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 할미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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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용인 할미산성은 경기도 용인시에 위치한 산성으로, 성 내부를 내성과 외성으로 구분하는 구조를 갖는다. 성벽의 둘레는 651m이며, 할미산의 정상부와 능선을 따라 축조되었다. 삼국시대에서 남북국 시대에 걸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 시대 문헌에는 고모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석성산과 보개산의 혼동으로 인해 명칭에 대한 논란이 존재하며, 일부 지역에서는 석성산의 산성을 할미산성으로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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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할미산성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용인 할미산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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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경기도 |
유형 | 기념물 |
지정번호 | 215 |
지정일 | 2007년 9월 7일 |
주소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마성리 산41 |
시대 | 삼국시대 |
소유자 | 용인시 |
면적 | 73,504m2 |
2. 구조
할미산성은 성 내부를 남북으로 양분하는 길이 180m의 공유 벽을 기준으로 북쪽의 내성, 남쪽의 외성으로 구분된다. 북쪽의 내성은 정상부를 포함한 높은 지대에 축조되었고, 남쪽의 외성은 비교적 낮은 지대에 조성되었는데, 형태상 사모형(紗帽形)이다.
성벽의 전체 둘레는 651m로, 할미산의 정상부와 그 남쪽의 능선을 둘러싸며 협축하였고, 내·외벽 기저부에서 보축이 확인되었다. 최정상부에서 매납 유구와 아궁이, 평지에서 적심석이 나왔으며, 수구지와 토광 등이 조사되었다. 판상형 석재로 축조된 테뫼식 산성으로 면적은 73,504m2 정도이다.[1]
2. 1. 성벽
할미산성은 성 내부를 남북으로 양분하는 길이 180m의 공유 벽을 기준으로 북쪽의 내성과 남쪽의 외성으로 구분된다. 북쪽의 내성은 정상부를 포함한 높은 지대에 축조되었고, 남쪽의 외성은 비교적 낮은 지대에 조성되었는데, 형태상 사모형(紗帽形)이다.성벽의 전체 둘레는 651m로, 할미산의 정상부와 그 남쪽의 능선을 둘러싸며 협축하였고, 내·외벽 기저부에서 보축이 확인되었다. 최정상부에서 매납 유구와 아궁이, 평지에서 적심석이 나왔으며, 수구지와 토광 등이 조사되었다. 판상형 석재로 축조된 테뫼식 산성으로 면적은 73,504m2 정도이다.
2. 2. 시설물
할미산성은 성 내부를 남북으로 양분하는 길이 180m의 공유 벽을 기준으로 북쪽의 내성과 남쪽의 외성으로 구분된다. 북쪽의 내성은 정상부를 포함한 높은 지대에 축조되었고, 남쪽의 외성은 비교적 낮은 지대에 조성되었는데, 형태상 사모형(紗帽形)이다.[1]성벽의 전체 둘레는 651m로, 용인 할미산의 정상부와 그 남쪽의 능선을 둘러싸며 협축하였고, 내·외벽 기저부에서 보축이 확인되었다. 최정상부에서 매납 유구와 아궁이, 평지에서 적심석이 나왔으며, 수구지와 토광 등이 조사되었다. 판상형 석재로 축조된 테뫼식 산성으로 면적은 73,504m2 정도이다.[1]
3. 축성 시기 및 역사
할미산성은 조선 후기에 간행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폐성(廢城)된 고모성(姑母城)’이라 기록되었다.[1] 이후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 “고려시대 한 노파가 하룻밤에 쌓았다”라는 전설이 기록되어 있어 오랫동안 고려시대의 성곽으로 이해되어 왔다.[1]
그러나 1999년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가 지표 조사를 통해 삼국시대에서 남북국 시대에 이르는 유물을 대량 발굴하자 학계의 관심이 쏠리게 되었고, 경기도박물관의 시굴 조사를 통해 신라가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던 시기에 축조된 성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1] 오늘날 성벽 윗면이 훼손되어 있지만, 원형은 비교적 잘 유지되어 있다.[1]
4. 명칭 논란
용인 할미산성은 인근의 석성산 및 보개산과 혼동이 존재한다.[1] 석성산에 있는 산성을 '할미산성', 보개산에 있는 산성을 '석성산성'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석성산과 보개산의 혼동에서 오는 착오로 보인다.[1] 일부에서는 석성산 자락을 할미산(할미산성)으로 부르기도 하며, 산 이름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아 산성의 구별도 모호하다는 견해도 있다.[1] 영동고속도로를 기준으로 북쪽 향수산, 에버랜드 방향은 할미산성, 남쪽 석성산 방향은 석성산성으로 구분하기도 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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