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접 (전한)
1. 개요
왕접은 전한 시대의 인물로, 초원 원년에 위위에 임명되었고, 영광 원년에는 대사마 거기장군이 되었으나 이듬해 사망했다. 시호는 고이며, 평창후 작위는 아들 왕림이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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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2년 사망 -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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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2년 사망 -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
가이우스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기원전 1세기의 로마 정치인이자 군인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의 주모자였으며, 필리피 전투에서 패배하여 자결했다. -
전한의 정치인 -
구독
구기(緱起)는 전한 시대에 기후(騎虎)에 봉해지고 태상(太常)을 역임한 인물로, 기원전 32년 사망 후 그의 아들 구숭(求崇)이 기후 자리를 계승했다. -
전한의 정치인 -
장량
장량은 전국시대 말기부터 초한쟁패기를 거쳐 전한 초기에 활약한 한나라 귀족 출신 인물로, 유방을 도와 한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우고 유후에 봉해진 뛰어난 지략가이자 책사이다. -
기원전 1세기 중국 사람 -
유급
유급은 전한 말기에 신양후에 봉해졌으나, 전한 멸망으로 작위를 잃은 유영의 아들이다. -
기원전 1세기 중국 사람 -
사마천
사마천은 중국 전한 시대의 역사가, 천문학자, 역법가로서 중국 최초의 통사로 평가받는 『사기』를 저술하여 기전체를 확립하고 역사 서술과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이릉 변호 사건으로 궁형을 받는 고난을 겪었으며 태초력 제정에도 참여하는 등 천문학과 역법에도 업적을 남겼다.
2. 생애
초원 원년(기원전 48년), 위위에 임명되었다. 영광 원년(기원전 43년), 대사마거기장군이 되었으나 이듬해에 죽었다. 시호를 고(考)라 하였고, 평창후(平昌侯) 작위는 아들 왕림이 이었다.
2.1. 관직
초원 원년(기원전 48년)에 위위에 임명되었다. 영광 원년(기원전 43년)에는 대사마거기장군이 되었으나, 이듬해에 사망하였다. 시호는 고(考)라 하였고, 평창후(平昌侯) 작위는 아들 왕림이 이었다.
2.1.1. 위위 (기원전 48년 ~ 기원전 43년)
초원 원년(기원전 48년), 위위에 임명되었다. 위위는 궁궐의 경비를 담당하는 중요한 직책으로, 왕접의 가문 배경이 이 임명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영광 원년(기원전 43년)에는 대사마거기장군이 되었으나, 이듬해에 사망하였다. 시호는 고(考)라 하였고, 평창후(平昌侯) 작위는 아들 왕림이 이었다.
2.1.2. 대사마 거기장군 (기원전 43년 ~ 기원전 42년)
초원 원년(기원전 48년)에 위위에 임명되었다.
영광 원년(기원전 43년), 대사마거기장군이 되었으나 이듬해에 죽었다. 시호를 고(考)라 하였고, 평창후(平昌侯) 작위는 아들 왕림이 이었다. 왕접이 대사마 거기장군에 오른 것은 외척 세력의 군사적 영향력을 보여주는 사례로 해석 할 수 있다.
2.2. 작위
초원 원년(기원전 48년), 위위에 임명되었다.
영광 원년(기원전 43년), 대사마거기장군이 되었으나 이듬해에 죽었다. 시호는 고(考)라 하였고, 평창후(平昌侯) 작위는 아들 왕림이 이었다.
2.2.1. 평창후 (기원전 57년 ~ 기원전 42년)
영광 원년(기원전 43년)에 왕접은 대사마거기장군이 되었으나, 이듬해에 죽었다. 시호는 고(考)라 하였고, 평창후(平昌侯) 작위는 아들 왕림이 이었다. 왕접이 아버지에게서 평창후 작위를 물려받은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왕림에게 작위가 이어진 기원전 42년 이전에 왕접이 평창후였음을 알 수 있다.
3. 평가
3.1. 긍정적 평가
3.2. 부정적 평가
4. 가계
4.1. 부모
4.2. 형제자매
4.3. 자녀
5. 출전
반고의 한서 권18 외척은택후표, 권82 왕상사단부희전, 권97 외척전에 왕접의 출전이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