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자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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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위자는 후한 말 진류 태수 장막의 부장으로, 효렴으로 천거되었으나 속세의 명성을 따르지 않고 지조가 높았던 인물이다. 조조를 처음 만나 천하를 평정할 인물임을 알아보고, 동탁 토벌을 위해 조조를 지원하여 5천 명의 병력을 얻게 했다. 190년, 장막의 명으로 조조를 따라 서영과 싸우다 전사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위자를 모델로 한 위홍이 등장하여 조조를 지원하는 역할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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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자 (삼국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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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위자 |
원어 이름 | 衛茲 |
자 | 자허 (子許) |
출생 | 생년 미상 |
사망 | 초평 원년 (190년) |
사망 장소 | 사례 하남윤 형양현 변수 |
출신지 | 연주 진류군 양읍현 |
주요 활동 | 장막 휘하 |
주요 사건 | 장막과 함께 조조 배반 모의 |
섬긴 군주 | 장막 |
2. 생애
진류태수 장막의 부장으로, 효렴으로 천거되었다. 격한 변론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속세의 명성을 좇지 않는 인물이었다. 또한 엄청난 지조를 가져, 삼공의 초빙에도 응하지 않았다.
조조가 처음 진류를 방문했을 때, 위자는 조조를 보고 "천하를 평정할 사람은 반드시 이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조조 또한 위자를 비범한 인물로 여겨, 이후 여러 차례 만나 대사(大事)를 논하였다. 그 후 위자는 동탁 토벌을 위하여 3천 명의 병력을 모았다. 또한 가재(家財)를 털어 조조의 거병을 지원하여, 조조는 5천 명의 병력을 얻을 수 있었다. 이는 사리사욕보다는 대의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190년, 장막의 명령으로 위자는 조조를 수행하였다. 위자와 조조는 형양현(滎陽縣) 변수(汴水)에서 동탁의 부하 서영의 군세와 교전하였으며, 며칠을 싸웠으나 패하였고 위자는 전사하였다. 조조는 위자의 죽음을 애석히 여겨, 진류를 지나갈 때마다 사자를 파견하여 위자의 제사를 지내었다.
2. 1. 조조와의 만남
조조가 처음 진류를 방문했을 때, 위자는 조조를 보고 "천하를 평정할 사람은 반드시 이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조조 또한 위자를 비범한 인물로 여겨, 이후 여러 차례 만나 대사(大事)를 논하였다. 그 후 위자는 동탁 토벌을 위하여 3천 명의 병력을 모았다. 또한 가재(家財)를 털어 조조의 거병을 지원하여, 조조는 5천 명의 병력을 얻을 수 있었다.2. 2. 조조 지원
위자는 장막의 부장으로, 효렴으로 천거되었다. 격렬한 변론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속세의 명성을 좇지 않는 인물이었다. 또한 엄청난 지조를 가져, 삼공의 초빙에도 응하지 않았다.조조가 처음 진류를 방문했을 때, 위자는 '''"이 사람은 반드시 천하를 평정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조조 또한 위자를 비범한 인물로 여겨, 수차례 만나 대사(大事)를 논하였다. 그 후 위자는 동탁 토벌을 위하여 3천 명의 병력을 모았다. 또한 가재(家財)를 털어 조조의 거병을 지원하여, 조조는 5천 명의 병력을 얻을 수 있었다. 이는 사리사욕보다는 대의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2. 3. 최후
190년, 위자는 장막의 명령으로 조조를 따라 형양현 변수에서 동탁의 부하 서영의 군대와 교전하였다. 며칠 동안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결국 패배하였고 위자는 전사하였다. 조조는 위자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진류를 지날 때마다 사자를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3. 삼국지연의 속 위자
위자는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위자를 모델로 한 것으로 보이는 '''위홍'''(衛弘)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위홍은 진류군의 대부호이자 효렴으로, 동탁 암살에 실패한 조조가 거병할 때 자금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는 위자의 행적과 유사하며, 소설에서도 그의 중요성을 짐작하게 한다.
4. 가계
위자의 가계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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