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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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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박은 수나라 말기에 활동한 인물로, 고구려 원정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611년 장백산에서 맹양과 함께 거병하여 지세랑을 칭하고 수나라에 저항했다. 이후 여러 세력에 투항하며 세력을 키웠으나, 622년 담주자사 이의만에게 살해당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수나라 고구려 원정을 비판하는 내용의 《막향요동랑사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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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박
기본 정보
조선 왕조의 문장
조선 왕조의 문장
한국어왕박
한자王薄
로마자 표기Wang Bo
생애
출생수나라 말기
사망당나라 초기
시대수나라 말기
활동
직업반란 지도자
주요 활동수나라에 대한 반란
장백산에서 자립
제나라 건국
가족 관계
부모미상
배우자미상
자녀미상
기타
관련 인물양현감
두건덕
이밀

2. 생애

왕박은 제군(齊郡) 추평현(鄒平縣) 출신으로, 수 양제 때인 611년 맹양(孟讓)과 함께 장백산(長白山)에서 거병하여 스스로 지세랑(知世郞)이라 칭하고 《막향요동랑사가(莫向遼東浪死歌)》를 지어 수나라 고구려 원정에 대한 반감을 일으켰다.[2] 농민들이 이에 호응하여 세력이 커졌으나, 613년 장수타(張須陀)에게 패하였다. 이후 손선아(孫宣雅), 학효덕(郝孝德)과 연합하여 다시 세력을 키웠다.[2]

619년, 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 항복했다가 두건덕(竇建德)에게 투항했고, 다시 당나라에 투항하여 제주총관(濟州總管)에 임명되었다.[2] 서원랑(徐圓朗) 토벌에 참여하기도 했다.

622년, 성언사(盛彦師)와 함께 수창현(須昌縣)을 공격하던 중, 군량 보급 문제로 담주자사(潭州刺史) 이의만(李義滿)과 갈등을 빚었다. 이의만이 옥사한 후, 그의 조카 이무의(李武意)에게 살해당했다.[3]

2. 1. 초기 생애와 봉기

611년(대업 7년) 10월, 왕박은 같은 군 사람인 맹양(孟讓)과 함께 무리를 모아 산둥성지난시장추구에 있는 장백산(長白山)을 거점으로 거병하였다. 그는 스스로 지세랑(知世郞)이라 칭하고, 《막향요동랑사가(莫向遼東浪死歌)》라는 노래를 지어 사람들에게 수 양제의 고구려 정벌에 대한 반감을 호소했다.[2]

왕박이 거병하자 농민들은 앞다투어 참여하였고, 그의 무리는 1년 만에 수만 명에 이르렀다. 왕박의 군대는 조정의 군사들과 여러 차례 격전을 벌인 뒤 강을 넘어 남쪽으로 진격하였다.[2]

613년, 왕박은 태산 아래에서 수나라 장수 장수타(張須陀)에게 패하여 병력이 1만여 명으로 줄었다. 그는 황하(黃河) 북쪽으로 퇴각했으나, 장수타의 추격으로 다시 패하여 임읍(臨邑)까지 도망하였다.[2]

이후 왕박은 손선아(孫宣雅), 학효덕(郝孝德)의 군사들과 연합하여 10여 만 명의 병력을 모아 장구(章丘)를 공격하고, 장수타가 이끌던 군사를 격파하였다.[2]

2. 2. 수나라와의 전투

611년(대업 7년) 10월 왕박은 같은 군 사람인 맹양(孟讓)과 무리를 모아 산둥성지난시장추구에 있는 장백산(長白山)을 거점으로 거병하고 스스로 지세랑(知世郞)이라 칭하며, 《막향요동랑사가(莫向遼東浪死歌)》라는 노래를 지어 수나라 고구려 원정에 대한 반감을 호소했다.[2]

왕박이 거병하자 농민들은 서로 앞다투어 가담하여, 그의 무리는 불과 1년 만에 수만 명에 이르렀고 조정의 군사들과 수차례 격파한 뒤 강을 넘어 남쪽으로 진격하였다. 613년에는 대군에 자만하여 대비를 소홀히 한 탓에, 수나라 제군군승(齊郡郡丞) 장수타(張須陀)에게 태산 기슭에서 패했다. 남은 병사들을 모아 황하를 건넜지만, 임읍에서 다시 장수타에게 패했다.

이후 왕박은 손선아(孫宣雅), 학효덕(郝孝德)의 군사들과 연합하여 많은 무리를 모아 10여 만명에 이르렀고, 장구(章丘)를 공격하여 비슷한 숫자였던 장수타가 이끌던 군사를 격파하였다.[2]

2. 3. 여러 세력에 투항

수 양제 재위 기간이던 611년(대업 7년) 10월, 제군(齊郡) 추평현(鄒平縣) 출신 왕박은 같은 군 사람인 맹양(孟讓)과 함께 장백산(長白山)을 거점으로 거병하고 스스로 지세랑(知世郞)이라 칭하며 《막향요동랑사가(莫向遼東浪死歌)》라는 노래를 지어 고구려 정벌에 대한 반감을 일으켰다.[2] 농민들이 이에 호응하여 1년 만에 수만 명의 무리를 모았고, 조정의 군사를 격파하며 강을 건너 남쪽으로 진격했다.[2]

613년, 왕박은 태산 아래에서 수나라 장수 장수타(張須陀)에게 패하고 황하(黃河) 북쪽으로 퇴각했으나, 장수타의 추격으로 임읍(臨邑)에서 다시 패했다.[2] 이후 손선아(孫宣雅), 학효덕(郝孝德)과 연합하여 10만 명의 군사를 모아 장구(章丘)를 공격, 장수타의 군사를 격파했다.[2]

619년(무덕 2년), 왕박은 반란을 일으켜 수 양제를 살해한 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 항복했다.[2] 그러나 우문화급이 두건덕(竇建德)에게 포위되자, 왕박은 두건덕에게 성문을 열어주고 투항했다.[2] 이후 왕박은 다시 당 고조(唐 高祖)에게 투항하여 제주총관(濟州總管)에 임명되고 서원랑(徐圓朗) 토벌에 나섰다.[2]

2. 4. 죽음

622년(무덕) 당나라의 담주자사(潭州刺史) 이의만(李義滿)에게 살해당했다.[2] 자치통감에 따르면, 왕박은 송주총관(宋州總管) 성언사(盛彦師)와 함께 수창현(須昌縣)을 공격하면서 담주의 이의만에게서 군량을 보급받으려 했으나, 이의만은 왕박과 사이가 나빠 창고를 열어 주지 않았다. 수창현이 함락되자 성언사는 이의만을 옥에 가두었고, 이후 이의만은 옥에서 죽었다. 왕박을 살해한 것은 이의만의 형의 아들인 이무의(李武意)이다.[3]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621년 왕박은 서원랑을 따르던 청주, 내주, 밀주 사람들을 설득하여 당나라에 귀순시켰다. 622년 성언사와 함께 수창을 공격할 때 군량미를 담주에서 징수하게 되었는데, 왕박과 담주 자사인 이의만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의만은 창고를 닫고 군량을 주지 않았고, 수창 함락 후 성언사는 이의만을 제주의 옥에 가두었다. 고조 이연이 이의만을 석방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조서가 도착하기 전에 이의만은 옥사했다. 이때 왕박이 담주를 지나가자, 이의만의 형의 아들인 이무의가 왕박을 붙잡아 살해했다.

3. 막향요동랑사가(莫向遼東浪死歌)

왕박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막향요동랑사가(莫向遼東浪死歌)는 수나라 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할 때 지어진 노래로, 요동에서 헛되이 죽지 말라는 뜻을 담고 있다.[1] 이는 당시 고구려 원정에 대한 백성들의 반감과 두려움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3. 1. 가사

무향 요동 낭사 노래[1]
원문한글 표기
장백산전지세랑,순착홍라면배당。
장삭침천반,륜도요일광。
상산흘장록,하산흘우양。
홀문관군지,제도향전탕。
비여요동사,참두하소상。
막향요동거,초초거로장。
노친의려망,소부수공방。
유전불득경,유사수상장。
일거불지하일반,일상룡퇴억고향。
막향요동거,종래행로난。
장하도무주,고산접운단。
청상의고박,대설골욕완。
일락한산행불식,음빙와우최심간。
막향요동거,이병사호시。
장검쇄아신,리족천아시。
성명지수유,절협수비애。
공성대장수상상,아독하위사호래!


참조

[1] Wikisource 無向遼東浪死歌 全隋詩
[2] 서적 '[武德]五年...三月戊戌 譚州刺史李義滿殺齊州都督王薄' 신당서
[3] 서적 '宋州總管盛彦師帥齊州總管王薄攻須昌 征軍糧於潭州 刺史李義滿與薄有隙 閉倉不與 及須昌降 彦師收義滿 系齊州獄 詔釋之 使者未至 義滿憂憤 死獄中 薄還 過潭州 戊戌夜 義滿兄子武意執薄 殺之' 자치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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