데, 이들이 바로 예수회이다. 예수회는 활발한 해외 선교 활동을 펼쳤으며, 소속 선교사 중 한 명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바오로 3세가 서거한 해인 1549년 8월 일본의 가고시마에 도착하여 천주교를 전파하기 시작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활동은 일본에 국한되었지만, 그를 시작으로 예수회 선교사들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했다. 이러한 활동은 이후 임진왜란 등을 거치며 일본을 통해 조선에 천주교 서적이 유입되고, 결과적으로 조선 내부에 천주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는 배경과 간접적으로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교황 바오로 3세의 예수회 인가는 한국의 천주교 역사에 있어 간접적인 영향을 미친 결정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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