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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메나이 쓰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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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메나이 쓰네오는 1947년 아오모리현에서 태어나 후쿠시마현립 의과대학에 재학 중 공산주의자동맹에 가맹하여 적군파에 참여했다. 그는 폭탄 제조를 담당하여 "우메나이 폭탄"을 개발했으며, 다이보사쓰 고개 사건 수사 과정에서 지명수배를 받고 잠적했다. 1972년 이후 행방이 묘연하며, 1978년 공소시효가 만료되었다. 그는 요도호 납치 사건 관련 오보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며, 신좌익 내에서 "전설의 남자"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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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메나이 쓰네오
기본 정보
이름우메나이 쓰네오
원어 이름梅内 恒夫
로마자 표기Umenai Tsuneo
출생
출생일1946년 10월 20일
출생지도쿄도고가네이시
사망
사망일2009년 9월 17일 (향년 62세)
사망지지바현가시와시
사인간암
학력
출신 학교도쿄 대학 공학부 도시공학과 졸업
도쿄 대학 대학원 공학연구과 도시공학전공 수료
학위공학박사
경력
주요 경력쓰쿠바 대학 사회공학계 조교수
아시아 대학 법학부 교수
아시아 대학 도시창조학부 교수
연구 분야
연구 분야도시 계획
국토 계획
교통 계획
소속 학회
소속 학회일본 도시 계획 학회
국토 계획 학회
일본 교통 학회
수상
수상 내역일본 도시 계획 학회 석교상 (2006년)
주요 저서
저서『교통 계획』 공저, 기말래피드, 1994년
『이동의 사회학』 공저, 학예출판사, 1996년
『교통·도시 21세기의 구상』 공저, 운수성 교통정책국 감수, 1997년
『사람이 사는 국토를 목표로: 제4차 전국 종합 개발 계획의 비판적 검증』 공동 편집, 학예출판사, 2000년
『지방 분권과 국토 축의 재구축』 공동 편집, 대명당, 2001년
『도시 계획 워크숍』 공동 편집, 학예출판사, 2003년
『사람 중심의 도시·교통 계획』 편저, 학예출판사, 2008년
『저출산 고령화 시대의 지역 대중교통』 공동 편집, 학예출판사, 2008년
외부 링크
외부 링크과학연구비조성사업 데이터베이스

2. 경력

아오모리현 출신으로 후쿠시마현립 의과대학 재학 중 공산주의자동맹에 가입하며 신좌익 활동을 시작했다. 적군파의 초기 멤버로 활동했으며, 특히 폭탄 제조에 능숙하여 속칭 "우메나이 폭탄"을 개발했다. 이는 당시 신좌익 세력의 폭탄 투쟁이 확산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

다이보사쓰 고개 사건 수사 과정에서 폭발물 단속 벌칙 위반 혐의로 지명수배되자 지하로 잠적했다. 잠적 중에도 수기를 통해 자신의 사상을 밝혔으며, 이는 이후 일본 원주민론과 반일 테러 활동으로 이어지는 사상적 배경을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78년 공소시효가 만료되었으나, 이후에도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현재까지 행방이 묘연하다.

2. 1. 초기 활동

1947년 아오모리현에서 태어났다. 아오모리현립 하치노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후쿠시마현립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대학 재학 중 공산주의자동맹에 가입했으며, 적군파가 결성되자 멤버가 되었다. 후에 연합적군 멤버가 되는 우에가키 야스히로를 적군파에 가입시키기도 했다.

우메나이는 폭탄 제조를 담당했으며, 그가 고안한 폭탄은 속칭 "우메나이 폭탄"으로 불리며 신좌익의 폭탄 투쟁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다이보사쓰 고개 사건 수사 과정에서 우메나이의 이름이 거론되면서 폭발물 단속 벌칙 위반 혐의로 지명수배되었고, 그 직후 지하로 잠적했다.

2. 2. 폭탄 제조 및 지명수배

우메나이는 폭탄 제조를 담당했으며, 그가 고안한 폭탄은 속칭 "우메나이 폭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폭탄은 신좌익의 폭탄 투쟁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다이보사쓰 고개 사건에 대한 수사 과정에서 우메나이의 이름이 드러나면서, 폭발물 단속 벌칙 위반 혐의로 지명수배되었다. 지명수배된 직후 우메나이는 지하로 잠적했다. 그의 수기에서 드러난 사상은 후에 일본 원주민론으로 이어져, 반일 테러 활동이 잇따르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1972년 5월 10일자 『영화 비평』에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로부터 일제 타도를 뜻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라는 제목의 수기를 기고하여 오타 료, 다케나카 로, 히라오카 마사아키 등에게 지지를 보냈다. 오타 료가 "동지로서 공개적으로 확인하자"고 답했지만, 우메나이는 이에 응답하지 않았다. 이것이 우메나이의 마지막 공식적인 소식으로 알려져 있다.

1978년 1월 10일, 우메나이의 지명수배 혐의에 대한 공소시효가 만료되었다. 다른 신좌익 활동가 중에는 공소시효 만료 후 공개 활동을 재개하거나 지지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지만, 우메나이는 그러한 구체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그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2. 3. 사상 및 영향

우메나이 쓰네오의 사상은 수기를 통해 알려졌으며, 이는 후에 일본 원주민론으로 발전하는 기초가 되었다. 이 일본 원주민론은 반일 테러가 연이어 발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1972년 5월 10일자 『영화 비평』에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로부터 일제 타도를 뜻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라는 제목의 수기를 기고하여 오타 료, 다케나카 로, 히라오카 마사아키 등에게 지지를 보냈다. 오타 료가 공개적으로 동지 관계를 확인하자고 제안했지만, 우메나이는 이에 대해 답하지 않았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공식적인 메시지로 알려져 있다.

2. 4. 잠적 이후

1972년 5월 10일자 『영화 비평』에 「공산주의자동맹 적군파로부터 일제 타도를 뜻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라는 제목의 수기를 기고했다. 이 글을 통해 오타 료, 다케나카 로, 히라오카 마사아키 등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이에 오타가 "동지로서 공개적으로 확인하자"고 응답했으나, 우메나이는 이에 대해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다. 이것이 우메나이에 대한 마지막 소식이 되었다.

1978년 1월 10일공소시효가 성립되었다. 당시 신좌익 운동가 중에는 지명수배 혐의의 공소시효가 만료된 후, 공개 활동 조직 등을 통해 성명을 발표하거나 지지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우메나이는 이러한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까지 그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3. 기타

(내용 없음)

3. 1. 오보 사건

1970년 3월 요도호 납치 사건이 발생했을 때, 경찰은 지문 대조 과정에서의 실수로 9명의 납치범 중 한 명을 우메나이 쓰네오로 잘못 발표했다. 하지만 10일 후, 해당 인물은 우메나이가 아닌 아베 키미히로로 정정되었다. 또한 아사마 산장 사건 당시에도 우메나이가 인질범 중 한 명으로 잘못 보도되는 일이 있었다.

3. 2. 평가

우메나이 쓰네오가 적군파 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은 아니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M 작전으로 불리는 은행 강도 계획 당시 망설이는 모습을 보여 동료들 사이에서 "겁쟁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가 고안한 것으로 알려진 소위 "우메나이 폭탄" 역시 높은 파괴력에도 불구하고 실용성에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폭탄의 무게가 3kg에 달해 안전 거리인 20m 이상으로 던지려면 포환 던지기 선수 수준의 능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랜 기간 지명수배자 신분으로 도피 생활을 이어가면서, 우메나이는 일본 신좌익 역사에서 일종의 "전설적인 인물"로 회자되기도 한다[1].

참조

[1] 간행물 爆弾魔・梅内恒夫のまぼろし―今も逃げつづける「爆弾作りの名人」の正体 文芸春秋 1995
[2] 간행물 爆弾魔・梅内恒夫のまぼろし―今も逃げつづける「爆弾作りの名人」の正体 文芸春秋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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