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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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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자 조는 주 경왕의 서장자로, 경왕의 총애를 받아 태자가 될 뻔했으나, 경왕 사후 왕위 계승 분쟁에 휘말렸다. 그는 도왕 즉위 후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나라의 지원을 받은 경왕 측에 밀려 초나라로 망명했다. 결국 초나라에서 살해되었으며, 그의 사후에도 지지 세력의 반란이 이어졌다.

2. 생애

주나라 경왕(景王)의 서장자(庶長子)로 태어났다.[1] 기원전 527년 본래 태자였던 수(壽)가 죽고[2] 왕자 맹(猛)이 새로운 태자가 되었으나, 경왕은 점차 왕자 조를 총애하여 그를 태자로 삼으려 하였다. 이는 왕실 내부에 왕자 조 지지 세력과 기존 태자 맹 지지 세력 간의 심각한 대립을 야기했다.

기원전 520년 경왕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3] 왕자 맹이 도왕(悼王)으로 즉위했지만, 왕자 조는 왕위를 노리고 반란을 일으켰다.[3] 이로 인해 주나라는 15년에 걸친 극심한 내전에 휩싸였다. 왕자 조는 한때 도왕을 살해하고[3] 스스로 왕위에 올라 서왕(西王)이라 칭하며 경왕(敬王, 동왕)과 대립, 주나라를 동서로 분열시키는 등 혼란을 가중시켰다.[4]

이 내분 과정에서 진나라가 개입하여 경왕을 지원했고, 치열한 전투와 정치적 암투 끝에 기원전 516년 왕자 조는 결국 세력을 잃고 주나라의 귀중한 전적(典籍)을 가지고 초나라로 망명했다.[7] 초나라에서도 제후들에게 자신의 정당성을 호소하며 재기를 도모했으나,[7] 기원전 505년 봄, 오나라가 초나라를 침공한 혼란을 틈타 경왕이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당하며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8]

2. 1. 출생과 초기 생애

왕자 조는 주나라 경왕(景王)의 서장자(庶長子)로 태어났다.[1] 기원전 527년 6월 9일, 경왕의 적장자이자 왕태자였던 수(壽)가 죽고, 같은 해 가을 8월 22일에는 태자 수의 생모인 왕후 목후(穆后)마저 세상을 떠났다.[2] 이에 경왕은 왕자 맹(猛)을 새로운 태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경왕은 서장자인 왕자 조를 깊이 총애하게 되었고, 결국 왕자 조를 태자로 삼으려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이러한 경왕의 뜻에 따라 왕자 조의 스승인 대부 빈기(賓起)를 비롯하여 여러 왕자들, 그리고 소씨(召氏), 모씨(毛氏), 윤씨(尹氏), 남궁씨(南宮氏) 일족 등이 왕자 조를 지지하고 나섰다. 반면, 기존 태자인 왕자 맹을 지지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선씨(單氏)의 단목공(單穆公) 선기(單旗), 유씨(劉氏)의 유헌공(劉 獻公) 유지(劉摯), 그리고 공씨(鞏氏), 감씨(甘氏), 번씨(樊氏) 일족 등은 왕자 맹을 지지하며 왕자 조 측과 대립했다. 특히 유 헌공의 서자이자 훗날 유문공(劉 文公)이 되는 공자 적(狄)은 단 목공을 섬기면서 빈기와 왕자 조를 미워하여 그들을 제거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어느 날, 빈기가 교외에 나갔다가 수탉이 자신의 꼬리를 쪼아대는 기이한 광경을 목격했다. 시종에게 이유를 묻자, "제물로 희생될 것이 두려워 스스로를 상하게 하는 것"이라는 답을 들었다. 빈기는 궁으로 돌아와 경왕에게 이 일을 보고하며, "닭은 사람에게 제물로 바쳐질까 두려워하지만, 사람은 스스로 희생되기를 원한다면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이 말을 들은 경왕은 마침내 왕자 조를 태자로 세우기로 결심을 굳혔다.

기원전 520년 여름 4월, 경왕은 북산(北山)으로 사냥을 나가 왕자 조의 태자 책봉에 걸림돌이 되는 유 헌공과 단 목공을 제거하려 했으나, 갑작스러운 심장병 발작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같은 달 18일, 경왕은 대부 영기(榮錡)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경왕의 뒤를 이어 태자 맹이 즉위하니, 이가 바로 도왕(悼王)이다. 경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왕자 조를 둘러싼 왕위 계승 갈등의 서막이 되었다.

2. 2. 경왕(景王) 사후 왕위 계승 분쟁

기원전 527년 6월 9일, 주나라의 태자 수(壽)가 사망했고, 같은 해 가을 8월 22일에는 그의 친모인 목후(穆后)마저 사망했다.[2] 이에 경왕(景王)은 왕자 맹(猛)을 새로운 태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서장자(庶長子)인 왕자 조(朝)가 경왕의 총애를 받기 시작했고, 경왕은 왕자 조를 태자로 삼으려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1] 왕자 조의 스승인 대부 빈기(賓起)를 비롯하여 여러 왕자들, 소씨(召氏), 모씨(毛氏), 윤씨(尹氏), 남궁씨(南宮氏) 일족 등은 왕자 조를 지지했다. 반면, 선씨(單氏)의 선 목공(單 穆公) 선기(單旗), 유씨(劉氏)의 유헌공 유지(劉摯), 공씨(鞏氏), 감씨(甘氏), 번씨(樊氏) 일족 등은 기존의 태자인 왕자 맹을 지지하며 양측의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다. 특히 유 헌공의 서자인 공자 적(狄, 유문공)은 선 목공을 섬기면서 빈기와 왕자 조를 미워하여 그들을 제거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어느 날, 빈기가 교외에서 수탉이 제 꼬리를 쪼는 것을 보고 그 이유를 묻자, 시종은 "제물로 희생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빈기는 이를 경왕에게 보고하며, 스스로 희생되기를 원한다면 문제 될 것이 없다는 논리로 왕자 조를 태자로 세울 것을 간언했고, 경왕은 마침내 왕자 조를 태자로 삼기로 결심했다.

기원전 520년 여름 4월, 경왕은 북산(北山)에서 사냥하며 왕자 조의 태자 책봉에 반대하는 유 헌공과 선 목공을 제거하려 했으나, 갑작스러운 심장병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4월 18일, 경왕은 대부 영기(榮錡)의 집에서 사망했다.[3] 경왕 사후 왕자 맹이 왕위를 이으니, 이가 도왕(悼王)이다. 며칠 뒤인 4월 22일, 유 헌공도 사망했는데 적자가 없어 선 목공이 서자인 공자 적을 후계자로 세우니, 그가 유 문공(劉 文公)이다. 5월 4일, 유 문공은 도왕을 조현한 직후 빈기를 공격하여 살해하고, 여러 왕자들과 함께 선 목공 앞에서 맹약을 맺었다.[3]

6월 11일, 경왕의 장례가 치러지자 왕자 조는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과 기존 질서에 불만을 품은 이들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왕자 조의 군대는 유 문공을 공격하여 그를 양(揚)으로 쫓아냈다.[3] 6월 16일, 유 문공은 양으로 달아났고, 선 목공은 도왕을 자신의 저택으로 피신시켰으나, 왕자 선(還)이 밤중에 도왕을 다시 장궁(莊宮)으로 데려갔다. 왕자 선은 소 장공(召 莊公) 소환(召奐)과 모의하여 선 목공을 제거하려 했으나, 번 경자(樊 頃子) 번제(樊齊)는 이를 비판했다. 왕자 선은 도왕을 받들고 선 목공을 추격하여 맹세를 통해 안심시킨 뒤, 죄를 대부 지황(摯荒)에게 뒤집어씌워 죽였다. 그러나 유 문공이 자신의 봉읍인 유(劉)로 가자, 선 목공은 왕자 선의 계략을 눈치채고 평치(平畤)로 달아났다. 6월 19일, 선 목공이 평치로 달아나자 여러 왕자들이 추격했지만, 선 목공은 반격하여 왕자 선, 고(姑), 발(發), 약(弱), 종(鬷), 연(延), 정(定), 조(稠) 등을 살해했다. 이에 왕자 조는 경(京)으로 도주했다.[3]

6월 20일, 선 목공이 경을 공격하자 경의 사람들은 북산으로 달아났고, 유 문공은 왕성(王城)으로 들어갔다. 6월 25일과 29일, 주나라 경사 공 간공과 감평공이 연이어 경을 공격했으나 왕자 조에게 패배했다.[3] 노나라 대부 숙앙(叔鞅)이 왕실의 난을 보고하자, 민마보(閔馬父)는 왕자 조가 하늘이 버린 자들과 함께 하므로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 예견했다. 선 목공은 진(晉)나라에 위급함을 알리고 구원을 요청했다.[3]

가을 7월, 도왕은 평치, 포거(圃車), 황(皇) 등지로 피신했고, 유 문공은 봉읍인 유로 돌아갔다. 선 목공은 왕자 처(處)에게 왕성을 지키게 하고 백공(百工)들과 맹세했다. 7월 16일, 왕자 조 측의 순힐(鄩肹)이 황을 공격했으나 선 목공에게 패배하고 포로로 잡혀 다음 날 왕성 시장에서 화형당했다. 8월 16일, 왕실 사도(司徒) 추(醜)가 이끄는 군대가 전성(前城)에서 패배하자 백공들이 반란에 가담했다. 백공들은 선 목공의 공궁을 공격했으나 실패했고, 선 목공은 반격하여 동어(東圉)를 쳤다.

겨울 10월 13일, 진나라 대부 적담과 순력(지력)이 이끄는 군대가 구주지융(九州之戎) 등 여러 세력과 합세하여 도왕을 왕성으로 들였다.[3] 그러나 10월 16일, 선 목공과 유 문공이 이끄는 도왕의 군대는 교외 전투에서 왕자 조에게 다시 패배했다. 11월 12일, 도왕이 갑자기 병사했다. 《춘추경(春秋經)》에는 그가 정식으로 즉위하지 못했기에 '붕(崩)' 대신 '졸(卒)'로 기록되었다. 도왕의 뒤를 이어 왕자 개(丐)가 즉위하니, 이가 경왕(敬王)이다.[3] 경왕은 즉위 후 대부 자려(子旅)의 집에 머물렀다. 12월, 진나라 군대가 평음(平陰), 후씨(侯氏), 계천(谿泉), 사(汜) 등지에 주둔하며 경왕을 지원했고, 경왕의 군대도 사(汜), 해(解), 임인(任人) 등지에 주둔했다. 윤 12월, 진나라 군대는 낙수(洛水)와 이수(伊水)를 건너 전성(前城)을 점령하고, 왕자 조의 거점인 경을 공격하여 서남부를 함락시켰다.[3]

기원전 519년 봄 1월, 경왕과 진나라 연합군은 왕자 조 측의 교(郊)를 포위하여 함락시켰다. 이후 진나라 군대는 상황이 호전되었다는 경왕의 보고를 받고 철수했다.[4] 여름 4월, 선 목공과 유 문공은 각각 자(訾)와 장(牆), 직(直)을 점령하며 세력을 회복했다. 6월, 왕자 조는 윤읍(尹邑)으로 들어가 세력을 재정비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서왕(西王)이라 칭했다. 이로써 주나라는 동쪽의 경왕(동왕)과 서쪽의 왕자 조(서왕)로 나뉘는 혼란기에 접어들었다.[4] 윤 문공(尹 文公) 윤어(尹圉)는 경왕 측의 유타(劉佗)를 유인하여 살해했다. 선 목공과 유 문공이 윤읍을 공격하려 했으나 선 목공이 먼저 패배하자 유 문공도 회군했다. 소 장공(召莊公)과 남궁극(南宮極)이 성주(成周)의 군대를 이끌고 윤읍을 방어하자, 선 목공, 유 문공, 번 경자는 경왕을 모시고 유 문공의 영지인 유로 피신했다. 6월 24일, 서왕(왕자 조)은 왕성에 들어가 좌항(左巷)에 머물렀다. 가을 7월, 서왕 측의 순라(鄩羅)가 왕자 조를 장궁(莊宮)으로 들어가게 했고, 윤신(尹辛)은 유 문공의 군대를 연이어 격파하며 서위(西闈)와 괴(蒯)를 점령하는 등 기세를 올렸다.[4] 8월 27일, 지진으로 서왕 측의 남궁극이 압사하자, 대부 장홍(萇弘)은 이를 하늘이 서왕을 버린 징조라며 유 문공을 독려했다.

기원전 518년 봄 1월, 소 장공의 아들 소간공 소영(召盈)과 남궁극의 아들 남궁은(南宮嚚)이 감 평공의 아들 감 환공(甘 桓公)을 데리고 서왕을 찾아가면서 감씨가 경왕을 배반했다. 유 문공이 이를 우려하자 장홍은 덕을 닦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5] 서왕은 오(鄔)로 들어갔고, 6월에는 하(瑕)와 행읍(杏邑)을 함락시켰다.[5] 겨울 10월, 서왕은 주나라의 보물인 규옥(珪玉)을 황하에 던지며 복을 빌었으나, 규옥은 사공에게 발견되었고 음불녕(陰不佞)에게 빼앗겼다. 규옥은 돌로 변했다가 훗날 경왕에게 바쳐지자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고, 경왕은 음불녕에게 동자(東訾)를 하사했다.

기원전 517년 10월, 서왕 측의 윤 문공이 동자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6]

기원전 516년 4월, 선 목공이 다시 진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5월, 유 문공의 군대가 시씨(尸氏)에서 서왕 군대를 격파했으나, 시곡(施谷) 전투에서는 대패했다.[7] 7월, 유 문공은 경왕을 데리고 피신길에 올랐고, 서왕 군대는 유를 불태웠다. 경왕은 거(渠), 저씨(褚氏), 환곡(萑谷), 서미(胥靡), 활(滑) 등지를 전전했다. 진나라의 지력과 조앙이 군대를 이끌고 와 경왕을 보호했다.[7] 겨울 10월, 경왕은 활에서 군사를 일으켜 교와 시로 이동했다. 11월, 진나라 군대가 서왕 측의 공(鞏)을 함락시키자, 형세가 불리해진 소 간공이 서왕을 축출했다. 결국 왕자 조는 소씨 일족, 모백(毛伯) 모득(毛得), 윤고(尹固), 남궁은 등과 함께 주나라의 귀중한 전적(典籍)을 가지고 초나라로 망명했다.[7] 망명 도중 윤고는 돌아왔으나, 한 여인에게 비난받고 얼마 못 가 죽을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다. 서왕 측의 음기(陰忌)는 거읍(莒邑)에서 저항을 계속했다. 소 간공은 경왕을 맞이하고 유 문공, 선 목공과 맹세한 뒤, 11월 23일 경왕은 마침내 성주로 돌아와 장궁에 들어갔다.[7] 진나라 군대는 성공반(成公般)을 남겨 주나라를 수비하게 한 뒤 철수했다.

왕자 조는 초나라에서 제후들에게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경왕 측과 진나라를 비난하는 글을 보냈으나, 노나라 대부 민마보는 예를 무시한 왕자 조의 행동을 비판하며 문사는 소용없다고 일축했다.

기원전 513년 3월, 경왕은 낙읍에서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소 간공, 윤고 등을 처형했다. 여름 5월, 서왕의 잔당인 왕자 조차(趙車)가 연(鄻)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음불녕에게 진압되었다.

기원전 504년 (《사기》 기록에 따르면), 왕자 조의 잔당이 다시 난을 일으키자 경왕은 진나라로 피신했다가 기원전 503년 진 정공(晉 定公)의 도움으로 복귀했다.

기원전 505년 봄, 오나라가 초나라를 크게 격파한 혼란을 틈타, 경왕은 사람을 보내 초나라에 망명 중이던 왕자 조를 암살했다.[8] 이로써 15년에 걸친 왕위 계승 분쟁은 막을 내렸다.

2. 3. 초나라 망명과 죽음

기원전 516년 11월, 진나라 군대가 왕자 조 측의 거점인 공(鞏)을 함락시키자, 소 간공은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하고 왕자 조를 축출했다.[7] 결국 왕자 조는 소씨(召氏) 일족, 모백(毛伯) 모득(毛得), 대부 윤고(尹固), 남궁은(南宮嚚) 등과 함께 주나라의 귀중한 전적(典籍)을 가지고 초나라로 망명했다.[7] 이때 윤고는 망명길에 올랐다가 얼마 안 되어 다시 왕실로 돌아왔다.[7] 왕자 조를 따르던 음기(陰忌)는 거(莒)로 달아나 저항을 계속했다.[7]

초나라로 망명한 왕자 조는 제후들에게 글을 보내 자신이 왕위를 계승해야 할 정당성을 호소하고, 경왕을 옹립한 선 목공과 유 문공의 부당함을 알리며 지지를 요청했다.[7] 그는 서주 시대의 형제 제후들이 왕실을 도왔던 역사적 사례들을 언급하며, 선 목공과 유 문공이 사사로운 욕심으로 어린 경왕을 세워 주나라의 전래의 왕위 계승 원칙을 어겼다고 주장했다.[7] 또한 자신을 돕는 것이 천법(天法)을 따르는 것이며, 교활한 자들을 돕지 말라고 호소했다.[7] 그러나 노나라의 대부 민마보는 왕자 조가 천자의 명을 어기고 진나라와 같은 대국을 멀리했으며, 무례함이 극에 달했으므로 그의 호소는 소용없는 일이라고 일축했다.[7]

왕자 조가 망명한 후에도 그의 잔존 세력들의 저항이 있었다. 기원전 513년에는 왕자 조의 무리였던 왕자 조차(趙車)가 연(鄻)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었다.[8]

기원전 505년 봄, 오나라가 초나라를 대파하여 초나라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경왕은 주나라의 성주(成周) 사람들을 시켜 초나라에 자객을 보내 망명 중이던 왕자 조를 암살했다.[8]

3. 사후

왕자 조가 사망한 이후에도 그의 지지 세력은 활동을 이어갔으며, 대표적으로 기원전 504년에 발생한 담편의 난이 있다. 이 난은 주나라 왕실에 상당한 혼란을 야기했다.

3. 1. 담편(儋翩)의 난

기원전 504년, 대부 담편(儋翩)은 과거 왕자 조를 지지했던 세력을 규합하여 정나라의 지원을 받아 성주(成周)에서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정나라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주나라 왕실의 영토인 빙(馮, 하남성 뤄양시 부근), 활(滑), 서미(胥靡), 부서(負黍, 하남성 덩펑시 서남쪽), 호인(狐人, 하남성 임영현), 궐외(闕外, 하남성 이천현 북쪽) 등을 공격하였다.

같은 해 6월, 진나라의 대부 염몰(閻沒)은 성주를 방어하면서 서미 지역에 성을 쌓아 대비하였다.

겨울 12월, 경왕은 담편이 일으킨 난을 피해 고유(姑蕕)로 피신하였다.

기원전 503년 봄 2월, 왕실의 대부인 담편은 의률(儀栗)로 들어가 반기를 들었다. 여름 4월에는 선 무공(單 武公)과 유 환공(劉 桓公)이 궁곡(窮谷)에서 윤씨(尹氏) 세력을 격파하였다.

겨울 11월 23일, 선 무공과 유 환공은 경왕을 대부 경씨(慶氏)의 집에서 맞이하였으며, 이때 진나라 대부 적진(籍秦)이 경왕을 호위하였다. 12월 5일, 경왕은 왕성으로 돌아와 왕족인 대부 당씨(黨氏)의 집에 머물렀고, 이후 장궁(莊宮)으로 들어가 조회를 받았다.

기원전 502년 3월 26일, 왕실의 경사(卿士)인 선 무공은 곡성(谷城, 하남성 뤄양시 동북쪽)을 공격하였고, 유 환공은 의률(儀栗)을 공격하였다. 3월 28일에는 선 무공이 간성(簡城, 왕성 부근)을, 유 환공이 우(盂, 하남성 심양현 서북쪽)를 공격하며 반란 세력 진압에 나섰다.

참조

[1] 서적 史記集解
[2] 서적 春秋左氏伝
[3] 서적 春秋左氏伝
[4] 서적 春秋左氏伝
[5] 서적 春秋左氏伝
[6] 서적 春秋左氏伝
[7] 서적 春秋左氏伝
[8] 서적 春秋左氏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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