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길지
1. 개요
왕길지(George Engel)는 독일 출신의 한국 선교사이자 신학자이다. 그는 1868년 독일에서 태어나 바젤 선교회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인도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1898년 한국에 파송되어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에서 교회사와 교육학을 가르치며, 영어 강독과 성서 원어를 최초로 가르쳤다. 그는 다양한 언어에 능통했으며, 신학지남의 책임 편집자로 활동하며 찬송가 편찬, 성경 개정, 교회 헌법 제정에 기여했다. 1921년에는 오하이오 우스터 대학에서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38년 은퇴 후 그의 아들 프랭크 엥겔은 에큐메니칼 운동 지도자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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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선교사 -
알베르트 슈바이처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독일 태생의 신학자, 음악가, 철학자, 의사, 선교사, 인도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로서, '생명에 대한 경외심' 철학을 바탕으로 아프리카에서 의료 봉사를 하고 평화 운동에 참여하여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으며 그의 삶과 사상은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
개신교 선교사 -
요한 헤르만 바빙크
요한 헤르만 바빙크는 네덜란드의 개혁주의 신학자이자 선교학 교수로, 암스테르담 자유 대학교와 캄펜 신학 신학교에서 선교학을 가르치며 선교사 교육과 선교의 신학적 기초를 다지는 데 헌신했고, 심리학, 신비주의, 선교학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저술 활동을 통해 개혁주의 신학 발전에 기여했다. -
대한민국의 선교사 -
한부선
한부선은 평양 출신으로 미국 유학 후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하고, PCA 창립 멤버로 만주 선교 활동을 했으며, 한국으로 돌아와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교단 설립에 참여하여 보수 신학 정립에 기여하고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1992년 미국에서 사망했다. -
대한민국의 선교사 -
DJ 렉스
DJ 렉스는 1974년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DJ로, 1990년대 초반 디제잉을 시작하여 클럽 활동, 프로듀싱, 아티스트 공동체 결성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며 DJ 문화를 보급해왔다. -
1868년 출생 -
펠릭스 호프만
펠릭스 호프만은 바이엘사 연구원으로 아스피린과 헤로인을 합성한 독일 화학자이며, 특히 아스피린은 아르투어 아이헨그륀의 지휘 아래 합성되어 진통, 해열, 항염증제로 널리 쓰였으나, 아이헨그륀의 역할 축소 및 호프만의 공로 과장 논란이 존재한다. -
1868년 출생 -
이용구
이용구는 동학 농민 운동에 참여하고 일본으로 망명하여 친일 활동을 하다가 시천교를 창설하고 한일 합방을 주도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2. 초기 생애와 교육 (1868-1898)
왕길지(George Engel영어)는 1868년 10월 10일 남부 독일 뷔르템베르크에서 4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교사였던 아버지는 왕길지가 4살 되던 해에 3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남은 가족은 가난하고 힘겨운 생활을 했다. 왕길지는 6살에 뮤링엔(Murlingen)에 있는 일반교양학교(the College for Classical Study)를 다녔고 뉘르팅엔(Nütingen)에서 중등학교를 마친 후에, 교사대학(Lehrer Seminar)에서 1883년부터 1888년까지 공부했다. 뷔르템베르크는 바젤 선교회를 탄생시킨 경건주의 운동의 산실이었다. 바젤 선교회에서 3년간의 신학훈련을 받았고, 에든버러에서 특별교사훈련을 받은 후 인도의 푸나에서 6년간 사역했고, 감리교 남자학교의 교장을 역임했다. 그는 호주 출신 클라라 바스 양(Miss Clara Bath)과 결혼했다. 그는 1898년에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호주에 와서 학교 교장을 역임하다가 빅토리아 장로교여선교회(PWMU) 소속의 한국선교사가 파송됐다.
2.1. 독일에서의 유년 시절과 교육
왕길지(영어: George Engel)는 1868년 10월 10일 남부 독일 뷔르템베르크에서 4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교사였던 아버지는 왕길지가 4살 되던 해에 3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남은 가족은 가난하고 힘겨운 생활을 했다. 왕길지는 6살에 뮤링엔(Murlingen)에 있는 일반교양학교(the College for Classical Study)를 다녔고 뉘르팅엔(Nütingen)에서 중등학교를 마친 후에, 교사대학(Lehrer Seminar)에서 1883년부터 1888년까지 공부했다.
2.2. 바젤 선교회와 인도 선교
3. 한국 선교와 신학 교육 (1898-1938)
왕길지 목사는 1902년부터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에서 가르쳤으며, 1906년에 정식 강사가 되었고 1916년에는 교수가 되었다. 그는 주로 교회사와 교육학을 강의했으며, 1916년 제5차 장로교 총회의 결정에 따라 최초로 영어강독과 성서원어를 가르친 교수였다. 그해 그는 조선예수교회 사기편집위원이 되었다. 1917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의 이사 겸 정교수가 되었고, '신학지남(神學指南)'의 책임편집자로서 1918년부터 1921년까지 총 13권의 책을 발간하고 27회의 글을 기고했다. 『신학지남』은 교육 기간이 짧았던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에게 목회 현장에서 설교하고 기도하는 데 필요한 자료들을 제공했다.
왕길지는 성서 언어인 헬라어, 히브리어, 라틴어를 비롯하여 독어, 영어, 불어, 이태리어 등 서방 현대어, 그리고 인도 방언인 마라티어, 힌디어, 우르두어와 한국어, 중국어에 능통했으며, 후일 일본어도 독학으로 익혀 불편 없이 사용했다. 그는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도서관장을 지내면서, 도서관에 보관중이던 책들이 없어진것에 대해 학생들에게 "원래 서책은 무족(無足)이라 자래(自來)하거니와 자거(自去)하지 못하는데 책이 없어졌지요."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1920년에 성경개역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33년부터 1934년에는 아모스서를 개정했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피아노, 바이올린, 오르간을 연주했으며, 찬송가 편찬위원으로 일하면서 루터의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번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미국 선교사 아담스와 함께 교회 헌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1921년, 선교 공로를 인정받아 오하이오 우스터 대학에서 명예 신학박사 학위(D.D.)를 받았다. 1938년, 70세가 되어 38년간의 선교사 생활과 31년간의 교수 생활에서 은퇴했고, 아그네스는 43년간의 선교사 생활을 끝내고 멜번으로 돌아갔다.
3.1. 한국 선교사 파송
3.2.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교수 활동
왕길지는 1902년부터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여, 1906년에 정식 강사가 되었고, 1916년에는 교수가 되었다. 그는 주로 교회사와 교육학을 강의하였으며, 제5차 장로교 총회의 결정에 따라 헬라어, 영어, 성서 원어를 가르쳤다. 또한, 조선예수교회 사기편집위원이 되었다. 1917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의 이사 겸 정교수가 되었고, 1918년부터 1921년까지 '신학지남(神學指南)'의 책임 편집자로서 총 13권의 책을 발간하고 27회의 글을 기고하여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에게 필요한 자료들을 제공했다.
왕길지는 언어 공부에 능하여 성서 언어는 물론, 여러 현대어와 인도 방언,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까지 불편 없이 사용했다. 그는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도서관장을 지내기도 했다. 1920년에는 성경개역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33년부터 1934년까지 아모스서를 개정했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찬송가 편찬위원으로 일했으며, 교회 헌법 제정에도 참여했다.
1921년, 왕길지는 선교 공로를 인정받아 오하이오 우스터 대학에서 명예 신학박사 학위(D.D.)를 받았다.
3.3. 언어학적 업적과 성경 번역
왕길지는 헬라어, 히브리어, 라틴어,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마라티어, 힌디어, 우르두어,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등 다양한 언어에 능통했다.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 도서관장을 지냈으며, 1920년에는 성경개역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3년부터 1934년까지 아모스서를 개정하는 작업에 참여했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피아노, 바이올린, 오르간을 연주했으며, 찬송가 편찬위원으로 활동하며 루터의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번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선교사 아담스와 함께 교회 헌법을 제정하는 데에도 기여했다.
3.4. 은퇴와 죽음
4. 엥겔의 유산과 영향
4.1. 한국 개신교에 미친 영향
4.2. 에큐메니칼 운동과 그의 아들 프랭크 엥겔
왕길지 목사의 아들 프랭크 엥겔(Frank Engel)은 1911년 한국에서 태어나 평양에서 성장했다. 그는 멜버른 대학교를 졸업하고 멜버른의 오몬드 칼리지(Ormond College)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다. 그는 오스트레일리아와 아시아의 에큐메니칼 운동 지도자로 성장했다. 1950년대 오스트레일리아 기독학생운동(SCM)의 상임총무, 1959-61년까지 세계기독학생연맹(WSCF)의 아시아총무, 호주교회협의회의 총무와 의장대행을 역임했다. 멜버른신학대학(MCD)에서 신학박사학위를 취득했고 역사신학자로서 저명한 호주 에큐메니칼 운동에 관한 서적들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