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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연 (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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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위연은 공손연을 섬겼으며, 공손연이 위나라에 반기를 들고 연왕을 칭했을 때 시중으로 활동했다. 사마의가 토벌군을 이끌고 공격해오자, 위연은 볼모를 보내 항복하려 했으나 사마의가 거절했다. 이후 공손연이 사마의에게 패배하면서 위연도 죽임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소설 《삼국지연의》에도 비슷한 내용으로 묘사된다.

2. 생애

위연(衛演)은 삼국 시대의 인물로, 요동의 공손연(公孫淵)을 섬겨 시중(侍中) 벼슬을 지냈다. 생몰년은 명확하지 않으나, 공손연 정권이 멸망한 소한 2년(238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237년 공손연이 위나라에 반기를 들고 스스로 연왕(燕王)이라 칭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였다. 238년 위나라의 사마의(司馬懿)가 대군을 이끌고 공손연 토벌에 나서 양평성(襄平城)을 포위하자, 궁지에 몰린 공손연은 시중 위연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인질을 보내는 조건으로 항복을 청하게 하였다.[1] 그러나 사마의는 항복 제의를 단호히 거절하고 위연을 돌려보냈다.

결국 사마의는 양평성을 함락시키고 공손연과 그가 임명한 고위 관료들을 대거 처형하였는데, 이때 위연 역시 죽임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1]

2. 1. 공손연의 사신

경초(景初) 원년(237년), (魏)에 복속되어 있던 공손연(公孫淵)은 스스로 연왕(燕王)이라 칭하고 연호를 소한(素漢)으로 바꾸며 위에 반기를 들었다.

소한 2년(238년), 위의 사마의(司馬懿)가 토벌군을 이끌고 공손연의 거점인 양평성(襄平城)을 공격하여 포위했다. 궁지에 몰린 공손연은 먼저 왕건(王建)과 유보(劉甫)를 사신으로 보내 포위를 풀면 항복하겠다고 제의했으나, 사마의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두 사신을 참수하며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이에 공손연은 다시 시중 위연을 사마의에게 보내, 세자 공손수(公孫脩)를 인질로 보내는 조건으로 항복을 청하게 했다.[1] 그러나 사마의는 위연에게 “군사의 대요는 다섯 가지가 있다. 싸울 수 있으면 싸우고, 싸울 수 없으면 지키고, 지킬 수 없으면 달아나는 것이다. 나머지 두 가지는 항복하거나 죽는 것뿐이다. 너희가 스스로 결박하고 나올 생각이 없다면 마땅히 죽기를 각오해야지, 어찌 볼모를 보내겠는가!”라고 답하며 항복 제의를 일축했다.

진서(晉書)》 선제기(宣帝紀)에는 위연이 “바라건대 태위께서는 진노하지 마소서. 오늘 중이라도 먼저 세자 공손수(公孫脩)를 볼모로 데려오고, 후에 임금과 신하가 스스로 결박하여 항복하겠습니다”라고 더욱 절박하게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사마의의 답변은 같았다.

결국 사마의는 공손연을 격파하고, 공손연 부자와 그가 임명했던 상국 이하의 관원 수천 명을 모두 처형했다. 위연 역시 이때 죽임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도 이 사건은 비슷한 내용으로 묘사된다.[2]

2. 2. 최후

공손연(公孫淵)을 섬겼다.

경초(景初) 원년(237년), (魏)에 복속되어 있던 공손연은 스스로 연왕(燕王)이라 칭하고 연호를 소한(素漢)으로 제정하며 위에 반기를 들었다.[1]

소한 2년(238년), 위의 사마의(司馬懿)가 토벌군을 이끌고 공손연의 거점인 양평성(襄平城)을 공격했다. 궁지에 몰린 공손연은 왕건(王建)과 유보(劉甫)를 보내 포위를 풀면 항복하겠다고 제의했으나, 사마의는 이를 거절하고 두 사신을 참수했다.[1] 이에 공손연은 시중 위연을 사마의의 영채로 보내 아들 공손수(公孫脩)를 볼모로 보내겠다고 다시 제안하며 항복을 간청했다.[1][2]

그러나 사마의는 “군사의 대요(大要)는 다섯 가지가 있다. 싸울 수 있으면 싸우고, 싸울 수 없으면 지키고, 지킬 수 없으면 달아나는 것이다. 나머지 두 가지는 항복하거나 죽는 것뿐이다. 너희 주군 공손연이 결박하여 항복할 것이 아니라면 마땅히 죽음을 각오해야 할 것이지, 볼모를 보낼 일이 아니다!”라고 답하며 위연의 제안 역시 거절했다.[1][2]

진서》(晉書) 선제기(宣帝紀)에는 위연이 사마의에게 “바라건대 태위께서는 진노하지 마소서. 오늘 중이라도 먼저 세자 공손수(公孫脩)를 볼모로 데려오고, 후에 임금과 신하가 스스로 결박하여 항복하겠습니다”라고 더욱 비굴하게 애원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사마의의 답변은 선제기와 같았다.[2]

결국 사마의는 공손연을 격파하고 양평성을 함락시킨 후, 공손연 부자를 포함하여 그가 임명했던 상국 이하의 관원 수천 명을 모조리 처형했다.[1] 위연 역시 이때 처형된 것으로 보인다.[1]

3.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진서》 선제기의 내용과 거의 흡사하나, 사마의에게 “바라건대 태위께서는 진노하지 마소서. 오늘 중이라도 먼저 세자 공손수(公孫脩)를 볼모로 데려오고. 후에 임금과 신하가 스스로 결박하여 항복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등 그 언사가 더욱 비참하게 묘사된다. 사마의의 답변은 선제기와 같다.

참조

[1] 위키문헌 晉書/卷001#宣帝
[2] 위키문헌 三國演義/第106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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