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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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용진진은 조선 효종 7년(1656)에 강화도 해안 방어를 위해 축조된 진이다. 병마만호 1명, 군관 24명, 사병 59명, 돈군 18명 등 102명의 병력이 주둔했으며, 4문의 포좌와 26개소의 총좌 시설을 갖추었다. 가리산, 좌강, 용당 등 3개의 돈대를 관리했으며, 1999년 문루와 좌강돈대를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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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진진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용진진 (龍津鎭) | |
국가 | 인천광역시, 강화군 |
유형 | 기념물, 향토유적 |
번호 | 42, 8 |
지정일 | 1999년 3월 29일, 1986년 4월 1일 |
해제일 | 1999년 3월 29일 |
주소 |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 215번지 |
시대 | 조선시대 |
문화재청 ID | 23,00420000,23 |
2. 역사
조선 효종 7년(1656)에 강화도의 해안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설치된 군사 주둔지이다.[1] 진(鎭)은 군대가 머물며 방어 임무를 수행하는 곳을 의미하며, 용진진은 병마만호의 지휘 아래 운영되었다. 이곳은 가리산돈대, 좌강돈대, 용당돈대 등 3개의 돈대를 관할하는 역할을 맡았다.[1] 시간이 흐르면서 시설 대부분이 유실되었으나, 1999년에 일부 복원이 이루어졌다.[1]
2. 1. 설치 배경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큰 전쟁을 겪으면서 수도 한양 방어의 핵심 길목인 강화도를 중심으로 한 해안 방어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해안 방어 체계를 정비하고 강화하는 노력이 이어졌으며, 그 일환으로 효종 7년(1656)에 용진진이 설치되었다.[1] 용진진은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방어 시설 중 하나였다.2. 2. 주요 시설
용진진에는 포좌(포를 놓는 자리) 4개소와 총좌(총을 놓는 자리) 26개소의 군사 시설물이 있었다.[1] 현재는 석축 대부분이 없어지고 윗부분이 무지개 모양을 이루고 있는 출입문인 홍예문 2곳만 남아 있었는데, 1999년 그 위로 누각을 새로 복원하였다.[1]2. 3. 병력 구성
조선 효종 7년(1656)에 축조된 용진진에는 병마만호의 지휘 아래 병력이 주둔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주둔 병력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1]
2. 4. 관할 돈대
용진진은 가리산돈대, 좌강돈대, 용당돈대 등 3개의 돈대를 관리하였다.[1]3. 구조
용진진은 조선 효종 7년(1656년)에 축조된 진으로, 성곽과 출입문으로 구성된 군사 방어 시설이었다. 성곽에는 포좌 4개소, 총좌 26개소 등의 시설이 있었으나 석축은 현재 대부분 유실되었다. 윗부분이 무지개 모양인 홍예문 형태의 출입문 2곳만 남아 있으며, 1999년 문 위에 문루가 복원되었다.[1] 용진진은 가리산돈대, 좌강돈대, 용당돈대 3개의 돈대를 관리하였다.
3. 1. 성곽
진은 군인이 주둔하던 무장 성곽도시를 의미한다. 용진진은 조선 효종 7년(1656년)에 축조되었으며, 각 진에 배치된 병마만호의 관리 아래 병력 101명이 주둔했다고 전해진다.포좌 4개소, 총좌 26개소 등의 시설물이 있었으나 석축은 현재 대부분 유실되었다. 윗부분이 홍예 양식인 출입문 2곳만 남아 있었는데, 1999년 문 위에 누각을 복원하였다.
가리산돈대, 좌강돈대, 용당돈대 3개의 돈대를 관리하였다고 한다.
3. 2. 출입문
용진진의 석축은 대부분 없어졌으나, 윗부분이 무지개 모양을 한 홍예문 두 곳이 남아 있다.[1] 이 문 위로는 1999년에 문루가 복원되었다.[1]3. 3. 복원 현황
용진진의 석축은 대부분 소실되어 홍예문 형태의 출입문 두 곳만이 남아 있었다.[1] 1999년에 이 문들 위로 문루를 새로 복원하였고, 용진진이 관리하던 돈대 중 하나인 좌강돈대도 이때 함께 복원되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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