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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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젠인은 빈고국 미요시번 초대 번주 아사노 나가하루의 딸로, 아사노 나가노리의 부인이자, 겐로쿠 아코 사건과 관련된 인물이다. 나가노리의 할복 후 출가하여 남편의 명복을 빌었으며, 아코 낭사들을 지원하고 유족들의 사면 운동에 힘썼다. 1714년 41세(혹은 46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남편과 함께 센가쿠지에 묻혔다. 요젠인은 겐로쿠 아코 사건을 소재로 한 창작물에도 등장하며, 난부자카 눈의 이별 장면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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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젠인 | |
|---|---|
| 인물 정보 | |
| 이름 | 요젠인 |
| 본명 | 아구리 (阿久里/阿久理/阿久利) |
| 다른 이름 | 오쿠리 (阿久里) |
| 생몰년도 | 1683년 ~ 1726년 6월 12일 (향년 44세) |
| 출생 | 1683년 |
| 사망 | 1726년 6월 12일 |
| 신분 | 에도 시대의 여성 미토 번 도쿠가와 요리모토의 딸 아사노 나가히로의 정실 부인 |
| 가문 | 미토 도쿠가와가 |
| 아버지 | 도쿠가와 요리모토 |
| 남편 | 아사노 나가히로 |
| 자녀 | 없음 |
| 존칭 및 법명 | |
| 존칭 | 요젠인 (瑤泉院) |
| 법명 | 춘화원전자모요센대자매 (春華院殿慈眸瑤泉大姉) |
| 가계 | |
| 친가 | 미토 도쿠가와가 |
| 양가 | 아사노가 |
| 혈통 | 미토 번 도쿠가와 요리모토의 딸 |
| 관련 장소 | |
| 묘소 | 도쿄도 미나토구 조조지 |
| 기타 정보 | |
| 특이사항 | 아코 사건으로 인해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고 전해짐 |
2. 생애
빈고국 미요시번 초대 번주 아사노 나가하루의 셋째 딸로 태어나 아사노 나가노리와 결혼했다. 자식을 얻지 못해 겐로쿠 8년 12월 (1696년 1월)에 나가노리의 동생 아사노 나가히로를 양자로 삼았다.
겐로쿠 14년 3월 14일(1701년 4월 21일), 남편 아사노 나가노리가 에도성 안에서 기라 요시히사에게 칼부림을 일으켜 당일 할복하고, 아코번은 개역되었다. 이후 요젠인은 출가하여 남편의 명복을 빌고, 아코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아코 낭사들과 그 유족들을 지원했다.
쇼토쿠 4년 (1714년), 41세(혹은 46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센가쿠지에 묻혔다.
2. 1. 출생과 혼인
빈고국 미요시번 초대 번주 아사노 나가하루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사망한 후, 아사노 나가테루의 양녀가 되었다. 어머니는 아사노 나가시게(아사노 나가노리의 증조부)의 딸이다. 처음 이름은 나오히메였으나, 후에 쿠리히메, 아구리히메로 개명했다. 미요시번사인 오치아이 카츠노부가 수행원으로 그녀를 양육했다.
태어나자마자 하리마국 아코번주 아사노 나가노리와의 혼인이 결정되었고, 엔호 5년 9월 (1677년 10월)에 약혼이 성립, 엔호 6년 4월 9일 (1678년 5월 29일)에 혼례를 위해 아사노 나가노리의 저택으로 옮겼다. 덴나 3년 정월 (1683년 2월)에 결혼식이 거행되었고, 같은 해 4월 9일 (5월 5일)에 정식으로 아사노 나가노리의 정실이 되었다.
2. 2. 아코 사건과 출가
나가노리가 에도성 안에서 고가 키모이리 키라 요시히사 (코즈케노스케)에게 칼부림을 했고, 에도성 안에서 칼을 뽑았다는 이유로 당일 할복, 아코번은 개역이 되었다. 아구리는 16일 아카사카에 있는 친정 미요시 아사노가 시모야시키에 몸을 맡기게 되었고, 출가하여 남편의 보다이를 조성하고 명복을 빌었다.전 아코번 가로 오오이시 요시오 등이 키라 저택을 습격하기로 결정하자, 요젠인은 자신의 화장료인 아코 염전에서 올라온 운상은을 오오이시에게 건네고, 그들의 생활을 음지에서 지지했다. 키라를 습격하고 난 후, 막부 명령에 의해 할복한 아코 낭사들의 유족들 가운데, 이즈 오오시마에 유배된 요시다 덴나이, 마세 사다하치, 나카무라 츄사부로, 무라마츠 마사에몬의 사면 운동에도 진력해, 호에이 3년 8월 (1706년 9월), 쇼군 이에츠나의 27회기 법회의 기회로 전년에 병사한 마세를 제외한 3명의 사면을 실현시켰다.
2. 3. 아코 낭사 지원과 사면 운동
전 아코번 가로 오오이시 요시오 등이 키라 저택을 습격하기로 결정하자, 요젠인은 자신의 화장료인 아코 염전에서 올라온 운상은을 오오이시에게 건네고, 그들의 생활을 음지에서 지지했다. 키라를 습격하고 난 후, 막부 명령에 의해 할복한 아코 낭사들의 유족들 가운데, 이즈 오오시마에 유배된 요시다 덴나이, 마세 사다하치, 나카무라 츄사부로, 무라마츠 마사에몬의 사면 운동에도 진력해, 호에이 3년 8월 (1706년 9월), 쇼군 이에츠나의 27회기 법회를 기회로 전년에 병사한 마세를 제외한 3명의 사면을 실현시켰다.2. 4. 사망
겐로쿠 14년 3월 14일(1701년 4월 21일), 나가노리가 에도성 안에서 고가 키모이리 키라 요시히사 (코즈케노스케)에게 칼부림을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에도성 안에서 칼을 뽑았다는 이유로 당일 할복하게 되었고, 아코번은 개역되었다. 아구리는 16일 아카사카에 있는 친정 미요시 아사노가 시모야시키에 몸을 의탁했고, 출가하여 남편의 명복을 빌었다.전 아코번 가로 오오이시 요시오 등이 키라 저택을 습격하기로 결정하자, 요젠인은 자신의 화장료인 아코 염전에서 올라온 운상은을 오오이시에게 건네고, 그들의 생활을 음지에서 지지했다. 키라를 습격하고 난 후, 막부 명령에 의해 할복한 아코 낭사들의 유족들 가운데, 이즈 오오시마에 유배된 요시다 덴나이, 마세 사다하치, 나카무라 츄사부로, 무라마츠 마사에몬의 사면 운동에도 진력해, 호에이 3년 8월 (1706년 9월), 쇼군 이에츠나의 27회기 법회 때 전년에 병사한 마세를 제외한 3명의 사면을 실현시켰다.
쇼토쿠 4년 (1714년), 미요시 아사노가 시모야시키에서 4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남편과 같은 에도 타카나와 센가쿠지에 묻혔다. 계명은 요천원전양영정징대자(瑤泉院殿良瑩正澄大姉)이다. 고향인 미요시 호겐지에는 요젠인을 공양하는 타카나와 유발탑이 있다.
요젠인의 생년, 향년에 대해서는 『아코의사사전(赤穂義士事典)』의 「아사노 나가노리 연보(浅野長矩年譜)」, 히라오 코죠 『인간아코낭사(人間赤穂浪士)』, 또한, 요젠인 묘소인 센가쿠지도 향년 41세로, 연호 2년생이 정설로 되어있다.
이에 대해, 아코 오오이시 신사의 궁사를 맡아 아코 의사 연구자이기도 했던 이오 타다시(飯尾精)가 이설을 소개했다. 이오에 따르면, 모든 아사노가의 기록으로, 아사노 종가에 전해지는 「미요시분가제미록(三次分家済美録)」에서는 요젠인은 간분 9년 (1669년) 출생이라고 한다.
이 설이 옳다면, 요젠인은 향년 46세로, 남편 나가노리와는 두 살 차이다. 다른 의사 연구 단체 『중앙의사회(中央義士会)』도 이 설을 답습하고 있다.
3. 겐로쿠 아코 사건 (아코 사건)
겐로쿠 아코 사건은 겐로쿠 시대에 일어난 아코 사건을 가리키는 역사 용어이다. 이 사건은 주군을 잃은 아코 번의 낭인들이 주군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으킨 사건으로, 일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4. 요젠인과 관련된 창작물
요젠인은 겐로쿠 아코 사건을 소재로 한 코단, 닌교조루리, 가부키 등 여러 창작물에서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특히, 아코번 가로 오오이시 요시오가 아카사카・난부자카의 요젠인에게 향한다는 「난부자카 눈의 이별(南部坂雪の別れ)」은 이러한 창작품에서 자주 그려지는 장면이다.
4. 1. 난부자카 눈의 이별(南部坂雪の別れ)
요젠인은 아사노 나가노리가 할복한 후, 친정인 빈고 미요시번 (미요시 아사노가) 저택에 맡겨졌다. 그러나 겐로쿠 아코 사건을 소재로 한 코단, 닌교조루리, 가부키 등 창작 작품에서 묘사되는 '난부자카 눈의 이별(南部坂雪の別れ)'은 사실이 아니다.아사노 가가 개역된 후, 오오이시 요시오가 요젠인을 만난 것은 습격하기 훨씬 전인 겐로쿠 14년 11월 14일 (1701년 12월 13일) 단 한 번뿐이었다. 이는 오오이시가 요젠인의 결혼 지참금을 아사노 가의 재건 및 습격 운동 자금으로 사용했고, 토벌 직전 그 수지 결산서를 요젠인의 수행원 오치아이 카츠노부에게 제출했기 때문이다. 습격 전날 밤, 이 서류들을 오오이시의 명으로 보낸 사람은 후세에 '의로운 시종(義僕)'이라 불린 치카마츠 유키시게의 가복 진사부로(甚三郎)이다.
미요시 번 번저택은 난부자카에 없다. 당시 카사마번 (그전에는 모리오카번. 난부자카의 유래) 이래 있었던 난부사카의 다이묘 저택은 빈터였다. 요젠인이 살던 미요시 번 아사노 가의 번저택은 아카사카 혼히카와자카 (현재 난부자카 정상 부근에서 좌회전해 두번째 고개를 오른 혼히카와자카 동쪽. 동쪽에서부터 난부자카(南部坂), 히카와자카(氷川坂), 혼히카와자카(本氷川坂). 현재의 히카와 신사 뒤쪽)에 있었다.
5. 요젠인 관련 유적
요젠인은 빈고국 미요시번 초대 번주 아사노 나가하루의 3녀로, 현재 히카와 신사가 있는 곳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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