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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코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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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치코와시는 근세 일본에서 발생한 민중 봉기의 한 형태로, 주로 상인들의 매점매석으로 인한 물가 상승에 대항하여 가옥 파괴 등을 통해 저항하는 행위였다. 인의(仁義) 정치 사상에 기반하여 부유층의 책무를 강조하며, 이를 다하지 못하는 대상에게 행해졌다. 1703년 나가사키에서 처음 발생한 이후, 에도 시대를 거치며 기근과 사회 불안 속에서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오사카의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난과 같은 사건도 우치코와시의 일종으로 간주된다. 우치코와시는 당시 사회의 불만을 표출하는 수단이었으며, 때로는 지역 사회의 묵인 하에 이루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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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코와시
사건 개요
유형민중 봉기, 폭동, 약탈
원인경제적 불만, 사회적 불평등, 기근
목표곡물 가격 인하, 부유층에 대한 분노 표출, 사회 시스템에 대한 저항
발생 시기에도 시대
발생 지역일본 전역의 도시 및 농촌
배경
사회 경제적 상황에도 시대 후기, 농촌 경제 악화 및 도시 빈민 증가
정치적 상황막부의 통제력 약화 및 사회적 불안 심화
사상적 배경유교적 질서에 대한 도전 및 평등 사상 확산
전개 과정
초기 단계소규모 시위 및 불만 표출
확산 단계도시 및 농촌 지역으로 확산, 폭력적인 양상으로 전개
절정 단계곡물 창고 습격, 부유층 가옥 파괴, 관리 습격
진압 단계막부 및 번의 군사력 동원, 주도자 체포 및 처벌
주요 특징
참여 계층농민, 도시 빈민, 상인, 수공업자
폭력성파괴, 약탈, 방화 등 폭력적인 양상
조직성자발적인 참여, 지도자 부재, 일시적인 연대
정치성사회 시스템에 대한 저항, 정치적 요구 표출
영향
사회적 영향사회 질서 혼란, 부유층과 빈민 간의 갈등 심화
경제적 영향곡물 가격 폭등, 상업 활동 마비
정치적 영향막부의 권위 실추, 사회 개혁 요구 증대
역사적 의미
사회 변동의 징후에도 시대 사회 모순 표출, 메이지 유신의 간접적 요인
민중 저항 운동억압적인 사회에 대한 민중의 저항 의식 표출
사회 운동의 역사근대 사회 운동의 기원
지역별 사례
오사카쌀 가격 폭등에 항의하는 대규모 우치코와시 발생
교토부유한 상인들에 대한 공격
에도도시 빈민들의 생활고를 반영한 우치코와시 발생
관련된 사건
세금 폭동과도한 세금 징수에 대한 저항
농민 봉기영주에 대한 저항
잇키농민들의 연대 저항
참고 문헌

2. 역사

근세 일본에서 도시를 중심으로 상인 간의 상호 부조 조직인 '합력'이 발전하고, 교호 연간(1716~1736)에는 부유한 상인들이 마을 운영을 맡게 되면서 '인의(仁義) 정치'라는 사회 정의 사상이 형성되었다.[3]

인의 정치에 따르면 위정자는 부자의 사욕 추구를 규제하여 약자를 보호하고, 부자는 사욕을 자제하며 기근이나 재해 발생 시 쌀을 나누는 등 약자를 도와야 했다. 이러한 책무를 다하지 못하는 위정자나 부자는 '부덕(不德)'하다고 비판받았다.[3]

우치코와시는 주로 도시에서 매점매석 등으로 물가를 올린 상인에게 가해졌지만, 백성 봉기와 함께 영주의 가혹한 정치와 결탁한 특권 상인이나 촌락 관리에게도 행해졌다. 가재도구 약탈도 있었지만, 정당한 제재임을 명확히 하기 위해 가옥 파괴에 그치고 약탈이나 방화는 엄격히 금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우치코와시 주동자는 처벌받았지만, 지역 사회에서 우치코와시의 정당성이 널리 인정되면 관리가 결과를 용인하고, 우치코와시 대상자는 처벌을 받거나 자리에서 물러나기도 했다.[3]

도시에서 최초의 우치코와시는 겐로쿠 16년(1703년) 나가사키에서, 교호 18년(1733년)에는 에도에서 발생했다. 이후 기근이나 정세 불안 등으로 자주 발생했으며, 특히 물가가 급등한 막말 시기에 증가했다.

에도 시대 중기(약 300년 전), 정치 부패와 흉작으로 쌀값이 폭등하면서 우치코와시가 일어났다. 교호 18년(1733년) 에도에서 시작되어 덴메이 연간(1781~1789년)의 기근 시기에는 오사카, 교토, 히로시마, 나가사키, 이시노마키[4] 등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덴포 8년(1837년) 오사카에서 발생한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난도 우치코와시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2. 1. 발생 배경

근세 일본의 도시 지역에서는 상인들 간의 상호 부조인 합력이 발전하였다. 부유한 상인에 의한 마을 운영이 성립된 교호 연간(1716년 ~ 1736년) 무렵부터는, 인의(仁義) 정치라고 불리는 사회 정의 사상이 형성되었다.[3]

인의 정치는 위정자와 부자에게 주어진 책무였다. 위정자는 부자의 사욕 추구를 규제하여 약자의 생활 유지를 돕고, 부자는 사욕을 자제하며 기근이나 재해 발생 시 솔선하여 쌀을 나누는 등 약자를 구해야 했다. 이러한 책무를 다하지 못하는 위정자와 부자는 공적, 사적 수탈 여부에 관계없이 부덕(不德)으로 규탄받았다.[3]

주로 도시 지역에서 매점매석 등으로 물가 상승의 원인으로 지목된 자에 대해 우치코와시가 행해졌다. 백성 봉기에 따라 영주의 가혹한 정치와 결부되었다고 여겨진 특권 상인이나 촌락 관리에 대해 행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가재도구 약탈 등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정당한 제재 행위임을 주장하기 위해 가옥 파괴에 그치고 약탈이나 방화는 엄격하게 경계한 사례도 많았다. 우치코와시를 주도한 자는 처벌받았지만, 우치코와시의 정당성이 지역 사회에서 널리 인식된 경우에는, 관리도 그 결과를 용인하고 우치코와시를 받은 측도 처벌받거나, 체면을 잃고 물러나는 일도 있었다.[3]

도시에서 최초의 우치코와시는 겐로쿠 16년(1703년) 나가사키에서 발생했고, 교호 18년(1733년)에는 에도에서도 처음 발생했다. 이후 기근이나 정세 불안 등으로 인해 빈번하게 발생했으며, 특히 물가가 급격히 상승한 막말 시기에 증가했다.

에도 시대 중기(약 300년 전)에는 정치 부패나 흉작으로 쌀값이 폭등하여 우치코와시가 일어나게 되었다.

교호 18년(1733년) 에도에서 시작되어, 덴메이 연간(1781년 ~ 1789년)에 일어난 기근 시기에는 에도뿐만 아니라 오사카, 교토, 히로시마, 나가사키, 이시노마키[4] 등 전국으로 퍼졌다. 덴포 8년(1837년) 오사카에서 일어난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난도 우치코와시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2. 2. 전개 과정

근세 일본의 도시부에서 상인끼리의 상호 부조인 합력이 발전하고, 부유한 상인에 의한 마을 시행이 성립한 교호 연간(1716~1736) 무렵부터, 인의(仁義) 정치라고 불리는 사회 정의 사상이 형성되었다.[3]

인의 정치는 위정자는 부자의 사욕 추구를 규제하여 약자의 생활 유지를 돕고, 부자는 사욕을 자제하며 기근이나 재해가 발생했을 때 솔선하여 쌀을 나눠주는 등 약자를 구해야 한다는 위정자와 부자에게 부과된 책무였다. 공적이든 사적이든 이 책무를 다하지 못하는 위정자와 부자는 부덕으로 규탄받았다.[3]

주로 도시부에서 매점매석 등에 의한 물가 상승의 원인으로 지목된 자에 대해 행해지는 경우가 많지만, 백성 봉기에 따라 영주의 악정과 결부되었다고 여겨진 특권을 가진 상인이나 촌락 관리에 대해 행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가재도구 약탈 등이 행해졌지만, 한편으로는 정당한 제재 행위임을 주장하기 위해 가옥 파괴에 그치고 약탈이나 방화는 엄격하게 경계된 사례도 많이 알려져 있다. 우치코와시를 주도한 자는 처벌받았지만, 우치코와시의 정당성이 지역 사회에서 널리 인식되고 있는 경우에는, 관리도 그 결과를 용인하고 우치코와시를 받은 측도 처벌을 받거나, 체면을 잃고 물러나는 일도 있었다.[3]

도시에서 최초의 우치코와시는 겐로쿠 16년(1703년)에 나가사키에서 발생했고, 교호 18년(1733년)에는 에도에서도 처음 발생했다. 그 이후에도 기근이나 정세 불안 등으로 인해 빈번하게 발생했고, 특히 물가가 급격히 상승한 막말(1853~1867)에 걸쳐 증가했다.

에도 시대 중기(약 300년 전)가 되자 정치 부패나 흉작으로 쌀 가격이 폭등하여 우치코와시가 일어나게 되었다. 교호 18년(1733년)에 에도에서 시작되어, 덴메이 연간(1781~1789년)에 일어난 기근 시기에는 에도뿐만 아니라 오사카, 교토, 히로시마, 나가사키, 이시노마키[4] 등 전국으로 퍼졌다. 덴포 8년(1837년)에 오사카에서 일어난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난도 우치코와시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2. 3. 주요 사건

근세 일본 도시에서 상인 간 상호 부조인 합력이 발전하고, 부유한 상인이 마을 운영을 담당하게 된 교호 연간(1716-1736) 무렵부터, '인의 정치'라는 사회 정의 사상이 형성되었다.[3]

인의 정치는 위정자와 부자에게 다음과 같은 책무를 부과했다.[3]

  • 위정자는 부자의 사욕 추구를 규제하여 약자의 생활 유지를 돕는다.
  • 부자는 사욕을 자제하고, 기근이나 재해 발생 시 쌀을 나눠주는 등 약자를 돕는다.


이 책무를 다하지 못하는 위정자나 부자는 '부덕'으로 규탄받았다.[3]

우치코와시는 주로 도시에서 매점매석 등으로 물가를 올린 자에게 행해졌지만, 백성 봉기와 함께 영주의 악정과 결부된 특권 상인이나 촌락 관리에게 행해지기도 했다. 가재도구 약탈도 있었지만, 정당한 제재임을 주장하기 위해 가옥 파괴에 그치고 약탈이나 방화는 엄격히 경계한 사례도 많다. 우치코와시 주동자는 처벌받았지만, 지역 사회에서 우치코와시의 정당성이 널리 인정되는 경우, 관리가 결과를 용인하고 우치코와시 대상자도 처벌받거나 물러나는 일도 있었다.[3]

도시 최초의 우치코와시는 겐로쿠 16년(1703년) 나가사키에서 발생했고, 교호 18년(1733년) 에도에서도 처음 발생했다. 이후 기근이나 정세 불안 등으로 빈번하게 발생했고, 특히 물가가 급등한 막말에 증가했다.

에도 시대 중기(약 300년 전) 정치 부패와 흉작으로 쌀값이 폭등하면서 우치코와시가 일어났다. 교호 18년(1733년) 에도에서 시작되어, 덴메이 연간(1781-1789년) 기근 시기에는 에도, 오사카, 교토, 히로시마, 나가사키, 이시노마키[4] 등 전국으로 퍼졌다. 덴포 8년(1837년) 오사카에서 일어난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난도 우치코와시의 일종이다.

3. 특징

우치코와시는 근세 일본에서 나타난 민중 봉기의 한 형태로, 주로 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발생했으나 농촌에서도 일어났다. 에도 시대 중기, 정치 부패와 흉작으로 인한 쌀값 폭등이 우치코와시 발생의 주요 원인이었다.

1733년 (교호 18년) 에도에서 처음 발생한 우치코와시는 1781년 ~ 1789년 (덴메이 연간) 기근 시기에 오사카, 교토, 히로시마, 나가사키, 이시노마키[4] 등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1837년 (덴포 8년) 오사카에서 일어난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난 역시 우치코와시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3. 1. 대상

근세 일본의 도시 지역에서는 상인 간 상호 부조인 합력이 발달하였다. 교호 연간(1716년 ~ 1736년)부터는 부유한 상인에 의한 마을 운영이 성립되면서, 인의 정치라고 불리는 사회 정의 사상이 형성되었다.[3]

인의 정치는 위정자와 부자에게 주어진 책무였다. 위정자는 부자의 사욕 추구를 규제하여 약자의 생활 유지를 보장해야 했다. 부자는 사욕을 자제하고, 기근이나 재해 발생 시 솔선하여 쌀을 나눠주는 등 약자를 구제해야 했다. 이러한 책무를 다하지 못하는 위정자나 부자는 공적, 사적 수탈 여부와 관계없이 부덕한 자로 비난받았다.[3]

우치코와시는 주로 도시 지역에서 매점매석 등으로 물가를 올린다고 지목된 자를 대상으로 행해졌다. 그러나 백성 봉기와 함께 영주의 잘못된 정치와 결탁한 특권 상인이나 촌락 관리를 대상으로 행해지기도 했다. 가재도구 약탈 등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정당한 제재 행위임을 주장하기 위해 가옥 파괴에 그치고 약탈이나 방화는 엄격히 금지된 사례도 많았다. 우치코와시 주동자는 처벌받았지만, 우치코와시의 정당성이 지역 사회에서 널리 인정되는 경우에는, 관리도 그 결과를 용인하고 우치코와시 대상자도 처벌을 받거나, 체면을 잃고 물러나는 일도 있었다.[3]

도시에서 최초의 우치코와시는 겐로쿠 16년(1703년) 나가사키에서 발생했고, 교호 18년(1733년)에는 에도에서도 처음 발생했다. 이후 기근이나 정세 불안 등으로 인해 우치코와시는 빈번하게 발생했으며, 특히 물가가 급격히 상승한 막말 시기에 증가했다.

에도 시대 중기(약 300년 전)에는 정치 부패나 흉작으로 쌀값이 폭등하면서 '우치코와시'가 발생하게 되었다. 교호 18년(1733년) 에도에서 시작된 우치코와시는 덴메이 연간(1781년 ~ 1789년)의 기근 시기에는 에도뿐만 아니라 오사카, 교토, 히로시마, 나가사키, 이시노마키[4] 등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덴포 8년(1837년) 오사카에서 발생한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난도 우치코와시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3. 2. 방식

근세 일본의 도시 지역에서는 상인들 간의 상호 부조인 합력이 발전하였다. 교호 연간(1716년 ~ 1736년)에는 부유한 상인에 의한 마을 운영이 성립되면서, 인의(仁義) 정치라고 불리는 사회 정의 사상이 형성되었다.[3]

인의 정치는 위정자와 부자에게 다음과 같은 책무를 부과하였다.[3]

  • 위정자는 부자의 사욕 추구를 규제하여 약자의 생활 유지를 방해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 부자는 사욕을 자제하고, 기근이나 재해 발생 시 솔선하여 쌀을 나눠주는 등 약자를 구제해야 한다.


이러한 책무를 다하지 못하는 위정자나 부자는 공적, 사적 수탈 여부에 관계없이 부덕(不德)한 자로 규탄받았다.[3]

우치코와시는 주로 도시 지역에서 매점매석 등으로 물가를 올린다고 지목된 자들을 대상으로 행해졌다. 그러나 백성 봉기와 함께, 영주의 가혹한 정치와 결탁한 특권 상인이나 촌락 관리를 대상으로 행해지기도 했다. 가재도구 약탈 등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정당한 제재 행위임을 주장하기 위해 가옥 파괴에 그치고, 약탈이나 방화는 엄격하게 금지된 사례도 많았다. 우치코와시를 주도한 자는 처벌받았지만, 우치코와시의 정당성이 지역 사회에서 널리 인정되는 경우에는, 관리들도 그 결과를 용인하고 우치코와시를 당한 측도 처벌을 받거나, 체면을 잃고 물러나는 일도 있었다.[3]

도시에서 최초의 우치코와시는 겐로쿠 16년(1703년) 나가사키에서 발생했고, 교호 18년(1733년)에는 에도에서도 처음 발생했다. 이후 기근이나 정세 불안 등으로 인해 빈번하게 발생했으며, 특히 물가가 급격히 상승한 막말 시기에 증가했다.

에도 시대 중기(약 300년 전)에는 정치 부패와 흉작으로 쌀값이 폭등하여 우치코와시가 발생하게 되었다.

교호 18년(1733년) 에도에서 시작된 우치코와시는 덴메이 연간(1781년 ~ 1789년)의 기근 시기에 에도뿐만 아니라 오사카, 교토, 히로시마, 나가사키, 이시노마키[4] 등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덴포 8년(1837년) 오사카에서 발생한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난도 우치코와시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3. 3. 사회적 인식

근세 일본의 도시부에서 상인끼리의 상호 부조인 합력이 발전하고, 부유한 상인에 의한 마을 시행이 성립한 교호 연간 무렵부터, 인의 정치라고 불리는 사회 정의 사상이 형성되었다[3]

인의 정치는 위정자는 부자의 사욕 추구를 규제하여 약자의 생활 유지를 돕고, 부자는 사욕을 자제하며 기근이나 재해 발생 시 솔선하여 쌀을 나눠주는 등 약자를 구해야 한다는 책무를 위정자와 부자에게 부과했다. 공적·사적 수탈에 관계없이 이 책무를 다하지 못하는 위정자와 부자는 부덕으로 규탄받았다[3]

주로 도시부에서 매점매석 등에 의한 물가 상승의 원인으로 지목된 자에 대해 행해지는 경우가 많지만, 백성 봉기에 따라 영주의 악정과 결부되었다고 여겨진 특권을 가진 상인이나 촌락 관리에 대해 행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가재의 약탈 등도 행해졌지만, 한편으로는 정당한 제재 행위임을 주장하기 위해 가옥 파괴에 그치고 약탈이나 방화는 엄격하게 경계한 사례도 많이 알려져 있다. 우치코와시를 주도한 자는 처벌받았지만, 우치코와시의 정당성이 지역 사회에서 널리 인식되고 있는 경우에는, 관리도 그 결과를 용인하고 우치코와시를 받은 측도 처벌을 받거나 면목을 잃고 물러나는 일도 있었다[3]

도시에서 최초의 우치코와시는 겐로쿠 16년(1703년) 나가사키에서 발생했고, 교호 18년(1733년) 에도에서도 처음 발생했다. 이후 기근이나 정세 불안 등으로 인해 빈번하게 발생했고, 특히 물가가 급격히 상승한 막말에 걸쳐 증가했다.

에도 시대 중기(약 300년 전)가 되자 정치 부패나 흉작으로 쌀 가격이 폭등하여 "우치코와시"가 일어나게 되었다.

교호 18년(1733년) 에도에서 시작되어 덴메이 연간(1781~1789년)에 일어난 기근 시기에는 에도뿐만 아니라 오사카, 교토, 히로시마, 나가사키, 이시노마키[4] 등 전국으로 퍼졌다. 덴포 8년(1837년) 오사카에서 일어난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난도 우치코와시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4. 의의 및 영향

근세 일본의 도시 지역에서는 상인들 간의 상호 부조인 합력이 발전하였다. 교호 연간(1716년 ~ 1736년)에는 부유한 상인에 의한 마을 운영이 성립되면서, '인의(仁義) 정치'라고 불리는 사회 정의 사상이 형성되었다.[3]

인의 정치는 위정자와 부자에게 다음과 같은 책무를 부여했다.


  • 위정자는 부자의 사욕 추구를 규제하여 약자의 생활 유지를 보장해야 한다.
  • 부자는 사욕을 자제하고, 기근이나 재해가 발생했을 때 솔선하여 쌀을 나눠주는 등 약자를 구제해야 한다.


이러한 책무를 다하지 못하는 위정자나 부자는 '부덕(不德)'하다고 비판받았다.[3]

우치코와시는 주로 도시 지역에서 매점·매석 등으로 물가 상승의 원인으로 지목된 자들에게 행해졌다. 그러나 백성 봉기와 함께 영주의 가혹한 정치와 결탁한 특권 상인이나 촌락 관리에 대해 행해지기도 했다. 가재도구 약탈 등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정당한 제재 행위임을 주장하기 위해 가옥 파괴에 그치고, 약탈이나 방화는 엄격하게 경계한 사례도 많다. 우치코와시를 주도한 자는 처벌받았지만, 우치코와시의 정당성이 지역 사회에서 널리 인식된 경우에는, 관리도 그 결과를 용인하고 우치코와시를 당한 측도 처벌을 받거나, 체면을 잃고 물러나는 일도 있었다.[3]

도시에서 최초의 우치코와시는 겐로쿠 16년(1703년) 나가사키에서 발생했고, 교호 18년(1733년)에는 에도에서도 처음 발생했다. 이후 기근이나 정세 불안 등으로 인해 빈번하게 발생했으며, 특히 물가가 급격하게 상승한 막말 시기에 증가했다.

에도 시대 중기(약 300년 전)에는 정치 부패와 흉작으로 쌀값이 폭등하면서 우치코와시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교호 18년(1733년) 에도에서 시작된 우치코와시는 덴메이 연간(1781년 ~ 1789년)의 기근 시기에 에도뿐만 아니라 오사카, 교토, 히로시마, 나가사키, 이시노마키[4] 등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덴포 8년(1837년) 오사카에서 일어난 오시오 헤이하치로의 난도 우치코와시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打ちこわしと慶応2年5月の尾崎村{{!}}阪南市 https://www.city.han[...] 阪南市 2022-11-28
[2] 서적 改訂 新潮国語辞典 ー現代語・古語ー 新潮社
[3] 서적 貧困 ミネルヴァ書房
[4] 서적 東日本大震災 石巻市のあゆみ https://www.city.ish[...] 石巻市 2024-10-02
[5] 서적 貧困 미ネルヴァ書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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