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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르템베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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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뷔르템베르크는 1495년 공국으로 시작하여 1806년부터 1918년까지 왕국으로 존속했던 독일의 역사적 지역이다. 1918년 독일 제국 패전으로 왕이 퇴위하고 자유주가 되었으며, 1952년 바덴과 통합되어 바덴-뷔르템베르크주가 되었다. 뷔르템베르크는 1083년 뷔르템베르크 백작령으로 시작하여 공국, 선제후령, 왕국을 거쳐 자유 인민주로 변모하는 과정을 겪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미국과 프랑스의 영향으로 분할되었다가 바덴-뷔르템베르크로 통합되었으며, 수도는 슈투트가르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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뷔르템베르크
지도
기본 정보
국호뷔르템베르크 (Württemberg)
존속 기간1081년 ~ 1952년
위치현재의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주
수도슈투트가르트
정치
정치 체제신성 로마 제국 (1081년 ~ 1806년)
라인 연방 (1806년 ~ 1813년)
독일 연방 (1815년 ~ 1866년)
북독일 연방 (1866년 ~ 1871년)
독일 제국 (1871년 ~ 1918년)
바이마르 공화국 (1918년 ~ 1933년)
나치 독일 (1933년 ~ 1945년)
연합군 점령하 독일 (1945년 ~ 1949년)
서독 (1949년 ~ 1952년)
칭호백작령 (1081년 ~ 1495년)
공국 (1495년 ~ 1803년)
선제후국 (1803년 ~ 1806년)
왕국 (1806년 ~ 1918년)
자유인민주 (1918년 ~ 1945년)
뷔르템베르크호엔촐레른 (1945년 ~ 1952년)
국가 원수뷔르템베르크 백작
뷔르템베르크 공작
뷔르템베르크 선제후
뷔르템베르크 국왕
뷔르템베르크 대통령
의회뷔르템베르크 신분제 의회 (Landtag)
역사
주요 사건1081년: 뷔르템베르크 백작령 건국
1495년: 뷔르템베르크 공국으로 승격
1803년: 뷔르템베르크 선제후국으로 승격
1806년: 뷔르템베르크 왕국으로 승격
1918년: 뷔르템베르크 왕국 폐지, 자유인민주 수립
1945년: 뷔르템베르크-호엔촐레른 주로 분할
1952년: 바덴과 통합하여 바덴뷔르템베르크주 형성
경제
통화굴덴 (1873년까지)
마르크 (1873년 이후)
인접 국가
인접 국가바덴 대공국
바이에른 왕국
프로이센 왕국
호엔촐레른지그마링겐
호엔촐레른헤힝겐
오스트리아 제국
스위스

2. 역사

뷔르템베르크는 원래 슈바벤 공국의 일부였다. 1495년 뷔르템베르크 공국이 되었고, 1806년부터 1918년까지 뷔르템베르크 왕국이었다. 1871년 독일 제국에 편입되었으며, 1918년 독일 제국의 패전으로 왕이 물러나고 뷔르템베르크 자유 인민국이 되었다. 1952년 이웃 바덴 주와 통합되어 바덴뷔르템베르크주가 되었다.

뷔르템베르크의 역사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 뷔르템베르크 백작령 (1083년–1495년)
  • 뷔르템베르크 공국 (1495년–1803년)
  • 뷔르템베르크 선제후령 (1803년–1806년)
  • 뷔르템베르크 왕국 (1806년–1918년)
  • 뷔르템베르크 자유 인민국 (1918년–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뷔르템베르크는 점령 지역이었던 미국프랑스의 영향으로 뷔르템베르크-바덴과 뷔르템베르크-호헨촐레른으로 분할되었다. 1952년, 이들은 바덴-뷔르템베르크에 통합되었다. 뷔르템베르크의 역사적 수도인 슈투트가르트는 현재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수도이다.

2. 1. 기원

"뷔르템베르크(Würtemberg)"라는 지역 명칭의 유래는 확실하지 않다. 예전에는 "Wirth am Berg"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널리 알려졌으나, 연구자들은 이 설을 부정했다. "Wiruto", "Wirtino"와 같은 사람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설, "Virolunum", "Verdunum"과 같은 켈트어 계통의 지명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존재한다. 슈투트가르트 근교의 빌텐베르크 성의 성주가 주변 지역으로 영토를 넓혀가면서, 그 영토가 성주의 성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 "뷔르템베르크"가 지역 명칭으로 정착된 계기이다. 뷔르템베르크는 과거 "Wirtenberg", "Wirtembenc", "Wirtenberc" 등으로 표기되었으며, 현재와 같은 "Würtemberg" 또는 "Wurttemberg" 표기는 16세기 후반부터 나타났다. 1806년 "Würtemberg"이 공식 표기가 되었지만, "Wurttemberg"도 자주 사용되었고, 화폐나 공문서에도 종종 사용되었다.

뷔르템베르크에 처음으로 거주한 것으로 알려진 민족은 켈트족이며, 이후 스웨비족이 거주했다. 1세기, 로마 제국이 이 지역을 정복하고 방벽을 쌓아 방어를 강화했다. 3세기 초, 알레만니족이 로마인들을 라인강 및 도나우강 이남으로 몰아내고 뷔르템베르크 지역을 지배했으나, 클로비스 왕이 이끄는 프랑크족이 496년에 알레만니족을 멸망시키고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 뷔르템베르크는 이후 4세기 동안 프랑크 왕국의 일부였으며, 왕이 임명한 백작이 통치했다. 9세기가 되면서 독일 슈바벤 공국의 일부가 되었다.

2. 2. 뷔르템베르크 백작령 (1083년–1495년)

1083년 빌텐베르크 성을 거점으로 뷔르템베르크 백작 콘라트 1세가 등장했다. 뷔르템베르크 백작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1241년부터 1265년까지 백작직에 있었던 울리히 1세 시대부터 확인된다. 울리히 1세는 네카르 강과 렘스 강 사이 계곡의 광대한 영토를 소유했고, 1262년에는 바트 우라흐 도시를 지배하에 두었다. 울리히 2세와 에버하르트 1세 시대에 뷔르템베르크 백작 가문의 세력은 꾸준히 확장되었다. 에버하르트 1세는 영토를 두 배로 확장하고, 거성을 빌텐베르크 성에서 현재 슈투트가르트 시 중심부에 있는 슈투트가르트 구성(Old Castle (Stuttgart))으로 옮겼다.[1]

에버하르트 1세의 후계자들도 뷔르템베르크 백작령을 확장해 나갔다. 1381년에는 테크 공작령을 매입했고, 1397년에는 결혼을 통해 몽벨리아르 백작령을 얻었다. 뷔르템베르크 가문의 영토는 분할되기도 했지만, 1482년 뮌징겐 조약으로 에버하르트 5세 아래 재통일되었다. 이 조약은 1495년 제국 의회에서 막시밀리안 1세의 승인을 얻었다.[1]

1457년부터 뷔르템베르크에는 이원제 영방 의회(Landtag)가 존재하여 백작에 의한 새로운 과세 승인 역할을 담당했다.[1]

2. 3. 뷔르템베르크 공국 (1495년–1803년)

1495년 에버하르트 5세가 공작 칭호를 받으면서 뷔르템베르크는 공국이 되었다. 뷔르템베르크는 주변 강대국들 사이에 있었지만, 인근의 소규모 영방보다는 규모가 컸기 때문에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종교 개혁 시기에는 신성 로마 제국 내 가톨릭 세력으로부터 압박을 받았고, 17세기와 18세기에는 프랑스의 침략을 여러 차례 받았다. 뷔르템베르크는 부르봉 왕조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군주국(오스트리아) 간의 오랜 분쟁 지역에 위치하여 양국 군대의 이동 경로가 되었다.

2. 3. 1. 중세 공작령과 오스트리아의 지배

에버하르트 1세가 1496년 사망하자 사촌인 에버하르트 2세가 뒤를 이었으나, 불과 2년 만에 폐위되었다.

에버하르트 2세의 후계자 울리히는 즉위 당시 아직 어린아이였다. 울리히의 긴 통치 기간(1498년 ~ 1550년) 동안 뷔르템베르크는 가장 격동적인 시기를 맞았고, 유능하면서도 무절제하고 야심찬 공작 울리히의 통치는 뷔르템베르크에 다른 독일 영방과는 다른 정치 문화를 구축하게 되었다. 울리히는 풍부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거의 강도와 같은 방법으로 돈을 빼앗았기 때문에, 가난한 콘라트(Armer Konrad)라는 인물이 이끄는 농민 반란이 발생했다(이는 잉글랜드의 왓 타일러가 일으킨 반란과 유사한 성격이었다). 공작과 그의 고문들은 기민하게 상황을 수습하여 1514년 튀빙겐 조약을 체결했고, 백성들은 공작에게 부과되는 세금을 받아들이는 대신 다양한 정치적 권리를 부여받았다. 이 정치적 권리 덕분에 뷔르템베르크 국가에는 법치에 기반한 자유를 토대로 한 사회가 형성되었다.

몇 년 후, 울리히는 슈바벤 동맹과 적대하여 슈바벤 동맹군의 뷔르템베르크 침략을 받았다. 동맹군은 울리히의 아내 사비나의 동생인 바이에른 공작 빌헬름 4세의 지원을 받았다. 바이에른 공작은 울리히가 누이를 학대하는 것에 분노하고 있었던 것이다. 망명을 강요당한 울리히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에게 공작령을 220000Gulden에 매각했다.

카를 5세는 뷔르템베르크를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에게 넘겼고, 페르디난트 1세는 몇 년 동안 명목상의 통치자로 일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오스트리아의 전제적인 지배에 대한 불만이 커졌고, 독일 내부가 농민 전쟁을 발단으로 한 전란과 종교 개혁으로 인한 혼란으로 불안정해지자, 울리히는 기회를 포착하여 공국을 되찾았다. 1534년 5월, 울리히는 헤센 방백 필립 1세와 기타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의 지원을 얻어 페르디난트 1세의 군대를 라우펜에서 물리치고, 카덴 조약에 의해 뷔르템베르크 공작으로 복위했다. 그러나 필연적으로 오스트리아 대공의 봉신으로 공국을 받는 형태로 복위하게 되었다. 울리히는 후에 개혁파의 종교 신앙을 채택하고, 자신의 영토 전역에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건설하려고 노력했으며, 1536년 튀빙겐 슈티프트 신학교를 설립했다. 울리히는 말년에 슈말칼덴 동맹에 가담했기 때문에 황제군에 의해 다시 영토에서 쫓겨났다. 카를 5세는 1547년 다시 울리히를 복위시켜 주었지만, 이번에는 금전적인 배상을 지불하게 했다.

2. 3. 2. 종교 개혁기

크리스토프 공(재위 1550년 - 1568년) 시대에 뷔르템베르크의 프로테스탄트화가 완료되었다. 크리스토프는 교회 통치 조직을 도입했고, 이 조직은 20세기까지 존속했다. 크리스토프 시대에는 상설 위원회가 공국의 재정을 관리하게 되었다. 이 위원회 소속 구성원은 모두 상류 계급이었으며, 위원들은 주로 도시의 재원을 자기 맘대로 배분하여 공국에서 큰 권력을 얻었다.

크리스토프의 아들 루트비히(재위 1568년 - 1593년)는 1593년에 자녀 없이 사망했고, 방계의 프리드리히 1세(재위 1593년 - 1608년)가 뒤를 이었다. 프리드리히 1세는 정력적인 통치자였지만, 권력에 제한이 있는 군주로서의 입장과 오래된 국법을 경시했다. 1599년, 프리드리히는 신성 로마 황제 루돌프 2세에게 거액의 돈을 지불하고 뷔르템베르크를 오스트리아의 속령 지위에서 해방시켰다. 이렇게 뷔르템베르크는 다시 봉토에서 벗어나 직할령(Imperial immediacy)이 되었다.

2. 3. 3. 절대주의 시도

요한 프리드리히 공작은 절대 군주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군주권 제한을 인정했다. 30년 전쟁으로 뷔르템베르크는 황폐화되었다. 에버하르트 루트비히 시대에 프랑스 침략으로 피해를 보았으나, 발도파 난민 수용으로 경제가 회복되었다. 루트비히스부르크 궁전이 건설되었다. 카를 알렉산더 공작은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유대인 고문 오펜하이머를 신임했다. 카를 오이겐 공작은 사치와 7년 전쟁 참전으로 백성들의 불만을 샀으나, 말년에 조정을 통해 분노를 가라앉혔다.

2. 3. 4. 프랑스 혁명기

프리드리히 2세 오이겐 시대(재위 1795년 - 1797년)에 프랑스 공화국군이 뷔르템베르크를 침공했다. 프리드리히 2세 오이겐은 프랑스군에 항복하고 신성 로마 제국 진영에서 이탈하여 프랑스에 배상금을 지불했다. 그는 2년이라는 짧은 기간 통치했지만, 공국의 독립을 유지했다. 그는 많은 자녀들을 러시아, 오스트리아, 영국을 비롯한 유럽 각국의 왕가와 혼인시켰다.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3세(재위 1797년 - 1816년)는 아버지가 섬겼던 프리드리히 대왕을 본보기로 삼았고, 공국의 민의에 반하여 프랑스와의 전쟁에 참가했다. 뷔르템베르크가 다시 프랑스에 점령되자 프리드리히 3세는 에어랑겐으로 피신하여 1801년 2월 9일 뤼네빌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1802년 3월, 프리드리히 3세는 프랑스와 거래하여 라인 강 좌안의 영토를 프랑스에 양도하고, 대신 로이틀링겐하일브론을 포함한 9개의 제국 도시와 기타 지역을 획득했다. 이때 획득한 영토는 약 2200km2의 넓이였고, 12만 4000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1803년에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영합하여 선제후 칭호를 얻었다. 프리드리히 3세의 새로운 영토는 뷔르템베르크 공국에 편입되지 않고 별도로 통치되었다. 이 새로운 영토는 "신 뷔르템베르크 (Neu-Württemberg)"라고 불렸으며, 이 지역에는 영방 의회가 설치되지 않았다. 1803년부터 1806년까지 "독일 영방의 봉신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뷔르템베르크는 더욱 다른 지역을 지배 영역에 편입해 나갔다.

뷔르템베르크는 1805년 프랑스의 동맹국으로서 전쟁에 참가했고, 1805년 12월프레스부르크 조약에서는 보상으로 오스트리아령 슈바벤 등의 지역을 얻었다.

2. 4. 뷔르템베르크 선제후령 (1803년–1806년)

1803년부터 1806년까지 존속한 뷔르템베르크 선제후령 시기에는 나폴레옹의 지원으로 뷔르템베르크가 선제후국이 되었다.

2. 5. 뷔르템베르크 왕국 (1806년–1918년)

1806년 1월 1일, 프리드리히 1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뷔르템베르크 공국은 왕국으로 승격되었다. 프리드리히 1세는 국법을 폐지하고 옛 공국과 새로 얻은 영토를 통합했으며, 교회령을 지배하고 독일 영방의 속국화로 독립을 잃은 지역을 흡수했다.[1] 같은 해, 라인 동맹에 가입하여 16만 명이 거주하는 지역을 추가로 얻었고, 1809년 쉔부른 조약을 통해 11만 명이 거주하는 지역을 추가로 확보했다.[1]

프리드리히 1세는 나폴레옹 1세를 도와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러시아 원정에 뷔르템베르크 병력을 파병했다. 모스크바 원정에는 16,000명이 참여했지만, 생존자는 수백 명에 불과했다.[1]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 이후, 프리드리히 1세는 메테르니히와 조약을 맺고 반프랑스 동맹에 가담하여 왕위와 영토를 보장받았다.[1]

1815년 뷔르템베르크는 독일 연방에 가입했지만, 빈 회의에서 추가 영토를 얻지는 못했다. 같은 해, 프리드리히 1세는 새 헌법 초안을 제시했으나 의회의 반대로 1816년 사망했다.

빌헬름 1세1819년 새 헌법을 제정하여 1918년까지 유지했다. 헌법 문제 해결 이후, 교육, 농업, 무역, 공업 등 내정 발전에 힘썼고, 절약을 통해 국가 재정을 재건했다. 1830년 이후 정치적 불안이 있었으나, 독일 관세 동맹 가입과 철도 건설로 무역이 활성화되면서 점차 해소되었다.

1848년 유럽 혁명 시기, 뷔르템베르크에서는 폭동은 없었지만, 빌헬름 1세는 자유주의 내각을 구성하고 민주주의 헌법을 공포했다. 그러나 자유주의 운동이 거세지자 보수 내각으로 교체하고 1851년에는 국왕에게 충실한 의회를 소집하여 1848년의 특권을 폐지했다. 1819년 헌법 체제가 부활하고 관료 중심 통치가 이루어졌다. 빌헬름 1세는 교황과의 콘코르다트(정교 협약) 체결을 시도했으나 의회는 거부했다.

1864년 즉위한 카를 1세는 독일 패권을 둘러싼 오스트리아 제국프로이센 왕국의 갈등에서 오스트리아 편에 섰다.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패배한 후, 프로이센에 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군사 동맹을 맺었다. 1868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선언에 서명했다.

1871년, 뷔르템베르크는 독일 제국의 일원이 되었지만, 우편, 전신, 철도 관리권과 과세, 군사 특권을 유지했다.[1] 이후 10년간 신질서를 지지하며 재정 등 여러 개혁을 단행했지만, 철도 통합 제안은 거부했다. 1904년에 철도가 독일 다른 지역과 통합되었다.[1]

1891년 카를 1세 사망 후 빌헬름 2세가 즉위했다. 빌헬름 2세와 예상 상속자 모두 자녀가 없어, 왕위 계승권은 가톨릭 방계로 넘어가게 되었고, 1910년 알브레히트 공이 법정 예상 상속인으로 지명되었다.[1]

1900년부터 1910년까지 뷔르템베르크는 헌법(1906년 개정)과 교육 문제 해결에 집중했다.[1]

2. 5. 1. 라인 동맹, 1806년 - 1813년

1806년 1월 1일, 공작 프리드리히는 왕위를 계승하여 뷔르템베르크 왕 프리드리히 1세가 되었고, 국법을 폐지하여 옛 뷔르템베르크 공국과 새로 획득한 영토를 통합했다. 이후 프리드리히 1세는 교회령을 지배하에 두고, 「독일 영방의 속국화」로 독립을 잃은 지역을 손에 넣었다. 같은 해 1806년, 프리드리히는 라인 동맹에 참가하여 16만 명이 거주하는 지역을 추가로 얻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809년 10월에 체결된 Schönbrunn 조약에 따라 프리드리히는 11만 명이 거주하는 지역을 추가로 확보했다.

이러한 새로운 영토를 제공해 준 나폴레옹 1세에 대한 보답으로, 프리드리히는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러시아에 대한 나폴레옹의 원정에 많은 뷔르템베르크 백성을 참여시켰다. 1812년 모스크바 원정에는 16,000명의 뷔르템베르크인이 참여했지만, 귀국할 수 있었던 사람은 수백 명에 불과했다. 1813년 10월 라이프치히 전투 이후, 변절이 빠른 프리드리히 1세는 운이 다한 프랑스 황제를 버리고, 1813년 11월 풀다에서 오스트리아 총리 클레멘스 메테르니히 후작과 조약을 맺어 왕위와 새로 획득한 영토를 보장받는 대가로 반프랑스 동맹군에 참여하여 프랑스에 군대를 파병할 것을 약속했다.[1]

2. 5. 2. 독일 연방, 1815년 - 1871년

1815년, 프리드리히 1세는 독일 연방에 가입했지만, 빈 회의에서는 새로운 영토를 획득하지 못했다. 같은 해, 프리드리히는 신민 대표들에게 새로운 헌법 초안을 제시했지만, 대표들은 왕의 헌법을 거부했고, 이러한 정치적 긴장 속에서 1816년 3월 프리드리히는 사망했다.

새로운 왕 빌헬름 1세(재위 1816년 – 1864년)는 즉위하자마자 헌법 문제 해결에 나서, 신민 대표들과의 긴 협상 끝에 1819년 9월 헌법이 제정되었다. 이 왕국 헌법은 수정을 거치면서도 1918년까지 국가의 기본법으로 존속하게 되었다. 헌법 문제가 해결되고 평화로운 시대가 오자, 교육, 농업, 무역, 공업 등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내적 발전이 중요한 문제로 주목받았다. 빌헬름 1세는 절약을 통해 파탄 직전이었던 국가 재정을 재건하려 했다. 그러나 1819년 헌법하의 자유보다 더 큰 정치적 자유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았고, 1830년 이후로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불안정도 뷔르템베르크가 독일 관세 동맹에 가입하고 철도가 건설되면서 무역이 활성화되자 점차 사라져 갔다.

1848년 유럽 각국에서 혁명 운동이 발발하는 가운데, 뷔르템베르크 왕국에서는 아무런 폭동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무관심할 수는 없었다. 빌헬름 1세는 총리 요하네스 폰 슐라이어와 다른 각료들을 해임하고, 보다 자유주의적이며 통일 독일의 이상을 지지하는 거물 정치가에게 내각 구성을 명령해야 했다. 빌헬름 1세는 민주주의 헌법을 공포했지만, 자유주의자들의 운동이 거세지자 자유주의자 내각을 해임했고, 1849년 10월에는 슐라이어와 그의 동료들이 다시 정권에 복귀했다. 국왕과 내각은 선거권을 확대하여 민심을 회유하는 한편, 1851년에는 자신들에게 충실한 의회를 소집하는 데 성공했고, 이 의회는 1848년 국민이 획득한 모든 특권을 포기했다. 당국은 이러한 교묘한 방책으로 1819년 헌법 체제를 부활시켰고, 국가 권력은 관료의 손에 넘어갔다. 교황과의 콘코르다트(정교 협약) 체결을 시도했던 것이 빌헬름 1세의 긴 통치 기간 중 마지막 정책이었지만, 의회는 이 협약의 비준을 거부했다. 의회는 왕국에서 독자적으로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1864년 7월 아버지 빌헬름으로부터 왕위를 계승한 카를 1세(재위 1864년 – 1891년)는 즉위 초부터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했다. 독일 패권을 둘러싼 오스트리아 제국프로이센 왕국의 다툼에서 선왕 빌헬름 1세는 항상 오스트리아 편에 서 있었는데, 이러한 친오스트리아적인 외교 노선은 새로운 왕과 그의 조언자들에게도 계승되었다.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뷔르템베르크는 오스트리아 편에 서서 참전했지만, 쾨니히그라츠 전투(1866년 7월 3일)로부터 3주 후, 뷔르템베르크 군은 타우버비쇼프스하임에서 프로이센 군에 대패했고, 왕국은 프로이센 군에 유린당했다. 프로이센은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북서부를 점령했고, 1866년 8월에 화약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에 따라 뷔르템베르크는 (800만 구르덴)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곧 정복국 프로이센과 군사 동맹을 맺었다. 뷔르템베르크는 1868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선언의 서명국 중 하나가 되었다.

2. 5. 3. 독일 제국, 1871년 - 1918년

1871년 뷔르템베르크는 독일 제국의 일원이 되었지만, 우편, 전신, 철도의 관리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1] 뷔르템베르크는 또한 과세와 군사에 관한 특정한 특권을 인정받았다.[1] 이후 10년 동안 뷔르템베르크 왕국은 신질서를 지지했다.[1] 뷔르템베르크에서는 재정 분야 등 많은 중요한 개혁이 단행되었지만, 뷔르템베르크의 철도를 독일 다른 지역의 철도와 통합하려는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 1904년, 뷔르템베르크의 철도는 독일 다른 지역의 철도와 통합되었다.[1]

1891년 10월 9일, 카를 1세가 급사하자 사촌인 빌헬름 2세(재위 1891년 - 1918년)가 왕위와 전임자의 정책을 계승했다.[1]

빌헬름 2세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예상 상속자인 니콜라우스 공(1833년 - 1903년)에게도 자녀가 없었다.[1] 왕위 계승권은 궁극적으로 뷔르템베르크 가문의 가톨릭 신자 방계로 넘어가게 되었지만, 가톨릭 신자 왕이 탄생하면 왕국 내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불협화음이 생길 우려가 있었다.[1] 1910년, 가톨릭 신자인 알브레히트 공이 국왕의 새로운 법정 예상 상속인으로 지명되었다.[1]

1900년부터 1910년까지 뷔르템베르크의 정치적 초점은 헌법 문제와 교육 문제 해결에 있었다.[1] 헌법은 1906년에 개정되었고, 교육 문제는 1909년 이후 해결되었다.[1]

2. 6. 군주제 폐지 이후의 뷔르템베르크

1918년 11월, 제1차 세계 대전 종전과 함께 발생한 혁명 운동으로 빌헬름 2세가 퇴위하고 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뷔르템베르크는 새롭게 성립된 바이마르 공화국의 주(Land)인 뷔르템베르크 자유인민주가 되었다. 1918년부터 1919년까지 혁명 운동이 고조된 후,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실시된 5차례의 선거에서 뷔르템베르크의 좌파 정당 득표 수는 점차 감소했다. 1934년 이후, 뷔르템베르크는 나치 독일 정권하에서 호엔촐레른과 함께 뷔르템베르크-호엔촐레른 관구를 구성하였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종결 후, 뷔르템베르크는 바이존(영미 공동 점령 지역)의 뷔르템베르크-바덴주와 프랑스 점령 지역의 뷔르템베르크-호엔촐레른주로 분할되었다. 두 주는 1952년 모두 바덴뷔르템베르크주의 일부가 되었다.

3. 지리

동쪽은 바이에른, 서쪽은 바덴과 접하고 있다. 남쪽에는 콘스탄츠 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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