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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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코 사건은 1701년 아코 번의 번주 아사노 나가노리가 에도 성에서 키라 요시히사를 칼로 공격한 사건이다. 아사노는 즉시 할복하고 아코 번은 몰수되었으며, 이에 아사노 가문의 가신들은 키라 저택에 침입하여 키라를 살해했다. 이 사건은 '충신장'이라는 가부키와 분라쿠 극으로 각색되어 큰 인기를 얻었으며, 47인의 낭인들의 행동을 '의사'로 칭송할지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막부는 46명의 낭인들에게 할복을 명했고, 키라 가문은 단절되었지만, 아사노 가문은 이후 재흥되었다. 아코 사건은 일본 예술에서 인기 있는 주제가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다양한 형태로 재해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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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코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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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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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명칭 | 아코 사건 (赤穂事件) |
일본어 명칭 | 赤穂事件 (Akō jiken) |
영어 명칭 | Akō incident |
관련 명칭 | 47 로닌 (四十七士, Akō-rōshi, 赤穂浪士) |
사건 발생 | |
날짜 | 1703년 1월 31일 |
장소 | 키라 저택 |
유형 | 복수 공격 |
원인 | 아사노 나가노리의 죽음 |
동기 | 아사노 나가노리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 키라 요시나카에게 할복을 강요 |
관련자 | |
주도자 | 오이시 요시오가 이끄는 47 로닌 (四十七士, Akō-rōshi, 赤穂浪士) |
최초 보고자 | 테라사카 키치에몬 |
결과 | |
47 로닌 | 0명 |
키라 요시나카와 가신 | 41명 |
사망자 수 | 19명 |
부상자 수 | 22명 |
체포된 자 | 47 로닌 |
피고인 | 47 로닌 |
유죄 판결 | 46 로닌에게 1703년 2월 4일 할복 선고, 1명은 사면 |
추가 정보 | |
배경 | 아사노 나가노리의 죽음과 그의 가신들이 로닌이 된 사건 |
목표 | 키라 요시나카에 대한 복수 |
전개 | 47 로닌이 키라 저택을 습격하여 복수를 감행 |
결과 | 47 로닌은 자수 후 할복 명령을 받음 |
영향 | 일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며 충신의 상징으로 여겨짐 |
2. 사건의 명칭
역사적 사실로서의 본 사건을 지칭하는 용어로는 "아코 사건"으로 통일되어 있다.[43] "쇼호 아코 사건", "분큐 아코 사건"과 구분하여 "겐로쿠 아코 사건"이라고도 불린다.
겐로쿠 14년(1701년) 4월 21일(겐로쿠 14년 3월 14일 (음력)) 아코 번 번주 아사노 나가노리가 에도 성 마쓰노오로카에서 키라 요시히사에게 칼을 휘두르는 사건이 발생했다.[15] 당시 에도 성에서는 막부가 조정의 사자를 접대하는 중이었으므로,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는 격노하여 아사노에게는 즉시 할복을 명하고, 아코 번은 몰수했다. 반면 키라에게는 책망이 없었다.[12]
아코 사건을 다룬 창작물에 대해서는, 인형 극・가부키의 『가나데혼 주신구라』 이후, '''충신장'''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강담에서는 '''아코 의사전'''(혹은 단순히 의사전)이라고 부른다.
키라를 쳐 죽인 47인('''사십칠사''')의 행위를 칭찬하는 입장에서는, 사십칠사를 '''아코 의사'''(혹은 단순히 의사)라고 부른다. 그 외의 입장에 서는 경우에는, 사십칠사를 포함한 아코 번의 낭인을 '''아코 낭사'''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지만, 이 명칭은 사건이 있었던 겐로쿠 시대에는 일반적인 단어가 아니었고, 작가 오부치 지로가 지금까지의 의사로서의 사십칠사상을 낭인으로서의 사십칠사로 대전환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쓴 소설 『아코 낭사』에서 일반적이 된 것이다[44].(단, 선행 작품에도 사용 예가 있다[45]).
이 때문에 "아코 낭사"라는 표현을 피하고, '''아코 낭인'''이라는 표현이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46]。
덧붙여 『와묘루이쥬쇼』의 "하리마 국 군향고"에서는 아코는 "아가호(あかほ)"라는 표기이다[47]。아코 사건 관련으로는 1913년(다이쇼 2년)의 "교육 화집 아코 의사"의 표지의 후리가나도 "아카호기시"라고 되어 있으며, 성의 인도의 문장도 "아카호노시로와타시"라고 되어 있다[47]。이 점에 관해서는 구 가나 표기의 "아카호"를 "아코"라고 읽었다는 설이 있다[47]。
3. 사건의 경과
아사노 가문의 가신들은 이에 반발, 필두 가로 오이시 요시오를 중심으로 대응을 협의했으나, 일단은 막부의 명령에 따르기로 했다.[48] 아사노 가문 재흥의 길이 사실상 막히자, 오이시를 비롯한 구 아코 번사들은 키라 저택에 침입할 것을 공식적으로 표명했다.[50]
1703년 1월 30일(겐로쿠 15년 12월 14일 (음력)) 오이시를 포함한 47명의 무사들이 키라 저택에 침입하여 키라를 살해했다.[18] 47명의 무사들은 키라의 목을 아사노의 묘에 바친 후 자수하였고, 막부의 명에 따라 전원 할복했다.[33]
3. 1. 마쓰노오로카의 칼부림
겐로쿠 14년(1701년) 3월 14일 (1701년 4월 21일) 巳の刻(오전 11시 반 경), 아사노 다쿠미노카미는 에도 성 혼마루 어전의 넓은 방에서 시라쇼인으로 이어지는 마쓰노오로카 (현재의 황거 동어원)에서 기라 고즈케노스케에게 등 뒤에서 칼로 덤벼들었다.[58] 아사노가 칼로 덤벼든 것은 기라에게 "유한(遺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어떠한 "유한"이 있었는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아 불분명하다.
기라가 뒤돌아보았기에 작은 칼은 기라의 눈썹 위를 베었다.[58] 작은 칼은 기라의 에보시(갓)의 쇠붙이에 맞아 큰 소리를 냈다.[61] 그리고 기라가 돌아서서 도망가는 곳을 쫓아가 다시 두 번 칼로 찔렀다.[58]
곧바로 아사노는 그 자리에 있던 가와키타 요소베 등에 의해 붙잡혔다.[62] 한편 기라는, 역시 그 자리에 있던 다른 고가(고케)에 의해 붙잡혀, 어의사간으로 옮겨졌고, 그 후 에도성 내의 자신의 방에 머물도록 명령받았다.[58] 기라의 상처는 외과의 제일인자인 구리자키 도유에 의해 여러 바늘 꿰매졌다.[64]
== 칼부림을 일으킨 이유 ==
아사노 나가노리가 칼부림을 일으킨 이유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아 오늘날까지도 그 원인은 불분명하다. 여러 가지 설이 제기되고 있지만, 어떤 "유감"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사노는 칼부림 당시 "요즘의 유감, 기억하는가"라고 말했으며[263], 심문에서는 "사적인 유감으로 전후를 생각하지 않고, 고노스케를 쳐 죽이려고 칼부림을 했다. 어떤 처벌을 받더라도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고노스케를 죽이는 데 실패한 것은 유감이다"라고 진술했다.[263]
반면, 키라는 전혀 기억이 없다고 주장했다.[265] 그러나 기억이 있다고 하면 입장이 나빠지기 때문에, 기억이 있었더라도 숨기고 이렇게 말했을 가능성이 크다.[265]
당시 문헌에는 키라가 암암리에 뇌물을 요구했는데 아사노가 충분한 뇌물을 보내지 않아 불화가 생겼다는 내용이 있다. 아사노는 칙사 접대역이 싫어서 "나에게는 도저히 맞지 않는다"고 말했으며[277], 스트레스가 쌓이는 일이었다.[277]
3. 1. 1. 칼부림을 일으킨 이유
아사노 나가노리가 칼부림을 일으킨 이유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아 오늘날까지도 그 원인은 불분명하다. 여러 가지 설이 제기되고 있지만, 어떤 "유감"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사노는 칼부림 당시 "요즘의 유감, 기억하는가"라고 말했으며[263], 심문에서는 "사적인 유감으로 전후를 생각하지 않고, 고노스케를 쳐 죽이려고 칼부림을 했다. 어떤 처벌을 받더라도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고노스케를 죽이는 데 실패한 것은 유감이다"라고 진술했다.[263] 또한 "정신이 나간 것은 아닙니다. 그 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 있었기에, 칼부림을 저질렀습니다"라고 답했다.[264]
반면, 키라는 전혀 기억이 없다고 주장했다.[265] 그러나 기억이 있다고 하면 입장이 나빠지기 때문에, 기억이 있었더라도 숨기고 이렇게 말했을 가능성이 크다.[265]
야스베에는 여러 사람들에게 넌지시 물어봤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입에 담을 수 없는 금기시하며 침묵을 지키는 듯했다"고 한다.[276] 그의 장인인 호리베 야헤이는 토벌 전에 쓴 글에서 원인이 키라의 악담에 있다고 적고 있다. 아사노가 키라에게 "무사도가 서지 않는 지독한 악담"을 들은 것이 원인이라고 아코 번 가신들 사이에서는 믿고 있었을 것이다.[265]
칼부림은 돌발적인 범행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266] 실제로 칼부림의 무계획성은 자주 지적되며, 에도 성에서 과거에 발생한 칼부림 사건에서는 단검으로 찔러 상대를 죽였다는 점[266]을 근거로 한다. 아사노는 가신에게 "오늘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다고 전해달라고 부탁했는데[267], 이는 이 날 무엇인가가 있어서 돌발적으로 칼로 벤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니시혼간지에서 발견된 고문서에는 "아사노 다쿠미노카미 란신(浅野内匠頭殿 乱心)", "아사노 다쿠미노카미의 란신의 모습을 듣고 싶다(浅野内匠頭殿の乱心の様子を承りたい)"고 적혀 있어, 란신설(乱心說)은 칼부림 사건 직후 시점에서 이미 유력한 설이었다.[269][270]
당시 문헌에는 키라가 암암리에 뇌물을 요구했는데 아사노가 충분한 뇌물을 보내지 않아 불화가 생겼다는 내용이 있다. 아사노는 칙사 접대역이 싫어서 "나에게는 도저히 맞지 않는다"고 말했으며[277], 스트레스가 쌓이는 일이었다.[277] 특히 이 해는 도쿠가와 쓰나요시가 어머니를 종1위로 추대하려고 했기 때문에, 예년보다 긴장을 강요받았다.[278] 아사노는 지병 등으로 심신에 이상을 겪고 있었던[277] 점도 스트레스의 발현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스트레스가 폭발하여 칼부림에 이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277]
아사노의 성격에 대한 기록도 있다. 쿠리자키 도유는 아사노가 평소에도 성미가 급한 사람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279]
3. 2. 아코 번의 개역
3. 2. 1. 아코로 사건의 전달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사건을 알리기 위해 빠른 가마가 아사노의 영지인 '''아코번'''으로 날아갔다.
빠른 가마는 두 차례에 걸쳐 아코에 도착했는데, 첫 번째 빠른 가마는 에도에서의 칼부림 사건만을 전했고[85], 두 번째 빠른 가마는 아사노 다쿠미노카미의 할복과 아코번 폐지를 보고했다.[85] 첫 번째 빠른 가마를 타고 아코를 방문한 것은 하야미즈 도자에몬과 카야노 삼페이 두 사람이었고[85], 두 번째 빠른 가마를 타고 있던 것은 하라 소자에몬과 오이시 세자에몬 두 사람이었다.[85]
첫 번째 빠른 가마는 3월 14일 미시(오후 3시 30분경)에 에도를 출발했고, 두 번째 빠른 가마는 같은 날 밤늦게[85] 출발했다. 전자는 19일 인시(오전 5시 30분경)[85]에 아코에 도착했고, 후자도 같은 날 중[85]에 아코에 도착했다.
에도에서 아코까지는 빠른 가마로도 보통 일주일 정도 걸리지만, 사자들은 밤낮으로 계속 달려 4일 반 정도만에 아코에 도착했다.[85]
키라의 생사에 관해서는 빠른 가마는 아무것도 전하지 않았고, 결국 생사가 아코 측에 전해진 것은 3월 말이었다.[86]
3. 2. 2. 번찰의 처리
오토리가쓰시의 이야기가 번에 퍼지자 상인들이 찰좌에 몰려들어 큰 혼란이 일어났다.[87] 번이 폐지되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번찰(藩札)이 무가치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번찰에 대한 대응이 이루어졌다. 교환 가능한 금의 양이 부족했기 때문에 오이시 구라노스케는 3월 20일(4월 27일) 번찰을 은으로 6푼 비율로 교환하도록 지시했다.[87] 아코 경제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때 오이시는 차석 가로인 오노 구로베와 상의하여 히로시마의 아사노 본가에 부족분 금의 차용을 부탁했지만, 히로시마 번은 번주 부재를 이유로 이를 거절했으며,[87][88][89] 이 건에 국한되지 않고 히로시마 번은 자번에 누를 끼치는 것을 두려워하여 아코 번에 일관되게 냉담한 태도를 유지했다고 한다.[88] 한편, 타카기 (2019)는[90] 엔포 8년의 아코 번 번찰이 히로시마 번(현재는 히로시마시)에 남아 있다는[91] 것을 근거로 아사노 본가로부터의 원조가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아코 개역 후에 히로시마 번은 고노이케 가문으로부터의 차입금이 차원이 다르게 증가하고 있다.[92]
3. 2. 3. 농성 논의와 아코 성 개성
3월 26일에 번찰 처리가 완료되자,[94] 필두 가로 오이시 구라노스케는 다음 3월 27일부터 3일 동안 가신들을 모아 사건을 알리고,[94][95] 성내 대광간에서 향후 대응을 논의하는 평정 회의를 열었다.[94][95] 히로시마의 본가 아사노 번과 미요시 번 아사노 가문에서는 온건하게 개성을 요구하는 사자가 파견되어 회의에 참석했다.[94][95]
28일 막부의 사자가 도착하여,[94] 아코성이 막부에 몰수될 것이 밝혀지자 논의가 격화되었다.[94] 가신들은 아사노 다쿠미노카미의 가신이지 막부의 가신이 아니므로, 막부의 명령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쉽게 넘겨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97]
가신들 사이에서는 농성을 통해 기라가 처벌받지 않은 것에 대한 항의의 뜻을 표시하자는 의견이 많았지만, 오이시는 이에 동조하지 않았다. 농성을 하면 공의에게 두려운 마음을 품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98] 또한 농성을 하면 아사노 대학에게 폐가 된다고 생각한 것도 농성을 포기한 이유 중 하나이다.[99] 오이시는 성내에서의 논의와 병행하여, 기라의 처분을 재고해 달라고 성 인수를 담당하는 상사에게 탄원서를 제출했는데,[100] 이 일이 아사노 다쿠미노카미의 동생인 아사노 대학의 귀에 들어갔기 때문에, 농성이 대학의 지시라고 여겨지는 것을 두려워했다.[99]
연일의 논의를 거쳐, 오이시는 아코성 앞에서 모두 할복하겠다는[98] 결론을 내렸다. 이러한 결단을 내린 것은, 할복할 때 자신들의 생각을 말하면 막부도 기라에 대한 처벌을 재고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98] 다만, 오이시는 곧 할복을 입에 담지 않게 되므로,[99] 할복이라는 방침을 내세워 진정으로 아군인 번사를 가려내려고 했다는 설도 있다.[99] 최종적으로 할복이라는 결론이 나오자, 60여 명이[98][101] 할복에 동의한다는 취지의 신문(기청문)을 제출했다.
한편, 차석 가로인 오노 구로베 등은 반대 의견을 냈다.[98] 오노 구로베는 주군 아사노 다쿠미노카미의 동생인 아사노 대학이 중요하므로, 우선 무사히 아코성을 막부에 넘겨주는 것이 중요하고,[103] 그 다음에 어가 재흥을 생각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101]
그러나 할복의 신문을 제출하는 단계에 이르러 하라 소에몬이 오노를 면박하여,[104] "뜻을 함께 하지 않는 분은 이 자리에서 물러나 주십시오"라고 발언하자, 오노를 비롯한 10명 정도가 퇴출했다.[98] 하라 소에몬은 만약 이때 오노가 물러나지 않았다면 오노를 쳐 죽였을 것이라고 나중에 회상하고 있다.[103] 한편, 에도에서 내려온 가타오카 겐고에몬, 이소카이 주로자에몬, 다나카 사다시로 3명은, 할복을 하지 않고 기라를 칠 것을 언급하며 퇴출했다.[98]
오이시 구라노스케는 음력 4월 12일[106]에 아코 성을 넘겨주기로 결심하고, 음력 4월 18일[106]에 성을 넘겨주었다. 예정되었던 할복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코 성을 접수하는 것은 매우 위압적인 분위기에서 이루어졌으며, 막부는 성 접수 담당관인 아라키 마사하와 사카키바라 마사토시, 대관 이시하라 마사우지, 성 접수 사자인 와키자카 야스테루, 기노시타 사다사다를 파견했고, 와키자카는 총 4550명을 동원했으며, 여기에 기노시타의 군세가 더해졌으며, 게다가 수백 척의 배가 경계하는 가운데 아코 성은 개성되었다.[107]
3. 3. 오이시와 호리베의 대립
그 후, 토벌이 결정될 때까지 오오이시 구라노스케를 중심으로 하는 상방 주류파('''상방 참진파'''[112])와 호리베 야스베를 비롯한 에도에 머물고 있는 급진파('''에도 급진파'''[112]) 사이에 만성적인 대립 상태가 계속되었다.
대립의 쟁점은 양측의 목표 차이에 있었다. 상방 참진파의 최대 목표는 아사노 다쿠미노카미의 동생인 아사노 다이가쿠를 옹립하여 아사노 가문을 재흥하는 데 있었으며[113], 그 과정에서 무사의 체면을 유지하고 키라의 출사를 막는 등의 처분을 받는 것이었다.[114] 상방에도 무바야시 유이치나 후와 가즈에몬과 같은 "혈기 왕성하고 직정경행형의 인물"[115]도 있었다.
반면, 에도 급진파의 목표는 키라를 토벌하는 것이었다.[112] 그들에게 주군은 아사노 다쿠미노카미 한 명뿐이었고, 그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키라를 토벌하는 수밖에 없었다.[113] 주군의 형제인 아사노 다이가쿠에 의한 가문 재흥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주군의 명예는 회복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113]
이러한 목표의 차이로 인해, 오이시는 당장 폭발할 것 같은 에도 급진파를 억누르기 위해 고심하게 된다. 양자 간의 이러한 목표의 차이는 양자 간 배경의 차이를 반영하고 있었다. 상방 참진파의 대표인 오오이시는 대대로 아사노 가문에 섬겼으며, 아사노 가문과 친척 관계에 있었다.[116] 이 때문에 아사노 타쿠미노카미 개인을 섬긴다기보다는 아사노 가문 자체를 섬긴다는 의식이 강했고, 가문의 부흥에 집착했을 것이다.[116]
호리베를 비롯해 타카다 곤베에와 오쿠다 마고타유 등 아사노 타쿠미노카미 대부터 아사노 가문에 섬긴 자가 많았던[117] 에도 급진파는 아사노 가문보다는 아사노 타쿠미노카미 개인에 대해 섬긴다는 의식이 강했고, 타쿠미노카미의 숙적인 키라를 토벌하는 것, 그것에 의해 무사로서의 체면을 세우는 것에 집착했을 것이다.[116]
아사노 다이가쿠 자신은 사건 직후 번사들이 소동을 일으키지 않도록 명했을 뿐, 그 후 폐문되어 아코 낭사와 연락이 닿지 않게 되었다.[118]
호리베는 고다 군베와 오쿠다 마고다유와 함께 기라 저택에 쳐들어 가려했지만[119], 기라의 친아들인 우에스기 쓰라노리가 기라 저택을 방문하는 등 경계가 심해 실행은 어려웠다.[119] 음력 4월 5일 3명은 에도를 떠났고[119], 음력 4월 14일[119]에 아코에 도착했다. 그들은 오이시에게 농성을 설득했지만 오이시는 찬성하지 않았고, 음력 4월 22일 성을 넘겨준뒤 아코를 출발했다[119]。
3. 4. 키라의 은거와 야마시나 회의
기라 고즈케노스케는 자신의 평판이 너무 나쁘다는 것을 알게 되자 은거를 신청하여 12월 13일에 허가받았고[133], 가독은 아들 기라 사헤에가 잇게 되었다[130]。
호리베 일파는 기라가 은거하여 아들의 양자처인 요네자와의 우에스기 가문으로 거두어지면 공격이 어려워지기 때문에 초조해하기 시작했다[133]。 또한, 막부로부터 기라에 대한 더 이상의 처벌은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아사노 다쿠미노카미의 1주기까지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34]。
한편, 오오시 구라노스케는 아사노 다이가쿠에 의한 가문 부흥에 영향이 있을 것을 우려하여[133] 공격을 늦춰야 한다고 주장했다[133]。 기라 고즈케노스케가 어렵다면 아들 기라 사헤에를 공격하면 되고[134], 문은 대개 3년이면 풀리기 때문에, 아사노 다이가쿠의 문이 풀릴 것으로 예상되는 주군의 3주기까지 공격을 기다려 후회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135]。
2월 15일부터 며칠 동안 교토 야마시나에서 앞으로의 행방을 결정하는 회의('''야마시나 회의''')가 열렸다[136]。 회의에서는 즉시 쳐들어가자는 의견은 소수였고[136], 잠시 상황을 지켜보자는 결론이 났다[136]。 오오시 구라노스케는 아사노 다쿠미노카미의 3주기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136]。
3. 5. 마루야마 회의와 신문 반환
음력 7월 18일[146] 아사노 다이가쿠가 폐문되고 히로시마 번으로 거두어지면서 가문 재건이 불가능하게 되었다.[146] 오이시는 "더러워진 가문을 존속시키는 것보다 없애는 것이 본래의 뜻이다"라고 말하며, 오히려 다이가쿠의 폐쇄를 복수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며 동지들에게 격문을 날렸다.[147]
음력 7월 28일[146] 교토 원산에서 회의('''원산 회의''')를 열고, 오이시는 10월에 에도로 올라가 키라 저택에 쳐들어갈 것을 공식적으로 표명했다.[146] 이 회의에는 우연히 교토 주변에 있던 19명이 참가했으며, 그 중 17명은 이후 복수에 참여한다.[148] 원산 회의는 비밀 회의였기 때문에, 논의 내용은 상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149] 호리베 등은 에도로 돌아가 스미다 강에서 배를 빌려 달맞이 잔치로 가장해, 배 안에서 동지들에게 원산 회의의 보고를 했다('''선중 회의''').[150]
야마시나 회의 무렵까지 동지는 120명 정도였지만,[151] 원산 회의에서 토벌이 결정되자 탈퇴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151] 오이시의 친척인 오쿠노 쇼겐, 코야마 겐자에몬, 신도 겐시로 세 사람이 탈퇴했다.[152] 오이시는 가문의 주요 인물들이 참여하기를 기대했지만, 지위가 높은 세 사람이 탈퇴하면서 좌절되었고, 이 일을 매우 부끄러워했다고 한다.[153][154]
동지들의 탈퇴를 받아들여 오이시는 아코 낭사 카이가 야자에몬과 오타카 겐고를 파견하여 연판장에서 잘라낸 혈판을 돌려주었다('''신문 반환''').[155] 그리고 복수에 참가하겠다고 대답한 자만을 동지로 인정했다.[155] 이로 인해 동지는 50명 정도로 줄었다.[155]
3. 6. 키라 저택 침입
12월 14일, 아코 낭인들은 토벌(討入, 적진 습격)을 결행하기로 결정했다.[168] 이는 키라 요시나카가 이날 다과회를 열어 집에 있을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다.[168] 다과회 정보는 오이시 쿠라노스케의 친족인 오이시 삼페이가 입수했다.[168] 오이시 삼페이는 다인 야마다 소헨의 제자였는데, 같은 문하생인 목재상의 집에 있던 하구라 사이큐가 에도에서 신토와 가도를 가르쳤고[168][169], 그 관계로 키라 저택에도 출입하여[168][169] 이 정보를 얻었다. 오타카 타다오 역시 야마다 소헨의 제자로, 14일 키라 저택에서 다과회가 열린다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한다.[168][169] 하지만, 미야자와 세이이치는 하이쿠 작가로 인기가 높았던 오타카에게 활약할 기회를 주기 위해 초기 실록에서부터 내려온 속설로 보고 있다.[170]
11월, 에도 잠복 중에도 동지들의 탈퇴가 이어졌다. 12월 11일까지 동지에 있었던[175] 모리 코헤이타도 탈퇴하여, 최종적으로 남은 동지는 47명이 되었다.[175]
겐로쿠 15년 (1703년) 12월 14일, 47명의 무사들은 호리베 야스베와 스기노 쥬헤이의 셋집에서 옷을 갈아입고, 인시(오전 4시경)에 출발했다.[176] 오이시 쿠라노스케가 이끄는 정문대와 오이시 치카라가 이끄는 뒷문대로 나뉘어 키라 저택에 침입했다.[176] 정문대는 도중에 입수한 사다리를 이용했고, 뒷문대는 큰 나무 망치로 문을 부수고 들어갔다.[176]
정문대는 침입 직후, 구상서를 넣은 문서 상자를 매단 대나무 장대를 현관 앞에 세웠다.[177] 뒷문대는 "불이야!"라고 외쳐 키라의 가신들을 혼란에 빠뜨렸다.[178] 또한, 키라 가신들이 거주하는 셋방의 출입구를 꺾쇠로 막아 가신들이 나오지 못하게 했다.[178] 키라 저택에는 100명 정도의 가신이 있었지만, 실제로 싸운 것은 40명도 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178] 옆집 지붕에서 상황을 살피던 자에게 가타오카 겐고에몬과 오노데라 쥬나이가 복수임을 알리자, 승낙의 표시로 높은 등불의 수가 늘어났다.[179]
47명의 무사들은 키라의 침실로 향했지만, 키라는 이미 도망친 후였다.[179] 가야노 와스케가 키라의 요에 손을 넣어 아직 따뜻한 것을 확인했다.[179] 47사는 키라를 찾기 시작했다.
결국 격전 끝에 부엌 뒤의 창고 같은 방에서 기라로 추정되는 노인을 발견했다.[183] 안에서 기라의 가신 두 명이 칼을 들고 덤벼들었으나 제압당했다.[183] 하사마 쥬지로가 흰 소매 차림의 노인을 창으로 찔렀고[183], 아사노 다쿠미노카미가 등에 있는 상처 자국을 확인하고[183], 키라 측 졸개에게 이 시체가 키라임을 확인시켰다.[183] 마침내 키라를 살해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신호로 당인적(차르멜라)을 불어 47사를 모았다.[182][183] 여기까지 불과 한 시간[183], 혹은 두 시간 정도였다.[184] 기라 측 사망자는 자료에 따라 15명에서 18명, 부상자는 19명에서 23명이었다.[185][183][186] 아코 낭인 측에는 사망자가 없었고, 부상자는 두 명이었다.[187]
낭인들의 습격 사건은 곧바로 소문으로 퍼졌다.[189]
3. 6. 1. 토벌에 대한 견해
아코 사건이 일어나자 그 시비를 둘러싸고 유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졌다.[52] 주요 논점은 아코 낭사들의 행동이 "의(義)"에 해당하는지 여부였으며, 이는 낭사들의 기라 저택 토벌이 주군의 "복수"로 간주될 수 있는지에 달려 있었다.[52] 이 사건 당시 "복수"란 자식이 부모의 원수를 갚는 등 윗사람이나 친족을 위해 복수하는 것을 의미하며[53], 주군의 원수를 갚은 것은 본 사건이 처음이었기 때문에[53],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이 문제는 무사의 삶의 방식이나 막번 체제의 구조와 깊이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54], 논쟁은 막말까지 이어졌다.[55]
4. 사건의 여파
4. 1. '의사' 논쟁
아코 사건 이후, 47인의 낭인들의 행동을 '의사(義士)'로 칭송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243] 주군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라 저택에 쳐들어간 이들의 행동이 유교적 도의에 합당한지, 그리고 이들에 대한 막부의 처벌이 정당한지에 대한 논의가 유학자들 사이에서 이어졌다.[244][246]이 문제는 무사의 삶의 방식이나 막번 체제의 구조와 깊이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54] 논쟁은 막말까지 이어졌다.[55] 당시 "복수"는 자식이 부모의 원수를 갚는 등 윗사람이나 친족을 위해 복수하는 것을 의미했고,[53][247] 주군의 원수를 갚은 것은 본 사건이 처음이었기 때문에,[53]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하야시 호코는 『복수론』을 저술하여 낭인들의 행동을 유교적 도의에 합당하다고 찬미했지만, 동시에 법을 어긴 자들이므로 막부의 처벌이 정당하다고 긍정했다.[248] 무로 큐소는 『아코 의인록』을 저술하여 의사를 찬미하고, 센가쿠지로 철수하는 도중에 사라진 테라사카 키치에몬을 포함하여 "47사"설을 주장했다.[249] 그러나 무로는 주나라 무왕과 백이 형제의 예를 들어 의사에 대한 찬미와 막부 처분의 정당성이 모순되지 않는다고 했다.[251]
사토 나오카타는 내匠頭의 칼부림 사건에서 키라 코즈케노스케는 무저항으로 도망쳤을 뿐이므로, 애초에 코즈케노스케는 아코 로시에게 "주군의 원수"가 아니라고 주장했다.[248] 오규 소라이도 『정담』에서 내匠頭는 막부에 처벌받았을 뿐 키라에게 살해된 것은 아니므로 키라는 "주군의 원수"가 아니며, 낭인들의 행동은 '주군의 사악한 뜻'을 계승한 것이므로 '의'로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248][255]
다자이 슌다이는 『아코 46사론』에서 막부의 처벌이 과도하다고 비판하며, 아코 로시들은 막부를 원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48] 미야케 쇼사이도 아사노가 법을 어기고 처벌받았고 키라가 죽인 것이 아니라면, 키라를 원수로 삼아 쳐죽인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257] 노무라 토코는 오이시의 행동은 '협'일지언정 '의'가 아니며, 주군의 사사로운 일(사악한 뜻)을 계승한 불의의 충이라고 비판했다.[258]
근대에 들어와서는 니토베 이나조가 아코 의사를 "무사도" 및 "의"의 실천자로서 해외에 소개하기도 했다.
4. 2. '충신장'의 탄생
아코 사건 직후, 주군의 복수를 위해 기라 저택에 쳐들어간 47인의 행동은 민중의 갈채를 받았다. 평화로운 겐로쿠 시대에 잊혀 가던 무사도 정신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곧바로 가부키와 분라쿠 극의 소재가 되었으며, 첫 작품은 낭인들이 사망한 지 2주 만에 등장한 《소가의 새벽 기습》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당국에 의해 폐쇄되었고, 이후 많은 작품이 오사카와 교토 등지에서 잇따라 등장했다. 이 이야기들은 심지어 마닐라까지 전해져 아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이러한 각색 작품 중 가장 성공적인 것은 1748년 다케다 이즈모와 그의 동료들이 쓴 분라쿠 인형극인 《가나데혼 주신구라》(가나데혼 충신장)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가부키로도 각색되어 큰 인기를 얻었으며, 이후 아코 사건을 다룬 창작물은 '충신장'물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충신장'은 흥행 보증수표로 여겨질 정도였다.
극에서는 검열을 피하기 위해 사건의 배경을 14세기 아시카가 다카우지 시대로 옮겼다. 아사노는 엔야 한간 타카사다, 키라는 고노 모로나오, 오이시는 오보시 유라노스케 요시오로 등장하는 등 등장인물들의 이름도 바뀌었다. 실제 이야기와는 다른 극적 설정도 추가되었는데, 예를 들어 모로나오가 엔야의 아내를 유혹하려 하거나, ''로닌'' 중 한 명이 가족과 무사도 사이의 갈등으로 공격 전에 사망하는 장면 등이 있다.
4. 3. 아코 낭사들의 최후

키라의 목을 주군 아사노 다쿠미노카미의 묘에 바친 46명의 로닌(테라사카 키치에몬 제외)들은 자수하였다.[32] 이들은 4개 그룹으로 나뉘어 4명의 다이묘에게 인도되었다.[32] 에도의 쇼군 관료들은 로닌들이 주군의 복수를 함으로써 규범을 따랐지만, 복수를 금지한 쇼군의 권위에도 반항한 것이기에 곤경에 처했다. 또한 쇼군은 로닌들을 칭찬하는 대중들의 청원을 많이 받았다.[33]
막부는 아코 낭사들의 처분을 논의하여 겐로쿠 16년 2월 4일(서기 1703년 3월 20일)에 할복을 명했다. 아코 낭사들이 "주군의 원수를 갚고자 한다고 진술"하고 "무리를 지어" 기라 저택에 "침입"했기 때문이었다.[198] 막부는 복수 사건을 "무리"로 보고 원수 갚음으로 인정하지 않았다.[198] 일반적으로 이러한 죄에는 참수가 선고되지만, 아코 낭사들의 입장을 고려하여 무사의 체면을 중시하여 할복이라는 처분이 내려졌다.[198]
1703년 3월 20일(겐로쿠 16년 2월 4일 (음력)) 46명의 낭인들은 할복했다.[34] 당시의 할복은 형식화되어 와키자시를 배에 댈 때 카이샤쿠인이 목을 치는 작법이었다.[200] 할복 장소에는 다다미가 깔렸으며, 이는 최고의 격식이었다.[201]
호소카와 쓰나토시는 할복 자국에 묻은 피를 청소하려는 번사에게 아코 로시는 우리 번의 훌륭한 수호신이라며 청소할 필요가 없다고 지시했다.[206][207]
이들의 유해는 주군 아사노 다쿠미노카미와 같은 센가쿠지에 매장되었다.[200] 아코의 아사노 가문 보리사인 카가쿠지에도 아코 로시들의 묘가 세워졌다.[208]

4. 4. 키라 가문에 대한 처벌
적호 낭사의 할복과 같은 날[209], 키라 사헤에 요시치카는 시나노 타카시마 번주 스와 아키노카미 타다토라에게 맡겨졌다.[210]막부가 키라 사헤에의 처분을 명령한 이유는 장인인 키라 코즈케노스케가 칼부림 사건 당시 "내장에게 비겁한 짓"을 했고, 아코 낭사들의 습격 때도 "미련"한 행동을 보였으므로, "아버지의 치욕은 자식으로서 피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다.[210] 여기서 주목할 점은 키라 코즈케노스케의 칼부림 사건 당시의 행동이 "내장에 대해 비겁"하다고 규정한 것으로, 막부는 아코 낭사들의 습격을 계기로 칼부림 사건 당시 특별한 처벌을 받지 않았던 코즈케노스케의 처분을 실질적으로 정정했다는 것이다.[210]
사헤에는 그 후 20세 남짓한 젊은 나이로 사망했고[210], 이로써 키라 가문은 단절되었다.[211]
4. 5. 아사노 가문의 재흥
고(綱吉)가 사망한 호에이 6년(1709년) 8월, 내匠頭의 친동생인 아사노 대학도 사면되어 500석의 기하타에 등용되었다.[218][219] 오이시 구라노스케의 삼남인 다이 사부로는 히로시마의 아사노 종가에 구라노스케와 같은 1500석으로 채용되었다.[220][219] 한편, 미요시 번주 아사노 나가즈미(요센인의 의붓조카)는 아사노 종가와 함께 토벌을 막으려 했으나, 사건 후 근신 처분을 받았다.[221]5. 현대의 평가 및 영향
5. 1. 예술 작품에서의 묘사
아코 사건은 일본 예술에서 인기 있는 주제 중 하나였으며, 최근에는 서양 예술에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사건 직후, 이 복수가 적절했는지에 대한 의견이 엇갈렸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주군에 대한 충성의 상징이 되었고, 이후에는 천황에 대한 충성의 상징이 되었다.이 사건은 즉시 ''가부키''와 ''분라쿠'' 극에 영감을 주었으며, 최초의 작품은 낭인들이 사망한 지 2주 만에 등장했지만 당국에 의해 폐쇄되었다. 그러나, 곧 다른 많은 작품들이 잇따라 등장했는데, 처음에는 막부의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오사카와 교토에서 시작되었다. 어떤 작품들은 마닐라까지 이야기를 가져가 아시아 전역에 퍼뜨리기도 했다.
가장 성공적인 각색 작품은 1748년 만들어진 ''분라쿠'' 인형극 《가나데혼 주신구라》(현재는 단순히 《주신구라》, 즉 "충신장의 보물")였다. 이 작품은 나중에 ''가부키'' 극으로 각색되었으며, 여전히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품 중 하나이다. 극에서는 검열관의 주의를 피하기 위해 사건을 먼 과거, 즉 ''쇼군'' 아시카가 타카우지의 14세기 통치 시대로 옮겼다. 아사노는 엔야 한간 타카사다, 키라는 고노 모로나오, 오이시는 오보시 유라노스케 요시오가 되었고, 나머지 ''로닌''들의 이름은 다소 가려졌다.
일본에서는 이 연극을 최소 6번 영화화했으며,[36] 가장 초창기 작품에는 오노에 마쓰노스케가 출연했다. 1941년, 일본군은 미조구치 겐지 감독에게 ''겐로쿠 주신구라''를 제작하도록 의뢰했다. 이 영화는 진주만 공격 일주일 전에 일본에서 개봉하여 상업적으로 실패했다. 1958년 버전인 ''충신 47인''은 와타나베 구니오가 감독했다. 이나가키 히로시가 감독한 1962년 영화 버전인 ''주신구라''는 서양 관객들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다.[36] 이치카와 곤은 1994년에 또 다른 버전을 연출했다. 2004년, 사이토 미쓰마사는 9부작 미니 시리즈를 연출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2006년 영화 ''하나''에서는 이 이야기가 배경으로 사용되었다.
키아누 리브스가 주연을 맡은 2013년 미국 영화 ''47 로닌''으로, 그리고 2015년에는 좀 더 양식화된 버전인 ''라스트 나이츠''로 제작되었다.[38]
47인의 로닌은 일본 우키요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주제 중 하나이며, 우타마로, 도요쿠니, 호쿠사이, 구니사다, 히로시게, 요시토시 등 많은 유명 예술가들이 실제 사건, 연극 장면 또는 배우를 묘사한 판화를 제작했다.[39] 아마도 이 장르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목판화는 구니요시의 작품일 것이다.[39]
이 사건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단편 소설 "코츠케노 스케, 궁정 예절의 비문명적인 선생"의 주제이며, 1935년 컬렉션 ''악명 높은 세계사''에 포함되었다.
6. 같이 보기
- 충신장
- 아코 사건 등장인물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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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本(2012a)第一章2節「藩主個人との距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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赤穂事件リアルタイム記録 西本願寺で文書見つか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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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吉良殿御痛も軽ク」… 刃傷事件直後の記録見つか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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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浅野内匠頭殿 乱心」 京都・西本願寺で文書発見 真相は……やはり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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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江戸江遣書状留帳
本願寺史料研究所上席研究員・大喜直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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宮澤(1999)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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野口(2015) 第五章1節「急進派の進出と左兵衛の家督相続」よ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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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1 #날짜 정보가 불완전하여 2024년 2월로만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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赤穂浪士と下平間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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稱名寺の歴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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了源寺略縁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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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本(2012a)第六章一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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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本(2012a)第六章一節「結実のと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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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本(2012a)第六章二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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野口(2015) 第七章「吉良邸討ち入り」3節「本懐を遂げて」の「各浪士の働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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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公演情報詳細
https://www.kabuki-b[...]
2024-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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野口(2015) 第七章「吉良邸討ち入り」3節「本懐を遂げて」の「首級をあげ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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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本(2012a)第六章三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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野口(1994)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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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本(2012b)第四章三節「計画通りの討ち入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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吉良以外の吉良側の死者とその死に場所は以下の通りである。『江赤見聞記』の記載は山本(2012a)第六章三節に、『吉良本所屋敷検使一件』(幕府目付の阿部式部、杉田五左衛門による検死結果)は野口(2015) 第七章「吉良邸討ち入り」2節「12月十五日の攻防」の「幕府目付けによる検分」よった。下記の通り資料により齟齬があるので山本(2012a)ではあくまで「参考のため」としている。{|class="wikitable"|+!! colspan="2" |『上杉家文書』より「米沢塩井家覚書」 !! colspan="3" |『江赤見聞記』!! colspan="2" |『吉良本所屋敷検使一件』|-|名前|役職|場所|享年|役職|場所|役職|場所|-|[[小林平八郎]]|家老|南書院前|-|家老・上杉家付き人|南書院前|家老|南長屋役人小屋|-|[[清水一学]]|近習|台所口|40|上野介用人|台所口|中小姓|台所|-|新貝弥七郎|近習|玄関|40|近習|玄関|中小姓|玄関|-|笠原長右衛門|祐筆|書院次|25|右筆|書院次|-|-|-|笠原長太郎|-|-|-|-|-|役人|小屋出口|-|大須賀治部右衛門|用人|台所口|30|上野介用人|台所口|中小姓|台所口|-|左右田源八郎|小姓|台所口|40|中小姓|玄関|中小姓|小玄関口|-|大石半右衛門|門番|馬屋前|-|-|-|-|-|-|森半右衛門|-|-|-|-|-|台所役人|玄関前|-|半右衛門|-|-|-|表門番|馬屋前|-|-|-|鈴木正竹|僧侶|小玄関前|-|坊主|小玄関前|左兵衛坊主|小玄関口|-|杉松三左衛門|祐筆|小屋出口|36|近習右筆|小屋出口|-|-|-|牧野春斎|僧侶|小屋出口|-|坊主|小屋出口|坊主|厠の前|-|須藤与一右衛門|取次|南書院次|-|取次|南書院次|左兵衛用人|座敷居間|-|榊原平右衛門|文官|台所口|50|役人|台所口|役人|台所|-|[[鳥居利右衛門]]|用人|座敷庭|60|用人|座敷庭|用人|座敷の庭|-|斎藤清左衛門|小姓|座敷庭|-|左兵衛中小姓|小門口|-|-|-|斎藤清右衛門|-|-|-|-|-|小姓|小屋口|-|小塩源五郎|-|-|22|料理番|玄関|-|-|-|中間二人|-|-|-|台所役人|小玄関前|-|-|-|小堺源次郎|-|-|-|-|-|役人|台所|-|鈴木元右衛門|-|-|-|-|-|役人|祐筆小屋|-|権十郎|-|-|-|-|-|仲間|小玄関前|}注:* 「米沢塩井家覚書」 によると**左右田源八郎は家老・[[左右田孫兵衛]]の嫡男、** 杉松三左衛門は[[小野寺秀和]]に槍で突き殺される** 牧野春斎は[[間光延]]に突き殺される。* 須藤与一右衛門『吉良本所屋敷検使一件』では「須藤与市右衛門」* 鈴木正竹は『吉良本所屋敷検使一件』では「鱸松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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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本(2012a)第六章二節「吉良邸内の奥へと進む赤穂浪士た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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流刑先の伊豆大島で無念の病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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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臣蔵で人気の「赤穂浪士」を福沢諭吉が非難の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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株式会社東洋経済新報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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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吉良殿、お痛み軽く」西本願寺が上野介聴取 忠臣蔵記録、本願寺史料研究所で見つか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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細川家堀内文書。伝右衛門은 국원 知行地에 있는 曹洞宗 寺에도 遺髪을 納墓
[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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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肥後文献叢書」第一巻」
[342]
문서
細川屋敷에서 排水가 隣の板倉邸에 흘러간 것에 대한 遺恨 (安中古文書, 群馬県立文書館)
[343]
문서
熊本藩御家資料(細川家文書・藩主裁可文書)ほか、熊本大学寄託永青文庫
[344]
문서
実際に大石良雄가 切腹한 場所ではない (大石良雄 기사의 이미지 8번째 참조)
[345]
서적
『江戸散歩』東京大学史料編纂所
角川書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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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成10年(1998年)中央義士会・港区教育委員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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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地「東京都教育委員会による二か国語説明板」解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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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碑에는 「徳富正敬」의 標記となっ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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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이탈리아 대사관에서 義士 위령제
赤穂民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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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毛利家文庫」「長府毛利十四代記」
下関市立長府博物館
[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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毛利氏の本貫・毛利荘の読みは「もりのしょう」
[353]
서적
彦根藩井伊家文書より「侍中由緒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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浄瑠璃坂の討入り - 忠臣蔵への道 -
199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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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쿠미노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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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즈케노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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