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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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슈는 1922년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의 측실로 숙비에 책봉되었으나, 1931년 푸이와 이혼했다. 전통적인 간택 방식이 아닌 사진을 보고 고르는 방식으로 간택되었으며, 자금성 생활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푸이와의 불화와 완룽의 질투 등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으며, 5만 5천 은화의 위자료를 받고 이혼했다. 이혼 후 평민으로 살아가다 1953년 사망했으며, 2004년 푸이 부인들에게 추존 작위가 수여되었으나 원슈는 제외되었다.

원슈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원슈
원래 이름문수 (文繡)
작위숙비(淑妃)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숙비 사진
출생일1909년 12월 20일
출생지청나라 펑톈 성 펑톈
사망일1953년 9월 17일
사망지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
국적청나라
가족 관계
아버지에르데트 두앙공
어머니강씨 부인
배우자1번째 전 부군: 푸이 (溥儀) (1922년 결혼, 1931년 이혼)
2번째 전 부군: 류전둥 (劉振東) (1947년 결혼)
자녀없음
가문
가문에르데트 가문
기타 정보
전체 이름에르데트 원슈 (額爾德特·文繡)
사후 칭호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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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1922년 푸이의 측실로 결혼했으며, 당시 직첩은 숙비(淑妃)였다. 전통적인 간택 방식과 달리, 후보군의 사진을 선통제 푸이가 보고 고르는 방법으로 간택받았다. 1931년 푸이와 이혼하였는데, 여동생의 도움을 받아 비밀리에 이혼을 계획했고 푸이의 허락을 받아 경원에서 탈출했다. 변호사가 기다리는 호텔로 가서 이혼 소송을 제기, 이혼을 허가받았다. 푸이는 원슈의 친척 중 한 명이 이 결정에 불만을 품고 글을 썼다고 주장했다. 이혼 후, 푸이는 전 청나라 관료들의 권유로 원슈의 황실 칭호를 박탈했다. 푸이는 나중에 완룽에게 이혼의 책임을 돌렸다.

이혼 조건은 원슈(文繍)가 평생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나, 1932년 지린에서 류전둥(劉振東)과 정식 재혼하여 톈진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3년 후 1935년 류와도 이혼하였다는 설과, 재혼은 한참 뒤의 일이고 이혼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잘 살았다는 설이 있다. 이후 원슈는 상하이에 거주하다가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원슈는 1947년 베이핑(현재의 베이징)의 유명한 동싱러우(东兴楼)에서 류전둥과 결혼했다. 류전둥은 자동차 대여 사업을 운영했으나 파산했고, 베이핑 항복 이후 집주인이 도망갔다. 전쟁 이후 류전둥은 정부에 자백하고 청소 서비스 회사에서 일하며, 10m2 집에서 가난하게 살았다.

원슈는 1953년 9월 17일 오후 10시에 사망했으며, 남편과 그의 동료들에 의해 안딩먼 밖에 매장되었다. 2004년, 청 왕조 황실 후손들은 푸이와 그의 부인들에게 추존 작위를 수여했으나, 원슈는 이혼 후 평민 신분으로 강등되어 제외되었다.

2.1. 초기 생애 (1909년 ~ 1922년)

원슈는 1909년 12월 20일에 태어났으며, 자는 혜신(Huixin)이고 스스로 지은 아호는 애련(Ailian)이었다. 만주족 양황기의 몽골계 에르데트 씨족 출신으로, 아버지는 돤궁(Duangong, 1852–1908)이고 어머니는 장씨 부인이었다. 원산(Wenshan)이라는 여동생이 있었으며, 어린 시절 학교에 다니면서 푸위팡(Fu Yufang)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1921년 경이황귀비에 의해 황후 후보로 추천되었으나, 집안이 몰락하여 단강황귀비에 의해 부결되었다.

2.2. 황실 생활 (1922년 ~ 1931년)

1922년 푸이의 측실(숙비(淑妃))로 간택되어 황실 생활을 시작하였다. 간택은 전통적인 방식이 아닌 후보군의 사진을 푸이가 보고 고르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푸이는 완룽보다 원슈를 황후로 선택하려 했으나, 단강황귀비를 비롯한 황족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결국 완룽이 황후로 책봉되고, 원슈는 비(妃)로 책봉되었다.

1920년대 자금성에 있는 원슈
1920년대 자금성에 있는 원슈


원슈는 자금성 생활에 대해 "궁궐에는 발전기가 있었지만 자주 고장이 났고, 정전이 흔했다. [...] 밤은 너무 길고 끔찍했으며, 마음속의 외로움은 떨쳐내기 어려웠다. [...] 이곳이 정말 웅장한 궁궐인가? 어쩌면 소름 끼치는 무덤일 뿐일지도 모른다!"라고 회상하며, 힘든 시간을 보냈음을 토로했다. 푸이가 다른 아내를 둔 것에 불만을 품은 완룽은 원슈에게 비판적인 내용의 편지를 쓰기도 했다.

1924년 푸이, 완룽과 함께 자금성을 떠나 톈진 일본 조계지의 장위안(张园)으로 이사했고, 이후 징위안(静园)으로 거처를 옮겼다. 원슈는 톈진에서의 생활에 대해 "푸이와 완룽은 2층에 살았고, 나는 1층 푸이의 응접실 옆방에 살았습니다. [...] 우리는 마치 길에서 만난 낯선 사람 같았습니다. [...] 푸이와 나 사이의 감정은 날마다 점차 사라졌습니다."라고 회상했다.

완룽은 원슈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사소한 행동에도 심하게 꾸짖는 등 갈등이 있었다. 푸이 또한 완룽의 편을 들며 원슈를 소외시켰고, 심지어 원슈에게 자살을 강요하는 칙령을 내리기도 했다.

1931년 원슈는 푸이와의 이혼을 법원에 신청했고, 위자료 5만 5천 원을 지급받는 조건으로 이혼이 성립되었다. 이혼 조건에는 원슈가 평생 재혼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포함되어 있었다.

2.3. 이혼과 평민으로서의 삶 (1931년 ~ 1953년)

1922년 푸이의 측실로 결혼하여 숙비(淑妃)가 되었다. 간택은 후보군의 사진을 푸이가 보고 고르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1931년 푸이와 이혼하였는데, 여동생의 도움을 받아 비밀리에 이혼을 계획했고 푸이의 허락을 받아 경원에서 탈출했다. 변호사가 기다리는 호텔로 가서 이혼 소송을 제기, 이혼을 허가받았다. 푸이는 원슈의 친척 중 한 명이 이 결정에 불만을 품고 글을 썼다고 주장했다. 이혼 후, 푸이는 전 청나라 관료들의 권유로 원슈의 황실 칭호를 박탈했다. 푸이는 나중에 완룽에게 이혼의 책임을 돌렸다.

이혼 조건은 원슈(文繍)가 평생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나, 1932년 지린에서 류전둥(劉振東)과 정식 재혼하여 톈진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3년 후 1935년 류와도 이혼하였다는 설과, 재혼은 한참 뒤의 일이고 이혼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잘 살았다는 설이 있다. 이후 원슈는 상하이에 거주하다가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원슈는 1947년 베이핑(현재의 베이징)의 유명한 동싱러우(东兴楼)에서 류전둥과 결혼했다. 류전둥은 자동차 대여 사업을 운영했으나 파산했고, 베이핑 항복 이후 집주인이 도망갔다. 전쟁 이후 류전둥은 정부에 자백하고 청소 서비스 회사에서 일하며, 10m2 집에서 가난하게 살았다.

원슈는 1953년 9월 17일 오후 10시에 사망했으며, 남편과 그의 동료들에 의해 안딩먼 밖에 매장되었다. 2004년, 청 왕조 황실 후손들은 푸이와 그의 부인들에게 추존 작위를 수여했으나, 원슈는 이혼 후 평민 신분으로 강등되어 제외되었다.

3. 이혼 배경과 사회적 파장

3.1. 이혼 배경

원슈는 자신의 삶에 불만을 품었고, 지위는 덜 중요하게 생각했다. 1931년 푸이와 완룽이 만주국으로 이주하기 몇 달 전, 원슈는 여동생의 도움을 받아 비밀리에 이혼을 계획했다. 경원에서 탈출하여 변호사가 기다리는 호텔로 간 후, 이혼 소송을 제기하여 이혼을 허가받았다. 푸이는 원슈가 소송 과정에서 큰 용기와 의지력을 보여주었다고 회고했다.

이혼 후, 푸이는 전 청나라 관료들의 권유로 원슈의 황실 칭호를 박탈했다. 원슈는 이혼 후 몇 년 동안 학교 교사로 일했다. 푸이는 나중에 완룽에게 이혼의 책임을 돌렸다.

3.2. 사회적 파장

4. 사후 평가

5. 대중문화 속 원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