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양주남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양주남은 일제강점기부터 1970년대까지 영화, 문학, 연극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대한민국의 예술가이다. 경성촬영소 연구원으로 영화계에 입문하여 영화감독, 편집감독, 음향연출, 촬영감독 등으로 활동했으며, 해방 후에는 국방부 문관과 군인으로 복무했다. 1953년에는 한국영화기술자협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며 한국 영화 기술 발전에 기여했고, 사진작가, 수필가, 시인, 연극연출가로도 활동했다. 1977년 경기도 안양에 낙향한 후 이듬해 예술 분야에서 은퇴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남해 양씨 - 양주동 (작가)
    양주동은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문학자, 수필가, 국문학자, 시인, 번역가, 교육자, 언어학자, 정치인으로, 초기 문학 평론가로 데뷔하여 서양 문학을 소개하고 향가와 고려가요 연구에 몰두했으며, 해방 후에는 대학교수로 후학 양성에 힘썼으나, 말년에는 친일 행적 논란과 사생활 문제로 비판을 받았다.
  • 생사 불명 - 나영균
    나영균은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 및 명예교수를 역임하고 한국영어영문학회 회장 등을 지낸 대한민국의 영어영문학자, 번역가, 문학평론가, 미술평론가이다.
  • 생사 불명 - 소 노보루
    소 노보루의 작품 목록은 일본 시인 소 노보루가 발표한 주요 시집들을 나열한 것으로, 『타마후리의 노래』, 『구니자카이의 노래』, 『풍경송가』, 『기억의 미나와』, 『고개』 등이 포함된다.
  • 음향 감독 - 김철석
    김철석은 197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다양한 장르의 한국 영화에 참여하여 1980년대 한국 영화 르네상스 시기에 활약했으며, 음향 및 특수효과 분야에서도 활동하며 대종상 영화제와 이천춘사대상영화제에서 수상한 영화인이다.
  • 음향 감독 - 이승철 (1961년)
    이승철은 1991년 영화 《젊은 날의 초상》부터 동시녹음 분야에서 활동하며, 사운드 슈퍼바이저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양주남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양주남
원어명梁柱南
양주남 (1959년 5월 17일)
양주남 (1959년 5월 17일)
출생일1912년 3월 8일
출생지일제강점기 경성부 (현재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
국적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직업영화 감독
영화 편집감독
영화 음향연출가
영화 동시녹음연출가
영화 음향감독
영화 녹음기사
영화 녹음감독
영화 현상감독
영화 촬영감독
기업가
사진
수필가
시인
연극연출가
활동 기간1932년 ~ 1978년
종교유교(성리학)
학력경성 신명고등보통학교 졸업
부모양재연(부)
친척양원장(5촌 종숙부), 양주동(6촌 재종형)
배우자김능안(金陵岸)
자녀슬하 3남 2녀
수상
수상 내역1954년 금성화랑무공훈장
1968년 공보부 장관 공로표창장
1972년 국방부 장관 공로표창장

2. 생애

2. 1. 초기 생애와 교육

양주남의 본관(관향)은 남해(南海)이고 호(號)는 풍송(豊松)· 귤산(橘山)· 기현(岐峴)이다. 일제강점기 경성부에서 출생한 그는 전라북도 남원전라남도 해남경상남도 남해경기도 시흥경기도 과천경기도 고양경기도 개풍과 경기도 개성과 황해도 장연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다. 이후 경성 공옥소학교 2학년 때이자 9세 시절이던 1920년에 부친상을 치렀다. 1925년 공옥소학교를 졸업하고, 1931년 신명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그의 6촌 재종형은 문학평론가·시인·수필가·국어국문학자·영어영문학자 겸 번역문학가 양주동(梁柱東, 1903년 6월 24일 ~ 1977년 2월 4일) 前 동국대학교 대학원 원장이다.

2. 2. 영화계 입문과 활동 (일제 강점기)

1932년 경성촬영소 연구원 1기로 입소하여 영화감독 이필우, 이명우 형제의 문하생으로 영화계에 입문하였다. 1934년에는 경성영화촬영소 영화조감독분과 연구원 1기로 입소하였으며, 이때 입소 동기로는 경기도 개풍 출신의 어약선 등이 있었다.

1936년 영화 《미몽(죽음의 자장가)》으로 영화감독 및 편집감독으로 정식 데뷔하였다. 이후 1940년 영화 《수업료》로 영화 음향연출가로, 1941년 영화 《집 없는 천사》로 영화 음향감독 겸 동시녹음연출가로 데뷔하며 활동 영역을 넓혔다.

2. 3. 해방 이후 활동과 국방부 참여

해방 이후 양주남은 1946년 김홍의 촉탁을 받아 자유영화사 편집국 국장으로 입직했다. 1947년 자유영화사 편집국 국장 직위에서 퇴진했다. 1949년 대한민국 국방부 정훈국 문관으로 발탁되었다.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후 대한민국 육군 중사로 임관하여 대한민국 국방부 정훈국 정훈부사관으로 복무했다. 1952년 대한민국 육군 상사로 진급했다. 군 복무 중 1952년 다큐멘터리 영화 《정의의 진격》으로 영화 촬영감독 데뷔를 했다. 1956년 대한민국 육군 상사로 예편했다.

2. 4. 영화 기술 분야 기여와 은퇴

양주남은 1932년 경성촬영소 연구원 1기로 영화계에 입문하여, 이필우, 이명우 형제의 문하생으로 영화 기술을 배웠다. 1936년 영화 《미몽(죽음의 자장가)》로 영화감독 및 편집감독으로 정식 데뷔하였고, 1940년 영화 《수업료》로 영화 음향연출가로 데뷔하였다. 1941년에는 영화 《집 없는 천사》로 영화 음향감독 겸 동시녹음 연출가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1940년대 후반부터는 다양한 영화 기술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1948년 다큐멘터리 영화 《장추화 무용》으로 영화 현상감독으로, 1949년 영화 《나라를 위하여》로 녹음기사, 같은 해 영화 《성벽을 뚫고》로 녹음감독으로 데뷔하였다. 1952년에는 다큐멘터리 영화 《정의의 진격》으로 촬영감독으로 데뷔하는 등 한국 영화 기술 분야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1953년에는 초대 한국영화기술자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한국 영화 기술 발전에 기여하였다. 1960년에는 영화 《대지의 어머니》를 감독하기도 하였다.

영화 기술 분야 외에도 사진작가, 수필가, 시인, 연극연출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1955년 사진집 《삼한 이남의 산하》를 발표하며 사진작가로, 1958년 수필집 《강릉에서 춘천까지 소박한 여행로》를 발표하며 수필가로, 1963년 시집 《길섶의 들풀꽃》을 발표하며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1964년에는 연극 《청춘극장》으로 연극연출가로 데뷔하였다. 1966년에는 서라벌예술대학교 연극영화학과 특임교수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1977년 이후 경기도 안양에 낙향하였고, 이듬해 1978년 예술 분야에서 사실상 은퇴하였다.

3. 작품 활동

3. 1. 영화



1952년정의의 진격

3. 1. 1. 감독 작품

3. 1. 2. 촬영감독 작품

1952년정의의 진격

3. 1. 3. 기타 영화 참여 작품

wikitext

3. 2. 문학


  • 1955년 《삼한 이남의 산하》
  • 1958년 《강릉에서 춘천까지 소박한 여행로》
  • 1963년 《길섶의 들풀꽃》

3. 2. 1. 사진집

1955년 《삼한 이남의 산하》

3. 2. 2. 수필집

1958년 《강릉에서 춘천까지 소박한 여행로》

3. 2. 3. 시집

3. 3. 연극

1964년 연출작으로 《청춘극장》이 있다.

4. 수상 경력

1954년 금성화랑무공훈장을 수여받았으며, 1968년 공보부 장관 공로표창장, 1972년 국방부 장관 공로표창장을 수여받았다.

5. 평가와 비판

5. 1. 긍정적 평가

5. 2. 비판적 평가

6. 기타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