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장공 (괴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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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위 장공(괴외)은 위 영공의 아들로, 위나라의 군주였다. 그는 아버지 영공의 부인 남자를 죽이려다 실패하여 송나라로 도망가고, 이후 진나라의 지원을 받아 위나라로 돌아와 공모자들을 제거하고 즉위했다. 즉위 후에는 대신들을 숙청하려다 실패하고, 진나라의 공격을 받았다. 융주를 파괴하고 백성들을 괴롭히다 반란을 겪고, 융주인에게 살해되었다. 위나라는 이후 공손반사를 옹립하여 복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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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장공 (괴외) | |
---|---|
기본 정보 | |
이름 | 위 후 장공 (衛後莊公) |
전체 이름 | 씨: 위 (衛) 성: 기 (姬) 이름: 쾌외 (蒯聵) |
시호 | 장공 (莊公) |
통치 정보 | |
작위 | 위나라 군주 |
재위 기간 | 기원전 480년 - 기원전 478년 |
이전 군주 | 출공 |
다음 군주 | 반사 |
가계 | |
아버지 | 영공 |
자녀 | 출공 태자 급 (太子 伋) 왕자 청 (王子 青) |
2. 생애
위 영공의 아들로 태어나 태자가 되었다.[1][2] 그러나 기원전 496년 가을, 계모인 남자와 사이가 좋지 않아 그녀를 죽이려다 실패하고 아버지 영공에게 발각되었다.[1][2] 이 일로 송나라로 달아났다가,[1][2] 이후 진나라로 가서 조씨에게 의탁하였다.[1][2]
기원전 493년, 아버지 위 영공이 사망하자[2] 아들 첩(출공)이 즉위하였다.[1][2] 같은 해 6월, 진나라의 조앙이 쾌외를 위나라로 돌려보내려 했으나,[2] 아들 출공이 왕위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하여 아버지의 귀국을 막았다.[1][2] 결국 쾌외는 위나라로 들어가지 못하고 국경 근처인 숙(宿) 땅에 머물게 되었다.[1][2]
기원전 480년 가을, 누이 백희와 그녀의 시동 혼량부 등의 도움을 받아,[2] 조카인 공쾌를 위협하여 자신을 군주로 세우도록 강요했다.[1][2] 이 과정에서 출공은 노나라로 달아났고,[1][2] 쾌외를 비판했던 공자의 제자 자로는 살해당했다.[1][2] 마침내 쾌외는 스스로 군위에 오르니, 이가 곧 위 장공이다.[1][2]
장공 원년(기원전 479년), 장공은 망명 시절 자신을 받아주지 않았던 대부들을 숙청하려 했으나 신하들의 반발로 중단했다.[2] 장공 2년(기원전 478년), 과거 망명 시절 자신을 도왔던 진나라 조앙의 군사 지원 요청을 거절하여 관계가 악화되었다.[2] 같은 해 융인의 읍인 융주(戎州)를 파괴하고 공장(工匠)들을 혹사시키는 등 실정을 거듭하였다.[2] 결국 기원전 478년 11월, 장공에게 원한을 품은 경 석포 등이 일으킨 반란으로 도주하다가, 과거 원한을 샀던 융주 사람들과 기씨(己氏)에게 살해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2] 장공 사후 위나라 사람들은 공손반사를 다시 군주로 추대하였다.[2]
2. 1. 즉위 이전
위 영공의 맏아들로 태어나 세자가 되었다.[1][2]기원전 496년 가을, 세자 괴외는 계모인 남자와 사이가 좋지 않아 그녀를 죽이려 하였다.[2] 괴외는 진나라에 사신으로 가던 중 송나라를 지날 때, 송나라 사람들이 남자와 송나라 공자 조(朝)의 사통을 노래하며 조롱하는 것을 들었다.[1] 이에 부끄러움과 분노를 느낀 괴외는 귀국 후 자객을 시켜 남자를 죽이려 했으나, 계획이 남자에게 발각되어 실패하고 아버지 영공에게 알려졌다.[1][2] 괴외는 송나라로 달아났다가,[1][2] 이후 진나라로 가서 조씨에게 의탁하였다.[1][2]
기원전 493년, 아버지 영공이 사망하였다.[2] 남자(南子)는 영공의 유언이라며 공자 영(郢)을 옹립하려 했으나, 공자 영은 이를 사양하였다.[1][2] 이에 괴외의 아들인 공손 첩(輒)을 군주로 세우니, 그가 바로 출공이다.[1][2] 같은 해 6월, 진나라의 조앙은 괴외를 위나라로 돌려보내려 하였으나,[2] 아들인 출공은 왕위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하여 아버지의 귀국을 막았다.[1][2] 결국 괴외는 위나라로 들어가지 못하고 국경 근처인 척(戚) 땅(사기에는 숙(宿)으로 기록됨)에 머물게 되었다.[1][2]
기원전 480년 가을, 진나라 조앙이 군대를 이끌고 위나라를 공격하였다.[2] 당시 위나라의 대부 공어(공문자)가 죽은 후, 그의 아내이자 괴외의 누이인 공백희가 시동인 혼량부와 밀통하고 있었다.[2] 백희는 혼량부를 괴외에게 보내 그를 소개했고, 괴외는 두 사람의 관계를 인정하는 대신 자신을 위나라 군주로 세워달라고 부탁하였다.[2] 괴외는 혼량부 및 환관 라(羅), 석기(石乞), 우염, 공손겸(公孫鍼) 등과 공모하였고,[1] 누이 백희와 함께 공씨 저택에 숨어 들어가[2] 공어와 백희 사이의 아들이자 당시 집정대부였던 조카 공회(孔悝)를 위협하여 자신을 돕도록 만들었다.[1][2]
이 소란 속에서 공씨의 가신 난녕(欒甯)은 급히 출공을 데리고 노나라로 달아났다.[1][2] 이보다 앞서 공자의 제자 자로(중유)는 괴외에게 공회(공쾌)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을 경계하라고 간언했으나 괴외는 듣지 않았다.[2] 난이 일어나자 자로는 공회를 구하기 위해 달려갔고,[1] 성문 앞에서 공손겸 등과 언쟁 후 안으로 들어가 구출을 시도했다.[1] 그러나 이미 자로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괴외의 명을 받은[2] 석기, 우염 등과 싸우게 되었고, 싸우는 도중 관끈이 끊어졌음에도 이를 바로 맨 뒤 계속 싸우다 결국 전사하였다.[1][2] 또 다른 공자의 제자 고시(자고)는 난을 피해 목숨을 건졌다.[1] 마침내 괴외는 대부 소획(召獲)과 아들 출공을 몰아내고 스스로 군위에 오르니, 이가 곧 위 장공이다.[1][2]
2. 2. 즉위 과정 (기원전 480년)
출공 13년인 기원전 480년 가을, 진나라의 조앙(조간자)이 군대를 이끌고 위나라를 공격했다. 당시 위나라에서는 공어(공문자)가 죽은 후, 그의 시동이었던 혼량부와 공어의 아내이자 쾌외의 누이인 백희가 밀통하고 있었다. 백희는 혼량부를 숙(宿) 땅에 머물고 있던 쾌외에게 보내 소개했고, 쾌외는 두 사람의 관계를 인정하는 대신 자신을 위나라 군주로 복위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쾌외와 혼량부는 공씨의 저택에 몰래 숨어 들어갔고, 백희와 함께 사람들을 위협하며 쾌외의 즉위를 강요했다. 이 소란을 들은 공씨의 가신 난녕은 즉시 출공을 데리고 탈출했다. 탈출 직전, 출공의 식객이었던 자로 (공자의 제자)는 쾌외에게 "태자(쾌외)께서는 어찌하여 공쾌(공어와 백희의 아들, 즉 쾌외의 조카)를 중용하려 하십니까? 만약 그가 살해당하더라도 대안은 얼마든지 있습니다."라고 간언했다. 자신의 복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공쾌를 경시하는 듯한 발언에 격분한 쾌외는 가신 석걸과 우엄에게 명하여 자로를 살해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쾌외는 조카인 공쾌에 의해 위나라 군주로 추대되어 즉위하니, 이가 곧 위 장공이다.
2. 3. 즉위 이후
장공 원년(기원전 479년), 장공은 망명 시절 자신을 받아주지 않았던 대부들에게 원한을 품고 이들을 숙청하려 했으나, 신하들이 반발하여 난을 일으키려 하자 계획을 중단했다.장공은 둘째 아들 질(疾)을 태자로 삼았다. 공어의 시동이었던 혼량부(渾良夫)는 장공이 출공이 가져간 공실의 보물을 탐내는 것을 알고, 출공을 다시 불러들인 뒤 태자 질과 출공 중에서 후계자를 정하게 하자는 계책을 내놓았다. 태자 질은 이 일로 혼량부를 미워하여 죄를 씌워 죽이기로 결심했다. 어느 날 밤, 태자 질은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들어가 아버지 장공에게 혼량부를 죽일 것을 강요하며 돼지 피로 맹세까지 했다. 장공은 이전에 혼량부에게 죽을 죄를 세 번까지 사면해주겠다고 약속했었지만, 태자 질은 연회가 열렸을 때 혼량부에게 네 가지 죽을 죄가 있다며 결국 그를 죽였다.
장공 2년(기원전 478년), 죽은 혼량부가 북궁(北宮)에서 자던 장공의 꿈에 나타나 자신은 죄가 없으며 하늘에 무고함을 호소하겠다고 외쳤다. 꿈 내용은 이러했다:
: 한 남자가 곤오(昆吾)의 폐허에 올라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북쪽을 향해 "이 곤오의 폐허에 오르면 계속해서 참외가 열리는데, 나는 혼량부라 한다. 하늘에 죄 없음을 호소하는 자다!"라고 외치고 있었다.
크게 놀란 장공이 직접 점을 쳤다. 서사(筮史) 벼슬의 서미사(胥彌赦)가 점괘를 풀이하며 아무런 해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장공이 상으로 내린 성읍을 받지 않고 곧 송나라로 달아나 버렸다. 이에 장공이 다시 점을 치자 불길한 괘사가 나왔다.
: 한 마리 붉은 꼬리의 물고기와 같으니, 급류를 옆으로 뚫고 가려는 것처럼 머뭇거리며 방황한다. 대국(진나라)이 가까이 있어 이를 없애고자 하니, 장차 망하게 된다. 문을 닫고 구멍을 틀어막으니, 이내 뒷담을 넘어 달아난다.
같은 해, 장공은 과거 망명 시절 자신을 도와주었던 진나라의 조앙이 군사 지원을 요청하자 국내에 난이 있다는 핑계로 거절했다. 이에 분노한 조앙은 6월에 위나라를 공격했으나, 제나라의 국관(國觀)과 진관(陳瓘)이 위나라를 구원하면서 진나라 군대는 물러났다.
그러나 겨울 10월, 진나라가 다시 위나라를 공격하여 외성(外城)을 돌파했다. 위나라 사람들은 사태의 원인인 장공을 견(鄄) 땅으로 내쫓고, 장공의 동생인 공자 반사를 임시로 내세워 정무를 보게 한 뒤 진나라와 강화했다. 하지만 11월, 장공이 견 땅에서 다시 도성으로 돌아와 군위를 되찾자 공자 반사는 물러났다.
복위한 장공은 성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다 융인들의 읍인 융주(戎州)를 발견하고는 "우리 위나라는 희성(姬姓)인데 어찌 융의 읍이 있을 수 있는가!"라며 융주를 파괴했다. 또한 공장(工匠)들을 혹사시키는 등 실정을 거듭했다. 결국 장공에게 원한을 품은 경 석포(石圃)가 불만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 장공을 공격했다. 장공은 용서를 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북쪽 담을 넘어 도망치려다 다리뼈가 부러졌다. 이때 과거 장공에게 읍락을 파괴당했던 융주 사람들이 그를 발견하고 공격했다. 태자 질과 공자 청(靑)이 장공을 구하러 왔지만 모두 융주 사람들에게 살해당했다. 장공은 기씨(己氏)의 집으로 도망쳤으나, 이전에 기씨에게도 원한을 산 일이 있었기에 결국 기씨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장공이 죽자 위나라 사람들은 다시 공손 반사를 불러들여 복위시켰다.
2. 4. 최후 (기원전 478년)
장공 2년(기원전 478년), 진의 조앙이 위나라에 급한 소식을 전해왔으나, 장공은 국내의 혼란을 이유로 도움 요청을 거절했다. 이는 과거 망명 시절 조앙에게 입은 은혜를 저버린 행위였다. 6월, 조앙은 군대를 이끌고 위나라를 포위했으나, 제나라의 국관과 진(陳)나라의 진관이 위나라를 구원하면서 진나라 군대는 물러났다.장공은 과거 성루 위에서 융인의 거주지인 융주(戎州)를 보고 "우리 위나라는 희성(姬姓)인데 어찌 오랑캐의 읍이 있단 말인가!"라며 군사를 보내 융주를 파괴한 일이 있었다. 또한 공장(工匠)들을 오랫동안 혹사시켰으며, 집정대부인 석포를 몰아내려 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석포는 장공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 11월에 반란을 일으켰다. 장공은 공궁(公宮)의 문을 닫고 강화를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북쪽 담장을 넘어 도망치려다 떨어져 다리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었다.
이때 과거 장공에게 터전을 파괴당했던 융주 사람들이 공격해왔다. 장공을 돕기 위해 온 태자 질(疾)과 공자 청(靑)은 융주 사람들에게 살해당했다. 홀로 달아나던 장공은 융인이었던 기씨(己氏)의 집에 숨어들었다. 공교롭게도 장공은 과거 기씨 아내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강제로 잘라 자신의 아내인 여강(呂姜)의 가발을 만들어 준 원한 관계가 있었다. 기씨에게 발각되자 장공은 벽옥을 내밀며 목숨을 구걸했지만, 기씨는 "너를 죽이면 벽옥이 어디로 달아나겠는가?"라고 말하며 장공을 살해하고 벽옥을 차지했다.
장공이 살해된 후, 위나라 사람들은 다시 공손 반사를 군주로 맞아 복위시켰다.
3. 가족 관계
- '''아버지''': 위 영공(衛 靈公)
- '''어머니''': 남자(南子)
- '''부인''': 여강(呂姜)
- '''자녀'''
- * 위 출공(衛 出公)
- * 세자 질(疾)
- * 공자 청(靑)
- '''형제자매'''
- * 누이: 공백희(孔伯姬)
- * 동생: 위군 반사(衛君 般師)
- * 동생: 위군 기(衛君 起)
- * 동생: 위 도공(衛 悼公)
- * 동생: 공자 영(郢)
4. 미디어
괴외는 전기 판타지 어드벤처 드라마 영화인 ''공자''에서 배우 리환이 연기하였다.
참조
[1]
서적
Cihai
Shanghai Lexicographical Publishing House
[2]
서적
Confucius Now: Contemporary Encounters with the Analects
https://books.google[...]
2015
[3]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http://www.guoxue123[...]
[4]
서적
Cihai
Shanghai Lexicographical Publishing 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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