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 (호숙후)
1. 개요
유성(호숙후)은 전한 원정 5년(기원전 112년)에 아버지 유서행의 뒤를 이어 호숙후에 봉해졌다. 《사기》에는 유성이 작위를 유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한서》에는 봉지 백성의 범죄에 대한 책임을 물어 작위가 박탈되었다는 내용이 덧붙여져 있다. 사기와 한서의 기록이 상충되어 작위 박탈 여부에 대한 단정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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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세기 중국 사람 -
신도가
신도가는 전한 시대의 무관 출신으로, 항우와의 싸움과 영포의 난에 참여하고 혜제 때 회양태수를 거쳐 승상에 올랐으며, 청렴한 성품으로 황제의 총애를 받던 등통을 처벌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조조와의 갈등 끝에 죽음을 맞이하여 절후의 시호를 받았다. -
기원전 2세기 중국 사람 -
사마천
사마천은 중국 전한 시대의 역사가, 천문학자, 역법가로서 중국 최초의 통사로 평가받는 『사기』를 저술하여 기전체를 확립하고 역사 서술과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이릉 변호 사건으로 궁형을 받는 고난을 겪었으며 태초력 제정에도 참여하는 등 천문학과 역법에도 업적을 남겼다. -
전한의 종실 -
유급
유급은 전한 말기에 신양후에 봉해졌으나, 전한 멸망으로 작위를 잃은 유영의 아들이다. -
전한의 종실 -
전한 무제
전한의 제7대 황제인 전한 무제는 54년간 재위하며 유교 기반 중앙집권 강화, 흉노 정벌을 통한 영토 확장, 소금과 철의 전매제 등 경제 개혁을 추진하여 전한의 최전성기를 이끌었으나, 과도한 군사 지출, 사치스러운 생활, 무고의 난 등 부정적인 면모도 보였다. -
생몰년 미상 -
유급
유급은 전한 말기에 신양후에 봉해졌으나, 전한 멸망으로 작위를 잃은 유영의 아들이다. -
생몰년 미상 -
야스케
야스케는 16세기 일본에 기록된 최초의 아프리카인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며, 혼노지의 변에서 함께 싸웠으나 이후 행적은 불확실하고,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소재로 활용된다.
2.1. 작위 계승
원정 5년(기원전 112년), 아버지 유서행의 뒤를 이어 호숙후(胡孰侯)에 봉해졌다. 《사기》에는 '금후'(今侯)라고 기록되어 있어, 유성이 사기 집필 당시에도 작위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한서》에는 다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한서에 따르면, 유성의 봉지에서 호적이 없는 백성이 발견되었는데, 그 백성은 노역형을 살던 중 살인까지 저질렀다.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유성은 결국 작위를 박탈당했다고 한다.
한서의 기록 방식상 유성이 작위를 계승한 기사 바로 뒤에 박탈 기사가 이어져 있어, 마치 작위를 받자마자 곧바로 박탈된 것처럼 해석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앞서 언급된 사기의 기록과 상충하기 때문에, 정확한 작위 박탈 시점을 단정하기는 어렵다.
2.2. 작위 박탈?
원정 5년(기원전 112년), 아버지 유서행의 뒤를 이어 호숙후(胡孰侯)에 봉해졌다. 그러나 유성의 작위 유지 여부에 대해서는 기록이 서로 다르다.
《사기》에는 유성을 '금후'(今侯)라고 기록하여, 《사기》 집필 당시에도 유성이 작위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반면, 《한서》에는 다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한서》에 따르면, 유성의 봉지에서 호적이 없는 백성이 발견되었는데, 이 백성이 노역형을 살던 중 살인까지 저질렀다. 이 사건의 책임을 물어 유성이 작위를 박탈당했다는 것이다.
《한서》에서는 유성이 작위를 계승한 기사 바로 뒤에 이 박탈 기사가 이어져 있어, 작위를 계승한 해에 바로 박탈된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하지만 이는 《사기》의 기록과 상충하기 때문에, 유성의 작위가 정확히 언제 박탈되었는지, 혹은 박탈되지 않았는지 명확히 단정하기 어렵다.