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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국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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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북국 시대는 698년 발해 건국부터 935년 신라 멸망까지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 존재했던 시대를 지칭하는 역사 용어이다. 발해사의 귀속 문제를 둘러싸고 논쟁이 있으며, 한국 학계는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를 한국사의 일부로, 중국 학계는 발해를 중국사의 일부로 본다. '남북국 시대'라는 용어는 조선 시대 유득공의 《발해고》에서 처음 제시되었으며, 현재 대한민국 학계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이 시기에는 통일 신라와 발해가 공존하며 각기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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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국 시대
명칭
시대 명칭남북국시대
한자 표기南北國時代
로마자 표기Nambukguk-sidae
북한에서의 명칭발해 및 후기 신라 시기
북한 한자 표기渤海 및 後期新羅 時期
북한 로마자 표기Parhae mich Hugisilla-sigi
역사적 배경
성립698년
종결926년
주요 국가
북쪽발해
남쪽통일신라
시대 구분 관점
대한민국신라 중심의 삼국 시대에서 통일신라와 발해를 중심으로 한 남북국 시대로의 전환을 나타내는 시대 구분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발해사를 중시하며, 고구려 계승 국가인 발해의 역사를 한국사의 일부로 편입시키려는 관점을 반영한다.
기타
관련 용어후삼국시대

2. 명칭

과거에는 이 시기를 일반적으로 '''통일신라 시대'''라고 불렀으나, 신라뿐만 아니라 발해도 존재했으므로 한국사의 범위를 설명하는 용어로서 문제 제기가 있어왔다. 이후 발해를 한국사에 포함하기 위해 두 나라의 역사를 포괄할 수 있는 '남북국 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현재는 남북국 시대라는 명칭을 더 많이 사용한다.

'남북국 시대'라는 용어는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이 《발해고》에서 처음 사용하였다. 유득공고구려가 멸망하고 삼국시대가 끝난 후 남쪽에는 신라가, 북쪽에는 발해가 있었다고 설명하며 '남북국사관'을 주장하였다.

1980년대부터 발해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1990년대 들어 남북국 시대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경우가 최초로 등장하게 되었다. 현재 남북국 시대 패러다임은 대한민국 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2. 1. 남북국 시대 인정 논란

최치원의 글 〈사불허북국거상표 謝不許北國居上表〉와 《삼국사기》에는 신라발해를 '북국'이라 부른 예가 나타난다. 그러나 발해가 신라를 '남국'으로 불렀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남북국'이라는 용어는 조선 시대 말기에 한국사의 체계 속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70]

발해고구려 멸망 이후 민족구성과 정치체제에 다소 변화가 있었지만, 지배층의 고구려 계승 의식, 초기 중심지인 동모산의 위치, 발해 왕족 무덤의 형태, 발해 멸망 이후 고려로의 편입 등 여러 면에서 한국사와 연관성이 높다.[70]

발해의 민족 구성이 말갈인이 다수인 점, 발해 멸망 후 유민 대부분이 요나라금나라로 이주한 점 등은 중국과의 역사 논쟁을 심화시킨다.[70] 중국은 발해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주장하고 있으나,[71] 한국 사학계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발해를 한국사의 일부로 간주한다.[70]

통일신라 시대와 고려 시대, 조선 시대에는 발해를 한민족과는 다른 말갈 국가로 인식했다. 신라는 발해를 타국으로, 고려도 자국의 역사관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조선 중기까지 발해는 한국사와 별개인 말갈족 왕조로 여겨졌고,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은 신라 중심의 역사관을 반영했다.

조선 초기 세조 때 발해사를 조선사로 편입하자는 상소가 있었으나, 세조는 발해가 삼한(신라, 고구려, 백제)에서 떨어져 나간 국가로 일축했다. 조선 후기 유득공은 《발해고》에서 남북국사관을 처음으로 주장했다.

일제강점기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통일신라 시대'라는 용어가 주로 사용되었으나, 1980년대부터 발해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1990년대 들어 남북국 시대라는 명칭이 등장했다. '통일신라 시대'라는 용어는 신라 중심의 역사관으로 발해를 제외하고 있어, 중국 동북공정의 근거로 악용되기도 한다.

고려 태조는 926년 발해 멸망 후 934년에 태자 대광현을 비롯한 20만 명의 발해 유민을 수용하고, 대광현에게 왕씨 성을 주어 왕족에 버금가는 반열에 들게 하였다.

3. 역사적 배경

'남북국 시대'라는 용어는 최근에 등장했다. 1962년 북한의 박시형이 발표한 논문 「발해사 연구를 위하여」에서 처음 이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전까지 북한에서는 레닌의 민족론에 따라 신라의 삼국 통일을 조선 준민족(나로드노스치) 형성의 계기로 보았다. 그러나 박시형 이후 삼국 쟁립, 남북 양립, 그리고 고려에 의한 통합이라는 새로운 역사관이 북한의 공식 견해가 되었다. 이에 따라 "통일 신라"는 "후기 신라"(후기신라한국어)로 불리게 되었지만, 북한에서는 "남북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발해 및 후기 신라"라고 표기한다[38]

1975년 이우성이 「남북국 시대와 최치원」을 발표하여 신라와 발해의 병립 시대를 "남북국 시대"로 규정했다. 이 규정은 민족주의적인 한국 사학에서 받아들여져 국정 교과서에 기술되었으나, "통일 신라"라는 명칭은 계속 사용되고 있다.

박시형은 자신의 논문에서 신라 시대에 이미 "남북조"라는 개념이 있었고, 이는 "확실히 통일을 실현하려는 동족 전체의 일부"라고 주장했다[39]한동욱박시형의 학술 이념을 엿볼 수 있는 일화를 소개하는데, 1962년 말 또는 1963년 봄 무렵, 조선 최고 인민 회의 상임 위원회 최용건 위원장이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중국 동북 지방의 고고 조사 및 발굴을 요구하며, 고조선의 발상지를 찾고자 했다는 것이다[39]

이씨 조선 중기 박지원은 한나라의 영토가 압록강 남쪽으로 뻗어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만주의 발해를 조선 역사에서 제외한 김부식을 비판하며 발해는 고구려의 "자손"이었다고 주장했다.[41] 이규경은 발해가 조선 역사에서 제외된 것은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기" 때문이며, 이는 "중대한 오류"라고 주장했다.[42] 이씨 조선 후기에는 발해 창시자가 고구려인이 아닌 말갈인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발해를 조선 역사에 포함시키는 역사가들이 늘어났다.[43] 18세기에는 학자 이익안정복은 발해를 조선 역사의 일부로 간주하는 것을 거부한 반면, 신경준유득공은 발해를 완전히 포함시켰다. 1세기 후, 한치윤한진서는 신라와 동등하게 발해를 조선 역사에 포함시켰다.[44] 신채호는 발해와 부여 왕국을 조선 역사에서 제외한 《삼국사기》를 비판하며, 발해가 거란에 패배한 것을 두고 "우리 조상 '단군'의 고대 땅의 절반을... 900년 이상 '잃었다'"고 해석했다.[45][46]

북한 학자들과 최근 한국의 일부 학자들은 고려가 한반도 북부의 옛 고구려 영토를 점령한 발해가 여전히 존재했기 때문에 최초의 조선 통일이었다고 주장한다.[47][48] "남북국 시대"론자들은 신라 후기 최치원의 《최문창후전집》에서 최치원이 당나라에 올린 상소문에 발해를 "북국"이라고 기록한 것을 근거로 이 용어가 처음 등장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발해가 신라를 "남국"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사료의 뒷받침이 없는 추측이다. 또한, 《삼국사기》에 보이는 "북국" 용례는 북쪽의 거란을 가리키며, 발해 관련 기사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승휴의 《제왕운기》가 역대 "동국군왕" 중 하나로 발해를 언급하고 있다.

이씨 조선의 실학자 유득공은 《발해고》에서 "고려는 남쪽의 신라, 북쪽의 발해를 합쳐 남북국사를 편찬했어야 했는데, 이를 하지 않아 발해 옛 땅을 얻을 근거를 잃고 약국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씨 조선의 주류 견해는 《동국통감》과 《동사강목》에서 볼 수 있듯이, 발해를 자국의 역사 일부로 간주하지 않았다.

하지만 현재 한국과 북한에서는 "발해는 고구려인이 건국한 나라이며, 고구려의 계승국이며, 한국사의 일부이다"라는 통일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1784년 유득공의 《발해고》가 처음 발표된 이후 1970년대에 연구가 활발해졌으며, 현재는 이 시대를 북쪽은 발해, 남쪽은 신라가 병립했던 "남북국 시대"로 국정 역사 교과서에도 기재하여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49]

박철희(경인교육대학교)는 한국의 국정 역사 교과서가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으로 서술되어 있으며, 고구려와 발해가 다민족 국가였다는 사실이 빠져 있다고 비판한다.[50][51] 송기호(서울대학교)는 발해 문화에 대한 고유성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고구려적인 것으로 설명하는 한국의 태도를 비판하며, 이는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인 시각이라고 지적한다.[52]

북한에서는 1991년에 출판된 《조선전사5》(중세편)에서 "발해와 후기 신라"라는 제목으로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국으로 명시하고 있다.[53] 전영률(조선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장)은 신라를 조선의 역사에서 통일 국가라고 주장하는 것은 발해를 조선 역사에서 분리하는 것이며, "신라 중심설"은 한국의 매국적인 "북진 통일"에 역사적 근거를 제공하는 어용 행위라고 비판한다.[54] 이에 대해 김동우는 "남북국 시대"라는 시대 구분을 채택하는 것은 고구려를 계승한 북쪽의 발해와 남쪽의 신라가 서로 존재했음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하며, 어느 한 쪽 국가를 비하해서는 "남북국 시대"라는 시대 구분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55]

"남북국 시대"를 저서 《한국사신론》(한국사신론한국어, 1967년)에서 제창한 이기백(서강대학교)은 발해를 한국사에 포함해야 하지만, 통일 신라가 조선 민족사의 대세를 차지하고 있고 발해는 지류라고 할 수 있다고 답변했다.[56]

한국 미디어에서는 조선의 역사에서 정통성인 통일 신라와 발해를 대등하게 병렬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으며, 방계를 직계보다 상위로 두면 우스꽝스러운 족보가 된다는 지적이 있다. 이종욱(서강대학교)은 조선의 역사의 정통성은 고조선, 삼국 시대, 통일 신라, 고려 왕조, 이씨 조선이며, 발해는 고려 왕조의 건국에 기여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또한 발해사가 이씨 조선 말기까지 조선 역사에 끼어든 적이 없었지만, 광복 후 《조선민족사개론》을 집필하여 발해사를 부록으로 넣었고, 1970년대에 들어와서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서 통일 신라 이후 부분에 발해가 들어왔으며, 2002년의 제7차 국정 교과서 개정에서 '통일 신라'가 없어지고 '남북국 시대'로 서술되어 신라와 발해가 대등하게 취급된다고 설명한다. 그는 발해가 오늘날의 한국인을 형성하는데 기여한 바가 적다는 점을 들어 발해가 조선의 역사에 들어오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57]

3. 1. 통일신라 이전

신라676년 통일 전쟁에서 승리한 후 국가 제도를 개혁하고 왕권을 강화하여 귀족 권력을 재편하는 등 내실을 다졌다.[71] 고구려백제 유민을 통합하여 인구가 증가하고 생산력이 향상되면서 조세 수입이 늘어나자, 수도를 정비하고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였다.

한편, 당나라는 옛 고구려 영토와 백제에 행정 구역을 설치하고 정착하려 했다. 신라는 671년에 백제와 한반도 북부에서 당나라를 공격했다.

674년, 당나라는 신라를 침공했지만, 신라는 북쪽에서 당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결국 신라는 676년까지 당나라 군대를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삼국 통일을 달성했다.[71]

통일 신라는 예술과 문화의 황금기였으며,[3][4][5][6] 불교는 신라 문화의 큰 부분을 차지했다. 불국사와 같은 불교 사찰은 한국 건축과 불교의 영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이 시대의 국가 주도 예술과 건축으로는 황룡사, 분황사, 석굴암 석굴 등이 있으며,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통일 신라는 중세 동아시아페니키아와 같은 역할을 한 백제의 해상력을 이어받아,[7] 8세기와 9세기 동안 동아시아의 바다와 중국, 한국, 일본 사이의 무역을 지배했으며, 특히 장보고 시대에 두드러졌다. 또한 신라인들은 산둥반도와 양쯔강 하구에 해외 공동체를 건설했다.[8][9][10][11] 통일 신라는 번영하고 부유한 국가였으며,[12] 수도 경주는[13]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였다.[14][15][16][17]

이 시기에 불교가 번성하여 많은 한국 불교 승려들이 중국에 건너가 원측, 원효, 의상, 무상,[20][21][22][23] 그리고 신라 왕족 출신으로 구화산을 중국 불교의 4대 성산 중 하나로 만든 김교각 등이 중국 불교에 큰 영향을 주었다.[18][19][24][25][26][27][28]

3. 2. 발해 건국

698년, 고구려 유민 출신 대조영은 말갈족과 함께 만주 동모산에서 발해를 건국하였다.[29][30] 발해는 고구려 계승 의식을 표방하며,[40] 만주와 연해주, 한반도 북부 지역을 아우르는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다.

4. 통일신라

신라는 삼국통일 이후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고, 9주 5소경을 설치하여 지방 통치를 효율화했다. 집사부 장관인 시중의 권한이 강화되어 왕권이 전제화되었으며, 신문왕은 녹읍을 폐지하고 국학을 설립하여 유학 교육을 장려했다.

골품제는 유지되었으나, 진골 귀족과 대결하던 6두품 세력이 왕권과 결탁하여 성장했다. 진골 귀족의 고위직 진출은 여전히 활발했다.[3][4][5][6]

불교가 융성하여 불국사, 황룡사, 분황사, 석굴암 등 뛰어난 문화유산을 남겼다. 원효, 의상, 원측, 무상 등 고승들이 활약했으며, 신라 왕족 출신 김교각은 중국 불교에 큰 영향을 주었다.[18][19][20][21][22][23][24][25][26][27][28]

장보고를 중심으로 해상 무역이 발전하여 백제의 해상 강점을 계승, 동아시아 무역을 주도했다.[7] 산둥반도와 양쯔강 하구에는 신라인들의 해외 공동체가 건설되었다.[8][9][10][11] 수도 경주는[13] 세계적인 대도시로 성장했다.[12][14][15][16][17]

그러나 9세기 후반, 골품제의 한계와 진골 귀족들의 권력 다툼, 지방 세력의 성장 등으로 인해 정치적 어려움을 겪으며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는 후삼국 시대의 도래로 이어졌다.

5. 발해

830년의 발해와 신라


발해고구려가 멸망한 후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과 말갈 세력을 규합하여 건국한 국가이다.[29][30][31][32][33] 대조영은 천문령 전투에서 당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고구려의 옛 영토 북부에 발해를 건국했다. 발해는 한반도 북부, 만주의 상당 부분, 그리고 오늘날의 러시아 연해주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발해는 3대 문왕(재위 737–793)과 선왕의 통치 기간 동안 문화적으로 번성했다. 당시 발해는 '해동성국'이라 불릴 정도로 문화가 발전했으며, 당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도 독자적인 문화를 유지했다. 중앙 통치 체제는 3성 6부제를 중심으로 운영되었고, 지방 행정 제도는 5경 15부 62주로 구성되었다. 대외적으로는 당나라, 일본, 신라 등과 교류했으며, 특히 일본과의 관계가 긴밀했다.

발해는 10세기에 쇠퇴하여 926년 거란요나라에게 멸망했다. 고려는 발해의 일부 영토를 흡수하고 발해 유민들을 받아들였지만, 발해에 대한 역사 기록은 거의 남기지 않았다.[71]

6. 통일신라와 발해의 관계

신라발해는 이전 삼국시대처럼 서로 적극적으로 무력 분쟁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대립적인 관계였다. 733년 신라당나라와 연합하여 발해를 공격하기도 하였으나 실패했으며, 발해의 공격을 막기 위해 대동강 이북에 장성을 쌓기도 했다. 그러나 두 국가의 관계가 항상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발해 남경 남해부에서 신라의 수도 서라벌에 이르는 신라도는 발해와 신라가 활발한 교류를 했다는 증거로 보인다. 신라도는 발해의 상경 용천부에서 동경 용원부과 남경을 거쳐 신라의 동해안을 따라 서라벌에 이르던 교통로로, 8세기 전반에 개설되었으리라 여겨지며, 8세기 후반부터 9세기 전반까지 자주 이용되었다. 정부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신라인과 발해인들은 서로 적지 않은 경쟁 의식을 가졌던 것이 최치원의 《사불허북국거상표》, 《고려사최언위 열전 등에서 드러나고 있다.

7. 남북국의 멸망과 후삼국 시대

900년, 견훤이 서남부에 후백제를 건국하면서 신라는 분열되기 시작했고, 이듬해 궁예가 신라 북부에서 후고구려를 건국하면서 후삼국 시대에 돌입했다. 이로써 남국인 신라가 분열되어 후삼국 시대가 전개되면서, 남북국 시대는 사실상 후삼국 시대와 병존하게 되었다. 918년 태봉의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라 고려를 건국했다. 926년 북국인 발해가 거란의 침입으로 멸망하자, 고려는 934년 발해 태자 대광현을 비롯한 발해 유민들을 인도주의적으로 수용하기도 하면서, 삼한을 통일한 신라와 멸망한 고구려의 계승국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했다.[29]

8. 남북국 시대의 문화

남북국 시대는 통일신라와 발해가 공존했던 시기로, 각 국가는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통일신라불교를 중심으로 예술과 문화의 황금기를 맞이했다. 불국사, 황룡사, 분황사, 석굴암 등 뛰어난 건축물과 예술 작품을 남겼으며, 백제의 해상력을 이어받아 동아시아 해상 무역을 주도했다. 경주는 국제적인 도시로 번성했으며, 원측, 원효, 의상, 무상, 김교각 등 많은 승려들이 중국 불교 발전에 기여했다.
발해고구려 문화를 계승하면서도 당나라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상경 용천부는 당나라 장안성을 본떠 만든 계획도시였으며, 정효공주 무덤 벽화는 고구려 고분 벽화의 영향을 보여준다. 불교가 융성하여 이불병좌상과 같은 독특한 양식의 불상이 제작되었다.

8. 1. 통일신라의 문화

통일 신라는 예술과 문화의 황금기였으며,[3][4][5][6] 불교는 신라 문화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불국사와 같은 불교 사찰은 한국 건축과 불교의 영향을 보여주는 예이다. 이 시대의 국가 주도 예술과 건축으로는 황룡사, 분황사, 석굴암 석굴 등이 있으며,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통일 신라는 백제의 해상 강점을 이어받아 중세 동아시아페니키아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7] 8세기와 9세기 동안 동아시아의 바다와 중국, 한국, 일본 사이의 무역을 지배했으며, 특히 장보고 시대에 두드러졌다. 또한 신라인들은 산둥반도와 양쯔강 하구에 해외 공동체를 건설했다.[8][9][10][11] 통일 신라는 번영하고 부유한 국가였으며,[12] 수도 경주는[13]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였다.[14][15][16][17]

이 시대에 불교가 번성하여 많은 한국 불교 승려들이 중국 불교도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었고[18] 중국 불교에 기여했는데,[19] 원측, 원효, 의상, 무상,[20][21][22][23] 그리고 신라 왕족 출신으로 그의 영향으로 구화산이 중국 불교의 4대 성산 중 하나가 된 김교각 등이 있다.[24][25][26][27][28]

8. 2. 발해의 문화

발해는 고구려 문화를 계승하면서도 당나라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상경 용천부는 당나라 장안성을 본떠 만든 계획도시로, 발해의 발전된 도시 문화를 보여준다. 정효공주 무덤에서 발견된 벽화는 고구려 고분 벽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발해의 회화 수준을 짐작하게 한다. 불교가 융성하여 사찰과 불상이 많이 만들어졌으며, 이불병좌상 등 독특한 양식의 불상이 제작되었다.

9. 남북국 시대 관련 기록

북한과 대한민국에서는 발해사를 한국사 체계에 포함시키기 위해 민족 문제에 집중한다.[40] 발해와 신라의 동족 관계, 고구려와 발해의 계승 관계 등이 주요 연구 주제이다.[40]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점들이 강조된다.


  • 건국자와 지배 집단의 출자: 대조영을 비롯한 발해 건국 세력과 지배층이 고구려인이라면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로 볼 수 있다.[40]
  • 발해 국내 민족 구성: 발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고구려계이며, 말갈족은 피지배층이었다고 본다. 말갈족의 고구려화와 같은 민족 융합을 강조하기도 한다.[40]
  • 고구려 계승 의식: 발해 국서에 "고려(고구려) 국왕"이라고 자칭한 점을 통해 발해 스스로 고구려 계승 의식을 가졌다고 본다.[40]
  • 신라와의 동족 의식: 신라가 발해를 "북국"으로 불렀으니, 발해도 신라를 "남국"으로 칭하며 서로 동족으로 인식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40]
  • 발해 유민의 고려 귀부: 발해 멸망 후 많은 유민이 고려로 간 것은 고려를 동족으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본다.[40]
  • 고구려 문화의 영향: 발해의 분묘, 주거지, 도성지, 출토 유물, 불상 등에서 고구려의 영향이 나타난다고 본다.[40]

9. 1. 한국 측 기록

당나라는 통일 전쟁 이후 옛 고구려 영토와 백제에 행정 구역을 설치하여 한반도를 지배하려 했다. 신라는 671년에 백제를 공격하고 한반도 북부에서 중국 세력을 공격했다. 674년 당나라가 신라를 침공했지만, 신라는 북쪽에서 당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신라는 676년까지 당나라 군대를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삼국 통일을 달성했다.

통일 신라는 예술과 문화의 황금기를 맞이했으며,[3][4][5][6] 불교는 신라 문화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불국사와 같은 불교 사찰은 한국 건축과 불교의 영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이 시대의 국가 주도 예술과 건축으로는 황룡사, 분황사, 석굴암 등이 있으며,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통일 신라는 백제의 해상력을 이어받아,[7] 8세기와 9세기 동안 동아시아의 바다와 중국, 한국, 일본 사이의 무역을 지배했으며, 특히 장보고 시대에 두드러졌다. 또한 신라인들은 산둥반도와 양쯔강 하구에 해외 공동체를 건설했다.[8][9][10][11] 통일 신라는 번영하고 부유한 국가였으며,[12] 수도 경주는[13]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였다.[14][15][16][17]

이 시대에 불교가 번성하여 많은 한국 불교 승려들이 중국에서 명성을 얻었고[18] 중국 불교에 기여했는데,[19] 원측, 원효, 의상, 무상,[20][21][22][23] 그리고 신라 왕족 출신으로 그의 영향으로 구화산이 중국 불교의 4대 성산 중 하나가 된 김교각 등이 있다.[24][25][26][27][28]

신라는 9세기 후반에 정치적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이는 신라를 약화시켰고, 곧 옛 백제의 후예들이 후백제를 건국했다. 북쪽에서는 반란군이 고구려를 부활시키면서 후삼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통일 신라는 경순왕 때인 935년 고려에 병합될 때까지 267년 동안 존속했다.

북한과 대한민국에서 발해사를 한국사 체계에 포함시키는 논거는 결국 민족 문제로 귀결되며, 발해사 연구는 발해와 신라와의 동족 관계 증명, 고구려-발해의 계승 관계 등 민족 문제에 집중한다.[40]

발해사에 대한 한국 측 기록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건국자와 지배 집단의 출자: 발해의 건국자 대조영과 지배 집단이 고구려인이라면,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국이라는 것이다. 건국자와 지배 집단이 왕조의 성격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논점으로 여겨진다.[40]

  • 발해 국내의 민족 구성과 지배 민족 역할: 발해에서 왕조의 주체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은 고구려계이며, 피지배 민족인 말갈족에 대한 지배 방식도 고구려 시대와 변함이 없었다고 본다. 주민 구성에서 말갈족의 비율을 적게 추정하거나, 말갈족의 고구려화를 강조하기도 한다.[40]

  • 발해 왕실 및 지배자 집단의 고구려 계승 의식: 일본에 전해진 발해 국서에 "고려(고구려) 국왕"이라고 자칭한 점을 중시하며, 발해인 자신이 명확하게 고구려 계승 의식을 가졌다고 간주한다.[40]

  • 신라와의 상호 간의 동족 의식: 신라는 발해를 "북국" 또는 "북조"라고 불렀으므로, 발해에서도 신라를 "남국" 또는 "남조"라고 칭했을 것이라고 추정하며, 남북국이라는 의식을 공유했던 것은 동족 의식의 증거라고 단정한다.[40]

  • 발해 유민의 귀추와 귀속 의식: 발해 멸망 후 10만여 명의 발해 유민이 고려에 귀부한 사실을 중시하며, 신라의 영역을 계승한 고려를 발해인이 동족으로 의식했기에 이러한 행동이 가능했다고 본다.[40]

  • 발해에서의 고구려 문화 영향: 발해의 분묘, 주거지, 도성지, 출토 유물, 불상 등은 모두 고구려와의 계승 관계를 명백하게 보여준다고 간주한다.[40]

9. 2. 중국 측 기록

중국의 역사서에서는 발해에 대해 다양한 기록을 남겼다.

  • 구당서》는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을 고구려의 별종, 즉 고구려 계통의 인물이라고 기록했다.[70]
  • 신당서》는 발해가 본래 속말말갈이며 고구려에 부속되었던 사람들이라고 기록하면서, 대조영의 성씨가 대(大)씨라고 전한다.[70]
  • 무경총요》는 발해를 부여의 별종으로 보았고, 본래 부여의 땅이었다고 기록했다.[70]
  • 신오대사》는 발해가 본래 말갈족이지만, 고구려의 별종이라고 기록했다.[70]
  • 금사》는 당나라 초기에 말갈족에 속말부와 흑수부가 있었는데, 모두 고구려에 신하로서 복속되었다고 한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속말부는 동모산을 차지하고 강성해져 발해라 불렸으며, 대씨 성을 가지고 문물과 예악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또한 금나라가 요나라를 정벌할 때 발해가 귀부해왔는데, 이들이 속말말갈의 후예라고 전한다.[70]
  • 책부원구》는 당나라가 말갈의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봉했는데, 대조영은 스스로 진국왕(振國王)으로 칭했으며, 영주에서 동쪽으로 2,000리나 되고 군사가 수만 명이었다고 기록했다.[70]


이처럼 중국 측 기록들은 발해의 건국 세력과 관련하여 고구려, 말갈, 부여 등 다양한 계통을 언급하고 있다.

9. 3. 일본 측 기록

일본의 역사서 속일본기에는 "발해는 옛날 고구려다",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에서 전해 내려온 풍속을 간직하고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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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서적 The History of Korea https://books.google[...] ABC-CLIO 2016-09-30
[7] 서적 The Religious Traditions of Asia: Religion, History, and Culture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6-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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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서적 Ennins Travels in Tang China https://books.google[...] John Wiley & Sons Canada, Limited 2016-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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